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사도행전 10:1-8
고넬료의 기도를 응답하신 하나님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이르되 주여 무슨 일이니까 천사가 이르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행 10:4).
본문은 한 경건한 군인이며 로마 사람, 이방인 고넬료에 대한 말씀입니다. 고넬료에 대한 말씀은 사도행전 구조상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로마 사람이 회심하고 첫 그리스도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하늘로 올라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이 말씀대로 예루살렘에서 시작한 복음이 온 유대에 전해졌으며, 빌립을 통해 사마리아에까지 전해졌습니다.
이제 복음이 땅끝까지 전해져야 했습니다. 당시 세계 땅끝은 로마였습니다. 로마 사람인 고넬료에게 복음이 전해졌다는 것은 땅끝 선교의 문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이는 고넬료 한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라 새로운 세기를 여는 순간이요, 새로운 역사를 쓰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준비된 베드로를 통해 이방 선교의 문을 여시는 순간이요, 유대교 안에 수백 년 동안 내려온 이방인을 멸시하던 선민사상이 폐기되고, 이방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선교시대가 도래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복음이 세계로 전파되는 일에 고넬료라는 한 이방인의 마음을 열게 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배우게 됩니다.
경건한 백부장
가아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행 10:1). 가이사랴는 욥바에서 약 55km 쯤 떨어진 곳으로 당시 로마의 총독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로마 총독부를 호위하는 군대 이름이 이달리야였습니다. 로마의 한 군단은 6,000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600명씩 10개의 부대로 편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각 여섯으로 나누어 100명씩 편성되었는데, 100명이 기본 단위로, 백부장은 최전선의 장이었습니다.
고넬료는 이달리야 군대의 백부장이었습니다. 당시 로마의 위대한 가문이거나 똑똑한 사람일수록 군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무력으로 천하를 제패한 로마 군대의 권세는 대단했습니다. 특히 고넬료는 총독부를 호위하는 백부장이었기 때문에 더 큰 세도를 누렸을 것입니다. 당시 로마 군인들은 강포하고 식민지 백성을 착취하기로 유명했습니다. 제가 70년대 동해안에서 해안 소초장을 했는데 그때만 해도 군의 위세가 대단해서 어촌계에서 갓 잡은 생선을 소초에 가져오는 것은 하나의 관례였습니다.
이런 시대 분위기 중에도 고넬료는 달랐습니다. 그는 경건했습니다(행 10:2상). 경건이란 믿음이 깊은, 독실한, 헌신적인, 마음에서 우러나는 열렬하다는 뜻을 함의하고 있습니다. 경건이 하나님께 쓰일 때에는 거룩하시고 전능하시고 지혜로우시고 사랑이 많으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포괄합니다. 특히 거룩하신 하나님을 뜻합니다. 한편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의 자세에 있어서의 경건은 신비롭다는 말과 달리 행함을 포함합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5).
경건은 능력을 수반합니다. 경건은 겉으로 보이는 외모보다 내적인 능력입니다. 토마스 왓슨은 “경건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시작되고, 말씀이 믿는 자의 입술과 행동을 통해 나타날 때 세상을 이기는 힘으로 작용한다”고 했습니다. 칼뱅은 “경건은 하나님을 향하여 인간이 가져야 할 자세”라고 했습니다. 그 자세는 진리, 예배에 대한 열망, 구원받은 믿음, 경건한 두려움, 기도로 가득한 순종, 경건한 사랑을 포함합니다.
우리가 말씀으로 입술을 향기롭게 하고, 말씀의 가르침을 따라 경건하고 거룩함으로 구별된 삶을 살아갈 때 경건의 능력이 우리의 삶을 주관하게 됩니다. 고넬료의 경건은 세 가지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 경외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행 10:2상).
그는 하나님을 경외했습니다. 경외란 두려워한다는 뜻입니다. 그는 군인입니다. 그는 정복자입니다. 그가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총독이나 로마 황제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했습니다.
경외는 사랑에서 옵니다. 우리가 사랑하면 경외심이 생깁니다. 우리가 부모님을 사랑하면 존경심이 생깁니다. 부모님을 존경하는 마음이 있을 때 말이나 행동을 함부로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할 때 주일 예배에 체육복이나 슬리퍼를 신고 올 수 없을 것입니다.
