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사도행전 15:36-41, 16:1-10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행 16:9).
세계 역사의 흐름을 이끌어 온 사상을 크게 둘로 나눈다면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입니다. 헬레니즘이 방법(how)을 추구한다면 헤브라이즘은 원인(why)을 찾습니다. 헬레니즘이 이성적이고 과학적이라면 헤브라이즘은 의지적이고 종교적입니다. 헬레니즘이 시각적이라면 헤브라이즘은 청각적입니다. 헬레니즘이 변증법적 시간 개념이라면 헤브라이즘은 직선적 시간 개념입니다. 이처럼 이 두 사상은 서로 그 뿌리가 다릅니다.
기독교는 헤브라이즘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이런 기독교가 문화와 사상과 철학이 다른 헬라로 전파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헬라 사상은 복음을 담는 그릇이 되었습니다. 헬라어가 없었다면 기독교는 세계화가 될 수 없었습니다. 헬라어는 2000년 전의 글이지만 논리적이고 체계적입니다. 헬라어는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고 이해하는 데 큰 공헌을 했습니다. 그리고 헬라 철학은 논리적인 동시에 사유적이며 깊이가 있습니다. 한편 복음은 그 깊이와 넓이와 높이와 길이가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깊은 경륜과 섭리와 뜻은 세상의 어떤 사상으로도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논리적이고 사유적인 헬라 철학과 언어를 사용하여 기독교를 논리적으로, 사상적으로 변증하고 체계화하셨습니다.
본문은 간단하지만 그 내용은 세계 역사를 바꾸어 놓은 큰 사건입니다. 바울은 아시아에 복음을 전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아시아에 전도의 문을 막으시고 헬라로 방향을 바꾸게 하셨습니다. 여기에는 선교 전략상 중대한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하나님의 경륜과 선교의 주체는 성령이신 것을 보게 됩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분립
바울과 바나바는 제1차 전도여행을 성공적으로 마쳤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총회를 통해 믿음으로 구원받는 복음의 절대성이 굳게 세워졌습니다. 또한 이방인들에게 전도의 문이 열렸습니다. 이제 바나바와 바울은 제2차 전도여행을 떠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마가를 데리고 가느냐, 마느냐의 문제로 의견이 엇갈렸습니다. 마가는 바울과 바나바와 같이 전도여행을 떠났다가 도중에 집으로 돌아간 사건이 있었습니다(행 13:13). 아마도 마가가 준비 없이 선교여행을 떠났다가 너무 힘이 들어 돌아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찌 되었든 마가는 중도에 전도여행을 포기했습니다. 바나바는 2차 전도여행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마가에게 다시 한 번 전도여행의 기회를 주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안 된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반대한 이유는 마가가 자신들과 끝까지 함께하지 않고 이탈했기 때문입니다(행 15:38). 바울의 생각은 충성된 일꾼이라면 무슨 일을 시작하면 끝을 봐야지 중도에 이탈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부분에서 냉정했습니다. 라인홀드 니버는 “개인에게는 사랑, 사회에는 정의”라는 말을 했습니다. 바울은 공과 사가 분명했습니다. 바울은 사적으로는 마가를 용서하지만 공적으로는 냉정했습니다.
