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세종대왕의 업적
김하영
1397년 세종대왕은 정안군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세종대왕은 어린 나이부터 보통의 책은 거의 다 읽었고, 벌써<초사>,<좌씨전> 등 어려운 책을 읽었습니다. 1408년 세종대왕의 나이는 12살이었다. 세종대왕은 왕자로서 불리는 이름인 충녕군에 봉해졌다. 충녕은 책읽은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슬쩍 보는게 아니라 그 뜻을 완전히 알 때 까지 몇 번 이고 되풀이 해가며 읽었다.
충녕은 학문뿐만 아니라 효성도 지극하였다. 태종은 충녕이 맏아들이였으면하는 마음을 누르지 못 하였다. 1404년 태종은 맏아들 양녕을 왕세자로 정했습니다. 하지만 양녕은 클수록 공부는 멀리하고 사냥만하며 술타령만 하였다.
그러한 아들을 보자 태종은 못 마땅하였다. 어느날 상감이 태종에게 말하였습니다. “매일 술 마시고 놀기만 하는 양녕에게 왕위를 물려주면 안됩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때 밖에서 그 말을 들은 양녕은 왕이 될 수 없다는 생각에 며칠 동안 방에만 있었다. 하지만 양녕은 임금 보다 사냥이 더 좋아 충녕 에게 왕세자 자리를 물려 주기위해 일부러 미친 척을 하며 아무에게나 욕설을 하고 다녔다. 그러자 태종은 충녕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마침내1418년 조선의 제4대 임금 세종대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 뒤, 세종과 학자들은 우리말을 표현할 수 있는 ‘훈민정음’을 만들어 내자 세종이 대궐안에 정음청 이라는 기관을 설치했다. 새로 만든 글자가 실제 생활에서 사용하는데 불편한 점은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정음청에서 실험을 거친 세종대왕은 새로 만든 글자가 우리말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졌다. 세종은 마침내1446년에 훈민정음을 나라 안에 모든 백성에게 알렸습니다. 발음기관의 모양을 따라 만든 총28자의 한글이 세상을 빛 보게 되었다. 훈민정음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 라는 뜻으로 백성들을 애틋하게 여기는 세종대왕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1446년 9월 훈민정음이 정식으로 반포되었다. 세종은 다음과 같이 밝혔다. “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 듯이 통하지 않는다. 이런 까닭은 어리석은 백성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 그 뜻을 담아 표현 할 수 없다. 이를 매우 딱하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자를 만들었구나. 쉽게 익혀 사용 하게 하라” 라는 백성을 사랑하는 세종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말이다. 그렇지만 한글이 제대로 쓰이는데 시간이 필요했다. 그 뒤,400년이지나 조선 말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국문’ 이라 불리며 한자와 같이 쓰이기 시작했다. 세종은 과학기술에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다. 재주만 있으면 신분에 상관없이 등용하여 중히 섰다. 그중에서도 장영실이 있었다. 장영실은 손재주가 뛰어났다. 세종은 그 재주를 인정해 벼슬까지 내렸다. 장영실이 발명한 기계는 농사에 필요한 기계, 물시계, 간의대등 그 외에도 발명한 기계가 많다. 그리고 세종대왕때 발명된 기구들로는 혼천의, 암부일구, 자격루, 측우기, 수표, 풍기대 등이 있다. 세종은 문화를 꽃피운 임금 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영토를 확장한 정복 군주이기도 하다. 남쪽으로는 쓰시마섬, 북쪽으로는 4군6진을 개척해 오늘날의 한반도 국경선을 확립하였다. 또, 세종은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하였다. 한글을 창제하고 과학의 기술을 꽃피우고 나라의 영토를 넓힌 것 말고도 억울하게 굶거나 다치거나 벌을 받지 않게 했다. 1450년2월 세종대왕이 54세 때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10월 9일을 한글날로 확정했다고 한다.
-내 생각-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만들었기에 지금 우리는 편하게 한글을 사용하고 있다. 만약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만들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우리는 어려운 한자를 쓰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세종대왕님께 감사하다.
<< 자료출처 >>
한민족을 빛낸 우리 왕 글 김영숙 그림 배종숙
세종대왕 글 이주철 그림 홍성찬
한글을 만든 뛰어난 세종대왕 글 미추홀 역사편찬위원회 그림 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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