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사도행전 10:9-23
베드로의 환상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어라 하거늘”(행 10:13).
예일 대학교 심리학 교수를 역임한 리처드 니스벳이 쓴 「생각의 지도」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가 동양 출신의 한 학생과 함께 인간의 사고 방법에 대해 연구를 하던 중, 동양 학생이 말하기를 “자신은 세상을 ‘원’이라고 생각하는 반면에, 교수님은 세상을 ‘직선’으로 생각한다는 점에서 다르다”고 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동양과 서양은 각기 다른 사고 과정과 사고 내용을 갖고 있습니다. 또한 그 안에서도 각기 나라마다 독특한 사고 과정과 사고 내용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이 문화입니다.
우리는 다른 문화에 대해 배타적이고, 타문화에 대한 편견이 많습니다. 그리고 자기와 다르면 무조건 배척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는 단일민족이란 점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요즘 다문화 가정에 많은 문제들이 발생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타문화에 대한 편견을 버려야 합니다. 문화는 상대적인 것이지 절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자기 문화를 사랑하는 만큼 다른 나라 문화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마음을 넓혀 누구에게도 복음을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하나님은 먼저 고넬료에게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환상은 욥바에 있는 베드로를 초청하라는 환상이었습니다. 고넬료는 이튿날에 세 사람을 보내 욥바 성에 있는 베드로를 데리고 오게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고넬료에게만 환상을 보여 주신 것이 아니라 베드로에게도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베드로는 6시(정오)에 기도하러 지붕에 올라갔습니다(행 10:9). 우리나라는 지붕이 삼각형입니다. 그러나 유대의 지붕은 평평합니다. 그래서 지붕에 올라가서 쉬기도 하고 기도도 합니다.
베드로는 때가 때인지라 배가 고파 먹을 것이 생각났습니다. 그때 마침 사람들이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집안에서 양고기 요리 냄새가 베드로의 코를 진동시켰습니다. 그러던 중에 자신도 모르게 비몽사몽이 되었습니다. 그는 기도 중에 하나님의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는 뜨거운 6시(정오)에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기 원한다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과 일하십니다. 바울의 사역의 열매도 기도였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권면했습니다. 바울은 항상 기도하라고 했습니다(엡 6:18). 우리의 성공과 실패는 기도에 달려있습니다.
베드로나 고넬료는 환상을 보여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기도 중에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기도할 때 동시에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이념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인 신분으로나 함께할 수 없는 사이입니다. 그러나 이 환상을 통해 베드로와 고넬료 사이의 높은 담이 헐렸습니다. 예수님은 화평이십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엡 2:14).
‘담’은 구별을 뜻합니다. 당시 성전에는 이방인 뜰과 성전 뜰 사이에 담이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더 이상 접근하지 말라. 접근하면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는 팻말이 있었습니다. 이방인들은 절대로 성전 뜰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성전 뜰과 성소 사이에도 담이 있었습니다. 일반 유대인들은 성소에 들어갈 수 없고 제사장들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또 담이 있었습니다. 지성소는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이런 모든 담들을 허셨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담을 허셔서 차별이 없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 성소의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이로써 성소와 지성소의 담을 허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를 이루시기 위해 이방인의 대표인 경건한 고넬료를 택하시고, 유대인을 대표해서 베드로를 택하여 두 사람에게 환상을 보여주시고, 두 사람의 만남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할 때 계시를 보여주십니다.
“주여 지난 밤 내 꿈에 뵈었으니 그 꿈 이루어 주옵소서 밤과 아침에 계시로 보여주사 항상 은혜를 주옵소서 나의 놀라운 꿈 정녕 나 믿기는 장차 큰 은혜 받을 표니 나의 놀라운 꿈 정녕 이루어져 주님 얼굴을 뵈오리라”(새찬송가 490장).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더라”(행 10:11-12).
베드로는 하늘 문이 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았는데, 큰 보자기 같은 그릇이 네 귀를 매어 내려오는 것이었습니다. 그 안에는 갖가지 짐승들과 하늘에 나는 새들과 땅에 기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구약성경에 먹지 말라고 한 것들도 있었습니다. 레위기 11장을 보면 먹지 말아야 할 음식과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나옵니다. 짐승 중에서는 굽이 갈라진 쪽발이 되고 새김질하는 것이어야 먹을 수 있습니다. 돼지는 굽은 갈라졌지만 되새김질하지 않기 때문에 먹을 수 없습니다. 물고기 중에서는 비늘과 지느러미가 없는 것은 먹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까다롭게 음식 문화를 만들어 놓았을까요? 왜 굽이 갈라지고 되새김질하는 소는 먹고, 굽이 갈라졌지만 되새김질 못하는 돼지는 먹지 말라고 했을까요? 우리는 돼지 삼겹살을 얼마나 좋아합니까? 사람들은 비늘이 없는 뱀장어를 보양 식품으로 좋아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깊은 마음을 다 헤아릴 수 없지만 몇 가지 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굽이 갈라지고 되새김질하는 짐승은 대체로 온순합니다.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평화로운 짐승입니다. 소나 양은 사람을 죽이고 물어뜯지 않습니다. 푸른 초원에 누워있고 풀을 뜯는 소나 양 떼들을 생각하면 평화로움이 깃듭니다.
