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마가복음 1:1-8
복음의 시작이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막 1:1).
시작은 언제나 가슴을 설레게 합니다. 시작은 언제나 희망과 기대가 함께합니다. 그래서 무엇을 하든 시작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무엇을 어떤 목적을 가지고 시작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어떤 방향과 목적을 가지고 시작하느냐에 따라 엄청난 차이와 결과가 초래되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복음의 시작입니다. 복음의 시작은 율법의 끝을 의미합니다. 복음 이전에는 율법이 있었습니다. 율법은 사람을 정죄하고 죽음에 이르게 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사람을 구원하고 살립니다. 이처럼 복음의 시작과 그 이전의 세계는 전혀 다릅니다. 그래서 복음이 기쁜 소식인 것입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복음의 시작과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리고 예수님의 선구자 세례 요한의 삶을 배울 수 있습니다.
복음의 시작
마가복음은 장엄한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창세기 1장 1절이 천지창조의 선포라면, 마가복음 1장 1절은 복음의 시작을 선포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성육신하신 예수님의 신성을 말합니다. ‘예수’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란 하나님에 의해 임명된 선지자, 대제사장, 그리고 만인의 왕을 뜻합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기쁜 소식을 말합니다. 복음, 십자가와 부활은 기독교의 요체요, 핵심입니다(롬 1:16-17). 복음의 성격은 죄로부터의 해방입니다(요 8:32, 롬 8:1-2). 복음은 사람을 죽음과 죄로부터 자유롭게 합니다. 복음은 진리와 배치되는 인습과 전통으로부터 사람을 해방시킵니다.
그런데 복음이 곡해되면 오히려 사람을 억압하고 달달 볶는 ‘볶음’으로 여겨지기 쉽습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다른 복음’(갈 1:6-9)은 복음이 아니라 ‘볶음’입니다. 요즘 예수 그리스도를 단순히 믿어서는 안 되고 뭔가 하나를 추가해서 볶아야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는 이단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α’를 주장하는 이단들을 경계해야 합니다. 복음은 제하고 더할 것이 없는 완전무결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요한계시록에서 더하면 재앙을 ‘더하실’것이요, 제하여 버리면 생명나무와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겠’다고 하셨습니다(계 22:18-19).
‘시작’은 사람을 벅차게 하고 설레게 합니다. 졸업을 하고 직장에 첫 출근할 때, 새 아파트를 구입해 입주할 때 우리의 마음은 설렙니다. 그러나 직장을 몇 달 다녀보면 시계추와 같은 반복된 삶에 실망합니다. 새 아파트에 입주해도 그때뿐 몇 달 살다보면 그저 그렇습니다. 신입생들도 처음에는 새로운 대학생활에 대한 기대감으로 설렙니다. 그러나 몇 날 다녀보면 고등학교와 별로 다른 점이 없다며 실망합니다. 심리적으로 볼 때 감격은 짧으면 한 달, 길면 3개월 간다고 합니다. 영국의 경제학자 허쉬는 「경제 성장의 사회적 한계」에서 경제 성장의 초반에는 만족감이 증대되지만 성장이 진전됨에 따라 불만이 증대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우리를 벅찬 감격으로 살게 합니다. 왜냐하면 이는 죄와 사망이 물러가고 빛과 생명과 구원이 시작된 것이요, 현상의 변화가 아니라 본질의 변화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가는 벅찬 감격으로 복음의 시작을 선포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막 1:1).
시작은 끝을 전제로 합니다. 복음이 시작되기 이전에는 아담의 교만과 불순종으로 죄와 사망이 세상을 지배했습니다. 사탄이 왕 노릇 했습니다. 인간은 죄의 노예였습니다. 죗값은 반드시 치러야 합니다. 교도소에 가야만 죗값을 치르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죄를 지으면 심한 양심의 가책을 받습니다. 이를 도스토예프스키는 「죄와 벌」에서 라스콜리니코프가 고리대금업자 노파를 죽인 후에 죄의식의 중압에 견딜 수 없어 소냐를 찾아가 죄를 고백하고 마침내 자수해 시베리아로 유형 가는 모습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가위에 눌리는 악몽을 꿉니다. 그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질환을 통해서도 벌을 받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성병입니다. 그리고 관계성이 파괴됩니다. 사랑의 관계에서 미움과 증오와 무관심의 관계로 바뀝니다.
