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사도행전 25:1-27
가이사께 상소하노라
“만일 내가 불의를 행하여 무슨 죽을 죄를 지었으면 죽기를 사양하지 아니할 것이나 만일 이 사람들이 나를 고발하는 것이 다 사실이 아니면 아무도 나를 그들에게 내줄 수 없나이다 내가 가이사께 상소하노라 한대”(행 25:11).
바울이 아나니아에게 고발당해서 재판정에 선 지 2년이 지났습니다. 바울을 재판하던 벨릭스는 로마 가이사에게 소환 명령을 받아 그 후임총독으로 베스도가 왔습니다. 벨릭스 총독은 바울이 아무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벨릭스는 바울을 석방하지 않았습니다. 바울로부터 돈을 뜯어내고자 했지만 바울이 돈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아무 죄 없이 2년 동안 옥에 갇혀 있어야 했습니다.
벨릭스 후임으로 온 총독이 베스도였습니다. 베스도 총독은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정직하고 의롭고 곧은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 그가 총독에 부임한지 2년 만에 건강이 좋지 않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총독으로 부임하자마자 곧 맡게 된 첫 업무는 대제사장과 원로들이 고소한 바울을 재판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법정에서 로마 가이사에게 상소했습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죄수의 몸으로라도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바울의 투철한 선교정신을 배울 수 있습니다.
베스도 앞에 선 바울
내가 죄를 범하지 않았다
본문은 베스도가 부임한 지 3일 후 예루살렘을 방문한 사건으로 시작합니다. 그는 막강한 로마 군사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 지도자들을 가이사랴까지 오라고 하여 그들을 접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친히 예루살렘을 찾아갔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으로 간다는 것은 안전에 문제가 생길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총독에 대한 적대 감정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 언제 어떻게 그를 암살할지 모릅니다. 그런데도 그는 직접 예루살렘의 공의회인 산헤드린을 찾아 원로들을 만났습니다.
베스도를 만난 대제사장과 원로들이 베스도에게 다시 바울을 고소했습니다. 대제사장과 원로들은 그를 만나자마자 첫 번째 안건으로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도록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지금 유대와 로마와의 관계는 벨릭스로 인해 관계가 악화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베스도는 그들의 소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도록 하려는 이유는, 길에 매복하였다가 바울을 죽이고자 함이었습니다(행 25:3).
대제사장이 바울을 죽이고자 했던 것이 2년 전 일입니다. 이제 그들은 바울을 잊어버릴 만도 합니다. 그런데 아직도 한을 품고 바울을 죽이고자 했습니다. 더 나아가 그들은 베스도의 호의를 악하게 이용했습니다. 크리스천의 윤리의 핵심은 선을 악으로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악을 선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선을 선으로, 악을 악으로 대하는 것은 불신자들의 가치관이고, 선을 악으로 대하는 것은 야만인들이나 동물세계에서나 볼 수 있는 가치관입니다. 그들은 짐승보다도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악하다 할지라도 법의 심판을 받지 않고 보복으로 살인하는 행위는 큰 죄입니다. 그것도 몰래 숨어서 암살하는 행동은 죄 중의 죄입니다.
베스도는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바울을 그들의 손에 넘겨주지 않았습니다. 그는 내가 재판을 할 것이니 필요하면 너희가 가이사랴에 와서 고소하라고 했습니다(행전 25:4-5). 이렇게 해서 베스도가 가이사랴 총독으로 부임하여 맡은 첫 업무가 바울의 재판이었습니다.
“그가 나오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유대인들이 둘러서서 여러 가지 중대한 사건으로 고발하되 능히 증거를 대지 못한지라”(행 25:7).
유대인들은 바울이 이래서 죄인이고, 저래서 죄인이라고 송사했지만, 바울에 대해 죄인으로서 이렇다 할 증언을 대지 못했습니다. 이 재판의 결론은 바울이 말한 대로였습니다.
“내가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노라 하니”(행 25:8하).
그러면 총독 베스도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베스도는 무죄를 선언하고 바울을 석방해야 옳습니다. 그런데 그는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예루살렘에 가서 재판을 받지 않겠느냐고 물었습니다(행 25:9). 여기에 베스도의 문제가 있습니다. 재판의 생명은 공의입니다. 재판이란 사실에 기초해서 그가 죄인인지 아닌지를 판결하면 됩니다. 이 재판을 통해 내 신상에 어떤 결과가 미칠 것인가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사사로운 감정에 치우치면 안 됩니다. 베스도는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원칙을 무시하고 타협했습니다. 그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한 이유는 자리 보존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공의를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하고 자기 유익을 취하고자 했습니다.
