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사도행전 21:1-26
바울의 일사각오(一死覺悟)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행 21:13).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살고 죽는 문제일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사람이 죽기를 각오할 가치 있는 일이 있다면, 그것을 위해 자신의 삶을 던질 것입니다. 일본 제국시대에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순교한 주기철 목사는 시시각각 다가오는 신변의 위험을 직감하고 산정현교회에서 ‘일사각오’라는 제목으로 설교했습니다. 그의 각오는 신앙의 순결과 정절을 지키겠다는 순수 신앙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주 목사는 일경의 참혹한 고문에도 끝까지 믿음의 순결을 지켰고, 순교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교회사를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구주로 믿고 자신의 생명을 바쳐서 믿음을 지킨 많은 성도들이 있습니다. 멀리는 초대교회 시대와 로마제국 시대, 그리고 가까이로는 우리나라의 일본 제국시대와 북한 공산치하에서입니다. 한 인간이 자신이 믿는 신앙과 신념을 표현하는 가장 강력하고도 분명한 태도는 죽음을 각오한 일사각오의 자세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일사각오로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죽음도 불사하는 바울의 일사각오, 순교신앙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바울은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에게 고별 메시지를 전하고 배를 타고 고스로 갔습니다(행 21:1-6). 고스에서 로도, 로도에서 바다라로 갔습니다. 그리고 바다라에서 두로에 상륙했습니다. 두로는 예수님이 수로보니게 여인의 어린 딸을 고쳐주신 유명한 곳입니다(막 7:24-30). 바울은 두로에서 상륙하여 이레를 머물렀습니다. 바울이 두로에 머문다는 소식을 들고 제자들이 찾아왔습니다. 이를 볼 때 예수님을 믿는 제자들이 사방에 흩어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만나자 말씀을 전했습니다. 바울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만나는 사람마다 기회가 닿는 대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두로에서 제자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 것을 간청했습니다. 바울이 두로에서 여러 날 머물고 떠날 때 그들은 처자와 함께 바닷가에까지 나와 전송했습니다. 바울은 그들과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바울의 기도의 특징은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입니다(행 20:36, 21:5). 무릎을 꿇고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복종의 자세입니다.
바울은 두로에서 가이사랴에 도착하여 일곱 집사 중의 한 사람인 빌립의 집에 거했습니다(행 21:7-12). 바울이 가이사랴에 거하는 동안 아가보라는 선지자가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성령께서 예루살렘에 가면 유대인들이 이 띠의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기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그곳 제자들과 바울 일행은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도록 울면서 호소했습니다(행 21:12-13). 성령은 이미 바울에게 예루살렘에서 환난과 박해, 그리고 각 성에서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음을 예고했습니다(행 20:22-23).
그러나 성령은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요 성령의 방향입니다. 반면에 제자들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그들의 소원이자 생각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신앙 고백을 들으신 후에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막 8:31).
이 말을 들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돌이켜 제자들을 보시며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며 꾸짖으셨습니다(막 8:33). 예수님이 고난 받고 죽임 당하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심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을 붙들고 죽으시면 안 된다는 베드로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이고 뜻입니다. 사탄은 베드로를 통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지 못하게 미혹했습니다. 십자가 없는 영광은 사탄의 유혹 방법입니다. 십자가가 없는 신앙은 모두 가짜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쉽고 편한 길을 제시하고 인도하는 것은 사탄의 속삭임이요, 이단의 미혹 방법입니다.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행 21:13).
사람들은 울며 바울에게 가지 말 것을 만류했습니다. 바울은 그들로 인해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감상주의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 결박당할 뿐만 아니라 죽을 것을 각오하고 예루살렘에 가기로 굳게 결심했습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바울의 이 장렬한 모습에서 예수님 생각이 납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실 기약이 다 되어가자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기를 결심하셨습니다(눅 9:51).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신다는 것은 쉬운 발걸음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에서는 제자들로부터 버림받을 일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조롱과 멸시, 침 뱉음과 천대, 배척과 채찍질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주와 수치의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다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가시기로 결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뜻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자 굳게 결심하셨습니다.
바울은 분명한 사명과 목적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를 위해 달려갔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2-14).
‘달려간다’(press on)는 단어는 강력하게 전진한다는 뜻입니다. 오랫동안 굶주렸던 사냥개가 먹이를 발견하였을 때 모든 에너지를 집중하여 먹이를 향해 질주하는 그런 단어입니다. 바울은 목표를 향하여 무섭게 질주했습니다.
사람이 실패하는 것은 생명을 바칠 가치와 목적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목적을 향해 죽을 각오로 전심전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호랑이도 토끼를 잡을 때 전력 질주합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할 때 반신반의하면 성취할 수 없습니다. 목적과 가치관을 정했으면 이를 위해 시간과 물질과 생명과 자신을 투자해야 합니다. 죽을 각오로 해야 합니다. 특히 신앙생활은 더욱더 그러합니다. 신앙생활은 끌려 다녀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 기도하고 방향을 잡았으면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 죽을 각오로 전심전력해야 합니다. 우리가 캠퍼스 선교를 위해 부름을 받았다면 이를 위해 시간과 물질은 말할 것도 없고 생명을 드릴 각오로 따라야 합니다.
