16 사도행전 6:8-15
천사의 얼굴을 가진 스데반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행 6:15).
오늘의 시대를 외모 지상주의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예뻐 보이기 위해 코를 세우고 쌍꺼풀 수술을 하고 턱을 깎고 비만도 아닌데 몸무게를 감량합니다. 우리나라 40대 이하의 70%는 출세하는 데 외모가 절대적인 요소라고 생각하며, 또한 여성들이 하루에 화장을 하는 데 소요하는 시간이 1시간 20분이라는 통계가 있습니다. 외모 지상주의로 인해 피부 미용업이 유망 업종으로 자리 매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외모는 우리 자신의 실체가 아닙니다. 우리의 실체는 외모에 있지 않고 마음의 중심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외모를 보시지 않고 중심을 보십니다(삼상 16:7). 또한 바울은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새 것이 되었다고 했습니다(고후 5:17).
본문에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는 말씀이 나옵니다(행 6:15하). 스데반의 얼굴이 어떻게 천사의 얼굴과 같았을까요? 그가 유명 피부과에 가서 피부 마사지를 받아서 그랬을까요? 이는 그가 성령이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스데반의 아름다운 모습을 통해 우리의 모습 또한 천사의 얼굴처럼 빛나기를 기도합니다.
은혜 충만
홀연히 무대 위에 등장했다가 홀연히 무대 위에서 사라지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바로 집사 스데반입니다. 그가 누구인가에 대해 성경은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에 대해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며 믿음이 있고 칭찬 듣는 집사 중 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행 6:1-6). 그는 집사지만 말씀과 성령의 능력이 충만했습니다. 그는 말씀을 전하다가 박해를 받고 첫 순교자가 되어 무대 위에서 내려왔습니다. 그러나 그의 순교의 피는 헛되지 않아서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복음이 전해지는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스데반은 헬라계 유대인입니다. 스데반은 스테파노스에서 나온 말로서 면류관(crown)을 의미합니다. 앞으로 왕관을 쓰는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부모가 그런 이름을 지어주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그의 부모의 소원대로 면류관을 썼습니다. 그 면류관은 첫 순교자의 영광의 면류관이었습니다. 그는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행 6:8).
그는 은혜가 충만했습니다. 은혜의 반대는 율법입니다. 율법은 완전한 행동을 요구합니다. 따라서 율법의 세계는 늘 부족합니다. 기쁨이 없습니다. 율법의 요구에 미치지 못하면 정죄함을 받습니다. 죄의식에 시달립니다. 그리고 늘 긴장되어 있습니다. 남의 눈치를 봅니다. 남의 잘못을 족집게처럼 끄집어내고 화를 잘 냅니다.
반면에 ‘은혜’(καρις)란 부드럽고 사랑스럽다는 뜻입니다. 은혜로운 사람은 온유합니다. 겸손과 이해와 사랑, 그리고 용서와 긍휼이 있습니다. 눈물이 있습니다. 영생과 의와 사랑과 평강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약점과 부족한 점을 돕습니다. 스데반은 이렇게 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삶은 율법 중심이 아니라 은혜 중심이었습니다.
은혜는 사람들을 자발적으로 이끄는 힘이 있습니다. 은혜를 아는 사람만이 주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께 쓰임 받으려면 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은혜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인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은혜는 사람을 겸손하게 하고 감사와 찬양과 기쁨과 소망을 넘치게 합니다.
바울은 은혜를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고 스데반을 죽이는 데 앞장섰습니다. 그는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에게 일방적으로 은혜를 베푸시어 구원하셨습니다. 그는 그 은혜가 너무나 놀라워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3-15).
스데반의 얼굴에서 광채가 난 것은 주님의 은혜로부터 나왔습니다. 은혜로운 사람은 얼굴에서 광채가 나고, 기쁨이 있고, 평강이 있고, 얼굴이 해같이 빛납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여 은혜를 알고, 은혜를 전하고, 은혜가 우리의 삶의 원동력이 되어야 합니다.
권능 충만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행 6:8).
스데반은 권능이 충만하여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큰 기사와 표적을 행했습니다. 권능은 펄펄 끓어오르는 힘이 있습니다. 불굴의 용기가 있습니다. 그는 권능이 충만하여 두려울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모두가 권능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권능은 얼굴의 빛으로 나타납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모세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십계명을 받고 시내 산에서 내려오니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얼굴에서 광채가 났습니다.
