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사도행전 28:1-31
셋집에 머물면서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행 28:30-31).
본문은 사도행전의 결론입니다. 바울이 로마에 입성한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는 주님의 선교명령과 뜻이 성취되는 순간이요(행 1:8), 바울의 비전과 기도제목이 이루어지는 순간이기도 합니다(행 19:21). 바울은 로마에 도착했지만, 자유의 몸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의 손목에는 수갑이 채워져 있었습니다. 복음을 전할 환경이 갖춰져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환경을 탓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감옥을 일대일 성경 공부 장소로 바꾸어, 찾아오는 모든 이들에게 성경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이는 계란으로 바위 치기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이 역사가 로마를 뒤집어놓아 주 후 313년에 밀라노 칙령을 통해 기독교가 공인되었습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복음의 능력, 복음의 진보, 복음의 생명력을 배울 수 있습니다.
독사에 물린 바울을 보호하신 하나님
바울이 탄 배는 풍랑을 만났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무사히 ‘멜리데’(Malta)섬에 상륙했습니다(행 28:1). 이 섬은 제주도의 6분의 1에 지나지 않지만, 지중해 전략상 중요했습니다. 바울 일행이 상륙하자 비가 오고 날이 차가워 원주민들이 땔감을 가져다가 불을 피워주었습니다. 바울이 나무 한 묶음을 가져다가 불에 넣는 순간 나무 속에 있던 독사가 뜨거워서 뛰쳐나와 바울의 손을 물었습니다. 이를 본 원주민들은 이 사람이 살인자이기 때문에 바다에서는 구원받았을지 모르지만 공의가 그를 살려주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에게 이적이 일어났습니다. 바울은 뱀에게 물렸지만 조금도 상하지 않았습니다(행 28:5).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은 바울이 사명을 감당하도록 바다에서는 폭풍으로부터 구원하시고, 섬에서는 뱀으로부터 구원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사명을 감당하는 이들에게 성령께서 우리를 모든 해로부터 보호하여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 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막 16:17-18).
우리는 이 말씀을 믿고 일부러 독(방사선)에 노출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고 죽나 안 죽나 하나님을 시험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은 시험의 대상이 아닙니다. 바울이 일부러 독사를 만지고 하나님을 시험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명을 감당하는 이들을 악으로부터 보호하여 주십니다.
이를 본 사람들은 바울을 신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 섬의 제일 높은 사람인 ‘보블리오’의 아버지의 병을 안수하여 고쳐 주었습니다(행 28:7-10).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병을 고치기 위해 몰려들었습니다. 바울은 이들을 모두 고쳐주었습니다. 이로 인해 바울 일행은 후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떠날 때에도 항해에 필요한 것들을 실어주어 항해하는 동안 불편한 것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명을 수행하는 이들을 섬세하게 돌봐주십니다.
로마에 도착한 바울
석 달 후에 그들은 ‘알렉산드리아’ 배로 항해했습니다. 바울 일행은 수라구사에 도착하여 3일간 묵고 로마 땅인 레기온에 도착했습니다(행 28:13). 그리고 이튿날 남풍이 불어 ‘보디올’에 도착했습니다. 바울이 도착하자 형제들이 바울을 초청해서 7일간 그곳에 머물다가 로마로 출발했습니다.
바울은 마침내 로마에 도착했습니다(행 28:14-15). 로마는 강대국의 수도였습니다. 로마는 정치, 경제, 군사, 문화의 중심지였습니다. 바울은 제3차 전도여행 중 에베소에서 복음의 능력을 체험한 후, 거대한 로마제국에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비전을 가졌습니다. 그는 이를 위해 로마에 갈 수 있는 좋은 길을 찾고 구하고 두드렸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에게 길이 막혔습니다. 그러나 그는 절망하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오히려 그는 로마를 발판으로 하여 서바나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고자 했습니다(롬 15:22-23). 하나님은 예루살렘의 옥에 갇혀 있는 바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행 23:11).
