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사도행전 27:1-44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행 27:23-24).
존 번연은 1628년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결혼 전까지 방탕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 그가 독실한 믿음의 여인 마거릿을 만나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는 회심한 후에 천로역정(The Pilgrim's Progress)을 썼습니다. 그는 천로역정에서 그리스도인의 여정을 아름답게 그렸습니다. 무엇보다 감동적인 것은 천로역정의 주인공이 우리 자신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삶의 여정을 항해로 비유합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늘 잔잔한 바다와 같이 평안한 것만은 아닙니다. 때때로 건강한 사람도 배에서 토할 정도의 큰 풍랑이 우리에게 다가오기도 합니다. 우리가 풍랑을 만나 깊은 절망에 빠질 때 주위 사람들이 떠납니다. 친구도 떠나고, 심지어는 믿고 사랑하던 아내도, 남편도 떠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우리 곁을 떠나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와 늘 함께하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안심해. 내가 곁에 있잖아” 하면서 위로해 주시고 이길 힘을 주십니다.
본문은 바울이 죄수의 몸으로 로마로 가고 있던 중 일어난 사건입니다. 태풍을 만났을 때 백부장과 선주, 선장, 그리고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은 구원의 여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구원의 여망이 보였습니다. 이는 주님이 바울과 함께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삶의 여정에서 크고 작은 사건들을 만날 때마다 주님이 늘 함께하심을 믿고 용기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백부장이 바울보다 그들을 더 믿더라
바울은 2년에 걸쳐 다섯 차례 재판을 받았지만 무죄로 판명되었습니다. 그러나 총독 베스도는 바울이 로마에 가서 가이사에게 재판을 받고자 상고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로마로 보내야 했습니다. 드디어 바울의 기도제목이 이루어졌습니다(롬 1:10).
“우리가 배를 타고 이달리야에 가기로 작정되매 바울과 다른 죄수 몇 사람을 아구스도대의 백부장 율리오란 사람에게 맡기니”(행 27:1).
여기에서 ‘우리’라고 한 것을 보면 바울 혼자 로마로 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와 바울 일행을 말합니다. 누가는 의사입니다. 누가는 바울에게 복음 사역을 위해서도 필요로 했지만 바울의 건강을 위해서도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도 함께 동행 했습니다(행 27:2). 아리스다고는 유대교에서 개종한 바울의 동역자였습니다(행 19:29). 바울은 다른 죄수 몇 사람과 함께 백부장 율리오에게 넘겨졌습니다.
바울은 아드라뭇데노에 승선했습니다. 바울이 탄 배는 시돈을 거쳐 구브로 해안을 따라 길리기아와 밤빌리아 바다를 건너 루기아의 무라 성에 도착했습니다(행 27:4-5). 바울은 무라 성에서 알렉산드리아 배로 갈아탔습니다(행 27:6). 이 배는 로마와 애굽을 왕래하는 곡물 나르는 큰 선박이었습니다. 배는 날씨가 좋지 않아 간신히 미항에 도착했습니다. 미항은 그레데 섬의 남쪽에 위치한 아름다운 항구로, 배가 지나다가 잠깐 머무는 작은 항구입니다. 배가 미항에서 잠간 머물다가 뵈닉스로 출항하려고 할 때 바울이 출항을 말렸습니다(행 27:7-10). 바울은 만일 출항하게 되면 하물(cargo)과 배는 물론 생명에도 큰 손실을 입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의 금식의 절기가 이미 지났기 때문이었습니다.
금식 절기는 속죄일을 말하는데, 속죄일은 9월 하순쯤(유대력 7월 10일)이 됩니다. 이 시기는 ‘지중해 계절’이라고 하는데, 풍랑이 심해서 항해를 할 수 없습니다. 당시에는 바람으로 가는 돛단배이기 때문에 바람이 심하면 부득불 어느 항구에든 정박하여 겨울을 나고 행선지로 떠나는 것이 상식이었습니다. 바울이 출항을 하지 말도록 한 것은 무슨 계시를 받아서가 아니라 하나의 상식이었습니다. 날씨가 이럴 때에는 배를 띄워야 하고, 저럴 때에는 출항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바울만이 아니라 누구나 다 아는 상식이었습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었습니다(행 27:11).
