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사도행전 8:26-40
빌립의 에티오피아 내시 전도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행 8:35).
빌립의 사마리아 전도는 성공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홀연히 하나님의 사자의 음성이 빌립에게 들려왔습니다. 광야로 가라는 것이었습니다(행 8:26). 이에 빌립이 순종하여 광야로 갔습니다. 다시 성령께서 이 수레로 가까이 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행 8:29). 빌립은 달려가서 수레로 가까이 갔습니다. 빌립이 가서 보니 에티오피아의 내시가 이사야 말씀을 읽고 있었습니다. 빌립이 그에게 이사야 말씀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하니 그가 복음을 영접했습니다. 그러자 빌립은 그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주도하시는 분은 성령이셨습니다. 성령께서 빌립을 강권적으로 붙들어 그에게 말씀하셨고, 그를 선교 역사에 쓰셨습니다. 선교 역사의 주체는 사람이 아니라 성령이십니다. 성령께서 필요한 사람을 불러서 쓰십니다. 성령께서 주도적으로 역사를 이루십니다. 우리는 다만 주님의 도구일 뿐입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는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는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에 순종하는 빌립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하여 이르되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행 8:26).
어느 날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남쪽을 향해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가는 길까지 가라고 하셨습니다. 가사 지역은 사마리아 지역에서 약 200리쯤 되는 거리입니다. 가사 대로를 따라가면 이집트가 나오고 더 가면 구스인 에티오피아가 나옵니다. 그 길은 광야 길입니다. 광야 길을 혼자 간다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무엇을 하라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시지 않고 무조건 그 길을 따라 가라고 하셨습니다. 가라고 명하신 분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입니다(마 28:18, 빌 2:10-11).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마 28:18-19상).
‘가라’는 뜻은 헬라어로 포류덴테스(τορευθέντες)로, 한계를 넘어서서 끝없이 지속적으로 가라는 전쟁 용어입니다. 총탄이 퍼붓는 곳이라도 가라는 것입니다. 이 명령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거역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가라고 하시면 어디든지 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민족에게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이 땅에는 193개국이 있습니다(UN 가입국, 2011년 기준). UN에 가입하지 않은 나라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200개국 이상의 나라가 있습니다. 그리고 나라에는 각기 종족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5,300개의 종족이 있습니다. 거기에다 사마리아 족속, 세리 족속, 합병증 족속, 베드로 족속, 답답한 안드레 족속, 계산 잘 하는 빌립 족속, 의심을 잘 하는 도마 족속, 이기적인 마태 족속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그뿐 아니라 여기에서‘민족’이란 한 세대 뿐만 아니라 모든 세대를 일컫습니다. 그러므로 ‘가라’는 명령은 끝없는 명령입니다. 그리고 선교는 가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주님의 가라는 명령을 들은 빌립은 여러 이유를 들어 거절할 수 있었습니다. “거기가 어디라고 가라고 하십니까? 그 길은 광야입니다. 거기다가 사람들을 만난다고 하더라도 성령이 지시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 저는 사마리아에서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무조건 일어나 갔습니다. 그는 성령의 지시가 있자마자 두말없이 즉각 광야 길로 향했습니다. 그는 자기 뜻을 앞세우지 않고 성령의 지시에 귀를 열고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순종의 미덕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지 사무엘은 사울 왕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
순종은 자기 나름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나름대로의 순종은 처음에는 순종하는 것 같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자기 식으로, 자기에게로 골인(goal in)합니다. 자기 나름대로의 순종은 자기 의를 내세우고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습니다. 자기 생각과 계획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상황에 따라 자기 생각을 앞세웁니다. 그리고 속으로 자기 생각을 고집합니다. ‘꼭 그렇게 해야만 하는가? 꼭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꼭 이 길밖에 없는가?’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 말씀에 순종하려 하지 않습니다. 자기 주관을 앞세워 하나님께 순종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멋진 종교 행사보다 말씀을 청종하는 것을 더 좋아하십니다. 제사보다 순종을 더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실지라도 나름대로 하지 않으시고 철저히 하나님께 순종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 한 분의 순종을 구원의 근원으로 삼으셨습니다. 신앙생활이란 처음도 순종, 과정도 순종, 마지막도 순종입니다.