바울의 로마 입성은 바울이 로마 선교 계획을 세운지 4년, 그리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지 3년 만에 이루어졌습니다. 그의 입성은 죄악으로 부패한 로마를 복음으로 정복하고자 하는 개선장군으로서의 입성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로마를 세계복음화의 전진기지로 삼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강한 의지이자, 주님의 지상 명령이 성취되는 순간이었습니다(행 1:8). 하나님은 세계선교를 기뻐하시고 그 기도를 반드시 이루어주십니다.
바울이 로마에 도착하자 이 소식을 듣고 그곳 형제들이 압비오 광장과 트레이스 타베르네(Three Taverns)까지 와서 바울을 맞이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담대한 마음을 얻었습니다(행 28:15). 바울은 비록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왔지만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하나님 안에서 가장 좋은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미래도 인도하여 주실 것을 믿고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미래를 하나님의 뜻대로 인도하여 주실 것으로 확신했습니다. 그는 역사의식이 있었습니다. 역사의식이란 과거에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과거에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이 지금도 함께하시고 미래도 함께하시고 도와주실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는 바울
이스라엘의 소망
바울이 로마에 도착하자 자기를 지키는 자와 함께 따로 있게 되었습니다(행 28:16). 바울은 밖으로 나갈 수는 없었지만 내방객들을 자유롭게 만날 수 있었습니다. 아마 이렇게 된 데에는 베스도 총독의 호의(행 26:32)와 바울을 호송한 백부장의 배려가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데 불편이 없도록 환경을 예비해 주신 것입니다. 3일이 지나자 바울은 유대인 중의 높은 사람들을 초청하여 가이사에게 상소한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가이사에게 상소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고발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소망 때문에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온 것임을 밝혔습니다(행 28:17-20).
“이러므로 너희를 보고 함께 이야기하려고 청하였으니 이스라엘의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노라”(행 28:20).
이스라엘의 소망은 메시아와 메시아 왕국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로 있었기 때문에 메시아 왕국을 더 열렬히 기다렸습니다. 그들이 기다리는 메시아 왕국은 정치적인 왕국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요구대로 정치적인 메시아가 되어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하면 산으로 가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은 지 3일 만에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사셨습니다. 이 때문에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신음하고 고통받하던 인류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주셨습니다. 이 나라는 이스라엘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믿는 모든 이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 나라는 우리 모두의 희망입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부, 명예, 타이틀이 전부인 줄로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이를 위해 목숨을 겁니다. 이것을 소유하면 행복의 여신이 다가오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소유한 사람은 얼마 안 가서 실망하고, 이것을 잡지 못한 사람은 잡지 못해 실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우리를 결코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이 나라는 결코 쇠하지 않습니다. 이 나라는 누가 빼앗을 수 없습니다.
니고데모는 세상에서 소유하고 싶은 모든 것을 소유했지만,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지 못했습니다. 그때 그의 내면은 칠흑처럼 어두웠습니다. 그는 내면의 어둠을 안고 밤에 예수님을 찾아와야만 했습니다. 세계적인 문호 헤밍웨이도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지 못했을 때 권총으로 스스로의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으로 소망해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신 하나님 나라입니다.
또한 ‘이스라엘의 소망’은 사명자로 살고자 하는 결단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온 세상 만민에게 전하고자 하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명감이 있을 때 어떤 상황과 역경도 이길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의 사상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고 했습니다(행 28:21-22). 그래서 그들은 바울의 사상이 무엇인가 알아보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어떤 사상이나 종파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울 파는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은 사실을 안다고 했습니다. 이에 바울은 유대인들과 날짜를 정해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들을 영접하여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
“그들이 날짜를 정하고 그가 유숙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대하여 권하더라”(행 28:23).
그는 하나님 나라를 증언했습니다. 로마는 거대한 물질문명의 나라였습니다. 그곳에는 좋아 보이는 것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그곳은 거대한 용광로와 같아서 모든 것을 로마라는 문화로 용해시켰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갖기가 어려웠습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도 그 문화에 동조되기 쉬웠습니다. 바울은 이런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와 그 영원함을 증언했습니다. 화려한 로마도 멸망하고 말 것임을 증언했습니다. 또한 모세와 선지자의 말로 예수님의 일을 증언했습니다. 그러자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었고, 믿지 않는 이들도 있었습니다(행 28:24).