정복자는 피정복자를 멸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일제 암흑기에 일본으로부터 많은 멸시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정치, 문화, 지식, 경제, 심지어 종교와 도덕적 면에서도 우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조선 사람을 조센징이니, 반도 근성이니 하며 멸시했습니다. 그리고 천황을 숭배하도록 신사참배를 강요했고 동조동근(同祖同根),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내세워 창씨개명을 강요하고 한글을 쓰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것이 정복자들의 모습입니다. 이는 로마 군인들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고넬료는 달랐습니다. 그는 로마 사람이요, 유대에 주둔한 로마 군대의 장교로 있으면서 유대 종교를 믿었습니다. 그는 정치적으로는 로마가 위이지만 종교로는 유대가 옳다고 여겼습니다. 당시 엘리트 계층 중에는 정치는 로마가 최상이고, 철학과 문화는 헬라가 최상이며 종교는 히브리 종교가 제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마 고넬료가 이런 부류에 속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열린 사람이요, 깨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혼자만 하나님을 경외한 것이 아니라 온 집안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섬겼습니다(행 10:24).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경건한 사람이라면 사랑하는 이들을 하나님께 나아오도록 해야 합니다. 내가 소중히 여기는 신앙을 어떻게 나만 가질 수 있습니까? 내 자녀, 내 가족, 내 친구들까지 인도해야 합니다. 나 자신은 열심히 믿는다고 하면서 자기 가족에게 전도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내가 하늘나라의 소망을 가지고 있다면 내 가족도 하늘나라에 소망을 갖도록 해야 합니다. 지옥으로 갈 사람을 천국으로 인도해야 합니다.
제 며느리는 대학 졸업 때까지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는 미국 유학 시절에 신실한 크리스천 룸메이트를 만나 복음을 접했습니다. 그리고 코스타에 가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때 친언니가 미국에 왔습니다. 언니는 학생 때에 불교학생회 리더였습니다. 언니는 처음에 복음을 잘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언니를 위해 금식하며 울며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언니의 마음이 열리고 미국에 온 지 3일 만에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언니와 합심하여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부모님을 위해 기도했을 때 부모님과 오빠 온 가족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우리는 식구 모두가 구원을 받기까지 공동체의식을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행 10:2상).
혼자 잘 믿는 것이 경건이 아니라 온 집안과 더불어 믿는 것이 경건입니다. 경건한 사람은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합니다. 구약에도 이처럼 경건한 인물 중에 욥이 있습니다.
“그의 아들들이 자기 생일에 각각 자기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그의 누이 세 명도 청하여 함께 먹고 마시더라 그들이 차례대로 잔치를 끝내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하게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위가 항상 이러하였더라”(욥 1:4-5).
우리의 온 식구가 손에 성경을 들고 교회에 나가는 모습을 그려보십시오. 그리고 저녁에는 온 식구가 한 상에 모여 주일 말씀을 나누며 기도하는 모습을 그려보십시오. 바로 이곳이 천국입니다. 우리 모두의 가정에 복음이 전파되어 경건한 가정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침과 저녁에 수고하여 다 같이 일하는 온 식구가 한 상에 둘러서 먹고 마셔 여기가 우리의 낙원이라 고마워라 임마누엘 예수만 섬기는 우리 집 고마워라 임마누엘 복되고 즐거운 하루하루”(새찬송가 559장).
구제
군인은 싸우는 사람, 싸워서 이기는 사람, 사람을 죽이는 훈련을 받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대개 군인들은 긍휼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는 관행이라는 명목 아래 재산을 축적할 수도 있는 위치입니다. 거기다가 가이사랴는 큰 도시입니다. 그런데 고넬료는 그렇게 살지 않았습니다. 그는 식민지 백성들을 많이 구제했습니다(행 10:2중). 그가 백성들을 얼마나 많이 구제했는지 하나님이 그 구제를 기억하실 정도였습니다.
“말하되 고넬료야 하나님이 네 기도를 들으시고 네 구제를 기억하셨으니”(행 10:31).
하나님은 구제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나눔과 배려를 귀하게 여기십니다.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지리라”(잠 11:24-25).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약 1:27).
사람들이 물질을 버는 법은 열심히 배우지만 물질을 쓰는 법에 대해서는 배우지 않습니다. 그러나 물질을 버는 것도 힘들지만 쓰는 것은 더 어렵습니다. 사람들이 물질을 벌지 못해서 나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돈을 쓸 줄 몰라서 타락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물질은 선을 행하고 구제하고 즐겨 나누는 데 사용돼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돈을 맡기시는 이유 중 하나는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함입니다. 물질은 다른 사람에게 복을 나눠주는 통로입니다.
신명기 28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과 명령을 지키는 자를 복 주시고 더 나아가 복의 통로가 되게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복을 받는 일보다 복을 나눠주는 일에 관심을 갖습니다. 우리는 물질을 통해 하나님의 복을 나눠주는 복의 통로가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주고 베푸는 손길을 기억하시고 때가 되면 갑절 이상의 복을 주십니다. 우리가 손해를 보더라도 이웃을 위해 선을 베풀고 이웃을 긍휼히 여기며 사랑을 베풀 때에 그 삶이 선한 열매로 가득하게 됩니다.
기도
고넬료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유대의 관례대로 제 구 시(오후 3시)에 기도했습니다. 그는 일을 시작할 때 기도로 시작하고, 끝날 때 기도로 끝냈습니다. 그것도 경건한 유대인이 아니라 로마 군인이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그는 무엇을 달라는 1차원적인 기도를 드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 그는 이렇게 기도했을 것입니다.
“제가 하나님을 믿지만 너무나 모릅니다. 진리를 밝히 깨닫게 하여주소서. 이를 위해 목자를 보내 주소서.”