과거 군사 독재 시절에 재판이 공정하지 못했습니다. 재판이 체제를 지키고 보호하는 데 이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재심을 청구한 사건들이 무죄 선고를 받고 있습니다. 재판은 좌고우면하면 안 됩니다. 판사는 헌법과 각종 법률, 그리고 양심에 기초해서 재판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성경과 교회법과 규정에 따라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크리스천은 성경을 최고의 권위에 놓고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살다가 보면 네 개의 원리를 만납니다. 성경의 원리인 성리(聖理), 법의 원리인 법리(法理), 그리고 의리(義理)와 정리(情理)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무슨 일이 생기면 우선 정리(情理)로, 정서적으로 접근합니다. ⌜생각의 지도⌟를 보면 에서 동양 사람들은 70%가 정서로 접근하고 30%만 이성으로 접근하는 반면에 서구 사람들은 70%가 이성으로 접근하고 30%가 정서로 접근한다고 보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우리나라 사람들은 무슨 사안이 발생하면 정과 인간관계로 처리하려고 합니다. 그것이 옳고 그름을 떠나 감정을 앞세워 “네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로 따집니다. 그러나 원리보다 정리(情理)로 처리하면 터가 무너지고, 터가 무너지면 공동체가 무너지게 됩니다. 우리는 어떤 문제를 해결할 때 냉정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가, 이것이 진리를 위한 것인가를 살피고 기도하고 또 살펴야 합니다.
우리는 문제가 생기면 세 번을 생각해야 합니다. 위아래, 좌우, 전후입니다. 전후를 통해 역사적으로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를 생각하고, 좌우를 통해 인간관계를 생각하고, 위아래를 통해 상하 질서,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찾다보면 성경을 읽게 되고 기도하게 됩니다. 실타래 같이 꼬이고 복잡하면 복잡할수록 원칙을 지켜야 합니다.
특히 우리는 성경에 기초하여 성경 말씀대로 해결해야 합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어떻게 기록될 것인가를 생각하고 해결해야 합니다. 우리가 자기의 신변과 자기 이익과 사사로운 인간관계를 앞세우면 공의가 설 자리를 잃게 되고, 그렇게 되면 공동체는 존폐 위기를 맞게 됩니다.
내가 가이사께상소하노라
바울은 이런 베스도를 보고 생각을 바꿨습니다. 이는 그에게서 아무런 공의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고, 희망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불의를 행한 일이 없기 때문에 가이사의 재판 자리에서 심문을 받겠다고 했습니다.
“ 만일 내가 불의를 행하여 무슨 죽을 죄를 지었으면 죽기를 사양하지 아니할 것이나 만일 이 사람들이 나를 고발하는 것이 다 사실이 아니면 아무도 나를 그들에게 내줄 수 없나이다 내가 가이사께 상소하노라 한대”(행 25:11).
바울은 가이사에게 상소했습니다. 바울은 태어날 때부터 로마 시민권자였습니다. 로마 시민은 가이사의 판결 없이는 털끝 하나 손댈 수 없었습니다. 바울은 만일 정치적인 논리로 여기에서 재판을 받아 죽게 되면 이것은 순교가 아니고 개죽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더구나 예루살렘으로 압송하여 가다가 암살당하는 수모를 당하기보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의 피를 흘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로마로 가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로부터 죽임을 당할 위기의 순간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예수님은 피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모습에서 예수님이 좀 비겁하지 않나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암살당하게 되면 만민의 구주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기로 굳게 결심했을 때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을 향해 당당하게 앞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골고다에 올라가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이로 인해 예수님은 만민의 구주가 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다 보면 고난을 받고 핍박을 당하고 어려운 순간을 만납니다. 이때 어떤 태도를 보이느냐가 중요합니다. 피치 못해, 어쩔 수 없이, 불가피하게 그 문제와 타협을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고난 앞에서도 믿는 사람으로서 당당해야 합니다.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바울은 어떤 모양으로든지 로마로 가서 복음을 전하고자 했습니다. 그것은 그의 간절한 소망이요 기대였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간절히 원하고 바라는 바였습니다. 바울이 공회에 갇혀 있을 때 마음 한편에 두려움이 엄습했습니다. 이 때 주님께서 곁에 서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행 23:11).
