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사도행전 18:24-28, 19:1-20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에베소 선교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행 19:20).
힘은 모든 영역의 기초가 됩니다. 힘은 사고 영역과 언어 영역 등 다양한 영역과 더불어 이루어집니다. 힘이 올바르게 작용하면 다른 모든 영역에도 증폭되어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러한 현상을 공명현상이라고 합니다. 힘은 물리적인 힘과 경제적인 힘, 그리고 영향력의 힘이 있습니다. 영향력의 힘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영적인 힘인 영력이 있습니다. 영력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힘입니다. 이 힘은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킵니다. 힘은 대결에서 나타납니다. 힘이 있으면 힘이 아닌 것은 물러갑니다. 주후 2010년의 제스민의 힘은 중동의 민주화를 불러일으켰습니다. 힘 앞에는 타협이 있을 수 없고, 머리가 둘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나는 반드시 사라집니다.
말씀은 힘이 있습니다. 말씀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능력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고전 1:18). 말씀은 능력이기 때문에 심령에 부딪히면 거듭나 새 사람이 됩니다. 말씀은 능력이기 때문에 말씀을 받아들이면 죄 사함을 받습니다. 죽음을 이깁니다. 가치관이 변합니다. 슬픔이 변해 소망이 생깁니다.
본문은 바울의 에베소 개척사입니다. 말씀에 힘이 있어 세력을 얻어, 두 해 만에 에베소가 뒤집어졌습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말씀의 능력을 배울 수 있습니다.
유능한 성경 선생 아볼로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한 자라”(행 18:24).
당시 알렉산드리아는 로마와 에베소와 더불어 3대 도시 중 하나였습니다. 이곳에 유대인이 100만 명이 살았고, 5, 60만 권의 장서가 있는 유명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있었습니다. 이곳은 주요한 세 가지 요소가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히브리 종교와 헬라 철학, 그리고 로마 정치가 공존했습니다. 그래서 이곳에 히브리어 구약성경을 70명이 헬라어로 번역한, 유명한 70인 역 성경이 있습니다.
이곳에 아볼로가 있었는데 그는 언변이 좋고 구약성경에 능통했습니다. 그는 일찍부터 주의 도를 배워 열심히 예수님에 관한 것을 가르쳤습니다. 그는 구약성경을 통해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그는 세례 요한이 왔고 그 다음에 예수님이 오셨다는 사실까지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없었습니다. 중생의 경험이 없었습니다. 서양에 속담 중에 “학문이 없는 경험이 경험 없는 학문보다 낫다. 경험이 최고의 스승이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볼로는 성경 지식이 많고 박식해서 예수님에 관한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거듭남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에베소에서 담대히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그의 가르치는 것을 듣고 그가 구약성경에 관해서는 해박한데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잘 알지 못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볼로에게 하나님의 도, 복음을 풀어주었습니다. 아볼로는 학문이 깊은 성경학자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평신도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게 배울 정도로 겸손했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로 인해 아볼로는 영적인 눈이 뜨여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습니다.
그는 영의 눈이 뜨여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 유능한 성경 선생이 되어 많은 이들에게 많은 유익을 끼쳤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공중 앞에서 증언하니 유대인 중 그 누구도 그의 증언을 반박할 수 없었습니다(행 18:28).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쓰여 있기 때문에 영의 눈이 뜨여야 성경의 깊은 비밀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엡 1:17).
요한의 세례와 성령세례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 바울이 에베소에 도착했습니다. 바울은 성도들의 신앙생활이 좀 이상해서 물어보았습니다.
“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행 19:2상).
그들은 성령의 존재에 대해 들어보지도 못했다고 대답했습니다. 이는 아볼로가 성령의 역사에 대해 알지 못하던 때에 그로부터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요한의 세례만 받았다고 대답했습니다. 당시 수리아와 아시아 지방에는 세례 요한파가 있어 예수님을 가르쳤지만 요한을 더 숭상했습니다. 그들은 금욕적이었습니다. 에베소도 이러한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관한 것만 들었지 예수님이 구주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생활은 금욕적이고 도덕적이었기 때문에 신앙생활의 기쁨이 없었습니다.
오늘날도 이런 이들이 많습니다. 이들은 신앙생활을 도덕을 잘 지키는 종교 정도로 생각합니다. 남에게 해를 안 끼치고 도덕적으로 선하게 살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도덕적인 죄만 죄로 여기고 영적인 죄를 죄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죄 사함의 은혜를 알지 못해 자기 의가 강합니다. 그러다보니 얼굴이 굳어져 있습니다.