선장은 배의 지휘권을 가진 자요, 선주는 배의 소유자입니다. 선장은 자신의 경험과 지식에 의지하고, 선주는 이해타산에 따라 출항하고자 했습니다. 백부장은 목자 바울의 말을 무시하고 그들의 말을 더 믿고 신뢰했습니다. 백부장이 바울의 말을 무시하고 뵈닉스에 가서 겨울을 나고자 하는 표면적인 이유는, 뵈닉스에서 겨울을 나자는 의견이 더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행 27:12). 그는 이른 바 민주주의 원칙에 따랐습니다. 그러나 여론이나 민심, 대다수 의견이 그렇다고 해서 다 옳은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여론과 숫자에 의해 결정하는 것 또한 다 옳은 것이 아닙니다. 지금은 인기가 없고 여론의 지지를 받지 못하지만 옳은 것이라면,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끝까지 밀고 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알 수 있는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간단하게 말해 내게 손해가 되면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다른 사람에게 손해가 되고 내게 유익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닙니다. 인간은 두 가지 속성이 있습니다. 자기 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와 쉽게 살고자 하는 안일주의입니다. 이것을 부인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유익과 안일을 따라 결정하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닙니다.
그들이 뵈닉스로 가고자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미항보다 뵈닉스가 겨울을 보내기가 좋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뵈닉스는 미항보다 큰 항구입니다. 그러므로 볼거리와 놀 거리가 자연히 많았습니다. 술집도 많고 환락가도 많았습니다. 그들이 뵈닉스를 택한 것은 바로 큰 도시에 가서 욕망을 추구하고자 함에 있었습니다. 사람이 욕망을 따라 살게 되면 반드시 화를 당합니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
미항에서 뵈닉스까지는 약 65km 정도입니다. 미항을 떠난 배는 한참 동안은 순항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결정을 잘했다고 좋아했습니다(행 27:13). 그러나 득의만만한 것도 잠시뿐이었습니다. 얼마 안 되어 ‘유라굴로’(northeaster)라는 광풍이 일었습니다(행 27:14-15). 유라굴로는 북동풍에서 불어오는 허리케인으로, 그때쯤 되면 으레 불어오는 계절풍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출항하지 말자고 한 것입니다. 태풍이 목선에 불어 닥쳤으니 침몰당하는 것은 한순간이었습니다. 거기다가 ‘스르디스’(sandbars)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행 27:17). 스르디스는 모래톱을 말합니다. 모래톱은 태풍으로 인해 바다 밑의 모래가 갑자기 산처럼 높아지기도 하고 또 없어지기도 하는 것을 말합니다. 배가 가다가 갑자기 모래톱을 만나 부딪치게 되면 두 동강이 납니다.
그들은 풍랑과 싸워 노를 저었지만 속수무책이었습니다. 뵈닉스로 가자고 큰소리를 치던 백부장, 자기 경험과 자기 기술을 믿고 가자고 하던 선주나 선장도 매한가지였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아까운 짐을 버렸습니다. 사흘 후에는 배의 기구도 다 버렸습니다(행 27:19). 배의 기구는 노, 돛대, 키 등을 말합니다. 이런 것들을 다 버렸다는 것은 모든 것을 다 포기했다는 말입니다. 거기다가 여러 날 동안 해와 별조차 보이지 않았습니다. 밤하늘의 별은 나침반 역할을 합니다. 또한, 그들은 사흘이나 굶었습니다. 그들은 뱃멀미로 어느 것도 먹을 수 없었습니다. 태풍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제 배는 바람에 밀려 방향을 잃고 요동쳤습니다. 그때의 상황이 어떠한지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행 27:20).