바울은 그들이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이사야 말씀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습니다(행 28:25-28). 그들은 완악하여 들어도 듣지 못하고 보아도 보지 못했습니다. 사람이 완악하면 말씀이 들리지 않습니다. 이제 바울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방향을 잡았습니다. 이것은 바울의 사명이요, 부름 받은 목적입니다. 하나님이 바울을 부르신 것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함이었습니다.
자기 셋집에서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행 28:30-31).
이 셋집은 바울이 돈을 주고 세낸 집으로, 그 안에서의 행동은 자유로웠습니다. 그러나 그곳은 군인들이 지키는 엄연한 감옥이었습니다. 바울은 셋집에서 2년 동안 이방인에게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가르쳤습니다. 우리는 셋집에서 복음을 전한 바울로부터 두 가지를 배울 수가 있습니다.
형편을 넘어서서 복음을 전하는 바울
그는 마음대로 다니며 전도할 수도 없고 심방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는 활동의 자유가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이때 그는 환경을 탓하며 원망하고 포기하기 쉬웠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조건을 넘어서서 담대하게 거침없이 하나님 나라와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그는 찾아오는 사람이 없으면 24시간 교대로 오는 군인과 일대일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바울을 지키는 군인은 친위대입니다. 당시 친위대는 만 명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저들은 왕에게 충성하는 사람이요, 정예부대입니다. 친위대에서 12년 근무하면 노예도 자유인이 되고, 그 다음에는 귀족이 될 수 있었습니다. 로마를 통치하던 정치가들은 거의 친위대 출신들이었습니다. 바울은 1년 365일, 365명의 친위대를 매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고, 전도하고 싶어도 전도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들을 매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매일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원하든지 원하지 않든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들은 충성된 사람들이기 때문에 복음을 영접하기만 하면 목숨을 걸고 충성스럽게 복음을 전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변화되면 로마의 상류층이 변화됩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죄수로 로마에 보내신 데는 이런 놀라운 깊은 뜻이 숨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틈틈이 편지를 써서 각 교회에 보냈습니다. 에베소서, 골로새서, 빌립보서, 빌레몬서, 디도서, 디모데전후서는 로마 옥중에서 쓴 서신입니다. 그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열심히 복음을 전했습니다(딤후 4:2). 복음은 기쁜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기쁜 소식은 전해져야 합니다.
리우기 파라시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평생 진기한 바이올린을 246개나 수집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죽을 때 이상하게 얼굴이 이지러져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그는 진기한 작품을 사다가 선율을 듣지는 않고 바이올린만 만져보고 쓰다듬으면서 즐겼습니다. 바이올린의 생명은 아름다운 선율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좋은 바이올린으로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선율을 들려주지 않고 전부 사들여 꽁꽁 묶어놓았습니다. 그 좋은 바이올린이 썩어 가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기쁜 소식인 복음을 듣고서도 전도하지 않고 혼자 즐기면 우리가 죽을 때 얼굴이 이지러집니다. 우리가 어렵더라도 기쁜 소식, 하나님 나라, 죄와 죽음을 이긴 복음을 전하기를 기도합니다.
일대일로 제자를 양성하는 바울
바울은 로마 정복의 비전이 넘쳤습니다. 그리고 나이는 50대 후반에 접어들었습니다. 바울은 아시아, 고린도, 빌립보 교회들을 개척한 역전의 노장입니다. 그런데 답답하게도 셋집에서 일대일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큰 희망과 비전에 비해 그의 복음 전하는 방법은 비현실적이며 비효율적으로 보입니다. 일대일로 언제 로마가 정복될 것인가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의 역사 방법이요, 예수님이 제자들을 키우신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25년 동안 일대일로 키우셨습니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들을 3년 반 동안 키우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 한 사람을 통해 12명을, 12명을 통해 세계 만민을 구원하고자 하셨습니다.