그런데 죄는 자신으로 끝나지 않고 가정과 사회와 인류에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부모의 죄로 인해 가정이 파괴될 때 자녀들은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겪습니다. 무엇보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롬 6:23상).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히 9:27). 심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는 둘째 사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계 21:8). 이처럼 죄의 결과는 무섭습니다.
본래 우리는 아름다운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한 거룩한 존재였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사랑과 거룩함, 그리고 의입니다. 그런데 죄로 인해 우리 내면은 거룩함을 사모하기보다 더럽고 변태적인 것을 좋아합니다. 나병환자처럼 우리 내면은 추합니다. 사랑보다 미움과 시기, 질투가 가득하고, 육신적인 욕망과 탐욕이 가득합니다. 의보다 거짓과 위선이 가득합니다. 거룩한 사명을 잃고 어떻게 하면 잘 먹고, 잘 입고, 인생을 즐길 것인가에 관심을 쏟습니다. 그리고 사회는 홉스가 말한 대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으로 강자만이 살아남는 동물농장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로 죽은 우리를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33년간 이 땅에 계시면서 가난하고 병들고 사회로부터 소외된 사람들, 그리고 죄와 죽음 아래 있는 사람들을 섬기시다가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져야 할 십자가를 대신 지시고 무서운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고전 15:3-4).
이로 인해 우리가 누릴 수 있는 특권이 무엇입니까? 어두운 B.C. 시대가 물러가고 찬란한 A.D.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어두움에서 빛이, 죽음에서 생명이, 절망에서 희망이 임했습니다. 죽음이 가져다주는 불안과 회의와 허무에 시달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율법의 시대에서 은혜의 시대로, 정죄와 심판에서 용서와 구원으로 바뀌었습니다. 미움이 사랑으로 바뀌었습니다. 사탄이 지배하던 삶에서 성령께서 지배하시는 삶으로 바뀌었습니다. 원망과 불평에서 감사와 기쁨과 찬미로 바뀌었습니다. 탐욕에서 나눔으로, 정욕에서 순결로 바뀌었습니다.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삶에서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삶으로 바뀌었습니다. 불평과 부정적인, 즉 악성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삶에서 감사와 긍정의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사람이 되었고, 복음의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내면의 슬픔과 아픔이 치유되고 건강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잃어버린 자아와 파괴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었습니다. 고귀한 사명이 회복되었습니다. 이웃과의 관계가 경쟁의 관계에서 사랑과 섬김의 관계로 변화되었습니다. 썩고 쇠할 것을 찾던 삶에서 영생과 하나님 나라의 산 소망을 바라며 살게 되었습니다. 죄와 사망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죄 사함과 새 생명을 주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주의 길을 준비하는 세례 요한
마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한 후에 복음이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를 말해 줍니다. 그는 먼저 메시아의 선구자 세례 요한을 언급합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막 1:2-3).
하나님은 일찍이 메시아가 오기 전에 선구자를 보내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자 메시아의 선구자 세례 요한을 보내셨습니다. 그의 사명은 주의 길을 준비하고, 주의 오실 길을 곧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마가복음에는 이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생략되었지만 누가복음은 이를 자세하게 기록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눅 3:4-5).
백성들은 메시아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이때 세례 요한은 백성들이 메시아를 영접할 수 있도록 마음을 준비시켰습니다. 세례 요한은 모든 골짜기를 메우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을 낮게 하고, 굽은 것을 곧게 하고, 험한 길을 평탄하게 했습니다.