그들에게 구원의 여망이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말을 무시하고 욕망을 따른 그들의 결국이 이러했습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큰 교훈을 얻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상식과 기술과 경험을 따라 살면 결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는 것은 다 우상입니다. 우리는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욕망을 따라 살면 안 됩니다. 우리는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자신이 손해를 보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안전한 삶의 여정입니다.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노라
이런 상황에서 절망하지 않는 한 명이 있었습니다. 그는 선주도 아니고 선장도 아니고 백부장도 아니고 목자 바울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잘못을 시인하라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라면 좋을 뻔하였느니라”(행 27:21).
바울은 그들에게 그레데를 떠나지 말도록 했음에도 불구하고 목자의 말을 듣지 않고 선주와 선장, 그리고 백부장의 말을 듣고 뵈닉스로 가다가 큰 변을 당했습니다. 바울은 이런 그들에게 잘못을 시인하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지난 일을 묵살하고 현재만을 주장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과거는 흘러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거의 잘못에 대한 반성과 회개가 없으면 똑같은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교회에서 문제를 일으킨 사람이 회개하지 않게 되면, 다른 교회에 가서 또 문제를 일으킵니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샙니다. 우리는 지난날 자신의 잘못을 마치 영웅담처럼 자랑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난날의 잘못을 말씀 앞에 통회하며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 없이 천국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오셔서 전하신 첫 메시지는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것입니다(막 1:15). 우리 속에 있는 숨은 탐욕, 정욕과 쾌락을 회개할 때 하늘의 보화와 하늘 영광, 그리고 천국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안심하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행 27:22).
바울은 “안심하라”(keep up your courage, NIV), “기운내라”(cheer, KJV)고 했습니다. 바울은 구원의 여망이 없는 그들에게 용기와 기운을 내어 안심하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구원의 여망이 없는 그들에게 안심하고 용기를 가지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지난밤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절망 중에 기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두려워 떨며 절망 중에 있을 때 바울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이것이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차이입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바울에게 나타나서 말씀하셨습니다.
“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행 27:23-24).
하나님은 바울에게 절망 중의 희망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의지할 반석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환난 중의 피할 바위가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의 생명의 주관자가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역경 중에도 눈동자같이 지키시고 보호하여 주셨습니다. 바울의 하나님으로 인해 배 안에 있는 사람들도 보호를 받았습니다. 주님은 이사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사 43:2).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홍해를 육지같이 건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밤에는 불기둥으로,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셔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어떤 역경 중에도 당신의 백성을 보호하여 주시고 지켜 주십니다.
남극탐험대 대장인 베어드는 남극 꼭짓점을 확인하기 위해 나갔다가 강풍에 길을 잃었습니다. 무전기도 작동되지 않았습니다. 온 몸이 얼어붙고 방향도 잃어버리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이제 여기서 내가 얼어 죽는구나 하는 그 순간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사 41:10상)는 주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는 그 말씀을 붙들고 일어났습니다. 자기가 왔던 길을 살펴보고 돌아서서 한 치의 앞도 안 보이는 눈보라 속을 걸어갔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베이스캠프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바울을 보호하시는 이유는 바울의 사명이 아직 남았기 때문입니다. 2년 전 바울이 체포되던 그날 밤 주님은 바울에게 나타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행 23:11).
리빙스턴은 선교사요, 아프리카 탐험가입니다. 그는 아프리카를 탐험하여 빅토리아 폭포를 발견하고 아프리카 횡단 여행을 달성했습니다. 그는 탐험 중에 토인에게 습격을 당하고 맹수한테 물리고 온갖 질병에 시달리고 혹서와 싸우면서 여러 번 죽을 고비를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프리카 탐험의 금자탑을 세웠습니다. 그는 아프리카 탐험을 마치고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사명을 가진 사람은 그것을 달성할 때까지 절대로 죽지 않는다.”
