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사도행전 9:32-43
다비다야 일어나라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행 9:40).
앤드류 머레이는 「기도 응답의 축복」에서 기도에 대해 총체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는 기도의 능력을 온몸으로 체험했습니다. 1860년에 그는 폭포수와 같은 기도와 더불어 성령이 온 회중에게 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기도하면 할수록 성령의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의 기도는 영국의 기도운동으로 점화되어 마침내 1904년 웨일스 부흥의 모판이 되었습니다.
또한 그와 동시대 사람인 찰스 피니가 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기도」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는 50만 명의 불신자를 예수님께로 인도했습니다. 그 비결은 기도였습니다. 그는 “기도는 하나님을 감동시키고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사도행전의 초대교회 특징은 사도들이 말씀을 전할 때 성령 충만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성령 충만했을 때 말씀을 기탄없이 전했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기탄없이 전했을 때 말씀을 듣는 이들이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았습니다. 또한 이적과 표적이 나타났습니다. 본문에는 베드로의 두 가지 이적이 나옵니다. 이는 베드로가 행한 이적 중에서 가장 큰 이적입니다. 그의 이적 뒤에는 기도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기도의 능력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낫게 하시니
베드로가 사방 곳곳에 복음을 전하다가 해안가 욥바에서 동남쪽으로 약 18km 떨어진 지점의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로 갔습니다(행 9:32). ‘성도’라는 말은 사도행전 9장 13절에 처음 등장합니다. 그리고 9장 41절에 또다시 성도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복음서에는 성도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성도란 제자와 같은 단어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통칭이며, 거룩한 무리란 뜻입니다. ‘거룩하다’는 구별되었다, 다르다는 말입니다. 성도란 세속에서 구별되고, 하나님 편으로 구별된 사람입니다. 또한, 거룩하다는 것은 제물을 일컫습니다. 수많은 양들이나 소들 중에 구별해서 하나님께 드리는데 그 제물이 거룩한 것입니다.
성도란 소속이 바뀌고, 본질이 변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소속이 바뀌고 본질이 변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과는 뭔가 달라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에 속했기 때문에 세상의 가치관대로 삽니다. 세상이 원하는 대로 삽니다. 세상의 유행을 따라 삽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속한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원하시는 대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행동, 생각, 가치관이 성도라는 단어와 함께 있어야 합니다. 말도 달라야 하고, 행동도 달라야 하고, 가치관도 달라야 하고, 삶도 달라야 하고, 옷 입는 것도 달라야 하고, 먹고 마시는 것도 달라야 합니다.
베드로는 룻다에서 8년간 중풍으로 누워있는 애니아라는 성도를 만났습니다. 그의 나이가 몇인지 알 수 없지만 대개 중풍은 어린이보다 나이가 좀 든 사람들에게 나타납니다. 따라서 그는 나이가 좀 든 것 같습니다. 중풍 걸린 사람은 마음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몸을 움직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그가 8년간 중풍으로 누워있었습니다. 더운 날씨에 침상에 계속 누워있으면 욕창이 나기 쉽습니다. 너무나 힘든 생활입니다. 베드로는 이 사람을 보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대 곧 일어나니”(행 9:34).
베드로는 자신의 이름으로 그를 낫게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능력으로 일어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실 지도 모른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애니아야 예수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애니아가 곧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베드로를 통해 두 가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는 베드로의 믿음의 말입니다. 말에는 믿음의 말이 있는 반면에 불신앙과 의심의 말이 있습니다. 불신의 말은 사람을 죽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말은 사람을 살립니다. 민수기 13,14장을 보면 40일간 가나안을 정탐하고 돌아와 보고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12명의 정탐꾼 중의 10사람은 불신의 눈으로 가나안을 보았습니다. 그 때 그들은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라고 보고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믿음의 눈으로 가나안을 보았습니다. 그때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요 우리의 먹이라고 했습니다. 이들의 말대로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믿음의 말은 하나님의 역사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둘째는 주님의 이름을 높이는 베드로의 믿음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이름을 높였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영광을 높였습니다. 베드로 자신은 단지 주님의 쓰임 받는 통로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본래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기 이름을 드러내고 첫째가 되는 데 열심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변화되어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예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는 선전부장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이로 인해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행 9:35).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베드로
욥바에 여제자가 있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다비다, 이를 번역하면 도르가였습니다. 그녀는 선행과 구제를 많이 했습니다(행 9:36). 특히 그녀는 과부들의 옷을 손수 지어 과부들을 섬겼습니다(행 9:39). 당시 과부는 가장 불쌍한 사람을 뜻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과부를 돌보는 것이 큰 덕목 중의 하나입니다.
룻다에서 욥바까지는 3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입니다. 그런데 그녀가 죽었습니다. 사람들은 장례식을 보류하고 세 시간이 걸리는 룻다로 사람 두 명을 보내어 베드로를 청했습니다. 그들이 베드로를 청한 것은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욥바에 도착했습니다. 베드로가 도착해 보니 모든 과부들이 모여 다비다가 과부들을 위해 손수 지었던 속옷과 겉옷을 내보여 주었습니다. 그들은 “이분이 나를 위해 이렇게 수고했는데”, “이분이 나를 위해 이렇게 좋은 일을 했는데”, “이분이 나를 위해 이렇게 선행을 베풀어서 이렇게 잘 됐는데” 하며 슬피 울고 있었습니다.
