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마가복음 1:9-11
그때에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그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막 1:9).
이스라엘은 오랫동안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 곧 왕을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기다리다 못해 산 위의 파수꾼에게 묻기도 했습니다(사 21:11). 그리고 그들은 메시아의 오심이 지체되는 것이 이상하다 싶어 날마다 외쳤습니다. “곧 오소서, 임마누엘!”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기에 앞서 세례 요한을 보내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선구자로 요단 강에서 백성들에게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세례의 기원은 구약의 결례의식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손이나 발을 씻는 결례의식이 있었습니다. 성전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손과 발을 씻어야 했고, 제사장 또한 그의 몸을 맑은 물로 깨끗이 씻어야 했습니다. 더러운 것을 만지거나 시신과 접촉한 후 하나님의 전에 들어갈 때는 두말할 것 없이 물로 깨끗하게 씻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세례는 이교도가 유대교로 개종할 때 행해졌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경건한 자’라는 말은 개종자를 뜻합니다. 유대교에 들어오려면 남자들은 할례와 세례를 받고 제물을 드려야 했습니다. 그리고 여자들은 세례를 받고 제물을 드려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기 위해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유대의 요단 강까지 먼 길을 걸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무 죄가 없으십니다(고후 5:21). 그런데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아무 죄 없으신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이유가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이루시기 위함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고 하시자 세례 요한은 내가 예수님으로부터 세례를 받아야 하는데 어떻게 내게로 오시느냐며 극구 사양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대답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마 3:15).
예수님이 받으시는 세례는 죄가 있거나 죄를 씻기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의’(δικαιοσύνην)는 하나님의 뜻에 맞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습니다(빌 2:8). 예수님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 3:26-27).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해 세례를 받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로 옷 입게 됩니다. 옷은 신분과 삶의 상징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의와 거룩함과 사랑입니다. 그리고 세례는 더러움을 깨끗이 씻는다는 의미일 뿐만 아니라 삶과 죽음과 직결되는 중요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 6:3-4).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을 때 죄에 대해 우리가 죽었습니다. ‘죽었다’는 것은 통치 개념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기 때문에 죄의 통치를 받지 않습니다. 그리고 죽음은 새 생명을 얻기 위함입니다. 이 생명은 현재의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생명입니다. 생명의 속성은 자라고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생명력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리고 생명이 있기 때문에 열매를 맺게 됩니다. 따라서 세례는 단순한 의식이 아니라 일생일대의 중요한 사건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세례에는 세 가지 효력이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죄를 사하는 효력(행 2:38), 둘째는 사망과 마귀에게서 구출해 내는 효력(롬 6:3), 셋째는 영원한 구원을 얻는 효력(막 16:16)이다.” 우리가 세례를 받았다면 내가 받은 세례가 구원의 인 침이라는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한국인 최초로 세례를 받은 사람은 노춘경입니다. 그는 한문 서적을 읽다가 서양종교인 기독교가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서양종교인 기독교는 ‘무부무군’(無父無君), 즉 아버지도 없고 군주도 부인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서양종교인 기독교에 대해 좀 더 알기 위해 의료선교사였던 헤론을 찾아가 기독교에 관한 책을 구하고자 했지만 얻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알렌을 찾아갔습니다. 알렌 선교사의 책상 위에 누가복음과 마가복음의 쪽 복음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 책을 양심의 가책 없이 옷소매에 감춘 채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을 읽은 노춘경은 언더우드 목사를 찾아갔고, 언더우드 목사로부터 기독교의 진리에 대해 자세히 듣게 되었습니다. 그가 얼마나 진지했던지 후에 언더우드 목사가 “노춘경의 눈초리는 진리를 찾으려는 갈망으로 빛나고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노춘경은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고백함과 동시에 앞으로 목숨을 걸고 예수님을 믿겠다고 서약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가 세례를 받을 때 헐버트라는 분이 대문에서 망을 보았습니다. 이는 당시 기독교를 국법으로 금하고 있었고, 외국인들과 접촉하는 것이 금지되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가 세례를 받는 것이 발각되면 어떠한 형벌도 각오해야 했습니다. 이날이 1886년 7월 11일이었습니다. 그는 죽음을 각오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처럼 세례란 생명과 직결되는 문제입니다. 세례를 사사롭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시기 위해 시험도 받으셨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라는 말씀은 부정의 부정으로, 강한 긍정을 나타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반드시 동정하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는 단순히 동정하는 것이 아니라 도와준다는 뜻입니다. 아픈 사람에게 동정만 해서는 안 됩니다. 독자를 잃은 어머니에게는 어떤 위로의 말도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아픔을 동정하실 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문제를 도와주는 분이십니다.
누가복음 7장 11-14절을 보면 독자를 잃은 한 과부가 나옵니다. 자녀가 부모보다 먼저 죽으면 부모의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도 과부의 독자, 다 큰 청년을 잃은 어머니의 심정은 그 무엇으로도 위로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눅 7:13). 그리고 가까이 가셔서 그 관에 손을 대시고 말씀으로 청년을 살리심으로 과부의 슬픔과 고통을 친히 해결해 주셨습니다(눅 7:14).
