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의 업적
조한별
정조는 영조(조선 제 21대 왕)의 손자로,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정조는 8세에 세손으로 책봉되었다. 하지만 열 한살이라는 어린나이에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게 되자(노론의 대신들이 사도세자가 음모를 꾸몄다고 거짓말을 하였다.), 영조는 정조가 왕위를 잇게 하기 위해서 정조를 효장세자의 아들로 삼았다. 영조 51년때, 할아버지 영조의 건강이 많이 안 좋아지자, 정조에게 대리청정, 즉 영조 대신 나라를 다스리게 하였다. 할아버지 영조가 죽고, 노론의 대신들은 정조가 죄인(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정조가 왕위를 잇는 것에 대해 반대하였지만, 다른 대신들의 도움으로 정조는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르고, 영조의 탕평책(사람들이 벼슬을 골고루 얻게 하기 위한 정책)을 계승시키고, 학자들이 학문을 연구하는 곳(규정각)을 설치하였다. 또, 상업을 발전시켰다.(이것들의 목적은 백성들의 안정과 왕권강화이다.)후에는 수원에다가 화성을 건설하였다. 화성을 건설하는데는 정약용이라는 대신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당시에는 성을 건설할 때 가장 힘든 일은 돌을 나르는 것이었다. 그래서 정약용은 돌을 쉽게 나르기 위해 ‘거중기’와 ‘녹로’를 발명하여 화성건설에 큰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배를 이어서 화성으로 가는 배다리를 건설하였다. 이렇게 백성들과 정약용의 도움으로 화성이 건설되고, 정조는 배다리를 지나서 화성까지 행차할 예정이었다. 그래서 정조를 싫어한 노론의 대신들은 정조를 죽이기 위하여 정조가 행차하는 도중에 도적 몇 명을 도입시켜 정조가 행차하는 배다리를 태우기로 몰래 결정하였다. 하지만 정조는 이럴 것이라는 것을 눈치채자, 장영용 대장에게 배다리를 지키라고 지시를 내렸다. 그날밤, 정조는 행차를 시작했다. 배다리를 건너고 있었는데, 갑자기 검은 옷을 입은 도적때가 들이닥쳐 정조의 군사들을 죽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장영용 대장의 군사들이 나타나 그 도적들을 포위해서 도적들을 잡아내고, 다음에도 또 이런 일이 있을것이라고 예측했다. 이 일을 안 정약용이 도화거의 화원들에게 화성행차를 그리다가 수상한 사람들을 보면 즉시 자신에게 말하라고 일렀다. 그리고 노론의 대신들의 우두머리인 심 대감의 자객들이 진짜로 정조를 또 죽일 예정이었다. 하지만 그 자객들도 화원들에 의해서 잡히고, 정조는 백성들의 환호와 함성을 들으면서 안전하게 행차를 하였다. 그 때는 정조는 백성들이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있게 하였고, 그리고 백성들이 자기의 가까이에 올 수 있게 하였다. 백성들과 친해질려고 한 것이다. 다시 정조가 했던 일로 돌아가자. 당시, 양반과 노비여자와 혼인하는 일이 많아 서자가 많았다. 하지만, 아무리 아버지가 양반이라도 어머니가 노비이기 때문에 서자도 많은 차별을 받았고,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형을 형이라고 부를수가 없었다. 그리고 서자는 과거에 급제될 수 없었고, 관리가 될 수 없었다. 이런 신분의 벽 때문에 많은 인재들이 소비되어서 정조는 서자도 과거에 급제하여 관리가 될 수 있게 하였다. 이제 조선의 큰 행차를 적는 의궤에 들어있는 그림을 알아보자. 말 그대로 이궤는 조선의 큰 행차를 적는 문서라고 할 수 있다. 의궤중에는 회갑잔치를 연 그림이 있다. 그림이름은 ‘봉수당진찬도’이다. 화성 행궁의 봉수당에서 열린 혜경궁 홍씨의 회갑잔치를 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정조는 역시 효심이 많다. 두 번째는 양로 잔치이다. 그림이름은 ‘낙남헌양로영도’이다. 화성 행차 마지막 날, 정조는 화성 행궁의 낙남헌에서 화성에 살고있는 모든 노인들을 초대하여 임금이 먹는 수라상을 차려 주었다. 이것도 정조의 효심과 신분의 차별을 두지 않겠다는 정조의 깊은 뜻이었다. 이제 화성의 구조에 대해 알아보자. 먼저 소개할 것은 장안문이다. 화성의 4대문 가운데 북쪽에 있는 문이다. 남문인 팔달문과 크기와 생김새가 같다. 두 번째로는 화홍문(북수문)이다. 화홍문은 맑은 물이 흐르는 수문이다. 예전에는 마을 사람들의 빨래터로 쓰였다고 한다. 세 번째는 서장대다. 장대는 군사 지휘소다. 화성에는 동서 두 곳에 장대가 있는데 이 장대는 말 그대로 서쪽에 있는 장대다. 네 번째는 아까 전에 말한 팔달문이다. 남쪽문으로, 성문 앞에 반원 모양의 둥근 성이 한 겹 더 있다. (장안문도 있다.) 다섯 번째는 봉돈이다. 봉화를 올리는 곳으로, 평소엔 하나, 적이 나타나면 둘, 적이 가까이 오면 셋, 적이 국경을 넘어오면 넷, 적과 싸울 땐 다섯 개의 봉화를 올렸다. 다음으로는 화성은 어떻게 만든 도시인지 알아보자. 화성은 도시에서 스스로 자급자족 할 수 있게 설계한 계획도시였다. 성 안은 상업을 중심으로, 성 밖은 농업 생산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 모든 설계는 정조가 설계하였다. 정조는 화성 건설에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다. 정조는 그런 화성에서 부모님께 효도를 마음껏 해 드렸다. 한 마디로 화성을 수원에다가 건설한 진짜 이유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이 있고, 화성에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잔치를 하기 위해서였다.
-내 생각-
내 생각에는 정조가 한 일을 보면 정조는 누구를 배려하는 마음이 많은 것 같다. 정조가 한 일을 보면 효심도 있고, 백성을 위한 정책도 많기 때문이다. 만약에 정조가 왕위를 잇지 않고 다른 사람이 왕위에 올랐다면 오늘날에 멋진 수원화성과 배다리를 보지 못했을 것이다.
-책 이름-
ㅇ정조와 화성행차-윤영수
ㅇ수원 화성에서 다진 의지-서유진,배성호
ㅇ한눈에 쏙 인물사전-안은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