우리는 기도를 영혼의 호흡이라고 합니다. 우리 몸은 산소가 계속 들어오고 나쁜 가스를 밖으로 내보내야 건강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몸이 썩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호흡이 끊어지면 맨 먼저 코와 귀와 입을 솜으로 막습니다. 왜냐하면 죽은 사람이 한 시간 쯤 지나면 코와 입에서 악취가 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매순간 기도하지 않으면 입에서 악취가 나옵니다. 말을 하기만 하면 상처주고, 불평과 원망을 쏟아내고, 남을 험담합니다. 눈은 음욕으로 가득하고, 귀는 쓸모없는 세상 소식으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로 하나님의 새 영을 들이마실 때 우리의 영혼은 죄악의 찌꺼기들이 밖으로 분출되어 하늘나라의 소망이 가득하게 됩니다. 또한 우리의 입은 칭찬과 감사와 찬양으로 가득 찹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서 결단코 범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삼상 12:23). 또한 바울은 쉬지 말고 기도하고 항상 성령 안에서 주님께 기도하라고 했습니다(살전 5:17; 엡 6:18). 우리는 믿음 없는 것을 탄식하지 말고 기도하지 못한 것을 탄식해야 합니다.
기도를 응답하신 하나님
고넬료가 기도했을 때 그의 구제와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었습니다.
“하루는 제 구 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이르되 고넬료야 하니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이르되 주여 무슨 일이니까 천사가 이르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행 10:3-4).
우리가 ‘주여, 주여’ 기도한다고 해서 그 기도가 다 상달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고넬료의 기도는 주님께 상달되고 주님은 이를 기억하셨습니다. 이는 그의 기도와 구제가 진실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제 구 시(오후 3시)에 기도했습니다.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그 시간은 낮잠 자는 시간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낮잠을 잘 때 고넬료는 기도했습니다. 그때 그는 주님의 환상을 보았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 그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의 소원을 이루시며 또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사 구원하시리로다”(시 145:18-19).
하나님은 진실하게 기도하는 사람에게 가까이 하십니다. 사람이 언제 진실하게 되느냐면 바로 죽음 직전입니다. 누구나 죽음 앞에서는 움켜쥔 모든 것을 다 내려놓습니다. 내가 움켜쥐고 있던 명예욕, 권세욕, 탐욕 등을 내려놓는 그 순간 진실해집니다. 그때 기도의 응답을 받습니다. 내가 무엇인가를 움켜쥐고 있는 한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합니다. 이는 마치 부모님이 자녀에게 맛있는 것을 사주고 싶은데 자녀가 불량식품을 손에 쥐고 놓지 않을 때 자녀에게 좋은 것을 사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움켜쥔 것을 내려놓고 빈손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고넬료는 환상을 보여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도하다가 환상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신실한 기도를 보시고 계시를 보여주셨습니다. 그 계시는 사람을 욥바로 보내서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거하며 그 집이 해변에 있다는 것까지 가르쳐 주었습니다(행 10:5-6). 하나님은 그에게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환상을 보았다”, “계시를 받았다”는 사람을 만납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하다가 저 자매님이 내 배필이라는 계시를 받았다고도 합니다. 만일 그 계시가 사실이라면 상대방인 그 자매도 그런 계시를 함께 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계시가 아니라 자기 암시, 자기 확신, 자기 착각에 불과합니다.
신앙생활에서 체험은 중요합니다. 신앙 체험이 없으면 이는 마치 마네킹 신자와 같습니다. 백화점의 마네킹은 키도 크고 늘씬한 몸매에 쇼윈도의 가장 좋은 자리에 화려하게 치장하고 서 있습니다. 몇 천만 원짜리 밍크코트도 마네킹에게는 그냥 입혀줍니다. 그것도 매번 다른 것들로 입혀줍니다. 모자도 몇 백만 원짜리를 씌워줍니다. 그러나 마네킹이 행복한 존재입니까? 마네킹은 겉으로 보기에는 화려하고 멋져 보여도 생명이 없기 때문에, 기쁨, 감사, 행복을 모릅니다. 기도도 할 수 없고, 성령을 받을 수도 없습니다.
교회 안에 마네킹 교인이 있습니다. 그런 교인은 예쁘게 화장하고 좋은 옷을 차려입고 예배드리기 위해 앉아있지만 찬송을 불러도 감동이 없고, 기도를 하여도 기도 소리가 나오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 없고 깨닫지도 못합니다. 백화점 마네킹이나 교회 마네킹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말씀과 기도와 봉사를 통한 영적 체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말씀과 기도와 구제를 통해 살아있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고넬료는 환상을 보고 즉시 경건한 하인 둘을 불러 욥바로 보냈습니다. 로마의 백부장은 얼마든지 어부 출신 베드로를 오라 가라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청하여 오라고 하시니 하인과 병사로 하여금 모셔오도록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지시에 즉시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순종의 사람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고넬료는 로마의 백부장으로서 경건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했습니다. 그는 구제에 힘쓰며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고넬료의 기도를 응답하시고 환상을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환상을 보기를 원한다면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손에 움켜쥐고 있는 것들을 내려놓고 진실하게 기도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