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사도행전 9:1-19
택한 나의 그릇이라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행 9:15).
“예수 그리스도는 사울을 바울로 바꾸셨고, 바울은 세계와 역사를 바꾸었다”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이처럼 바울의 회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후에 나타난 가장 중요한 역사적 사건 중의 하나입니다. 인류 역사를 보면 바울이 인류 문화에 미친 영향은 지대합니다. 바울이 회심하기 이전의 모습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교회를 핍박하고 첫 순교자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는 데 앞장을 섰던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유대교 신봉자 중의 신봉자였습니다. 그런 사람이 변하여 새 사람이 되어 인류를 변화시키는 예수님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바울의 회심은 극적이고 동적입니다.
청년 사울이 변화되었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청년의 시기를 에릭슨은 자아정체감 형성의 중요한 시기로 보았고, 스탠리 홀은 질풍노도(storm and stress)의 시기라고 했습니다. 청년기는 힘이 넘쳐나고 불의에 대항하여 정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시기이기도 하고, 또 이 시기는 무엇인가 목숨을 걸고 할 일을 찾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이 시기를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서 나머지 인생이 거의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도 단 한 번밖에 없는 청년기에 주님을 만나 고귀한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체포된 사울
사울은 성도들을 대해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했습니다. 그의 눈에는 무서운 살인자의 독기가 서려 있었습니다. 그는 스데반의 죽음을 마땅히 여기고 교회를 잔멸하고자 철저한 수색 작전을 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만으로는 부족하여 먼 다메섹까지 가서 성도들을 잡아오고자 대제사장에게 공문을 청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다메섹까지의 거리는 약 240㎞, 일주일이나 걸리는 꽤 먼 거리입니다.
그가 이렇게까지 성도들을 박해하는 이유는 그의 이력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는 길리기아 다소 출신으로, 헬라계 유대인이었습니다. 그 당시 다소는 학문이 발달한 도시였습니다. 그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으로(빌 3:5-6), 조상들의 율법을 철저하게 교육 받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특심했습니다(행 22:3). 그는 바리새파 중에 정통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비친 예수교는 이단 중의 이단이었습니다. 이러한 이단은 토벌의 대상이었고, 나사렛 예수는 철저하게 대적해야 할 대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예수당을 이 땅에서 싹쓸이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울이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왔을 때였습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큰 빛이 그를 둘러 비췄습니다(행 9:3). 시간은 대낮, 정오였습니다. 그가 명상하거나 기도하던 중이 아니었습니다. 꿈을 꾼 것도 아니고 환상을 본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 믿는 사람들을 죽이려고 가던 중이었습니다. 또한 혼자 경험한 것도 아니고 여러 사람들이 보는 데서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환한 빛이 순간적으로 바울을 비추자 바울이 그만 땅에 거꾸러졌습니다. 이때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행 9:4).
교회를 박해하는 그에게 예수님은 나를 박해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교회와 자신을 동일시하셨습니다. 이를 볼 때에 우리가 교회를 사랑하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교회를 박해하면 예수님을 박해하는 것입니다. 사울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는 음성을 듣고 물었습니다.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행 9:5상).
사울은 혼비백산의 순간에도 감히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행 9:5하).
사울은 예수님을 핍박한 일이 없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박해했지 예수님을 박해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체포하러 가는 길이지 예수님을 체포하러 가는 길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네가 나를 핍박한다고 했습니다. 이를 통해 사울은 자기가 누구이며, 자기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사울은 지금까지 예수님을 박해했고, 예수님께 대항했고, 지금 다메섹으로 가는 것 또한 예수님을 박해하는 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정체를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행 9:6).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들었을 뿐 아무도 보지 못하고 서 있었습니다(행 9:7). 그리고 사울은 순식간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사울은 위협과 살기가 등등한 모습에서 이제는 눈 뜬 장님이 되어 남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박해자 사울을 체포하셨습니다. 사울을 체포하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예수님은 성도들의 고난에 동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핍박 받고 있는 성도들을 자신이 핍박 받는 것으로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고난 받는 성도들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고난에 동참하고 계셨습니다. 아니, 예수님은 성도들이 받는 고통보다 더 고통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교회를 사랑하고 돌보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이십니다(엡 5:23).