반면에 바나바는 마가의 실수를 한번 감싸주자는 것입니다. 중국 당서에 “일승일패(一勝一敗) 병가상사(兵家常事)”라는 말이 있습니다. 전쟁터에서 한번 지고이기는 것은 늘 있는 법이기 때문에 한번 졌다고 낙심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결국 이로 인해 바나바와 바울은 선교 여정을 달리했습니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로 떠났습니다. 후에 바나바가 밀라노의 감독이 되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실라를 택해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떠났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여행이 달라진 것을 꼭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가 없습니다. 누가 옳고 그르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 문제는 옳고 그름으로 판단할 문제가 아니라 의견이 각기 다른 것입니다. 그들은 헤어지는 아픔이 있었지만 주님 안에서 서로 다름을 인정했습니다. 그들은 자기 생각과 맞지 않는다고 공동체를 깨지 않았습니다. 이를 신학적 용어로 분립(分立)이라고 합니다. 분열은 대립하는 것이지만 분립은 서로 의견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분열은 공동체를 깨는 것이지만 분립은 공동체를 더욱더 세워나갑니다. 분열은 이권과 교권으로 나누어지는 것이지만 분립은 공동체가 합의하에 나누는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분립한 것을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오묘한 진리가 담겨져 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당시 이방 선교의 두 기둥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두 사람이 함께 다니기보다 서로 분립하여 전도하도록 하여 더욱 효과적으로 전도를 극대화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을 계기로 후에 마가는 강한 영적인 군사가 되어 베드로의 영적인 아들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바울의 유익한 종이 되기도 했습니다(벧전 5:13; 딤후 4:11). 그리고 그는 마가복음서를 기록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분열되었다면 마가가 바울의 좋은 동역자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한편 바울은 실라를 동역자로 얻었습니다. 순수한 선교 열정이 있는 곳에는 의견이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통해 하나님의 역사는 더 굳게 세워지고 선교가 극대화됩니다.
디모데를 만난 바울
바울은 제1차 전도여행을 마친 후 5년쯤 되어 제2차 전도여행을 떠났습니다.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의 목적은 제1차 전도여행 때 세웠던 교회를 돌아보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제1차 전도여행 때 세웠던 더베를 거쳐 루스드라에 도착했습니다(행 16:1). 루스드라는 제1차 선교여행 때 바울이 돌에 맞아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세워진 교회입니다(행 14:8-19).
그곳에 디모데라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디모데는 제1차 전도여행 때 바울의 전도로 복음을 영접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유대인이요, 아버지는 헬라인이었습니다. 그의 외할머니 이름은 로이스고, 그의 어머니는 유니게였습니다. 5년 전에 복음을 영접했던 그가 지금은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5년 전 바울은 루스드라를 떠날 때 걱정이 많았습니다. 바울은 디모데가 믿음생활을 잘 할지, 핍박을 이겨낼 수 있을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아마 바울은 5년간 쉬지 않고 디모데를 위해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5년 후에 와서 보니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영향력이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있었습니다.
헬라어로 디모데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뜻입니다. 믿음이 좋은 어머니와 외할머니가 그렇게 이름을 지어주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눈물이 많았습니다(딤후 1:4-5). 그는 마음이 순수하고 목자의 심정이 남달랐습니다. 또한 그는 거짓이 없는 믿음의 사람으로, 진실하고 충성된 주님의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와 함께 떠나고자 했습니다(행 16:3). 바울은 그를 데리고 다니며 복음의 동역자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를 데리고 가려고 할 때 문제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이란 것이었습니다. 이에 바울은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했습니다.
이것은 사도행전 15장에서의 바울의 모습과 전혀 다릅니다. 바울은 율법주의자들에 대항하여 믿음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음을 필사적으로 설파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총회에서 구원은 할례를 행하고 행하지 않음에 달려있지 않다고 선언했습니다. 더구나 그는 총회에서 의결된 편지를 이방 교회에 전달하는 책임자였습니다. 그런데 디모데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이는 복음 역사를 이루는 데 유대인들의 훼방을 받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에게는 유대인과 같이 되고, 율법 아래 있는 자에게는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되었습니다. 이는 아무쪼록 그리스도 안에서 몇몇 사람을 구원하고자 함이었습니다(고전 9:20). 다시 말해 복음 진리는 사수하되, 그 외의 것에 대해서는 관대했습니다.
바울과 그 동역자들은 제1차 선교여행 때에 복음을 전했던 이고니온, 더베, 비시디아 안디옥 교회를 심방하여 예루살렘 총회에서 작성한 규례를 전했습니다. 바울은 교회를 심방하면서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벗겨 주고 격려하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이들의 믿음이 굳어지고 그 수가 날마다 더해갔습니다(행 16:4-5).
