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사도행전 13:1-3
안디옥 교회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행 13:2).
교회에는 다섯 가지의 기능이 있습니다. 첫째는 예배의 기능입니다. 교회의 일차적 기능은 예배입니다. 하나님은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자들을 찾으십니다(요 4:23-24). 둘째는 선교의 기능입니다. 교회는 복음 전파를 위한 선교의 전초 기지로 이 세상 안에 존재합니다. 그래서 모든 교회는 전도할 사명이 있습니다. 선교는 지역 사회뿐만 아니라 땅끝까지 해야 합니다. 선교를 통해 교회가 세워지고 하나님 나라가 확장됩니다. 셋째는 교육의 기능입니다. 교회는 성경을 교재로 한 교육을 통해 하나님의 온전한 사람으로 키워집니다. 넷째는 친교의 기능입니다. 친교는 이웃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다섯째는 봉사의 기능입니다. 봉사는 헌신으로 나타납니다. 우리는 기도로 헌신할 수 있고, 시간과 물질로 헌신할 수 있고,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로 헌신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장부터 12장까지는 베드로를 중심으로 한 유대인 사역입니다. 그리고 13장부터 28장까지는 바울을 중심으로 한 이방인 중심 사역입니다. 여기에서 네 차례에 걸친 바울의 전도 여행으로 복음이 세계화됩니다. 그 중심에 안디옥 교회가 있습니다. 본문에는 위에 열거한 다섯 가지 기능을 갖춘 안디옥 교회가 나옵니다. 안디옥 교회의 모습이 우리 교회의 모습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무명의 전도자로 세워진 교회
스데반의 순교는 세계선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먼저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인 사울이 회심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스데반의 순교로 인해 사방으로 흩어진 제자들이 곳곳을 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로 인해 복음의 불길이 들불처럼 사방에 퍼져나갔습니다. 집사 빌립은 사마리아에 가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또 빌립이 에티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전하여 아프리카에까지 복음의 씨가 떨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스데반의 순교를 세계선교에 쓰셨습니다. 그래서 “순교자의 피는 교회 성장의 씨앗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무명의 제자들이 핍박을 피해 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에 이르렀습니다(행 11:19-21). 그들은 정든 고향을 떠나 정처 없는 나그네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장래가 불안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부활의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부활의 믿음으로 안디옥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안디옥은 수리아의 수도로 당시 ‘동방의 로마’, ‘동방의 여왕’이라고 불렸습니다. 핍박으로 흩어진 무명의 전도자들은 유다이즘을 뛰어넘어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로 인해 헬라인들이 복음을 영접하여 안디옥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당시 헬라인들은 지성의 대명사였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지성인들은 자기 나름대로 형성된 가치관이 있어서 복음에 대한 반응이 그렇게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무명의 전도자들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했습니다. 이는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하셨기 때문입니다(행 11:21).
사람들은 할 수만 있으면 사회적으로 저명한 사람과 함께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부활신앙을 가지고 믿음으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과 함께하십니다. 하나님은 유명인과 무명인을 차별하시지 않으십니다. 외적으로 보면 사도행전의 주역이 베드로와 바울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의 주역은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섬긴 무명의 전도자들입니다. 안디옥에는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 구레네 사람 루기오,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이 있었습니다(행 13:1). 이들은 이름만 나오지 누구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이 믿음으로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을 때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하셔서 안디옥 교회가 탄생되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무명의 전도자들이 세운 교회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이름도 없는 믿음의 용사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십니다.
대학마을교회나 CMI도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충성한 평신도 목자들의 헌신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이름도 빛도 없는 자비량 선교사들의 순수한 믿음과 헌신의 역사입니다. 무명의 자비량 선교사들을 통해 러시아와 헝가리, 그리고 루마니아 등에 교회가 세워져 대학생들의 선교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말씀을 사랑하는 교회
안디옥에 하나님의 역사가 놀랍게 일어난다는 소문을 들은 예루살렘 교회는 즉시 바나바를 안디옥에 파송했습니다(행 11:22-26).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곳에 일어난 하나님의 역사로 인해 심히 기뻐하고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고 권면했습니다. 바나바는 이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행 11:25-26상).
바나바는 성경 공부의 중요성을 깨닫고 다소에 있는 사울을 초청해 일 년 동안 그들을 가르쳤습니다. 이로 인해 그들은 말씀에 기초한 믿음의 뿌리를 내렸습니다. 그리고 무리 중심이 아니라 제자 중심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더 나아가 유능한 교사들이 생겨났습니다(행 13:1).