빌립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광야 길로 전진했습니다. 그는 좌고우면(左顧右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가면서 자기 생각대로 여기저기 다니면서 전도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아갔습니다. 그는 끝까지 목표를 잃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한 가지 목표, 예수님을 붙잡고 좇아갔습니다(빌 3:14). ‘좇아간다’(press on)는 오랫동안 굶주렸던 사냥개가 먹이를 찾았을 때에 모든 에너지를 집중하여 먹이를 향해 질주하는 그런 단어입니다. 바울은 목표를 향해 무섭게 질주했습니다. 그는 어떤 시련과 장애물이 있다 할지라도 한눈팔지 않고 그 목표에 헌신했습니다. 그렇게 했을 때 위대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위대한 삶이란 목표를 잊지 않고 끝까지 질주하는 것입니다.
제 친구 중에 독일의 최 스데반 선교사가 있습니다. 그는 1978년 1월 1일에 독일 유학생 선교사 제 1호 파송된 선교사입니다. 그는 80년대 초 독일에서 화학공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가 학위를 받자마자 곧 한국의 지도 교수로부터 텔렉스 한 장이 왔습니다. 그 내용은 국립대학 조교수로 올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독일 선교사로 왔기 때문에 귀국할 수 없다고 텔렉스로 답신을 보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국립대학 교수 자리는 하늘의 별따기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부르심과 사명과, 그리고 목적을 잃지 않고 35년간 독일 선교사로 독일 대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에티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전하는 빌립
빌립이 광야 길로 나갔을 때 수레 행렬이 보였습니다. 그 행렬은 에티오피아의 국고를 맡은 내시가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마치고 귀국하는 길이었습니다. 그는 성경을 읽으며 고국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성령께서 명령하셨습니다.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수레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행 8:29).
그는 명령에 순종하여 수레 가까이 나갔습니다. 이것은 굉장한 모험입니다. 수레에 탄 인물이 누구입니까? 수레에 탄 사람은 에티오피아의 중요한 인물입니다. 요새로 말하면 재무부 장관입니다. 본문에는 병거 한 대가 달랑 광야를 지나가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일국의 재무부 장관이 행차하는데 한 수레만 지나갔겠습니까? 거기다가 광야 길을 혼자 갔겠습니까? 적어도 그 행렬이 50명은 족히 넘을 것입니다. 그런데 빌립이 그 수레에 가까이 간다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잘못하다간 강도로 몰리기 십상입니다. 그리고 생전 처음 보는 낯선 사람에게로 성큼 다가선다는 것 또한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성령이 가까이 가라고 하니 그는 가까이 갔습니다. 이것은 모험입니다. 그가 모험을 무릅쓰고 가까이 갔을 때에 국고를 맡은 에티오피아 내시와의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선교란 낯선 사람을 만남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교회에 와서 친한 사람들끼리 앉아 예배를 드리고 친한 사람끼리 교제를 갖는 것은 선교 관점에서 옳지 않습니다. 낯선 사람 옆에서 예배드리고 끝나고 나서 인사도 나누고 또 교제를 갖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우리가 낯선 사람에게 다가서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삶과 교제의 폭이 넓어집니다. 전도의 폭이 넓어집니다. 선교의 영역이 넓어집니다. 우리가 교회나 혹은 직장에서도 친한 사람끼리만 함께하지 말고 폭넓은 교제를 통해 교제의 폭이 넓어지도록 해야 합니다. 이때 다양한 사람에게 복음이 전해지게 됩니다.
빌립이 가서 보니 에티오피아 여왕의 내시가 이사야의 글을 읽고 있었습니다. 외국인이 수레 위에서 성경을 읽고 있는 것은 당시로서는 매우 기이한 현상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빌립은 한눈에 바로 이 사람이 성령께서 말씀하신 그 사람임을 확신했습니다. 빌립은 그에게 읽는 말씀이 이해가 되는지 물었습니다. 그는 지도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이해가 안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두 가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이해가 안 되더라도 성경을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르면 모르는 대로, 알면 아는 대로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다보면 내가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는 성경이 내게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을 꾸준히 읽어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성경을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도하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성경을 혼자 읽고 기도하다가 터득했다느니 직통 계시를 받았다느니 하는 사람들은 다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나 혼자 성경을 읽고 자기 멋대로 해석하는 것은 아주 위험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는 것과 더불어 겸손히 가르침을 받는 것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으면서 그 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우리가 구약을 읽든, 신약을 읽든, 그리고 요한계시록을 읽든 예수 그리스도, 복음을 만나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성경을 바르게 해석해주는 성경 선생이 필요합니다.
그는 빌립을 수레에 오르라고 했습니다. 그가 읽고 있는 성경 구절은 이사야서 말씀이었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사 53:7-8).
