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사도행전 21:27-40, 22:1-29
유대인들 앞에서 증언하는 바울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행 22:21).
대원군이 집정하여 쇄국정책을 펴고 있을 때, 토마스 선교사는 성경을 가지고 대동강으로 제너럴셔먼호를 타고 평양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조선의 반대로 상륙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배는 대동강에서 불타버리고 말았습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성경 몇 권을 가슴에 품고 병졸 박춘권에 의해 대동강의 모래사장에서 순교의 피를 흘렸습니다. 그는 죽기 직전에, 박춘권에게 예수를 믿으라면서 성경책을 마지막으로 건네주었습니다. 나중에 박춘권은 토마스 선교사가 준 성경을 통해 예수를 믿게 되었고, 후에는 안주교회의 영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토마스가 전한 성경을 뜯어 벽지로 썼던 영문주사 박영식의 집은 평양 최초의 교회 널다리 골 예배당이 되었습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의 씨를 뿌리면 언젠가 싹이 트고 자라 꽃이 피고 결실을 맺게 됩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붙잡혀 두 쇠사슬로 결박되었습니다. 바울은 생사의 갈림길에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런 중에도 유대인들에게 바울이 경험한 예수님과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바 사명에 대해 말했습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전도의 법과 어떤 형편 중에도 복음을 전해야 됨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붙잡힌 바울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었습니다. 그것도 성전에서 체포되어 성전 밖으로 쫓겨났습니다(행 21:30). 이것은 바울의 마지막 성전 출입이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야고보는 바울이 잡히지 않게 하려고 사방팔방으로 힘썼지만,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바울은 결국 예상했던 대로 체포되었습니다. 바울은 체포될 이유가 없었습니다. 바울은 죽임당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습니다. 표면적인 이유는 바울이 성전을 더럽혔다는 것입니다(행 21:27-29). 그래서 바울이 결례의식을 다 끝낼 무렵에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자 달려들어 체포한 것입니다.
소아시아에 온 유대인들이란 에베소를 중심한 여러 지방에서 온 유대인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에베소를 비롯한 여러 지방의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까지 와서 바울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바울이 이방인 헬라 사람을 성전에 데리고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라 죽이기 위해 많은 돈을 들여서 에베소에서 예루살렘까지 왔습니다. 그들은 데살로니가에서 베뢰아까지 와서 바울을 핍박했습니다(행 17장). 데살로니가에서 베뢰아까지의 거리는 약 40km 정도이니까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에베소에서 예루살렘까지의 거리는 아주 먼 거리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먼 거리도 마다하지 않고 와서 백성들을 충동질해서 바울을 죽이고자 했습니다(행 21:30).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감추고 여론을 호도하고 군중심리를 자극하여 바울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독재자들이 즐겨 쓰는 수법입니다.
그들이 군중심리를 이용해서 바울을 죽이려고 한다는 소식이 천부장에게 들렸습니다. 천부장은 그냥 내버려두면 바울이 스데반과 같이 돌에 맞아 죽을 것을 알고, 백부장을 데리고 가서 바울을 쇠사슬로 결박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군중들에게 바울이 누구며 그의 죄명이 무엇인지 심문했습니다(행 21:31-33). 군중들은 각기 말이 달랐습니다. 천부장은 소동으로 그 진상을 알 수 없게 되자 영내로 데리고 가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바울을 따라오면서 바울을 없애야 한다며 외쳤습니다.
바울은 로마 군병이나 로마인들로부터 핍박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로부터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바울을 그토록 핍박하는 것은 외형적으로 성전을 더럽혔다는 것이지만 내면은 시기와 질투심 때문이었습니다. 사람이 시기와 질투심이 생기면 저가 죽어야 내가 산다는 상극원리가 작용해서 남이 잘되는 것을 눈 뜨고 봐줄 수 없습니다. 흥부와 놀부의 판소리를 보면 놀부가 동생 흥부가 잘되는 것을 눈 뜨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놀부는 흥부의 박에 말뚝을 박았습니다. 사람들은 남을 낮춰야 자기가 높아지는 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원리는 남이 잘되어야 나도 잘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섬김이 성경의 최고의 덕목입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을 죽여야 자기들의 의가 드러난다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이 가르치는 복음이 없어져야 자기들이 믿는 유대교가 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이 없어져야 히브리 종교의 우월성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시기심은 미움을 가져다주고 미움은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사울은 일평생 다윗을 죽이려고 쫓아다녔습니다. 그 이유는 시기심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이 자신보다 백성에게 명성을 얻고 특히 여인들에게서 인기를 얻자 배가 아파 견딜 수 없었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시기하여 죽이려고 쫓아다니다가 결국 뼈가 썩는 고통을 겪고 비참한 최후를 마쳤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도 종교 지도자들의 시기심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계시는 한 그들의 불의가 계속 드러나기 때문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우리는 시기심에 사로잡혀서 상대를 죽여야 내가 산다는 상극의 원리를 버리고 더불어 사는 상생의 원리를 몸에 익혀야 합니다. 내가 이겨야 산다는 정글의 법칙에서, 남을 위해 복을 비는 성경의 원리, 주님이 가르쳐 주신 법칙을 마음에 새겨 행해야 합니다.