바울에게 디모데는 그저 뜻을 같이하는 동역자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그를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딤후 2:3),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딤전 6:11)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디모데를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고전 4:17)이라고 했습니다. 한편 디모데는 바울이 있으라고 하면 있고, 가라고 하면 가는 바울의 신실한 동역자였습니다. 디모데는 바울과 한 몸이었습니다. 디모데는 바울과 기쁨과 고난을 평생 함께 했습니다. 심지어 디모데의 무덤이 바울의 무덤 밑에 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디모데를 깊이 사랑하고 디모데는 바울을 존경했습니다.
바울은 언제 어느 때 얻어맞고 언제 어느 때 옥에 갇히게 될지, 언제 순교할지 몰랐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언제 어느 때 죽더라도 복음을 전할 계승자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믿음이 있고 사람들에게 칭찬 듣는 디모데를 처음부터 후계자로 삼아 데리고 다니면서 훈련하고 양육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막후 인물의 역사입니다. 모세의 뒤에 여호수아가 있고, 바울의 뒤에 디모데가 있고, 베드로 뒤에 마가가 있었습니다. 여호수아나 디모데나 마가는 훌륭한 역사를 이루게 한 숨은 공헌자입니다. 여호수아는 출애굽부터 광야 40년 동안 모세의 충실한 시종이었습니다. 후에 여호수아는 모세의 뒤를 잇는 후계자가 되었고, 마가 또한 베드로의 계승자가 되어 마가복음서를 기록했으며, 디모데는 바울의 후계자가 되었습니다. 위대한 역사 뒤에는 충성된 종들과 아름다운 계승이 있습니다.
환상을 본 바울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행 16:6).
바울은 아시아에 복음을 전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아시아에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막으셨습니다. 바울은 어찌하든지 아시아에 복음을 전하고자 북쪽, 브루기아와 갈라디아로 향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시아 동북부인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서 마침내 무시아 앞에 이르렀습니다.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행 16:7).
이처럼 바울이 아시아 선교 열정에 사로잡히게 된 것은 제1차 선교여행을 통해 아시아 사람들이 우상숭배와 마술과 음행에 빠져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들을 돕고자 하는 목자의 심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성령께서 바울이 북쪽으로 가는 길을 두 번이나 막으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서쪽인 드로아로 갔습니다. 바울의 마음 한 편에는 왜 하나님께서 아시아 선교를 막으시는지 이해가 안 되었습니다. 그는 드로아에서 밤에 답답한 마음으로 몸을 뒤척이다 잠이 들었습니다. 이때 바울에게 환상이 보였습니다.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행 16:9).
하나님은 바울을 무조건 막기만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여기에서 마게도냐 사람이 누구냐를 놓고 의견이 분분한데 보통 알렉산더 대왕으로 봅니다. 드로아의 원래 이름이 알렉산드리아입니다. 드로아에서 배를 타고 건너가면 빌립보입니다. 빌립보는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 이름인 빌립에서 연유되었습니다. 이처럼 알렉산드리아에서 배를 타고 알렉산더 대왕 아버지의 이름을 딴 빌립보에 이르게 되는 등 모든 것이 알렉산더와 연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두 가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선교의 주체는 성령
성령께서 소아시아에 머물기 원하는 바울을 유럽으로 보냈습니다. 사람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매너리즘에 빠져서 자기가 있던 곳에 계속 머물려는 속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때로 안주하고자 하는 심리를 가로막고 미지의 땅, 고난과 모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배는 항구에 머물러 있기보다 항해할 때 아름답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뜻이 여기에 있음을 알고 내 뜻을 버리고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생각과 뜻이 인간의 생각과 뜻보다 더 깊고 높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는 바울이 계획했던 것보다 더 큰 뜻을 두고 마게도냐로 인도하셨습니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 55:8-9).