인간의 근본 문제는 연약함에서 옵니다. 인간은 연약하기 때문에 원하지 않게 죄를 짓습니다. 인간은 연약하기 때문에 사탄의 시험을 받아 넘어집니다. 사탄이 우리에게 의심을 심어놓으면 아무리 강한 사람도 넘어집니다. 아무리 강한 사람도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면 소금에 절인 배추처럼 무기력해집니다. 강한 삼손도 이방 여자의 꾐에 빠졌을 때 분별력을 잃고 비참한 최후를 마쳤습니다. 솔로몬도 이방 여자의 꾐에 빠졌을 때 그 모든 지혜를 상실하고 헛되고 헛된 사람으로 마감했습니다. 우리는 연약하기 때문에 환난과 핍박을 받을 때 넘어지기 쉽습니다.
예수님은 강한 사람을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연약한 자를 위해 오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 없습니다. 겸손하고 연약한 사람만이 예수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세상은 연약한 사람을 무시하고 퇴출시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연약한 사람을 동정하시고 도우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예수님께 나가면 때를 따라 그분의 도우심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때를 따라’란 적절한 시기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적절한 시기에 적절하게 도와주십니다. 적절한 시기에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시고, 가장 좋은 선물을 주십니다.
‘은혜의 보좌’란 하나님이 계신 장소, 성막 안의 속죄소로(히 9:5, 출 25:21)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 은혜의 보좌에 앉으셔서 우리의 죄를 속하시고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 은혜의 보좌에 나아갈 때 용서와 사랑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 은혜의 보좌에 나아갈 때 우리는 어떤 죄를 지었든지 긍휼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나아가다’란 기도를 뜻합니다. 그런데 나의 허물과 죄만을 생각할 때는 나아갈 수 없습니다. 나의 죄의식, 불신, 무지 등은 담대히 나아가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으로 불신을 극복하고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면 사죄의 은혜를 덧입게 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면 피곤하고 지친 영혼에 위로와 긍휼을 덧입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개인적인 문제와 현실 문제 앞에 쉽게 넘어집니다. 또한 죄악된 본성 때문에 쉽게 넘어집니다. 회의와 불신과 절망, 그리고 사탄의 송사에 넘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문제를 들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 기도하면 사탄의 송사를 이길 수 있습니다. 내가 어떤 죄를 지었든지, 지금 어떤 상황이든지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 은혜의 보좌로 담대하게 나아가 기도하면 십자가의 보배로운 피가 우리의 내면을 사죄의 은총과 긍휼과 소망으로 채워 줍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승인을 위함
예수님의 세례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승인의 절차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세례 받으실 때 세 가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막 1:10-11).
하늘이 갈라짐
예수님이 세례 받으실 때 하늘이 갈라지는 우주적인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하늘이 갈라진 사건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시는 순간, 성전의 성소와 지성소를 가로막은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진 사건과 일맥상통합니다(막 15:38, 마 27:51, 눅 23:45). 다시 말해 하늘이 갈라졌다는 것은 아담의 죄로 인해 막혔던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담이 무너지고 하늘이 열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만이 인간과 하나님이 교제할 수 있는 새로운 살 길임을 보여줍니다(히 10:19-20).
성령께서 비둘기같이 예수님께로 내려오심
예수님이 세례 받을 때 성령께서 내려오셨습니다. 성령 강림은 B.C. 8세기경 선지자 이사야가 이미 예언했습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사 11:1-2).
예수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 모략과 재능의 영,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께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므로 예수님이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습니다(행 10:38). 성령께서는 능력과 지혜의 근원이시요, 모든 사탄의 세력을 물리칠 수 있는 원천이십니다.
‘비둘기’는 온유, 겸손, 순결, 평화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온유와 겸손과 순결과 평화의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메시아의 사역은 주 여호와의 영이 내리심으로부터 시작됩니다(사 61:1-2). 이는 복음 역사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요, 악령과의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성령 충만해 모든 악령과 사탄의 세력을 이기셨습니다(행 10:38). 우리가 진실하게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하면 성령께서 우리에게 임하십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아들로 선포하심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하나님은 세계만방에 예수님이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시기 위해 하늘 영광과 권세를 다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로부터 멸시와 배척을 당하시고 많은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침내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예수님을 죽으신 지 3일 만에 능력으로 부활시키셔서 주의 주, 왕의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낮아짐의 절정
죄 없으신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것은 낮아짐과 겸손의 절정입니다. 사람들은 조금만 인정해 주거나 자리를 잡는 듯싶으면 목에 힘을 주고 다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이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빌 2:8). 따라서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낮은 자리, 겸손의 자리로 가야 합니다. 겸손은 가장 안전한 자리입니다. 작은 자가 천 명을 이루고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룹니다.
“그 작은 자가 천 명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사 60:22).
하나님은 바울에게 가시를 주셨습니다. 이는 바울로 하여금 낮아지고 겸손하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바울은 이를 깨닫고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고 간증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고후 12:10).
“못생긴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을 쓰십니다. 하늘 문은 겸손하고 낮아진 사람에게 열립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작아지고 낮아진 데서 나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자신의 힘을 빼고 하나님을 의지할 때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내세우고 어깨에 힘 준 사람과는 절대로 함께하시지 않습니다. 모세는 초기에 자신의 힘과 지혜와 능력을 의지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그를 쓰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광야에서 40년간 자기를 의지하던 것들을 모두 버렸을 때 그를 들어 사용하셨습니다.
겸손은 기도로 나타납니다. 게으른 사람이 기도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교만한 사람이 기도하지 않습니다. 내 능력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엎드려 기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기 위해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유대의 요단 강까지 먼 길을 걸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무 죄가 없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시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세례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공적인 선포입니다. 또한 이는 예수님의 겸손하심의 절정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 받으신 예수님을 배워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