유대 백성들 앞에서 증언하는 바울
나는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히 있는 자라
바울은 성전에서 유대인들의 시기와 질투로 천부장에 의해 쇠사슬에 묶여 영내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층계로 올라갔습니다. 바울은 천부장의 보호 아래 성난 유대 군중들에게 바울이 경험한 주님의 은혜를 전했습니다. 바울은 쇠사슬로 결박된 채 손으로 백성들을 조용하게 하고 그들에게 친숙한 히브리 언어인 아람어로 간증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이 자기를 죽이려는 사람 앞에 서게 되면 위축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성난 군중 앞에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는 어떤 환경에 처한다 할지라도 위축되지 않고 말씀을 전하는 불사조와 같은 믿음의 장군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한 몸 살려고 하지 않고 군중들에게 말씀을 선포하여 그들을 구원하고자 했습니다. 그의 얼굴은 천사와 같이 온유하고 밝고 빛났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설명했습니다. 그는 추상적으로 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실에 기초해서 전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행 22:3).
바울은 “나는 너희와 다를 바가 하나도 없다. 나는 당신들과 똑같은 히브리인이다. 나는 너희와 생각도 같고, 경험도 같고, 사상도 같고, 의식도 같고, 마음도 같다. 나는 너희와 똑같이 네 살 때부터 집에서 율법의 가르침을 받았고, 여섯 살 때부터는 회당에서 가르침을 받았고, 율법이 나의 의식은 물론 무의식 세계까지도 지배한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길리기아 다소 출신으로 헬라계 유대인이었습니다. 그 당시 다소는 학문이 발달한 도시였습니다. 그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었습니다(빌 3:5-6). 그는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바리새파 중에 정통파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는 모세 이후의 최대 선생이라고 일컬음을 받는 힐렐이라는 스승의 손자인 가말리엘의 제자였으며 골수 유대교 신봉자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믿는 남녀를 무론하고 결박하여 옥에 넘겼던 사람이었습니다(행 22:4).
이처럼 바울은 나는 너희와 다르지 않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나는 너희와 똑같다고 했습니다. 나는 너희와 같은 민족이요, 같은 히브리 언어권이요, 같은 헤브라이즘의 문화권이요, 전통도 같고, 조상도 같으며, 너희와 다른 바가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바울을 통해 전도하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전도의 첫 단계는 동질감으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나는 너와 다르다는 이질감이 있으면 전도가 되지 않습니다. 어렵고 힘들고 지친 사람에게 “젊은이가 그게 뭐야” 하면 안 됩니다. “그래, 오죽하면 젊은 네가 그러겠어. 나도 네 마음 이해해.” 이렇게 해야 소통이 되고, 소통이 돼야 대화가 되고, 대화가 되어야 전도가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이해입니다. 김난도 교수의 “아프니까 청춘이다”는 책이 베스트 셀라가 된 것은 제목 자체부터가 청춘을 이해하는 입장에서 접근했기 때문입니다.
전도의 두 번째 단계는 다름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너희와 다를 바가 하나도 없지만 단 한 가지 다른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건을 길게 이야기합니다. 전도란 바로 같음에서 다름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큰 빛이 나를 비치매
“가는 중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부터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치매”(행 22:6).
바울이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 오정쯤 되어 하늘에서 큰 빛이 바울을 둘러 비췄습니다. 바울은 오정쯤, 밝은 대낮에 놀라운 사건을 만났습니다. 바울에게 일어난 놀라운 사건은 그가 명상하거나 기도하던 중에 일어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꿈을 꾼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죽이려고 가던 중이었습니다. 밝은 대낮에 환한 빛이 순간적으로 바울을 비췄습니다. 바울은 몽롱한 중에 사건을 체험한 것이 아님을 상기시켰습니다. 그때 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행 22:7).
이에 바울이 “주님 누구시니이까”(행 22:8상) 하고 물었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고 자신을 소개하셨습니다.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행 22:8하).