그러나 돼지는 쪽발이지만 되새김질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돼지는 주로 썩고 더러운 것과 찌꺼기를 좋아합니다. 소는 누울 때 자기가 누운 똥을 피해 깨끗한 곳을 찾아 눕습니다. 반면에 돼지는 우리를 깨끗하게 치워주면 금세 똥을 싸고 그 자리에 눕고 뒹굽니다. 하나님은 더럽고 추한 삶을 싫어하십니다. 제가 볼 때에 돼지가 쪽발이지만 더럽게 사는 것은 되새김질하지 않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우리도 말씀을 읽고 묵상하지 않으면 돼지처럼 지저분한 삶을 살게 됩니다. 교회를 다니며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세상의 못된 짓을 하는 사람들은 100명이면 100명 모두가 성경을 읽지 않고 성경을 묵상하지 않는 이들입니다. 주일에 먼지 묻은 성경을 털고 오는 사람은 돼지처럼 지저분한 삶을 살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경건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게 됩니다.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물고기는 산청어나 연어와 같이 맑은 물에서 삽니다. 일급수가 아니면 자랄 수 없습니다. 그리고 행동이 민첩합니다. 반면에 지느러미와 비늘 없는 낙지, 문어, 뱀장어 등은 주로 시궁창이나 갯벌에서 삽니다. 그들의 행동은 보기에도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어항에 키우는 물고기들은 모두가 비늘이 있고 지느러미가 있는 것들입니다. 비늘이 없고 지느러미가 없는 물고기는 물의 밑바닥에서 삽니다. 반면에 비늘이 있고 지느러미가 있는 물고기는 물의 위쪽에서 삽니다. 지느러미가 없는 물고기는 더러운 환경에 그대로 적응하며 살아갑니다. 반면에 지느러미가 있는 물고기는 탁류를 거슬러 올라갑니다.
우리는 비늘이 있고 지느러미가 있는 물고기처럼 탁류와 같은 세속적인 삶을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불의한 세상과 싸우는 정직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성도는 바닥에서 기는 삶이 아니라 저 높은 곳을 향해 살아야 합니다.
성경은 정한 새에 대해 말씀하지 않고 부정한 새 20종을 들고 있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사납고, 죽은 고기를 뜯어 먹고, 주로 밤에 활동한다는 것입니다. 독수리는 공격적이고 약탈적입니다. 피를 흘리는 잔인함이 있습니다. 까마귀는 음울합니다. 올빼미나 박쥐 등은 어둠을 좋아합니다. 부엉이는 고독한 날짐승입니다.
성도는 온유하고 온순해야 합니다. 사람이 사납고 공격적이고 어둠을 좋아하면 안 됩니다. 사람이 칙칙하고 음울한 삶을 살면 안 됩니다. 성도는 맑고 밝고 깨끗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약자의 것을 빼앗는 강포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고독한 방에서 혼자 고독하게 살아서도 안 됩니다. 성도는 함께 어울려서 더불어 살아야 합니다.
음식은 하나의 문화입니다. 문화는 사람이 만들어 갑니다. 문화는 변합니다. 문화는 다양합니다. 나이 든 사람들은 김치와 된장찌개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김치와 된장찌개를 좋아하지 않고 햄버거와 치킨을 좋아합니다. 외국 사람들은 김치나 마늘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외국에 계신 우리 선교사님들은 토요일과 주일에는 절대로 김치를 먹지 않습니다. 주일에 김치 냄새를 풍기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소고기를 좋아하지만 인도 사람들은 소고기 국물도 먹지 않습니다. 이처럼 문화는 다양합니다. 음식 문화는 신앙이 아니라 문화, 혹은 종교 문화입니다. 종교 문화도 사람이 만들어가기 때문에 언제든지 변할 수 있습니다.
옷 입는 것도 일종의 문화입니다. 우리는 중요한 자리나 결혼식장에 갈 때는 깨끗한 옷을 입고 갑니다. 물론 요즘 청바지 차림으로 가는 사람도 있지만 그래도 예의를 아는 사람은 그렇게 하고 가지는 않습니다. 이처럼 교회에 올 때에는 예를 갖추고 와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세상에 마지막 남은 거룩한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야 아무렇게 입고 다닌다 할지라도 세상의 마지막 거룩한 장소인 교회에 올 때만큼은, 일주일에 한 번만이라도 그렇게 했으면 하는 것이 저의 바램입니다. 사람이 옷을 어떻게 입느냐에 따라 삶의 자세가 달라집니다. 그러나 문화는 상대적인 것이지 절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리처드 칼슨은 「사소한 것에 목숨 걸지 말라」는 책에서 사소한 것과 중요한 것,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을 정확히 구별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구별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을 구별하지 못해서 절대적인 것은 양보하고, 그리 중요하지 않은 사소한 것, 비본질적인 것에 목숨을 걸고 싸우다가 실패합니다. 우리는 자신이 만든 잣대, 고정관념, 편견, 편협한 생각, 자기 경험을 가지고 남을 판단합니다. 그러다보니 여유가 없고, 여유가 없으니 충돌하게 되고, 충돌하다 보니 남을 정죄하게 됩니다. 우리는 사소한 것에 목숨 걸지 말고 가장 중요한 복음에 목숨을 걸아야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일어나 잡아먹어라
또 베드로에게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큰 보자기 안에 있는 각종 짐승과 공중에 나는 것들을 일어나 잡아먹으라는 것입니다.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어라 하거늘”(행 10:13).