바울은 이들에게 요한의 세례의 참 뜻과 성령세례에 대해 증언했습니다. 요한의 세례는 회개의 세례입니다. 이는 예수님을 영접하기 위한 준비 단계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전파한 후 자기 뒤에 오시는 예수님을 믿으라고 전했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것은 성령세례입니다. 성령세례는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이에게 주어집니다. 바울은 그들의 신앙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지 않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습니다(행 19:5). 그리고 그들에게 안수하니 성령이 임했습니다. 이로 인해 그들은 방언과 예언을 했습니다. 그들이 열두 사람쯤 되었습니다(행 19:7).
여기에서 말하는 방언 또한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방언이 아닙니다. 이 방언(tongue)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입니다. 그들이 성령세례를 받자 바울의 메시지가 이해가 되고 들렸습니다. 바울의 메시지가 들리고 이해가 되니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언도 했습니다. 예언(prophesied)은 간증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나의 구주’임을 간증했습니다. 이제 그들은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도덕이 아니라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성령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육에 속합니다. 아무리 훌륭해도 육은 육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요 3:3, 5).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롬 8:5).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생각하고, ‘성령을 따르는 자’는 성령의 일을 생각합니다. 육의 사람은 자기애가 강하고 자기중심적입니다. 그러나 성령을 따르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삽니다. 성령께서 원하시는 생각을 합니다. 성령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합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어떻게 하면 은혜롭게 살 수 있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어떻게 하면 이웃을 사랑할 수 있을까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성령 받은 이들은 이를 실천하기 위해 기도하게 됩니다.
물론 이들도 육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육신의 일을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육신의 소원보다 영적 소원이 더 강합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뜻대로 삽니다. 말씀과 기도로 힘과 지혜를 얻습니다. 이로 인해 거룩한 삶을 살게 됩니다. 생명과 평안을 얻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갈 5:22-23). 우리가 말씀을 듣고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성령이 내 안에 내주합니다. 성령이 내주하면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게 되고 예수님을 사랑하며 형제를 사랑하게 됩니다(고전 12:3).
두란노 서원의 역사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행 19:8).
바울은 늘 하는 방식대로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강론하며 권면했습니다. ‘강론’(spoke boldly)은 많은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공개강의를 말합니다. 그리고 ‘권면’(arguing persuasively)은 설득시키려고 다투며 증언했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회당에 사람들을 모아놓고 석 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강론하고 권했습니다. 바울은 폭발적으로 복음 역사가 일어날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바울이 전한 말씀을 듣고 오히려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대리석과 같이 딱딱하고, 버터 먹은 강아지처럼 빤질빤질했습니다. 그중에 어떤 이들은 무리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바울이 전하는 도를 비방했습니다. 바울은 더 이상 그들과 싸우지 않고 회당 중심에서 두란노 서원 중심으로 전환했습니다. 두란노 서원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제자 양성
바울은 말씀을 듣고 불순종하고 반발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사역했습니다. 그는 그들을 열심을 다해 도왔습니다. 그렇게 하면 할수록 그들은 더욱더 반발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회개시키고자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말씀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사람들을 잘 돌보지 못했습니다. 이때 바울은 지치기만 했지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이제 바울은 불순종하고 반발하는 사람들에게서 떠나 말씀을 배우고자 하는 제자 몇 사람을 따로 세워 그들에게 날마다 강론했습니다. 다시 말해 바울은 사역의 방향을 무리 중심에서 제자 중심으로 바꾸었습니다.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니라”(행 19:9하).
제자란 사전적 의미로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거나, 받은 사람을 일컫습니다. 제자는 스승과 함께 길을 걷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사제동행’이란 말이 있습니다. 제자란 영어로 ‘disciple’인데, 훈련이라는 뜻을 가진 ‘discipline’에서 나왔습니다. 가르침을 받고자 하지 않는 사람은 배울 마음이 없기 때문에 교만합니다. 그런 사람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마치 젖은 장작을 부싯돌로 태우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 사람은 겸손합니다. 이런 사람은 불이 붙은 마른 장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이 붙은 마른 장작은 주변의 젖은 장작까지도 태웁니다.
바울의 사역의 원리는 다른 말로 표현하면 ‘선택과 집중’입니다. 선택과 집중은 연구 관리(project management)를 할 때 많은 프로젝트 중에서 몇 가지 가능성이 있는 프로젝트를 선택하여 그 선택된 프로젝트에 모든 예산과 인력을 집중적으로 투자하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의 선택과 집중은 성경에서 나온 원리입니다.