사명이란 하나님이 내게 맡긴 일, 민족과 역사가 내게 위탁한 일, 사람이 내게 맡긴 일을 말합니다. 그러한 사명을 마음속에 느끼는 것을 ‘사명감’이라고 합니다. 또한, 사명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을 ‘사명인’이라고 합니다. 역사의 큰일을 한 사람, 사회의 놀라운 업적을 이룬 사람들은 크건 작건 저마다 마음속에 확고부동한 ‘사명’을 가지고 산 사람들입니다. ‘사명감’이 그들로 하여금 큰일을 하게 했습니다. 사람들은 아는 것이 힘이며 지식이 힘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명감은 어떤 지식보다 큰 힘입니다. 인간의 진정한 힘의 원천은 사명감이요, 사명정신입니다. 자기의 사명을 다 하기 전에 절대로 죽을 수 없다는 사명정신을 가질 때 위대한 역사를 이룰 수 있습니다. 사명감은 이처럼 중요한 것입니다.
저는 대학 2학년 때부터 대학선교에 대한 사명감이 있었습니다. 저는 때로 이 사명 앞에 고민도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사명을 40여 년간 한 번도 포기한 적이 없습니다. 저는 대학선교는 선택할 사항이 아니라 필수사항이라고 믿었습니다. 왜냐하면 대학생은 미래의 지도자들이요, 미래의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대학선교가 힘들다고 포기하면 한국 교회에 희망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전보다 더욱더 대학선교를 위한 사명감에 불타야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고, 하나님의 뜻을 믿었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바울은 반드시 한 섬에 안전하게 정박될 것을 확신했습니다(행 27:25-26).
머리카락 하나도 잃을 자가 없으리라
미항을 떠난 지 열 나흘째 되던 날 밤이었습니다. 그들은 겨우 육지에 가까이 이르게 된 것을 알았습니다. 물길을 재어 보니 20길(120 feet)이었습니다. 또 재어 보니 15길(90 feet)이었습니다. 이때 사공들은 이물(선미)에 닻을 내리려는 체하면서 자기들만 살려고 거루(구명정)를 바다에 내려놓고 도망하려고 했습니다. 이를 본 바울은 백부장과 군사들에게 거루 줄을 끊도록 했습니다. 이제 바울이 배의 지휘자요, 백부장은 바울의 조수가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바울은 배에 탄 276명의 목자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들로 하여금 음식을 먹도록 격려했습니다. 그리고 너희 중 머리카락 하나라도 잃지 않을 것임을 확신시켜 주었습니다. 바울은 어려운 환경 중에도 목자가 되어 그들의 방향을 잡아 주었습니다.
“음식 먹기를 권하노니 이것이 너희의 구원을 위하는 것이요 너희 중 머리카락 하나도 잃을 자가 없으리라 하고”(행 27:34).
바울은 그들 앞에서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하고 떡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그들은 모두가 안심하고 음식을 먹었습니다. 사람들은 밀을 버려 배를 가볍게 했습니다.
날이 새자 어느 해안이 보여 그곳에 정박했습니다. 그런데 배는 물이 합하여 흐르는 곳에서 큰 물결에 부딪혀 깨어졌습니다. 군사들은 죄수들이 도망갈까 봐 죽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백부장이 바울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헤엄치거나 널빤지를 의지하도록 했습니다. 이로 인해 그들은 모두 난파선에서 구원받았습니다.
우리는 삶의 여정에서 크고 작은 사건들을 만납니다. 이때 두려워할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진정한 힘의 원천은 사명감, 사명정신입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환난 중에도 함께하시고 보호하시고 피할 길을 주십니다.
“큰 물결이 설레는 어둔 바다 저 등대의 불빛도 희미한데 이 풍랑에 배 저어 항해하는 이 작은 배사공은 주님이라 나 두렴 없네 두렴 없도다 주 예수님 늘 깨어 계시도다 이 흉흉한 바다를 다 지나면 저 소망의 나라에 이르리라”(새찬송가 432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