이는 청천벽력과 같은 명령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이 소리를 듣자마자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즉시 대답했습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한대”(행 10:14).
그도 그럴 것이 부정한 짐승은 먹기는 고사하고 만지기만 해도 부정해지므로, 다시 깨끗하게 하는 과정이 복잡합니다. 옷도 빨아야 하고 손도 씻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먹으라고 하니 기가 막혔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를 완강하게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부정한 짐승들은 구원받을 수 없는 이방인을 가리킵니다. 반면에 거룩한 음식은 이스라엘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먹을 수 없다고 거절한 베드로에게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또 두 번째 소리가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행 10:15).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이방인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깨끗하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세 번 똑같은 말씀을 하심으로 확고한 의지를 나타내셨습니다(행 10:13, 15-16). 예수님 안에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천명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유대인에게는 선민이라는 강한 유다이즘이 있습니다. 율법을 통해 이 사상이 굳어졌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통해 이방인들보다 도덕적으로 비교적 깨끗한 생활을 했습니다. 이로 인해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개, 돼지와 같은 짐승으로 생각하고 멸시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과의 교제 자체를 불법으로 여겼습니다(행 10:28). 이 유다이즘은 자기중심적이고 좁고 편협하고 폐쇄적입니다. 베드로는 DNA도 유다이즘이고, 피도 유다이즘이고, 그의 뇌 속에도 유다이즘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부정한 음식들은 절대로 먹을 수 없다고 반사적으로 거절한 것입니다. 그는 비몽사몽 중에서도 유대인으로서의 자세를 잃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을 택하신 이유는 그들 자신들만 구원받도록 하고자 하심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택하신 목적은 세상 만민의 제사장이 되게 하고자 하심입니다(출 19:6). 그러므로 그들은 열방을 향한 목자의 심정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교만하고 배타적이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가정교사인데 오히려 율법을 가지고 선민사상을 고착화했습니다. 율법으로 형성된 ‘자기 의’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의’를 배척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자기 의’에 갇혀서 복음을 영접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원수 노릇을 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편협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폐쇄적이지 않습니다. 복음은 배타적이지 않습니다. 복음은 보편적입니다. 복음은 개방적입니다. 복음은 범세계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도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해 복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 12:3).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마 28:19).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능력이 있습니다(롬 1:16). 복음의 범위와 성격이 이와 같다면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의 자세도 열려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어떤 족속에게도 복음을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는 유다이즘의 좁은 세계에 갇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에게 환상을 보여 주심으로 유다이즘을 깨고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베드로와 같은 유다이즘적인 요소가 없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단일 민족이라는 자긍심 때문에 타민족을 잘 영접하지 못하는 배타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민족주의를 깨야 합니다. 민족애에 대한 자긍심은 있어야 하지만 국수주의로 가서는 안 됩니다. 조선 왕조 말기의 국수주의 정책은 민족을 비극으로 이끌었습니다. 우리는 민족주의라는 좁은 마음을 깨고 바다와 같은 넓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바다는 대륙에서 쏟아내는 모든 오물을 받아 정화시킵니다. 우리는 폐쇄적인 생각을 열어 열방을 향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유교사상의 체면 문화, 유불선(儒佛仙)의 영향으로 인한 은둔과 도피, 소극적인 모습, 사주팔자 타령을 하는 운명주의, 양반과 상민, 적자와 서자라는 차별의식, 이념과 지역 간의 편견의 벽을 깨고 어떤 종류의 사람, 어떤 나라의 사람에게도 복음을 전하는 왕 같은 제사장이 되어야 합니다.
일어나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
베드로는 이 환상이 무슨 뜻인지 의아했습니다. 그때 마침 고넬료가 보낸 종들이 베드로가 머문 집의 대문을 두드렸습니다. 얼마나 절묘한 성령의 역사입니까? 정확한 시간에 정확하게 찾아와 노크했습니다. 바로 이때 베드로에게 성령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그에게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일어나 내려가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 내가 그들을 보내었느니라 하시니”(행 10:19-20).
고넬료의 종들은 자초지종을 베드로에게 설명했습니다. 그들은 주인의 말에 절대 순종했습니다. 베드로는 그들을 불러들여 유숙하게 했습니다(행 10:22-23상).
하나님은 먼저 고넬료에게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동시에 베드로에게도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베드로는 유다이즘의 좁은 세계에 갇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에게 환상을 보여 주심으로 유다이즘을 깨고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하셨습니다. 우리에게도 베드로와 같은 편견이 있습니다. 우리는 편견과 문화의 장벽을 깨고 세상 땅끝까지 복음을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