안디옥 교회는 은사 중심의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처음부터 성경을 사랑하고, 성경을 가르치고, 성경 교사를 양성했습니다. 다시 말해 안디옥 교회의 부흥의 비결은 성경을 사랑하고 성경을 가르치는 성경 교사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큰 교회였지만 문제만 일으키고 영향력을 끼치지 못했던 것은 은사를 강조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안디옥 교회가 작지만 예루살렘 교회와 더불어 초대교회의 양대 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처음부터 성경을 사랑하고 성경을 가르치는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어느 시대나 성경을 사랑하는 교회는 하나님이 늘 함께하십니다.
초대 한국 교회는 성경을 사랑하는 교회였습니다.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의 주역인 윌리엄 블레어 선교사는 그의 저서 「God in Korea」에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50여 년이 넘도록 한국 교회가 급격히 성장하고 지속적으로 부흥할 수 있었던 조건을 각자 나름대로 설명해보라고 한다면 나는 서슴없이 ‘사경회’라고 대답할 것이다.”
당시 사경회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성경 공부였습니다. 성경 한 권을 한 구절씩 조직적으로 공부했습니다. 이러한 성경 공부는 성경에 대한 지식을 증가시켜주었고, 나태해진 신자들에게는 신앙을 새롭게 다지는 계기가 되었으며, 초신자에게는 그리스도를 구주로 만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백낙준 박사는 ‘기도회’와 ‘사경회’는 한국 부흥의 기원이라 했습니다.
이만열 교수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선배들이 성경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평양부흥회 때 어떤 이들은 목포에서부터 성경과 먹을 것과 덮을 것을 들고 메고 이고 평양까지 왔다. 믿음의 선배들은 처음 복음이 전파될 때부터 성경을 사랑했다. 그리고 성경을 팔러 다니는 권서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가가호호 방문하며 성경을 팔며 복음을 전했다.”
이처럼 믿음의 선배들의 성경 사랑으로 복음이 들어온 지 백여 년밖에 안 되었지만 천만 성도, 인구의 25%가 기독교인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적으로 별 볼 일 없습니다. 거기다 같은 민족끼리 총부리를 겨눈 지가 60년이 넘은 슬픈 민족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사랑하게 되면 위대한 민족이 됩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사랑하는 개인과 민족과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말씀을 사랑했을 때 갈릴리 어부가 인류의 스승이 되었습니다. 초등학교도 나오지 않은 무디 목사가 성경을 사랑했을 때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대학을 변화시켰고 미국을 변화시켰습니다. 그리고 미국이나 영국의 저명한 대학이 본래부터 유명해진 것이 아닙니다. 그 대학에 성경을 사랑하는 총장과 교수들과 소수의 학생들로 인해 위대한 대학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사랑하여 빼어난 성경 교사가 될 때 무명인이 유명인이 되고, 우리의 가정은 명문 가문(royal family)이 되고, 우리가 섬기는 대학은 명문대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섬기는 교회는 이사야서 2장처럼 말씀을 배우러 몰려들 것입니다.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사 2:2-3).
말씀을 듣고 행하는 교회
사람이 지식이 쌓이게 되면 바리새인과 같이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말씀 공부를 이론적으로 하지 않고 실제의 삶 속에 적용하여 성경 말씀대로 살았습니다. 그랬을 때에 사람들은 그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 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행 11:26).
당시 사람들은 신자, 제자, 형제, 또는 성도라고 불렸습니다. 그러나 안디옥 교회에서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신자들을 크리스천(imitation of christ)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불리게 된 것은 성경을 듣고 이론에서 끝나지 않고 행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믿는 만큼 행했고 아는 만큼 행했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받았으면 믿음으로 행해야 합니다. 알고도 행함이 없는 교리적인 믿음, 지식적인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약 2:17). 죽은 믿음은 냄새가 고약합니다. 행함이 없고 말만 하는 믿음은 역겹고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줍니다. 반면에 행함이 있는 믿음은 산 믿음입니다. 산 믿음은 생명이 있어 따뜻하고, 자라납니다. 산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향기를 풍겨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게 됩니다.
그들이 얼마나 성경 말씀대로 살았는지 예루살렘에 기근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힘에 지나도록 헌금하여 그들을 도왔습니다.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행 11:29-30).
개척기에 다른 곳을 도와준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안디옥 교회는 처음부터 주 예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을 실천했습니다(행 20:35). 그들은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했습니다(딤전 6:17-19). 그들은 주님과 이웃을 위해 쓰는 것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를 부요하게 하고 주님과 이웃을 위해 인색한 사람들은 신용불량자가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과 이웃을 위해 드리는 분들은 절대로 신용불량자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산 믿음입니까? 아니면 죽은 믿음입니까? 우리는 믿고 아는 만큼 행하는 산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한마음 한뜻으로 섬기는 교회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행 13:1).