하나님은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아브라함 한 사람을 선택하여 그가 믿음의 조상이 되기까지 25년간 집중적으로 시간을 투자하셨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이 열국의 아비가 되었습니다. 예수님도 많은 무리들 가운데서 12명의 제자들을 선택하시고 그들을 사도로 키우시기 위해 3년 반 동안의 공생애를 집중적으로 투자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12명의 예수님의 제자들이 변화되어 사도들이 되었고, 세계 복음화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날마다 강론
두란노서원은 본래 헬라 철학자들이 모여서 수사학과 철학 등을 가르치던 곳입니다. 바울은 이 서원을 낮잠 자는 시간(siesta, 11시-4시)에 세를 내어 성경을 강론했습니다. 지금까지 바울은 회당을 중심으로 사역을 했습니다. 이제 바울은 회당에서 두란노 서원으로 옮겨 제자들과 함께 2년 동안 날마다 강론(discussion)했습니다. 바울이 전한 말씀의 주제는 이러했을 것입니다. 말씀이 곧 하나님입니다(요 1:1). 말씀은 곧 예수님입니다(요 1:14).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빛입니다(요 14:6, 9:5). 예수님은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를 사하시는 권세가 있습니다(막 2:5).
그는 눈이 오든 비가 오든, 국경일이든 명절이든 하루도 빠지지 않고 날마다 말씀을 가지고 각 사람을 각기 도왔습니다. 그는 매일 온 힘을 기울여 그들을 도왔습니다. 그는 3년 동안 눈물과 겸손과 인내로 각 사람을 가르치고 훈계했습니다(행 20:31). 그는 지식 전달이 아니라 인격과 인격이 부딪히는 일대일로 그들을 도왔습니다. 이 사역은 당장에 눈에 띄지 않았지만 2년 후에 에베소를 집어삼켰습니다. 바울의 두란노 사역으로 아시아에 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들었습니다(행 19:10). 이곳을 통해 골로새와 라오디게아 교회 등 아시아의 일곱 교회가 개척되었습니다(계 1:11).
제가 초기에 많은 대학생을 초청하여 성경강좌(Bible Academy)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남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수고에 비해 열매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경 공부에 소원이 있는 몇 사람을 중심으로 일대일로 성경을 공부하며 제자들을 세워나갔습니다. 이때 조선공학과 김태근 형제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을 영접한 후 변화되었습니다.
말씀은 생명이 있어 운명과 열등감에 눌려있던 형제자매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후배들에게 일대일로 말씀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해마다 봄 학기가 되면 신입생들이 몰려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매일 아침에는 캠퍼스에서 Q.T. 를 하며 캠퍼스와 나라와 세계선교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이 때 황무지에 장미꽃이 피어나듯이 젊은이들이 살아나고 비전을 갖고 세계 곳곳으로 나아가서 역사의 주역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지금은 선교사로, 혹은 캠퍼스 사역자로, 혹은 지역교회를 섬기는 목사들로 열심히 사역하고 있습니다.
“작은 불꽃 하나가 큰 불을 일으키어 곧 주위 사람들 그 불에 몸 녹이듯이 주님의 사랑 이같이 한번 경험하면 그의 사랑 모두에게 전하고 싶으리”(복음성가).
하나님은 바울에게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셔서 바울의 앞치마나 손수건을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나가고 악귀도 물러갔습니다(행 19:11-12). 이를 본 스게와 제사장의 일곱 아들이 이를 따라 행하다가 마귀에게 큰 봉변을 당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에베소에 있는 유대인이나 헬라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주 예수 이름을 높였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죄를 자복하고 마술을 행하던 사람들이 마술책을 가지고 와서 모두 불태웠습니다. 불태운 책의 값을 계산하니 은 오만(약 15억 원)이나 되었습니다(행 19:19). 저자 누가는 에베소 역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를 달았습니다.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행 19:20).
에베소는 마술과 마귀가 지배했습니다. 마술이 사람들의 영혼과 사상과 생각을 지배했습니다. 마술이 문화를 형성했습니다. 그러나 말씀이 전파되었을 때 말씀이 힘이 있고 흥왕하여 이를 모두 파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2-13).
하나님의 말씀 앞에는 모든 것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어 좋지 못한 사상과 이즘의 세력을 파합니다. 말씀은 마귀의 세력도 파합니다. 말씀은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킵니다. 말씀은 생명의 말씀입니다(빌 2:16). 말씀은 죽은 자를 살립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말씀은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냅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제자 양성과 말씀을 강론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이때 우상의 도시 에베소가 뒤집어졌습니다. 이로 인해 주위 도시까지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말씀은 힘과 능력이 있습니다. 말씀은 보이지 않게 조용히 우리의 내면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말씀은 치료하는 광선이 되어 패이고 굽어진 마음을 치료해줍니다. 말씀은 절망과 좌절을 희망으로 바꿉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