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사도행전 16:11-18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빌립보 선교(1)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행 16:14).
바울은 하나님의 환상을 본 후 큰 기대감을 갖고 빌립보에 왔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바울을 환영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환상 속의 손짓하던 사람도 없었습니다. 이때 바울은 자신이 혹시 환상을 잘못 본 것이 아닌지 의심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루디아 한 사람을 만나게 하심으로 유럽 선교의 문을 여셨습니다. 하나님의 환상은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되고, 유럽 선교는 한 사람으로부터 구체화 되었습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는 한 사람으로부터 조용히 시작됨을 배우게 됩니다.
루디아를 만난 바울
바울은 드로아에서 환상을 본 후 곧 방향을 바꾸어 배를 타고 사모드라게로 직행했습니다. 그는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서 거기서 유럽의 첫 성 빌립보에 도착했습니다. 드로아에서 빌립보까지는 약 240km입니다. 바울이 이틀 만에 도착한 것을 보면 바울이 탄 배가 순풍을 만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돌아오는 길은 닷새나 걸렸기 때문입니다(행 20:6). 하나님은 빌립보 전도가 시급하기 때문에 순풍을 만나게 하여 바울이 빨리 도착하게 하셨습니다.
성경은 빌립보를 마게도냐의 첫 관문, 로마의 식민지라고 했습니다. 마게도냐는 4개의 지역으로 구분되었는데, 빌립보는 마게도냐 지역에서 제일 큰 도시입니다. 당시 로마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로마에 복음이 전파되어야 그리스도교가 세계화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바울이 로마 식민지 빌립보에 도착한 것은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에 도착하여 몇 날 있다 보니 안식일이 돌아왔습니다(행 16:12-13). 유대인들은 안식일이 되면 회당에 가서 안식일을 지켰습니다. 그런데 빌립보에는 회당이 없었습니다. 이는 빌립보가 로마 식민지이고 유대인들이 몇 명이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10가족만 모이면 회당을 지어 안식일을 지켰습니다. 만일 유대인들이 회당에서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면 이방인으로 취급당했습니다. 이방인으로 취급당한다는 것은 유대 공동체에서 매장되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목숨을 걸고 안식일을 지켰습니다. 그들은 안식일만 되면 하던 일을 멈추고 회당으로 갔습니다. 안식일은 반드시 회당에서 지켜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삶은 회당 중심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디를 가든지 회당부터 먼저 지었고, 회당을 중심으로 유대인 타운(게토)이 형성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도 주일에 집에서 나와 교회로 와서 예배드려야 교인입니다.
요즘 가나안 신자들이 유행한다고 합니다. ‘가나안 신자’는 ‘교회 안나가’는 신자를 일컫습니다. 그들은 주일에 교회에 안나가고 집에서 인터넷이나 기독교 방송이나 기독교 TV를 보며 예배를 드립니다. 이런 사람들은 신자가 아닙니다. 교회의 기능은 세 가지가 있는데 말씀 선포(예배)와 성도의 교제, 그리고 봉사입니다. 이 세 가지가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혼자 집에서 예배를 드리며 무슨 봉사가 있고, 교제가 있을 수 있습니까? 신자는 주일에 집에서 나와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성도 간에 교제를 하고 헌신과 봉사를 해야 합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할 환경이 갖추어지지 않았다며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환경을 탓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예배처소를 찾아 한적한 강가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바울 일행이 문밖 강가에 이르자 여자들 몇 명이 거기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회당이 없으면 한적한 곳에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유대인의 관습이었습니다. 그들 중에 루디아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루디아를 예비해놓으시고 바울을 빌립보로 보내셨습니다. 루디아는 어떤 사람입니까?
루디아, 여자
바울이 유럽 선교의 전초기지인 빌립보에서 처음 만난 사람은 여자 루디아였습니다(행 16:14중). 당시 여자들은 사람 숫자에 넣지도 않을 만큼 무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유럽의 첫 교회가 여성에 의해 세워졌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입니다. 지금은 안 그렇지만 한국도 한때는 여자를 무시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국 교회가 성장하게 된 데는 여성들의 숨은 공로가 큽니다. 대학마을교회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여자 안수 문제를 문화로 볼 것이냐 성경 진리로 볼 것이냐의 의견이 분분하지만 좀 더 열린 마음으로 접근해야 되지 않나 생각됩니다.
루디아, 자색 옷감 장사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행 16:14상).
루디아는 빌립보에 살고 있지만 두아디라 시에서 자색 옷감을 사서 파는 비단 장사였습니다. 한마디로 두아디라 비단 장수였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염색은 고급 기술을 필요로 합니다. 염색 기술이 안 좋으면 빨래할 때 물이 빠져 다른 옷도 못쓰게 만듭니다. 두아디라 성은 염료 생산지로 유명했습니다. 그중에 자색 염료는 값이 비싸기로 유명합니다. 루디아는 그 자주색을 취급하는 비단 장사였습니다. 두아디라에서 자주색 옷감을 사와서 빌립보에서 팔 수 있을 정도면 생활력이 강했을 것이며 비단 장사이니 돈도 꽤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녀는 돈밖에 모르는 천민자본주의에 물든 여인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은 그녀를 표현할 때 루디아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행 16:14)라고 했습니다. 유대인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기본입니다. 그래서 유대인을 일컬을 때 하나님을 섬기는 유대인이라고 소개하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루디아는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녀는 돈을 벌어 자기 집의 살림만 꾸리는 그런 여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사업으로 번 돈을 빌립보 교회를 위해 헌신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옥에 갇혔을 때 연보를 하여 바울을 도왔습니다. 루디아는 주님과 교회를 위해 헌신하고, 주님을 섬기는 종들을 섬기는 헌신의 여인이었습니다.