본문에 선지자와 교사가 나오는데 그 기능이 각기 다릅니다. 선지자는 요즘 흔히 말하는 인간의 미래에 있을 생사화복을 말하는 무당 같은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선지자는 헬라어로 ‘프로페테스’(προφητηζ)로, 하나님의 뜻을 받아 사람들에게 전하는 사람입니다. 계시를 받는 동시에 영감을 받은 사람입니다. 당시에는 성경이 없었습니다. 구약성경이 있었지만 회당에만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무나 구약성경을 읽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당시에는 신약성경이 다 기록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영감을 받은 사람들이 필요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선지자입니다. 선지자는 한 교회에 매이지 않았습니다. 성령께서 지시하는 대로 오가야 했습니다. 선지자는 성령께 이끌리어 삽니다. 반면에 교사는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을 말합니다. 교사는 교회에 속합니다.
안디옥 교회의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은 아프리카 흑인이었고, 마나엔은 헤롯의 젖먹이 동기동창으로 그의 친밀한 친구요, 궁중 고관이었습니다. 안디옥 교회의 구성원을 보면 흑인도 있고, 백인도 있으며, 마나엔과 같은 귀족도 있었고, 천인도 있었습니다. 본토인도 있었고 바울과 바나바와 같이 외부에서 들어온 사람도 있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처음부터 다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신분이 천차만별이었습니다. 그리고 직분도 다양했습니다. 그래서 안디옥 교회는 고린도 교회처럼 베드로파, 바울파, 아볼로파 등 파벌을 형성하여 서로 다투고 분열되기 쉬웠습니다. 하나가 되기 어려운 구성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한마음 한뜻이 되어 주님을 섬겼습니다. 교회는 다양한 구성원과 다양한 직임 속에 주님을 중심으로 하나가 되어 주님의 뜻을 섬겨야 합니다.
선교사를 파송하는 교회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행 13:2).
‘주를 섬겨’(worshiping the Lord)는 주님을 예배했다는 뜻입니다. 예배는 무엇을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는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예배는 주님께 봉사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경배하는 마음, 말씀을 듣는 자세, 뜻을 기다리는 마음입니다. 예배는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우리는 보통 섬긴다고 하면 물질만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섬긴다는 것은 마음을 온전히 드리는 것입니다. 주님을 앙망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눈으로 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음성을 듣고자 기다리는 것입니다. 만지고 보려는 것은 인본주의 신앙입니다. 헬레니즘의 특징은 시각적, 촉각적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청종하는 것,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그들은 금식하며 주님을 예배했습니다. 그들은 먹는 욕망을 끊고, 신령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렇게 주님을 섬길 때에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개인 명상이나 골방에서 기도하다가 음성을 들은 것이 아니라, 예배 중에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들이 간구할 때 들은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들을 때에 음성이 들렸습니다. 우리는 예배 중에 성경 말씀에 기초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의 뜻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들이 들은 말씀은 성령이 불러 시키는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바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행 13:2하).
‘불러’는 소명입니다. 하나님의 소명은 성령의 주도적인 역사입니다. 성령께서 “내가 불러 시키는 일, 내가 필요해서 시키는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울과 바나바를 세우는 것입니다. 사울은 히브리식이고 바울은 헬라식 이름입니다. 주님의 역사는 내가 하고 싶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시켜야 하고 주님께서 기회를 주셔야 하고 주님이 불러주셔야 합니다. 선교사는 내가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불러서 가는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께 우리 교회는 개척 교회이기에 교회가 성장하고 자리를 잡으면 선교사를 보내겠다고 사정을 이야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성령에 순종하여 그들을 안수하여 보냈습니다.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행 13:3).
그들은 땅끝 선교를 하고자 하시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이로써 안디옥 교회는 선교사를 처음으로 파송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선교에는 보내는 그룹(sending group)과 나가는 그룹(going group)이 있습니다. 파송하는 사람이나 파송 받는 사람이나 모두 중요합니다. 파송하는 이 없이 파송 받을 수 없고, 파송을 받는 이 없이 파송할 수 없습니다. 파송을 한 이들은 파송 받은 이를 위해 물질과 기도와 편지로 섬겨야 합니다. 그리고 파송 받은 사람은 분명한 사명을 가지고 파송되어 사명을 감당하고 또 사역을 보고해야 합니다.
안디옥 교회는 무명의 전도자들이 세운 교회였습니다. 말씀을 사랑하는 교회였습니다. 말씀을 듣고 행하는 교회였습니다. 동역하는 교회였습니다. 선교사를 파송하는 교회요, 주는 교회였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와 더불어 모범적인 초대교회로 불립니다. 우리는 안디옥 교회와 같이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을 실천하고, 선교사를 파송하고, 파송된 선교사를 돕는 등, 나눠주고 섬기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