사울은 예수님을 박해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인 스데반을 죽이는 데 앞장섰지 예수님을 박해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는 이들을 박해했지만 예수님을 박해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으러 가지 예수님을 잡으러 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네가 나를 박해한다고 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사울은 자기가 누구이며, 자기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사울은 지금까지 예수님을 박해했고, 예수님께 대항했고, 지금 다메섹으로 가는 것 또한 예수님을 박해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교회를 박해하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을 박해하는 것이요, 교회의 사역을 훼방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박해하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우리 또한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를 힘들게 하고 믿는 이들을 박해하는 것은 예수님을 박해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마 10:40).
예수님은 성도들의 고난에 동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핍박 받고 있는 성도들을 예수님 자신이 핍박을 받는 것으로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고난 받는 성도들의 고난에 동참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도들이 받는 고통보다 더 고통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교회를 지극히 사랑하고 돌보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이십니다(엡 5:23). 사울은 주님께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행 22:10상). 이때 주님은 사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네가 해야 할 모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하시거늘”(행 22:10하).
바울은 혼자 스스로 다메섹에 갈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비췬 빛이 너무나 강렬하여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사람이 캄캄한 곳에 있다가 갑자기 환한 빛을 만나게 되면 사물을 제대로 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함께 가던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에 갔습니다(행 22:11).
예수님은 바울에게 빛으로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이 바울에게 빛으로 찾아오신 것은 어둠이 그를 지배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에게 빛으로 찾아오신 예수님은 부활과 생명의 빛, 영광의 빛이었습니다. 빛은 죽음의 권세를 물리치는 부활의 빛이었습니다. 부활의 빛, 생명의 빛, 영광의 빛이 사울에게 임하자 그를 지배하던 어둠이 순식간에 물러갔습니다. 죽어가던 그의 영혼이 소생했습니다. 감겼던 그의 영적인 눈이 뜨였습니다. 부활과 영광과 생명의 빛이신 예수님은 인간 사울을 바울로 다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빛이 어둠을 이겼습니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유대인들로부터 칭찬을 듣는 경건한 아나니아를 만났습니다. 그는 바울을 섬세하게 도왔습니다.
“그가 또 이르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그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행 22:14).
아나니아는 바울에게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비밀, 하나님의 계시를 알게 해주었습니다. 이 비밀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복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의인’을 보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의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행 3:13-14). 세상 사람들의 눈에 비친 예수님은 저주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중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실 때 예수님은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셨습니다.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의가 계시되어 있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통해서만 의롭게 됩니다.
하나님은 친히 바울에게 음성을 들려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직접 하나님의 음성, 직통 계시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계시를 모두 다 드러내셨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나님께서 바울을 택하신 목적은 그가 만난 예수님을 증언하게 하려는 것입니다(행 22:15). 그가 예수님을 증언할 구체적인 대상은 이방인이었습니다.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행 22:21).
하나님은 바울을 이방인에게로 보내기 위해 택하셨습니다. 그는 이방인의 사도로 적합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을 두루 섭렵한 석학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사명을 감당하다가, 지금 동족의 손에 체포되어 천부장에게 넘겨졌습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의 간증 메시지를 듣다가 흥분하여 저런 방자한 놈을 죽여야 한다며 소동을 벌였습니다(행 22:22-29). 천부장은 여론의 압력에 견디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백부장에게 바울을 영내로 끌고 들어가 채찍질을 가하며 심문하라고 했습니다. 이때 바울은 자신이 로마 시민인 것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죄도 정하지 않고 로마 시민을 채찍질할 수 있느냐고 했습니다. 그러자 천부장은 바울의 죄도 묻지 않고 결박한 것으로 인해 두려워 떨었습니다.
예수님은 바울에게 빛으로 찾아오셨습니다. 바울에게 빛으로 찾아오신 예수님은 부활과 생명의 빛이십니다. 생명과 부활의 빛이신 주님이 바울을 택하셨습니다(Paul has no choice. God chose Paul in Christ). 바울은 주의 택하심을 받은 후 그의 인생의 목적과 방향이 달라졌습니다. 바울은 생사의 갈림길에서도 그가 만난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우리 또한 어떤 상황 중에도 죄에서 구원하신 예수님을 증거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를 위해 우리를 주권적으로 택하셨습니다.
“어둠의 권세에서 인생을 건지신 주 길 잃고 헤매이던 우리의 빛이시라 영원한 그 나라의 참 모습 보이시고 그 얼굴 밝은 광채 우리 길 비추인다”(새찬송가 398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