사울을 만나 주신 예수님은 부활과 생명의 빛, 영광의 빛이십니다. 이 빛은 너무나 강렬하여 사울의 눈을 멀게 했습니다. 예수님이 사울에게 빛으로 찾아오신 것은 어둠이 그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둠의 대표적인 상징은 교만입니다. 교만은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교만은 성령의 역사를 대적합니다. 교만은 자기를 자랑합니다. 교만은 영적인 무지를 가져옵니다. 무지한 열심은 사울을 어둠으로 인도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영광과 부활의 빛으로 찾아오셨습니다. 부활과 생명의 빛, 영광의 빛이 사울에게 임하게 되자 그를 지배하던 어둠이 순식간에 물러갔습니다. 죽어가던 그의 영혼이 소생했습니다. 감겼던 영적인 눈이 뜨였습니다. 이때 인간 사울은 죽고 새 사람 바울이 탄생했습니다. 사울은 불의의 종에서 의의 종, 불순종의 종에서 순종의 종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바울과 같이 극과 극의 변화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런 변화만이 회심은 아닙니다. 회심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프린스턴 대학생들의 1,000명을 대상으로 회심 유무를 물었는데 330명이 회심을 경험했습니다. 그중에서 급격한 변화를 경험한 사람은 18명(5%)이었습니다. 나머지는 점진적인 변화를 겪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천천히 변화하는 사람이 절대 다수였습니다. 회심에는 급격한 변화나 점진적인 변화뿐만 아니라 무의식적인 변화도 있습니다. 소위 모태신앙입니다. 이런 사람은 언제 어디서부터 변했는지 자기도 모릅니다.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 등에 업혀 교회에 오가며 기독교 문화에 젖어 내면에 예수님의 형상이 조각됩니다. 또 다른 사람은 고난을 통한 회심입니다. 미온적인 사람이 곤경이나 역경을 통해 확 달라지는 경우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화끈한 경험이 없다고 해서 중생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통해 예수님을 나의 그리스도로 고백한 경험이 있는가, 없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한편 자신의 극적인 변화를 바울의 변화와 동격화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내가 허랑방탕했는데 예수님을 믿고 새 사람이 되었음을 바울과 비교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허랑방탕하다가 예수님을 믿고 변화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도덕적으로 타락했다가 도덕적인 사람으로 변화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열렬한 유대교 신자에서 기독교 신자로 바뀌었습니다. 부도덕한 생활을 하다가 예수님을 믿고 나서 바울과 같이 회심했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사울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셨습니다.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고, 불의가 진리를 이길 수 없고, 죽음이 생명을 이길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부활과 생명의 빛, 영광의 빛이십니다.
예수님의 택한 그릇, 사울
예수님은 사울을 체포하신 후 그를 위해 다메섹에 있는 아나니아를 준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환상 중에 사울에게 나타나셔서 직가로 가서 사울을 돕도록 하셨습니다. 그러자 아나니아는 사울이 어떤 사람인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기를 꺼렸습니다. 이때 주님께서 그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행 9:15-16).
예수님은 아나니아에게 “사울에게로 가라. 사울은 나의 택한 그릇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에는 크게 진노의 그릇과 긍휼의 그릇이 있습니다(롬 9:22-23). 그릇은 누가 사용하느냐에 따라 진노의 그릇이 되기도 하고 긍휼의 그릇이 되기도 하는 등 그 가치가 달라집니다. 의사에게 들려진 칼은 생명을 살리는 도구가 되고, 강도에게 들려진 칼은 생명을 죽이는 데 사용됩니다. 사탄이 사용하면 죄와 사망과 불의의 열매를 맺고, 하나님이 사용하시면 생명과 의의 열매를 맺습니다. 지금까지 사울은 죄와 율법주의가 사용하는 그릇이었습니다. 이제 사울은 하나님이 쓰시는 그릇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릇은 물건을 담는 용기로, 어떤 내용을 담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집니다. 인간이 위대하게 되는 것은 자신의 인간 조건이나 형편에 있지 않습니다. 내 안에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내 인생이 달라집니다. 보화를 담으면 보배합이 되고, 쓰레기를 담으면 쓰레기통이 됩니다.