우리의 얼굴이 빛나고 권능이 나타나는 방법은 단 한 가지,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에 순종하며 무릎을 꿇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의 불이 타오릅니다. 성령의 불이 타오르면 권능이 나타납니다. 성령의 불이 활활 타오르면 캠퍼스와 직장과 사회 곳곳에 지옥불이 소멸됩니다.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
“이른 바 자유민들 즉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할새”(행 6:9).
‘자유민들’은 본래 유대인이었지만 주전 53년 폼페이가 시리아 전쟁을 하면서 유대 땅을 토벌할 때 로마의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그 후 그들은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주후 19년에 로마에서 추방당하자 그들 중에 얼마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회당을 지었습니다. 그 회당이 해방된 자의 회당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이렇게 예루살렘으로 귀환했지만 본토 유대인들로부터 멸시를 받았습니다.
‘구레네’, ‘알렉산드리아’, ‘길리기아 지역’이 나오는데 당시에는 각 지방별로 회당을 지었습니다. 회당은 예배와 교육의 장소였습니다. 로마에서 온 사람들은 로마 사람들끼리, 헬라에서 온 사람들은 헬라 사람끼리, 길리기아에서 온 사람들은 길리기아 사람들끼리 각기 회당에 모여 예배드리고 교육했습니다. 이는 언어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각기 각처로 흩어졌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히브리어를 잘 못했습니다. 대신에 세계 언어인 헬라어를 잘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각각 회당을 지어서 각각 예배와 교육을 한 것입니다. ‘길리기아’는 바울의 고향입니다. 바울은 길리기아 다소 태생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길리기아 회당의 회원이었을 것으로 짐작이 갑니다. 스데반이 그들과 변론했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스데반을 이길 수는 없었습니다. 이는 그가 지혜와 성령으로 말했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행 6:10).
성령은 능력입니다. 성령은 권능으로 나타납니다. 성령은 마음을 새롭게 합니다. 불안이 평안으로 변합니다. 절망이 희망으로 바뀝니다. 비판이 이해로 바뀌게 됩니다. 근심이 기쁨으로 변합니다. 목적이 자기 자신에서 예수님으로 바뀝니다.
지혜는 지식과 구별됩니다. 지식은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혜는 헬라어로 ‘소피아’(σοφια)로, 아는 지식을 적용하는 힘입니다. 지혜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힘입니다. 지혜는 지식을 거룩하고 아름답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데 쓸 수 있는 힘입니다. 이처럼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하나님께 자신의 몸과 시간, 그리고 물질과 재능을 씁니다. 미련한 자일수록 자신이 가장 지혜롭다고 생각하고, 지혜로운 사람일수록 자신의 부족과 허물과 약함을 압니다. 연구하면 할수록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음을 깨닫게 됩니다.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기나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느니라”(잠 12:15).
“미련한 자는 명철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의사를 드러내기만 기뻐하느니라”(잠 18:2).
지혜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세상의 지혜와 하늘의 지혜입니다. 야고보는 세상 지혜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약 3:15-16).
세상의 지혜는 시기와 다툼이 있습니다. 혼란스럽고 악을 도모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지혜를 떠나서 하늘의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약 3:17-18).
하늘의 지혜는 성결합니다. 하늘의 지혜는 화평합니다. 하늘의 지혜는 관용이 있습니다. 하늘의 지혜는 양순합니다. 하늘의 지혜는 긍휼이 있습니다. 하늘의 지혜는 선한 열매가 있습니다. 하늘의 지혜는 편견이 없습니다. 하늘의 지혜는 거짓이 없습니다. 하늘의 지혜는 의의 열매를 맺습니다. 지금은 세상 지식이 홍수를 이루고 있는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는 지혜를 가지고 살되 세상의 지혜가 아니라 하늘의 지혜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선한 열매와 의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들은 스데반과의 변론에서 그를 당해내지 못하자 스데반을 시기하고 모함했습니다. 그들이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스데반을 이길 수 없게 되자 성전과 율법 문제를 가지고 모함했습니다(행 6:11-14). 이것은 모두가 신성모독에 해당되는 문제였습니다. 그들이 이 문제를 들고 일어난 것은 신성모독은 합법적으로 죽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백성과 장로, 서기관들을 충동질하여 스데반을 끌어다가 산헤드린 공회 재판정에 세웠습니다.