루디아, 자기 집을 가정 교회로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이르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머물게 하니라”(행 16:15).
그녀와 온 집안이 모두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바울에게 자신을 예수님을 믿는 자로 여긴다면 자신의 집에 유하라고 강권했습니다. 그녀는 바울에게 자기 자신을 여자로 보지 말고 주님을 믿는 자로 알라고 했습니다. 그녀는 바울에게 자기 집을 가정 교회로 사용하도록 했습니다. 그녀는 유대교로 개종한 후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기는 여인이었습니다.
루디아, 행동하는 여인
루디아는 믿는 것을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그녀는 한마디로 ‘나는 믿고 행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여인이었습니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했고, 요즘은 “나는 느낀다. 고로 존재한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나는 믿는다. 고로 존재한다”, “나는 헌신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루디아는 믿고 행하고 헌신하는 데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는 믿음의 여인이었습니다.
30년 전에 저는 제 아내와 함께 인천의 하버드라고 일컫는 인하대학교 복음화의 꿈을 가지고 인천에 왔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제게 보내주신 학생은 인천간호전문대학 3학년 졸업반 여학생인 조봉순(김 레베카) 자매였습니다. 제가 온 것은 인하대학교 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였는데, 생각도 안 했던 간호전문대학 그것도 졸업반 3학년 여학생이 왔습니다. 그러나 저와 제 아내는 그녀를 하나님이 보내주신 하나님의 사람, 루디아로 영접하고 말씀으로 잘 섬겼습니다. 그녀가 예수님을 믿고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긴 머리를 짧게 깎고 높은 구두를 버리고 운동화로 갈아 신었습니다. 그리고는 인하대학교를 발바닥이 닳도록 심방하며 복음을 전하는 여인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녀는 세광병원과 고대부속병원에 근무하면서 병원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복음을 전하여,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변화되어 인천 개척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전도를 받고 예수님을 믿은 몇 명의 형제자매들이 선교사로 파송되었고, 본인 자신도 헝가리 선교사를 거쳐 지금은 루마니아에서 20년째 캠퍼스 복음 사역을 섬기고 있습니다.
루디아의 마음을 여신 하나님
바울은 강가에서 그들을 만나자마자 곧 성령에 감동되어 열심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때 성령께서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 바울이 전하는 말씀을 듣게 하셨습니다. 선교의 주체는 성령이십니다. 우리가 열심히 전도하지만 그 사람의 마음을 여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토머스 키다가 쓴 「생각의 오류」라는 책을 보면 인간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자 하는 심리가 있다고 합니다. 카이사르도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려 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편견이고 선입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녀의 마음을 여시니 편견과 선입견 없이 말씀을 받아들였습니다. 박동근 시인은 이런 시를 지었습니다.
“그대의 창가에 세레나데를 보냅니다. 사랑이 들게 마음 문을 열어다오. 마음의 창으로 사랑이 들면 세상이 아름답게 보일 거예요.”
마음이 열려야 세레나데가 들립니다. 이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안 믿는 것은 내 의지나 부모님의 의지, 목자의 의지, 남편이나 아내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을 열어 주셔야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입니다(요 1:13).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고후 1:22).
성령께서 나와 함께 하실 때에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시인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고 고백한 것은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7)고 하셨습니다. 성령의 감화 감동 없이는 예수님을 주라고 시인할 수 없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입니다(요 3:6). 성령의 감화 감동을 받아야 예수님이 날 위해 죽으시고 날 위해 부활하신 주님이신 것을 믿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마음의 문이 열려 하늘의 영적 신비를 알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7-19).
마음의 문이 열리면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도 이해되고 순종하기 힘든 말씀도 기쁨으로 순종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신비함을 알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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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괴로움
바울 일행이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났습니다(행 16:16). 주인은 그녀로 인해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은 주인에게 팔려 온, 자유가 없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주인의 돈벌이 수단에 불과했습니다. 그런 여자가 바울을 보자 따라오며 소리 질렀습니다.
“그가 바울과 우리를 따라와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하며”(행 16:17).
그녀가 며칠 동안 계속 이렇게 하자 바울은 심히 괴로웠습니다(행 16:18). 사실 귀신 들린 여인은 바울을 바르게 봤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괴로움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습니다. 이는 마귀가 자신을 칭찬하고, 귀신으로부터 자신이 증언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불쌍한 여인을 이용하여 돈을 버는 그녀의 주인으로 인해 괴로웠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여 귀신을 내쫓았습니다(행 16:18).
마귀의 칭찬은 언제나 함정과 올무가 있습니다. 야고보서를 보면 하나님이 누구신가는 귀신도 잘 안다고 했습니다(약 2:19). 그래서 우리 속담에 귀신같이 잘 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귀신은 주님이 누구신지 잘 알지만 회개가 없고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귀신은 순종하지 않고 헌신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아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주님을 믿고 순종하고 주님을 가까이 따라야 합니다. 말을 그럴듯하게 하면서 따르지 않으면 거짓말이요, 진리를 모독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십계명 중 제3계명은 지 말라“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입니다(출 20:7). 하나님의 이름은 깊은 심중에서 존경과 찬양과 무거운 마음으로 불러야 합니다.
바울은 주님의 환상을 보고 순종하여 빌립보에 왔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에서 루디아라는 여인을 만났습니다. 바울은 루디아를 하나님이 보내주신 사람으로 여기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것이 유럽 선교의 문이 열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비전은 구체화될 때 비전이 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비전을 크게 갖되 작은 것에 충성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