여기에서 골짜기와 모든 산과 작은 산, 그리고 굽은 것과 험한 길은 우리 내면의 모습입니다. 먼저, 골짜기의 특징은 패여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운명과 패배, 절망과 열등감의 패임이 있습니다. 그리고 미움과 불신과 증오의 패임이 있습니다. 사람이 한 번 패이게 되면 헤어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공통점은 무기력하고, 자기 자신을 학대하고, 신경질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원망과 불평이 입에서 떠나지 않고, 미움의 눈초리로 사람과 사회를 비판하고 냉소적입니다.
또 각종 산이 있습니다. 산은 저마다 스스로 잘났다며 위풍당당하게 솟아 있습니다. 자기가 최고라고 뽐냅니다. 여기에서 큰 산은 아주 교만한 사람이요, 작은 산은 덜 교만한 사람인데 아주 교만한 사람이나 덜 교만한 사람이나 교만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의가 강하고 자존심이 강합니다. 자기 생각과 좀 맞지 않고 자존심이 상한다 싶으면 불도그처럼 눈을 부릅뜨고 대듭니다. 자기 광을 내기를 좋아하고, 남을 무시하며, 배우려는 마음이 없습니다. 그리고 영의 세계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아울러 굽은 것이 있습니다. 굽은 길은 삐뚤어진 마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모든 것을 색안경을 쓰고 바라봅니다. 사랑을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관심을 갖고 사랑해 주면 자기 일에 상관한다고 반발하고, 관심을 두지 않으면 무관심하다고 불평합니다.
마지막으로, 험한 길이 있습니다. 험한 길은 악한 마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죄의 문화를 양성합니다. 남을 해치고 분쟁을 일으키나 자기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자기의 죄를 정당화합니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로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막 1:4).
광야는 풀 한 포기 없는 사막입니다. 사막에는 물이 없습니다. 사막에는 작열하는 태양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사막은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춥습니다. 세례 요한은 이런 악조건 속에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습니다. 사람들은 환경이 준비되어야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환경을 탓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열정적으로 환경을 극복하고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습니다. 그의 열정은 환경과 여건을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역사학자인 아놀드 토인비는 「역사의 연구」에서 환경이 좋지 않은 곳에서 문명의 꽃이 피었다고 했습니다.
세례 요한의 메시지는 메아리가 아니라 ‘소리’였습니다. 메아리는 희미하고 되돌아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의 메시지는 소리가 되어 백성들의 심장을 뚫고 들어갔습니다. 그는 열정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열정의 사람을 쓰십니다. 링컨 대통령은 남북전쟁을 하면서 부관들에게 그랜트 장군을 일컬어, “우리가 이겼다. 왜냐하면 그랜트 장군에게 이기고자 하는 강렬한 열망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전략가가 전쟁에서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전쟁에 대한 책을 잘 쓰는 사람이 전쟁에서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전쟁에서 이기고자 하는 열망을 가진 자만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부흥하기를 원한다면 부흥에 대한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열정은 강력한 바이러스입니다. 한 사람의 열정이 다른 사람에게 열정을 갖게 합니다. 열정이 있는 사람만이 사람과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열정이 있는 곳에 창조가 있습니다. 사자성어 중에 ‘불광불급’(不狂不及)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일에 미칠 정도로 열심히 매진해야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미쳤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복음을 전했을 때(행 26:24) 복음으로 세계를 제패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하든 그 일에 모든 역량을 쏟아부을 정도로 열정적으로 해야 합니다. 열정 앞에는 환경과 조건이 전혀 문제 되지 않습니다. 열정은 역사를 창조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세례 요한이 열정적으로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자 백성들이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막 1:5).