사람은 죽은 후에야 비로소 진정으로 평가된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누구의 죽음의 소식을 듣고 “그 사람 잘 죽었어. 그런 사람은 진작 죽어야 하는데 오래도 살았지” 하기도 하고, “그 사람 정말 안 됐어. 좀 더 살아야 하는데, 좀 더 오래 살아서 더 좋은 일을 했어야 하는데” 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죽었을 때 어떤 평가를 받고 싶습니까? “그 사람은 자기밖에 모르던 사람이었는데 잘 죽었지.” 이런 소리를 들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평소에 선행과 구제에 힘쓰고, 주님을 위해 봉사를 많이 하고,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많은 사람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경은 많은 사람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사람은 그 이름이 하늘의 별과 같이 빛난다고 했습니다(단 12:3).
베드로는 다비다의 선한 행동을 듣고 감동이 되어 주님께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행 9:40상).
사람이 마음이 감동하면 더 기도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를 위해 기도하려고 하는데 섭섭한 생각이 들면 기도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을 위해 선을 베풀어 감동을 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베드로는 무릎을 꿇고 주님께 절대 복종과 동시에 절박한 심정으로 기도했습니다. 무릎을 꿇는 기도는 겸손과 간절함과 뜨거운 기도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준비해 놓으신 모든 것들을 공급받게 됩니다(마 6:31-33, 요 16:23-24).
미국의 16대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은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끈 후에 하나님께 감사하며 이와 같이 말했습니다.
“북군의 승리는 기도의 승리였습니다. 우리에게 남군의 로버트리장군 같은 명장이 없었음이 오히려 다행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기도로 하나님을 더욱 의지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능력이 있습니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큽니다(약 5:16하). 기도는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듭니다. 기도는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기도는 단순한 심리효과나 종교적 형식이 아닙니다. 기도는 단순히 자신의 마음의 평강을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기도는 슬픈 눈물을 멈추게 해 줍니다. 기도는 고통을 기쁨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기도하면 인간으로서 도저히 불가능한 일도 가능한 일로 나타납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어느 특정한 사람에게만 기도의 능력을 나타내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주님이 되시며,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기도는 은혜의 통로, 능력의 통로입니다.
베드로는 본래 기도의 종이 아니었습니다. 복음서의 베드로를 생각하면 그는 기도하지 않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마가복음 1장을 보면 예수님이 인기 절정에 이르셨을 때 베드로는 마음이 들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새벽 미명에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시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막 1:38).
예수님은 순간적인 인기의 영합을 위한 길을 가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본래의 목적, 사명을 붙드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놓으시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같이 되기까지 기도하셨습니다. 반면에 베드로는 옆에서 쿨쿨 잠만 잤습니다. 그는 기도보다 말과 발이 앞섰습니다. 그때 그는 예수님을 부인하는 나약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가 자기 능력과 경험을 의지했을 때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베드로는 기도의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예수님은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처럼 습관을 따라 기도했습니다(행 3:1). 베드로는 예수님이 무릎을 꿇고 기도한 것처럼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했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내 뜻이 이루어지면 내 세계가 건설되고, 사탄의 뜻이 이루어지면 지옥이 건설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면 천국이 건설된다.”
베드로가 주님의 기도를 배웠을 때, 여종 앞에서도 떨던 그가 이스라엘 최고의 권력기관인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행 4:19). 베드로는 기도를 통해 영적인 힘을 공급받았습니다. 그가 기도를 통해 영적인 힘을 공급받았을 때 하나님께서 자신을 주님의 도구로 삼으신 것을 믿었습니다. 그는 기도를 통해 예수님 권세가 내 권세가 된 것을 확신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주님의 도구로 삼아 예수님의 권세와 부활의 능력을 나타내실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때 그는 명령했습니다.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행 9:40중).
그러자 다비다가 눈을 떠서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았습니다(행 9:40하). 주님의 부활의 권세, 부활의 능력이 베드로를 통해 나타났습니다. 베드로는 온전히 100% 주님께 쓰임 받는 그릇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주님을 의지하되 100%를 믿는 믿음, 주님의 도구로 100% 쓰임 받고자 하는 마음이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권세와 하나로 묶여질 때 하나님은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인디언이 기우제를 하면 반드시 비가 온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인디언들은 한번 기우제를 하면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인생의 문제가 있다면 예수님의 능력이 임할 때까지 기도하면 됩니다. 우리가 믿음의 기도를 드리면 병든 자를 하나님께서 일으키십니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약 5:14-15).
엘리야와 우리는 똑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와 다른 점은 기도의 내용과 기도의 자세입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약 5:17-18).
엘리야가 주님의 영광을 위해 비가 오지 않도록 기도했을 때 3년 6개월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또한 주님의 영광을 위해 다시 기도했을 때 비가 내렸습니다. 엘리야의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기도가 절실하였을 뿐 아니라, 오직 주님의 영광만을 드러내고자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절박하고 순수하고 간절하게 기도할 때 죄인들이 미혹의 길에서 돌아서게 되며 사망에서 구원받게 됩니다(약 5:19-20).
베드로는 오직 예수님을 의지하고 예수님만을 생각하고 예수님만을 높였습니다. 그리고 절박하게 기도했습니다. 그때에 애니아가 일어나고 죽은 다비다가 살아났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높이고 간절한 기도에는 놀라운 믿음의 역사, 기적의 역사, 재창조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간절한 기도는 주님의 권세가 내 권세가 되게 합니다. 순수한 기도는 나를 주님의 온전한 그릇으로 사용하게 하여 주님의 권세와 능력을 나타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