하나님은 중국으로 가고자 하는 리빙스턴을 막으시고 아프리카로 인도하셨습니다. 윌리엄 캐리는 남태평양에 있는 폴리네시아 섬으로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중간에 그가 탄 뱃머리를 인도로 돌려 인도에서 일생을 마치게 하셨습니다. 저는 대전에 머물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천으로 인도하셔서 인하대학교를 중심한 인천 캠퍼스 복음 역사와 동유럽 선교를 섬기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막으실 때에는 다른 길을 준비해 놓고 계십니다. 따라서 내가 준비하고 계획했던 대로 되는 것만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가던 길을 멈추게 하시고, 다른 길로 방향을 틀어 새로운 길로 인도하실 때 내 뜻을 고집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성령의 인도함을 따르는 것이 성령의 사람입니다. 성령이 막으시면 멈추고, 열어주시면 가면 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자기 고집과 자기 생각을 접어야 합니다. 이때 성령의 역사에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성령의 방향에 즉시 순종하여 마게도냐로 떠나기로 했습니다(행 16:10). 바울은 성령에 순종하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선교의 주체는 내가 아니라 성령이십니다.
세계는 복음을 필요로 함
사도행전 저자는 성령의 환상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행 16:10).
‘우리’는 누가와 바울을 뜻합니다. 그들은 성령께서 보여주신 환상을 마게도냐 사람들이 복음을 전해달라는 환상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들에게 복음이 필요했던 것은 그들이 미신과 우상에 지배당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마게도냐 사람들은 인간적으로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이곳은 헬라 문화가 꽃핀 곳이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로마의 물질문명 속에서 풍요롭고 호화로운 생활을 했습니다. 이들은 문화인이요 지성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영적으로는 공항상태였습니다. 그들은 심지어 자기도 알지 못하는 신을 만들어 놓고 경배했습니다(행 17:22-23).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허탄한 것을 좇았습니다. 또한 허무하기 때문에 쾌락을 즐겼습니다. 아덴에는 쾌락을 추구하는 에피큐로스 학파가 있었고, 고린도의 아프로디테 신전에는 매춘부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울에게 와서 복음을 전해달라고 간절히 요청했습니다. 그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돈도 쾌락도 아니었습니다. 이들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복음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했습니다.
지금 세계는 미국과 중국이라는 양대 축이 좌지우지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물질문명이 발달하여 겉은 마치 에덴동산과 같습니다. 그러나 속은 소돔, 고모라같이 부패해 있습니다. 미국은 게이의 천국이요, 마약과 섹스가 범람하고 있습니다. 한편 중국은 40년간 공산주의 사상과 모택동 사상에 갇혀 있다가 돈맛을 알았습니다. 그러자 급속도로 돈과 쾌락이 중국을 광풍처럼 휩쓸고 있습니다. 그들은 돈을 벌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미국은 그래도 조상들의 청교도 신앙의 뿌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중국은 노자 사상이 그들의 깊은 내면을 지배하고 있어서 ‘절대’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여기에 천민자본주의 사상이 침투하자 돈과 쾌락에 춤추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복음 진리가 절실히 요구되고 복음을 전할 선교사들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닙니다. 우리나라는 지금 천민자본주의로 인해 돈과 쾌락에 놀아나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복음 진리가 절실히 요구되고 복음을 전할 목자들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분립도 하나님의 경륜이고, 바울이 디모데를 만난 것도 하나님의 경륜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드로아에서 환상을 본 것도 하나님의 경륜입니다. 하나님은 깊은 경륜 속에 아시아 전도의 문을 막으시고 헬라로 방향을 트셨습니다. 선교의 주체는 성령이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겸손하게 성령의 방향을 따르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익은 곡식 거둘 자가 없는 이때에 누가 가서 거둘까 내가 어찌 게으르게 앉아 있을까 어서 가자 밭으로 보내주소서 보내주소서 제단 숯불 내 입술에 대니 어찌 주저할까 주여 나를 보내주소서”(새찬송가 495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