CMI 국제대표인 김요한 목사가 50년간 캠퍼스 사역을 위해 전심전력하다가 2012년 8월 29일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소천하셨습니다. 말이 50년이지 50년간 한 길을 간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대학생 복음 사역은 가치 있는 사역이지만 배고픈 사역이고, 또 누가 알아주지 않는 사역입니다. 그래서 2, 30대에는 대학생 사역을 하다가 4, 50대가 되면 지역 교회 사역으로 전환합니다. 왜냐하면, 이상과 현실이 일치가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김 목사는 한결같이 캠퍼스 사역을 위해 50년간 달려가셨습니다. 그리고 투병하시면서 한국에서 유일하게 대학생운동의 저서인“21세기 희망 대학생선교운동”을 남겼습니다.
싸울 때 가장 무서운 사람은 칼도 아니고 총도 아닙니다. 죽을 각오로 달려드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생명을 걸고 싸울 때 가장 무섭습니다. 죽어도 상관없다며 달려들면 그 누구도 이길 수 없습니다. *‘뿌리 깊은 나무’라는 드라마가 인기 중에 방영된 적이 있습니다. 세종이 한글을 만들 때 기득권 세력과 중화사상에 물든 관리들로부터 많은 도전을 받았습니다. 그들에게 글자를 만든다는 것은 오랑캐가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종은 목숨을 걸고 도전했습니다. 세종이 목숨 걸고 도전하여 한글이 창시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이 뜻을 위해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헛된 죽음이 됩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세 번씩이나 고민하시고 기도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 두려워서 피하고자 기도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를 물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신 후 빌라도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골고다 언덕에 올라가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확신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가 하나님이 주신 뜻임을 확신했을 때 기쁨으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바울 또한 예루살렘에 가서 핍박을 받고 결박당하고 이방인의 손에 넘겨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믿었습니다. 이를 통해 땅끝 선교인 로마와 서바나까지 복음이 전해지고 사도행전 1장 8절이 이루어질 것을 확신했습니다.
바울이 자기 생명보다도 주님께 받은 사명, 곧 복음 증언하는 일을 더 귀하게 여겼던 것은 하나님의 인자하심 때문이었습니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시 63:3).
바울은 하나님이 피로 사신 교회를 핍박하고 주님을 믿는 이들을 잡아 죽이는 죄인의 괴수였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구원받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무한한 인자하심(love)을 경험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에 감사하여 주님께서 주신 사명, 복음 전하는 일을 마침에 있어서 자기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자기 생명보다 주 예수님께 받은 사명을 더 중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한 번밖에 없는 목숨을 주님을 위해 드리고자 예루살렘으로 가고자 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권했던 이들도 바울의 뜻을 받아들여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했습니다. 바울은 여러 날 후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결례를 행하는 바울
바울 일행이 예루살렘에 도착하자 형제들이 기쁨으로 맞이했습니다. 그 이튿날 야고보에게 가니 장로들도 모여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이방인들에게 이루신 역사를 낱낱이 보고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들이 회개하고 믿게 된 사실 뿐만 아니라 이방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를 생각하여 보내준 구제헌금으로 인해 더욱 감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바울에게는 유대 신자들로부터 오해받고 있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에는 유대인 중에 믿는 사람이 수천 여명이 있었는데 이들은 다 율법에 열심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면서 복음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직 복음의 진수를 깨닫지 못한 어린 신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이방의 유대인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고 율법도 지킬 필요가 없다고 가르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거짓이었습니다. 바울은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얻는 복음을 가르쳤지, 율법이 필요 없다고 가르치지 않았습니다(행 13:39).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율법 무용론자들에게 율법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에 선하며, 결코 폐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야고보는 그들이 오해를 풀도록 서원한 사람들과 함께 율법을 좇아 결례를 행하도록 권면했습니다. 결례란 부정한 것을 정결하게 하는 예식으로 보통 30일간 했으나 특별한 경우에는 7일 동안 하면 됐습니다. 그 시작과 끝에 머리를 깎고 그 기간에는 금욕적인 생활을 하며, 기간이 차면 제물을 바쳤습니다. 바울은 율법주의자가 아니었지만 복음을 위해 율법 아래 있는 유대인들을 얻기 위해 이를 기꺼이 순종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자유인이었습니다. 그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는 어느 것도 다 양보했습니다(고전 9:22-23). 그러나 복음의 진리만큼은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8-9).
바울은 목숨을 바칠 분명한 사명과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 사명은 주님께서 주신 복음 전파의 사명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사명을 위해 생명을 조금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는 어느 것도 다 양보할 수 있었지만 복음의 진리만큼은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또한 주님이 주신 사명을 따라 생명을 조금도 아끼지 않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환난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 이 신앙 생각할 때에 기쁨이 충만하도다 성도의 신앙 따라서 죽도록 충성하겠네”(새찬송가 336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