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사도행전 18:1-23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힌 바울 -고린도 선교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행 18:5).
연어는 회귀성 물고기입니다. 자기가 태어난 곳을 떠나 태평양을 헤매고 다니며 성장하여 3년 만에 자기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자기가 태어난 강으로 돌아가는 길은 험난합니다. 거기에는 수십 미터나 되는 폭포도 있습니다. 연어는 그 폭포를 거슬러 올라가 자기가 태어난 곳에서 알을 낳고 죽습니다. 연어들이 3년 후에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은 연어의 본능 때문입니다. 연어는 귀소본능에 따라 회귀하여 알을 낳고 죽습니다. 사람에게도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습니다(전 3:11). 그것이 무지한 불신자들에게는 우상숭배로 나타나고, 믿는 이들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더욱더 굳게 합니다.
본문은 고린도의 개척사입니다. 고린도는 아가야 지방의 수도로, 인구가 60만이 넘는 거대한 신흥 항구도시였습니다. 그중에 40만이 노예였습니다. 아덴이 학문과 예술의 도시라면 고린도는 상업과 향락의 도시였습니다. 고린도는 물질적으로 번영했지만 도덕적으로 타락한 방탕의 대명사였습니다. 당시 고린도에는 유명한 아프로디테(비너스)의 신전이 있었습니다. 이 신전에는 일천 명의 여사제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창기였습니다. 고린도는 복음을 전하기가 힘든 곳 중의 하나였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말씀에 붙잡혀서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심을 증언했습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도 말씀에 붙잡힌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를 만난 바울
바울이 고린도에 이르렀을 때 로마에서 온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를 만났습니다. 아굴라는 본도 출신으로 유대인이고, 브리스길라는 로마 사람입니다. 이 가정은 로마에서 살다가 주후 49년에 글라우디오 황제의 유대인 추방령으로 고린도로 이주했습니다. 그들의 직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초대 교회에서 가장 아름답고 믿음이 있는 부부입니다. 바울은 이 가정을 디모데처럼 나의 동역자라고 불렀습니다(롬 16:3).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가정은 디모데처럼 전임 사역자가 아니라 직장을 가진 평신도입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그를 ‘나의 동역자’라고 불렀을 만큼 그 가정은 복음 역사에 희생적이었고 바울의 좋은 동역자였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천막 만드는 직장에서 만났습니다(행 18:2-3). 바울은 천막을 만드는 기술이 있었습니다. 당시 천막은 목자와 군인들과 여행자들을 위해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바울은 평일에는 직장생활을 하며 복음을 전했고, 안식일에는 회당에 가서 하루 종일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평신도 선교사였습니다. 바울은 직장 복음화를 위해 기도하는 중에 아굴라 부부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은 바울의 전도로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그 후 그들은 일생동안 바울의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들과 팀을 이루어 고린도 역사를 섬겼습니다. 그들 또한 고린도 교회를 개척할 때 바울을 충성스럽게 도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세우고 안디옥 교회로 돌아갈 때에 동행했습니다. 바울은 그들과 동행하는 중에 겐그레아에서 서원이 있어 머리를 깎았습니다. 바울이 어떤 서원을 했는지 알 수 없지만 전후 사정을 살펴볼 때 제3차 전도여행 때에는 그토록 개척하고 싶었던 에베소를 개척해야 하겠다는 서원이었을 것입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바울의 심중을 알고 거처를 에베소로 옮겼습니다. 바울은 이 가정과 함께 에베소에서 두 해 동안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의 말씀이 세력이 있어서 에베소를 복음으로 뒤집어 놓았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복음의 능력을 체험한 후에 로마 선교에 대한 비전을 보았습니다(행 19:21). 그러자 아굴라 부부는 에베소에서 다시 로마로 옮겼습니다. 이처럼 그들은 바울이 개척 역사를 섬길 수 있도록 미리 가서 준비를 했습니다. 그들은 바울의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후에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로마에서 또다시 에베소로 옮겼습니다(딤후 4:19). 이는 심약한 디모데를 동역하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들은 전적으로 교회를 중심으로 살았고, 복음 전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했습니다. 그들은 바울과 동역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으로 받아들이고 일생동안 헌신적으로 동역했습니다.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롬 16:4).