내시는 “사지로 가는 양이 누구를 말하는가? 선지자 자신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을 말하는가?”를 물었습니다. 빌립은 내시의 질문을 받자마자 내시가 읽던 말씀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사야서 53장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우리의 모든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실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으로, 구약의 복음서라고 일컫습니다. 여기에서 ‘그’는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을 양으로 비유한 것은 히브리 사람들은 유목민이기 때문에 양의 특징과 속성에 대해 잘 알고 또 양에 대해 친숙하기 때문입니다. 양의 특징은 조용하고 순종적입니다. 반면에 염소의 특징은 반동적이며 불순종의 대명사입니다. 물론 양도 크면 버티기도 하지만 어린 양은 조용하고 순종적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 같이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그 입을 열지 않으셨습니다. 평소 말이 없고 겸손하고 온유하던 사람도 억울하게 고난을 받는다 싶으면 거칠어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억울하게 곤욕을 당해도 그 입을 열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의 무죄함을 변명하거나 반항하지 않으셨습니다. 악인들을 저주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참으셨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범죄 사실에 대해 갖가지로 변명합니다. 저명한 변호사들을 내세워 자신들의 죄를 정당화합니다. 플라톤은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너무 억울해서 「소크라테스의 변명」이란 책을 써서 변명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조금도 변명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사람들의 거짓 고소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은 벌거벗은 몸으로 120대의 채찍을 맞으셨습니다. 이로 인해 예수님의 몸은 온통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왕이 입는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 면류관을 엮어 푹 씌웠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얼굴에는 한 줄기 두 줄기 피가 흘러내렸습니다. 예수님은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70kg이나 되는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예수님은 기진맥진하여 더 이상 십자가를 지고 가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군병들은 옆에서 구경하던 구레네 사람 시몬을 붙잡아 대신 십자가를 지고 가게 했습니다. 그들은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군병들은 예수님의 손목과 발목에 굵은 대못을 박았습니다. 아무 죄 없으신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죽으셔야 했습니까? 왜 채찍에 맞고 수치와 멸시를 당하셔야 했습니까? 왜 예수님은 피와 물을 다 쏟으시고 십자가에서 처절하게 죽으셔야 했습니까?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벧전 2:24-25).
예수님은 나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죄 때문에 조롱과 침 뱉음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내 대신 하나님의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우리에게는 누구나 죄로 인한 상처와 슬픔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부모님의 이혼으로 인한 슬픔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미움과 열등감과 운명주의로 무기력한 삶을 사는 분도 있습니다. 완벽주의로 인해 늘 불안한 사람도 있습니다. 냉소주의와 우울증으로 단잠을 자지 못하는 분도 있습니다. 누가 이 죄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습니까? 철학입니까? 종교생활입니까? 예술과 스포츠입니까? 컴퓨터 게임입니까? 명상입니까? 이런 것으로 우리의 죄 문제가 결코 해결되지 않습니다. 나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만이 해결해 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이 나의 죄 때문임을 믿기만 하면 아무 조건 없이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그 참혹한 십자가에 달려 흘린 피 샘물같이 늘 흘러서 죄 씻어주시네 값없어도 다 나와서 내 죄를 직고하면 흰 눈보다 더 희도록 성결 얻으리 나 믿노라 나 믿노라 그 보혈 공로를 흠 없어도 피 흘리사 날 구원하셨네”(찬송가 269장).
에티오피아 내시에게 세례를 베푸는 빌립
빌립의 말씀을 들은 내시는 마음에 구원의 확신과 복음을 향한 뜨거운 열정이 솟아났습니다. 내시는 빌립에게 세례를 베풀어 달라고 했습니다(행 8:36). 그렇게도 구원의 은혜를 사모하던 내시는 고향 땅에 이르기 전에 성령의 역사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증표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세례는 사죄의 은총을 입었다는 표시일 뿐만 아니라 자신이 평생 주님의 백성으로 거룩하고 성결한 삶을 살겠다는 약속이자 결단입니다.
빌립이 성령께 순종했을 때 에티오피아 내시를 만났습니다. 빌립이 말씀을 전했을 때 내시가 복음을 영접했습니다. 빌립은 그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주도하시는 분은 성령이셨습니다. 성령께서 빌립을 강권적으로 붙들어 그에게 말씀하셨고 그를 선교역사에 쓰셨습니다. 선교는 전적인 성령의 역사입니다. 우리가 성령께 순종할 때 선교는 이루어집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시고 복음을 믿게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