그들은 자신들의 숨은 죄악을 자복했습니다. 운명의 골짜기, 패배의 골짜기, 절망의 골짜기, 열등감의 골짜기, 미움과 불신과 증오의 골짜기를 회개했습니다. 그러자 입에서 찬양과 감사가 나왔습니다. 스스로 잘났다는 교만을 회개했습니다. 그리했을 때 겸손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굽었던 마음을 회개했습니다. 그러자 색안경이 벗겨지고 순수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험한 길을 가던 사람이 회개했습니다. 그러자 상처를 주던 사람이 위로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회개의 표로 요단 강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는 단지 종교적인 의식이 아니라 죄에 대한 회개의 표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물질 문제. 질병 문제, 진로 문제, 자녀 문제, 가정 문제, 직장 문제, 부부간의 문제, 성격 문제, 친구 문제로 괴로워합니다. 그러나 이런 외적인 문제도 문제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내면의 죄 문제입니다. 정욕, 탐심, 거짓, 위선, 미움, 절망, 무기력, 이기심, 안일이 문제입니다. 죄로 인해 사람들은 인간관계가 원만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눈동자가 풀어지기까지 컴퓨터 게임에 몰입합니다. 줄담배를 피우고, 술집과 영화관을 전전합니다. 밤거리를 배회합니다. 더 심하면 마약을 복용해 폐인이 되기도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건강해질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자신의 모든 죄를 자복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죄 씻음 받고 죄 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세례를 받아 하나님의 아들로 성령의 인 치심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속에 깊이 숨어 있는 죄를 드러내놓고 통회하고 예수님의 보혈로 죄 씻음을 받아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세례 요한의 생활양식과 증거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막 1:6).
세례 요한은 낙타털로 낮에는 의복을 삼고, 밤에는 이불을 삼았습니다. 그리고 당시 가난한 자들이 먹던 석청과 메뚜기가 그의 주식이었습니다. 그의 생활은 단순하고 검소했습니다. 그는 제사장의 아들로서 얼마든지 성전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위엄 있는 가운을 입고 좋은 환경에서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검소하게 시대와 구별된 생활을 했습니다. 그의 능력은 바로 그의 단순한 생활에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의 삶은 금욕적인 삶이 아니라 사명을 중심으로 한 삶이었습니다. 생활인은 생활을 중심으로 삽니다. 그러나 사명인은 사명을 중심으로 삽니다. 세례 요한은 낙타털 옷 대신 비단옷을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메뚜기 대신 보양식품을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말씀을 붙들고 단순한 삶을 살며 주어진 사명에 충실했습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은 메시지나 삶에서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그는 두 가지 면에서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자신의 신분과 비교할 수 없는 예수님
“그가 전파하여 이르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막 1:7).
세례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을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자신을 낮추고 예수님을 높였습니다. 당시 세례 요한의 인기는 날로 상승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혹시 메시아가 아닌지 생각했습니다(눅 3:15). 그는 백성들의 존경과 흠모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고 자신은 예수님의 신발 끈조차 풀 수 없는 비천한 존재임을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은 존귀하고 위대하신 분이십니다.
자신의 사역과 비교할 수 없는 예수님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막 1:8).
‘물세례’는 회개의 세례로, 죄 사함을 받도록 마음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 세례’는 죄를 소멸합니다. 성령 세례는 변하여 새사람이 되게 합니다. 성령 세례는 죄를 회개하고 자복한 자에게 주어집니다(행 2:38). 세례 요한은 물세례를 주는 한 인간에 불과하지만 예수님은 성령 세례를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세례 요한은 말씀을 통해 자신의 사명을 깨닫고 그 사명에 충실했습니다. 또한 자신의 위치를 깨닫고 자신을 낮추고 예수님을 높였습니다. 그는 ‘나’를 바라보지 말고 ‘예수님’을 바라보라고 외쳤습니다(요 1:29). 그는 “예수님은 흥해야 하겠고 나는 쇠해야 하리라”고 했습니다(요 3:30). 그는 예수님 앞에서 겸손했습니다.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 그의 꿈이자 목표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를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가장 큰 자라고 칭찬하셨습니다(눅 7:28). 우리가 사명에 충실할 때 사람들로부터 조롱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를 높여주십니다.
저자 마가는 복음의 시작을 선포했습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복음은 사람을 죽음과 죄로부터 자유롭게 합니다. 복음은 모든 매임을 풀어줍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은 단순하게 살았습니다. 그는 자신을 낮추고 예수님을 높였습니다. 그의 삶은 사명인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본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