그들은 바울을 위해 자기들의 목까지라도 내어놓을 만큼 바울을 사랑하고 동역했습니다. 그들이 바울 옆에서 동역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비전이 큰 사람일수록 뒤에서 감당해 주어야 할 부분이 너무 크고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바울과 동역하였고 아낌없이 헌신했습니다. 그들의 섬김으로 바울이 방탕한 항구도시 고린도를 개척할 수 있었고, 우상숭배가 가득한 에베소를 개척할 수 있었으며, 후에 로마에 가서 교회를 섬길 수 있었고, 스페인까지도 개척할 수 있었습니다. 훌륭한 리더 뒤에는 좋은 팔로워가 있다는 말처럼 바울의 사역 뒤에는 이들의 보이지 않는 헌신적인 동역이 있었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누구나 리더가 되고자 합니다. 그러나 좋은 리더가 되려면 먼저 좋은 팔로워가 되어야 합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은 40년간 모세의 좋은 팔로워가 되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제게는 헌신적이고 충성스러운 좋은 동역자들이 많습니다. 그중에 캐나다 이일형 형제(이요셉 선교사)와 윤숙자 자매(이한나 선교사) 부부, 그리고 루마니아 이선명 형제(이안드레 선교사)와 우영남 자매(이에스더 선교사)가 있습니다. 저는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1983년에 그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변함없이 저의 좋은 동역자가 되어 동역하고 있습니다.
말씀에 붙잡힌 바울
바울이 고린도에 있을 때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에서 내려왔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말씀에 붙잡혀서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밝히 증언했습니다.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행 18:5).
사람에게는 누구나 매임 병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어디엔가 매여 있어야 편안함을 느낍니다. 매여 있다가 풀리면 허전합니다.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합니다. 이 세상에는 완전한 자유인이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무엇인가에 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TV 드라마에 매여 사는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쇼핑에 매인 사람들, 인터넷 게임과 술에 매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커피에 매인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커피 전문점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납니다. 무엇보다 사람들은 부동산과 돈에 매여 있습니다. 화장과 피부 관리에 매인 이들도 있습니다. 피부 관리를 위해 일 년에 일억 원을 쓰는 이도 있습니다. 민낯으로 다니면 자신감이 없어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창조 이래 너나 할 것 없이 사람들이 붙들려 사는 세 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입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 2:16).
사람들은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육신의 정욕에 붙들려 삽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 가치관을 따라 안목의 정욕에 매여 삽니다. 자기 영광을 좇아 이생의 자랑에 붙잡혀 삽니다. 그런데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있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사랑에 붙잡혀 산 사람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사랑에 둘러싸여 살고, 갇혀 살고, 강권되어 산 사람입니다(고후 5:14상).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사랑이 강권하니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의 삶이었습니다.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포로는 선택권이 없습니다. 바울은 말씀에 붙들려 살았습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고전 9:16). 복음 전하는 것이 그의 존재 의미요 목적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께 붙잡힌 바 되어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갔습니다(빌 3:12). 말씀에 붙잡힌 사람의 특징은 한마디로 오직 예수님만을 증언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말씀은 곧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에 붙잡힌 사람은 누구나 예수님을 증언하게 됩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힌 사람인가, 아닌가를 알 수 있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증언하고 있는가, 안 하고 있는가를 살펴보면 됩니다. 예수님을 전하는 사람은 말씀에 붙잡힌 사람입니다. 말씀에 붙잡힌 삶은 구원과 영생에 이르는 복 받는 삶입니다. 말씀에 붙잡힌 사람은 기쁨이 충만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변하지 않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을 증언하지 않는 사람은 말씀에 붙잡히지 않은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의 썩을 것을 추구하다가 썩어질 삶을 살게 됩니다. 그의 마지막은 사망입니다(롬 6:23).
바울은 아덴에서 큰 열매를 맺지 못했지만 고린도에서는 대성공이었습니다. 그가 실패에서 성공으로 바뀔 수 있었던 것은 말씀에 붙잡혔기 때문입니다. 아덴에서는 자신의 말과 지혜로 복음을 전하였지만 고린도에서는 말씀에 붙잡혀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그때 그의 사역은 성공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둘러싸여 있고, 하나님이 말씀이 그를 둘러싸고 보호하고 있으니 누가, 또 무엇이 바울을 해할 수 있겠습니까?