백성들은 군중심리에 이끌려 분개했습니다. 그들의 분개는 깊은 신앙 양심 때문이 아니라 돈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전역에 사는 남자들은 일 년에 세 번은 의무적으로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게다가 세계 각처에 흩어져 살던 디아스포라 유대인에게도 예루살렘 성전 순례는 신성한 의무였습니다. 따라서 매년 수백만 명에 달하는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을 찾아 그곳에 머물면서 소나 양을 잡아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를 위해 지출하는 경비는 엄청났습니다. 그것은 예루살렘 사람들의 가장 중요한 수입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성전이 헐리게 되면 백성들의 수입원이 없어지니 들고 일어날 법도 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유익 때문에 무지한 백성을 선동하였고, 또 무지한 백성들은 그들의 선동에 요동쳤습니다. 사람들에게 가장 민감한 것은 돈 문제입니다. 모든 문제의 배후에는 돈이 개입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들은 돈 때문에 결국 예수님을 죽였고 스데반을 죽이고자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돈 중심이 아니라 진리 중심, 하나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혜와 성령의 사람이 되어 담대하게 진리를 말하고 진리를 위해 몸을 던질 수 있어야 합니다.
얼굴의 광채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행 6:15).
공회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스데반을 주목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반응과 표정이 어떻게 나타날지 궁금했습니다. 그러나 의외로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분노에 떨어야 하고, 창백해져야 하고, 겁에 질린 얼굴이어야 하는데 오히려 그의 얼굴은 천사와 같았습니다. 천사의 얼굴과 같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세상 법정은 죄를 짓고도 자기가 억울하다며 법정에서 소란을 피우고 또 오리발을 내밉니다. 그런데 스데반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과 같이 변화되었습니다. 그는 모함을 당하고 거짓 증인들까지 나섰지만 그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과 같았습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잠 15:13).
눈은 마음의 창이고 얼굴은 내면의 표상입니다. 얼굴이 변화되었다는 것은 내면이 변화되었다는 말입니다. 얼굴이 빛이 났다는 것은 내면이 빛났다는 말입니다. 스코틀랜드의 제이니 교수가 있었습니다. 그가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비친 그의 얼굴은 매일 천국에 갔다 온 것처럼 늘 행복한 얼굴빛이었습니다. 학생들은 그가 어떻게 날마다 행복해 보이는지 그 이유가 궁금했습니다. 어느 날 그는 학생들에게 그리스도인의 기쁨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기쁨이라는 것은 하나의 깃발이라고 생각한다. 성에 깃발이 나부낄 때는 왕이 성에 계시다는 것을 나타내듯이,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기쁨은 내 안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표시이다.”
사람이 다른 것은 다 속일지라도 얼굴 표정만큼은 못 속입니다. 우리가 표정을 속이려고 해도 표정 속에 나타난 색깔과 영감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표정 속에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링컨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40살 이상 되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 40세 이전의 아름다움은 주어진 아름다움으로, 그것은 누구도 어찌할 수 없다. 그런데 그 아름다움은 나이가 들면 퇴색해진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퇴색한 후에 나타나는 아름다움이다. 그 아름다움을 위해 힘써라.”
찡그린 얼굴에서 그 속의 아픔을 알 수 있습니다. 얼굴의 주름에서 그 삶을 읽을 수 있습니다. 환한 얼굴에서 그 속의 즐거움을 볼 수 있습니다. 뻣뻣한 얼굴에서 그의 긴장과 교만을 볼 수 있습니다. 붉으락푸르락하는 얼굴에서 그의 분노와 원망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얼굴은 하루에도 수십 번 변합니다. 이는 우리 마음이 수십 번 변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얼굴을 관리하는 것은 내면을 관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얼굴에는 항상 평온함과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평온함과 기쁨은 내 속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증언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깃발입니다.
스데반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고 믿음이 충만하며 은혜와 권능이 충만했습니다. 그는 성령 충만, 지혜 충만, 믿음 충만, 은혜 충만, 권능 충만했습니다. 그는 신앙 인격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리고 헬라파 유대인 앞에서도 당당하게 변론할 수 있는 지성인이었습니다. 그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처럼 광채가 났습니다. 우리는 내적인 자질과 외적 능력을 갖춘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 옛것은 지나고 새 사람이로다 그 생명 내 맘에 강같이 흐르고 그 사랑 내게서 해같이 빛난다 영생을 누리며 주 안에 살리라 오늘도 내일도 주 함께 살리라”(새찬송가 436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