그는 자나 깨나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로마에 가서 복음 전하고자 했습니다. 바울은 어떠하든지 주님의 뜻을 성취하고자 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자신을 택하신 목적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는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사명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이 반드시 로마로 갈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떤 경로로 로마에 갈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자유의 몸으로 가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생각을 고집하지 않고 하나님의 방법을 구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롬 1:10).
바울은 로마로 가는 가장 좋은 길이 죄수의 몸으로 가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쇠고랑을 차고 로마로 가는 이 길은 미지의 불확실한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이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기 뜻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 8:34).
우리는 자기 생각과 주님의 생각이 충돌할 때 주님의 생각과 주님의 말씀을 앞세워야 합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마 26:39하).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는 자기 부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생각을 앞세웁니다. 자기 뜻을 앞세웁니다. 자기 고집을 앞세웁니다. 그러나 신앙이란 자기 뜻보다 주님의 뜻을 앞세우고, 자기 고집보다 주님의 생각을 앞세우는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은 부르심을 따라가는 삶입니다. 주님이 가신 고난의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길은 영광의 길이요 생명의 길입니다.
아그립바 왕 앞에 선 바울
수일 후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가 베스도 총독에게 문안하러 왔습니다. 여기서 아그립바 왕은 아그립바 2세입니다(행 12:20-22). 그는 정치적인 수완이 좋아서 주 후 48-70년까지 22년간 통치했습니다. 또 부인인 버니게는 아그립바 1세의 큰 딸입니다. 그러니까 그는 남매끼리 살고 있습니다. 베스도는 아그립바에게 바울에 대해 상의했습니다.
“원고들이 서서 내가 짐작하던 것 같은 악행의 혐의는 하나도 제시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들의 종교와 또는 예수라 하는 이가 죽은 것을 살아 있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그 일에 관한 문제로 고발하는 것뿐이라”(행 25:18-19).
베스도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사건을 한낱 종교 문제라고 일축했습니다. 그런데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예수님을 한낱 종교로 치부할 수 있습니까? 죽은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입니까?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 살아나셨다는 것은 가장 기쁜 소식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지금까지 사망이 왕 노릇 했습니다. 사람들은 아담의 불순종 이래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죽음 앞에 지배당해 왔습니다. 역사 이래 사망을 정복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사망 권세를 파하셨다는 이 소식을 어떻게 제우스나 비너스와 비교할 수 있습니까? 죽은 자가 부활했다는 것은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입니다. 그런데 그는 이것을 몰랐습니다. 그는 복음을 듣고도 그 가치를 모르는 무지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 중에 제일 처음 세례를 받은 사람이 1879년의 백홍준이라는 사람입니다. 그의 아버지가 중국 만주에서 로스 선교사로부터 성경과 양초 한 자루를 받았습니다. 그는 이것을 받아가지고 아들에게 너나 읽으라고 넘겨주었습니다. 아들은 초를 켜놓고 성경을 2년 동안 읽었습니다. 그는 성경을 읽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를 좀 더 알기 위해 만주로 가서 복음의 깊은 뜻을 깨닫고, 의주로 건너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들을 때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려서는 안 됩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복음의 소식을 들을 때 감격하게 됩니다.
아그립바 왕은 바울의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도 이 사람으로부터 직접 듣고 싶다고 했습니다(행 25:22). 그리하여 바울은 아그립바 왕과 베스도 총독 앞에서 또 복음을 증언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베스도는 바울을 보고 죄명도 없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행 25:23-27). 이 법정의 특징이 죄 없는 사람을 죄인으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세상 법정은 빌라도 법정이 될 수 있습니다. 멀쩡한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요즘 신문지상에 이런 기사가 종종 나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런 법정을 통해 바울로 하여금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바울은 가이사에게 상소했습니다. 이는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자 함이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자신을 택하신 목적과 사명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 뜻대로, 자기 방식대로 로마로 가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방법을 따랐습니다. 그 길은 바로 죄수의 몸으로 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이 예비하신 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바울로 하여금 땅끝 선교를 이루어가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