유명한 종교개혁자 존 칼뱅은 말씀에 붙잡힌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임종을 맞았을 때 제자들은 될 수 있는 대로 말씀 한마디라도 더 들으려고 모여 앉았습니다. 그때 칼뱅은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Bible said so.”
“성경이 시작하는 데서 시작하고 성경이 가는 대로 가고 성경이 멎은 데서 멎었노라.”
토마스 에디슨은 한평생 발명가로 살면서 잠을 자지 못할 정도로 발명에 매여 있던 사람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하루라도 노동이라는 것을 한 적이 없다. 왜냐하면 무슨 일을 하든지 재미있어서 참을 수 없어서 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는 재미가 나서 그것에 붙잡혀서 발명했다고 합니다. 그가 성공만 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는 전등 하나를 발명하는 데 700번 실패했습니다. 그래도 그는 그것을 노동으로 생각하지 않고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습니다. 연구가 재미가 있고, 연구에 붙잡혀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701번째에 드디어 전구를 발명했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말과 지혜로 살면 실패합니다. 크리스천(christian)에게 그리스도(christ)가 빠지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I am nothing).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살면 성공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살아가는 분들은 성공합니다. 왜냐하면 말씀에 붙잡힌 사람은 하나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복음에 붙잡힌 바 되어 모든 일에 승리하기를 기도합니다.
두려워하는 바울
바울이 말씀에 붙잡혀 담대하게 복음을 증언하자 유대인들이 대적하여 복음 역사를 훼방했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그들에게 단호하게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고 이방 선교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그들이 대적하여 비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털면서 이르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다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하고”(행 18:6).
바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디도 유스도의 집으로 옮겨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회당장 그리스보와 온 가족이 믿고 수다한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았습니다(행 18:7-8).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으로 생겨납니다. 우리가 어떤 형편 가운데서든지 말씀을 전해야 할 절대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극심한 핍박이 계속되자 바울의 심중에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바울이 그들 중에 있을 때 약하고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다고 했습니다(고전 2:3). 이때 주님께서 바울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행 18:9-10).
바울은 핍박이 심해지자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았고 잠잠히 있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바울에게 어떤 형편 중에서도 두려워하지 말고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구원받을 하나님의 백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도 멸망하지 않고 다 회개하고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고전 1:21). 바울은 말씀에 순종하여 고린도에서 1년 6개월 동안 머물면서 침묵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이때 도덕적으로 타락한 고린도에 큰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바울이 두려움을 이기고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주님께서 그와 함께하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위대한 삶을 산 사람들은 모두가 하나님이 함께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와 함께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출 3:12상).
그리고 하나님은 다윗과 함께하셨습니다.
“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원수를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땅에서 위대한 자들의 이름같이 네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어 주리라”(삼하 7:9).
하나님은 이사야와 함께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사 41:10).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20).
하나님은 우리와 늘 함께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시기 때문에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아무도 우리를 해롭게 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함께한 사람들은 모두가 위대한 삶을 살았습니다.
바울의 귀환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또 박해를 받았습니다(행 18:12-17). 갈리오가 아가야의 새로운 총독으로 부임하자 유대인들이 바울을 신임 총독에게 고소했습니다. 갈리오는 그들의 고소 내용을 듣고 그들의 종교에 관한 것인 줄 알고 기각시켜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재판 자리에서 쫓아냈습니다. 그들은 회당장 소스데네를 재판 자리에서 때렸습니다. 소스데네는 동족들로부터 고난을 받았으나 믿음으로 견디어 바울의 귀한 동역자가 되었습니다(고전 1:1).
바울은 얼마 후 형제들과 작별하고 고린도를 떠났습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도 선교 동역자로 함께 떠났습니다. 바울이 겐그레아에 이르렀을 때 일찍이 서원한 바가 있어 머리를 깎았습니다(행 18:18). 그 후 바울은 에베소에 들러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를 그곳에 남겨 두고 안디옥 교회로 내려갔습니다. 그는 안디옥 교회에서 제2차 선교보고를 하고 얼마 있다가 1차 전도여행 때 개척한 교회를 두루 심방하여 제자들을 굳게 세웠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고린도와 같이 도덕적으로 타락한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에 필요한 것은 복음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시대 환경이 바뀌어 그리스도의 계절이 옵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말씀에 붙잡혀서, 잠잠하지 말고 말씀을 증언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굴라 부부가 바울을 동역한 것처럼 주님의 종들과 동역하며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