바울의 셋집에서의 일대일 역사는 소리 없이 로마 곳곳에 전파되었습니다. 친위대가 복음을 영접하기도 했습니다(빌 1:13). 일대일 역사는 네로 황제의 조직적인 핍박 속에서도 로마 사회에 파고들어 바울이 복음을 전한지 250년 후에 마침내 거대한 로마제국이 복음으로 정복되었습니다.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사도행전은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행 28:31하)로 끝을 맺었습니다. 이 말씀은 그 어느 것에도 방해를 받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은 매이지 않습니다. 말씀은 어느 장소에도 매이질 않습니다. 말씀은 어느 사람도 막을 수 없습니다. 말씀은 어느 세력도 가둘 수 없습니다. 사람은 매일지라도 복음은 매이지 않습니다. 말씀은 어느 것에도 방해받지 않고 전파되고 전파되어집니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딤후 2:9).
말씀은 매이지 않아 로마에 전파되어 기독교가 국교가 되었습니다. 기독교가 국교가 된 후에는 무늬만 크리스천이지 내용은 세상 사람들과 다른 것이 없었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했습니다(딤후 3:5). 형식만 있고 내용이 없었습니다. 한 교황이 “교회에 이제 금과 은이 없는 가난한 시대는 지났다”고 하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제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말할 시대도 지나갔다”고 한탄했다고 합니다. 말씀이 매인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말씀은 매이지 않았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을 내걸고 본래의 복음으로 돌아가자며 종교개혁을 부르짖었습니다. 이로 인해 가톨릭의 교황이라는 형식에 갇혀 있던 복음이 독일과 영국으로 건너갔습니다. 영국으로 건너간 복음은 꽃을 피웠습니다. 영국의 옥스퍼드대학과 케임브리지대학이 세계선교의 주축을 이루는 토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영국 국교의 핍박을 피해 퓨리턴들이 미국으로 건너가 복음의 꽃이 활짝 피웠습니다. 미국은 SVM을 통해 수많은 선교사가 세계 각국에 파송되었습니다. 미국에서 만개한 복음이 가난과 무지와 우상숭배로 희망이 없던 우리나라에 상륙했습니다. 이 복음은 전래된 지 100년 만에 1,000만 성도라는 기적을 이루었습니다. 이것은 미국에서 만개하였던 복음이 한국에 상륙하여 맺은 열매입니다. 특히 1970년대에는 대학선교를 통해 한국 교회에 개인 구원의 확신과 제자 양성이 활성화되어 한국 교회가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이제 복음은 한국을 통해 세계 곳곳에 전파되고 있습니다. 이 복음은 14억의 중국으로 전진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매이지 않고 담대하게 전파되고 전파되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 전하기가 어려운 환경이라 할지라도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희망을 가지고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은 복음서나 다른 서신과 달리 결론이 없는 미완의 결말입니다(행 28:31). 이것은 교회의 복음의 증언이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복음 전파는 시간적으로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요, 범위는 땅 끝까지입니다(행 1:8). 당시 땅 끝은 로마였지만, 로마는 땅 끝이 아닙니다. 이제 나머지는 우리의 몫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인종과 문화와 언어의 모든 장벽을 뚫고 끊임없이 십자가의 복음과 부활의 복음을 들고 세계로 담대하게 전진하고 전진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28장 32절은 바로 오늘 우리를 통해, 나를 통해 계속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소망을 가지고 로마에 왔습니다. 그가 로마에 와서 한 것은 셋집에서의 일대일 사역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로마 개척의 초석이요, 세계 복음화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일대일로 성경을 가르치는 것이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사도행전 28장 32절이 기록되는 역사적인 순간입니다. 우리가 주님이 오시는 그 날까지 말씀 충만, 성령 충만하여 복음을 들고 땅 끝까지 전진하고 또 전진하여 사도행전 28장 32절을 써나가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초대 교회로 돌아가 말씀을 사랑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