수년 전 미국 선교사들이 한국의 요강을 가지고 가서 맛있는 빵과 초콜릿을 담는 그릇으로 사용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옛날 사기 요강에는 사군자가 그려져 있었습니다. 요강에 맛있는 초콜릿을 담으니 초콜릿 그릇이 된 것입니다. 이처럼 그릇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담느냐가 중요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딤후 2:20-21).
그리고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
지금까지 사울이라는 그릇에는 혈기가 담겨 있었습니다. 유대교라는 율법주의가 담겨 있었습니다. 사울이라는 그릇에는 자기중심이 담겨 있었습니다. 자기 열심이 담겨 있었습니다. 자기 의와 자기 자랑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을 지킨다고 했지만 그의 그릇에는 자기완성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의 그릇에는 자기 이름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도 초대 왕인 사울의 이름을 따서 사울이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사울이란 큰 자, 왕이란 뜻입니다. 그는 큰 자가 되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할수록 성령의 사역을 훼방하는 진노의 그릇이 되었고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습니다.
이제 사울은 예수님의 택한 그릇이 되었습니다. 이제 사울의 그릇에 보배, 복음이 담겨 있습니다. 사울의 그릇에 주님의 명예가 담겨 있습니다. 그의 그릇에 주님의 영광이 담겨 있습니다. 빛과 사랑과 은혜가 담겨 있습니다.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의 그릇에 이방인 선교라는 사명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울을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그릇으로 삼으셨습니다. 사울은 히브리 문화와 헬라 문화를 섭렵한 당대의 석학이었습니다. 그는 당대 공통 언어였던 헬라어를 유창하게 하였고 히브리어에도 능통했습니다.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에 적합한 인물이었습니다. 또 그는 충성심과 열정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지식, 열심, 학문, 언어를 쓰셔서 그를 이방인과 세상 왕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그릇으로 삼으셨습니다.
나란 존재는 연약하고 쉽게 깨지는 질그릇과 같습니다. 나란 존재는 놋그릇이나 은그릇, 금 그릇이 아닙니다. 진흙으로 빚은 토기입니다. 그러나 보화를 담으면 보배합으로 쓰임 받게 됩니다. 보화 되신 예수님을 담으면 성령의 전으로 쓰임 받게 됩니다. 보화 되신 예수님을 담으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는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화가 감추어져 있습니다(골 2:3).
복음서에는 보배 되신 예수님의 모습을 여러 모양으로 묘사합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생명의 주이십니다(요 1:4). 예수님은 목마른 인생들에게 영생수를 주시는 영생의 샘이십니다(요 4:14). 예수님은 배고픈 자의 생명의 양식이십니다(요 6:35). 예수님은 눈먼 자의 빛이십니다(요 9:5). 예수님은 사망 권세에 신음하는 이의 부활이요, 생명이십니다(요 11:25). 예수님은 방향을 잃고 방황하는 이의 선한 목자이십니다(요 10:11). 예수님은 병든 자를 치료하시는 치료자이십니다. 예수님은 변화의 능력자이십니다.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십니다. 이 변화는 본질적인 변화,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변화입니다(고후 5:17). 예수님은 저주의 자식을 축복의 자녀로 변화시키십니다.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자를 희생적인 자로, 교만하고 거친 내면을 가진 자를 겸손하고 온유한 사람으로 변화시키십니다. 쓸모없는 자를 유용한 사람으로 변화시키십니다.
예수님은 죄로부터의 구원과 죄 사함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죽음으로부터의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어둠으로부터의 빛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슬픔과 절망으로부터의 기쁨과 소망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공포로부터의 평화를 주십니다. 예수님은 삶의 무의미에서 삶의 존재 가치와 존재 의미를 주십니다. 예수님은 낮은 자존감에서 높은 자존감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생의 보람을 주십니다.
아나니아는 즉시 떠나 사울이 있는 집으로 들어가 그에게 안수했습니다. 대적자를 형제로 영접하고 안수를 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에게 안수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아나니아가 안수를 하자 즉시 바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지고 보게 되었습니다. 사울은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은 후 건강해졌습니다(행 9:17-19).
바울은 복음의 훼방자요 대적자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울을 택하여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그릇으로 삼으셨습니다. 이로 인해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가 되어 인류 역사를 변화시키는 예수님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택함을 받아 복음을 담는 세상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는 그릇으로 쓰임 살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