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자랑스런 장군, 이 순 신
김하진
이순신은 사형제중 셋째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이순신은 어릴 때부터 아이들과 전쟁놀이를 했는데 항상 대장역학을 맡고 이순신의 부하역할을 맡은 아이들은 항상 이겼습니다. 그리고 이순신은 약한 아이를 괴롭히는 아이들을 보면 스스로 나서서 혼내주고 어려운 아이에게 아낌없이 도와주었습니다. 스무 살이 된 이순신은 고을 원님의 딸인 방 씨와 혼인하여 두 아들 회와 예를 얻었습니다. 이순신이 스물여덟 살이 되던 해 이순신은 무과 시험을 보기로 했습니다. 이순신은 이 시험에서 활쏘기 ,창던지기, 칼쓰기 3종목에서 1등을 하였습니다. 이제 마지막 간문인 말 달리기가 남았습니다. 한사람씩 말을 타고 달렸습니다. 이순신도 말을 타며 순식간에 넓은 뜰 한바퀴를 돌았습니다. 이순신은 말위에서 여러 가지 재주를 부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순신이 타고 있던 말이 비틀거리며 옆으로 기울어졌습니다. 그와 함께 이순신도 땅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말굽이가 돌부리에 걸린 탓 이었습니다.말에서 떨어진 이순신은 쓰러진 채 꼼짝도 하지 못 했습니다.잠시 후, 죽은 줄만 알았던 이순신이 정신을 차리고 벌떡 일어나 부러진 다리를 굵은 버드나무가지로 동여매었습니다. 아픔을 참아내며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다시 말 위로 올라와 달렸습니다. 그러나 이순신은 말에서 떨어졌기 때문에 시험에 붙지 못 했습니다.이순신은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4년 뒤 시험을 다시 응시하여 장원 급제에 합격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이순신은 한성에 훈련한 봉사로 옮겨가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병조정략서익이 이순신을 찾아와 친척 한 사람을 승진시켜야겠다고 서류를 꾸며달라고 하여 이순신은 벼슬을 높이려면 그만한 까닭이 있어야 한다며 거절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해 겨울에 서익은 이순신을 충청도 병마절도사의 군관으로 쫓아냈습니다. 그 이듬해 이순신은 수군만호로 승진되어 전라도로 갔습니다. 만호는 해안을 다스리는 경비대장인데 이순신은 그때 바다와 처음 인연을 맺었습니다. 이순신은 총명하여 전쟁에 사용할 배를 만들었습니다. 이 배들로 많은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크게 3가지로 분류 할 수 있는데 판옥선, 안택선, 마지막으로 가장 유명한 거북선이 있습니다.
<판옥선>
우선 판옥선은 둘레를 널빤지로 이어 붙이고, 함포와 수군이 있는 갑판 한 가운데에 지휘관이 서서 지휘하는 집을 지어놓았다. 해서 판옥선이라고 한다. 조선 수군의 주된 전투선인 판옥선은 배 밑바닥이 평평하게 되어있다. 이렇게 한 까닭은 썰물 때 배가 안전하게 갯벌에 내려앉게 하려는 것도 있지만, 전투를 할 때 바로바로 방향을 틀려고 일부러 그렇게 만들었다고 한다. 대게 이백 남짓 되는 군사가 탔답니다. 판옥선은 주로 소나무로 만들었다. 그리고 판자를 이을 때 안택선과 달리 참나무로 깎은 나무못을 썼다. 소나무나 참나무는 물을 먹으면 잘 불어나는데 이렇게 불어나면서 서로 꽉 붙들어서 훨~씬 더 단단하다고 한다. 그래서 무거운 대포를 여러 대 실을 수 있고 배위에서 포 사격을 해도 전혀 문제가 없다.
안택선
‘갑판 위에 집을 지어 놓았다’해서 이름이 안택선이다. 일본 수군의 주된 전투선인 이 배의 길이가 30미터쯤으로 탈 수 있는 병사 수까지 판옥선과 비슷하다. 배의 밑이 뾰족해 물의 저항이 적어 빠르지만 방향을 바꾸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재료가 삼나무나 전나무라서 아주 약하다고 한다. 더구나 판자를 쇠못으로 박아 있는 탓에 녹이 잘 쓸어 나무가 썩기 쉬웠다.
<거북선>
임진왜란 직전 이순신이 펄로 만든 세계 최초 공격용 전투함이다. 왜군을 무찌르는데 크게 이바지한 거북모양의 철갑선이다. 등에는 창검과 송곳을 꽂아 적이 오르지 못하도록 하였고 앞머리와 옆구리 사방에 화포를 설치하였다. 입으로 대포를 쏘고 안에서는 밖을 내다 볼 수 있도록 했지만 밖에서는 안을 보지 못하도록 만들어 놓았다.
난중일기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7년 동안 이순신이 쓴 일기이다. 필사본으로 1592년 5월 1일부터 1598년 9월 17일까지 기록되어 있다. 전투 후의 기록, 수군 통제 전술, 부하들에 대한 상벌 등을 비롯하여 편지 글이나 어머님을 그리워하고 부인을 생각하며 자식을 걱정하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현재 현충사에 보관되어 있으며 국보 제76호로 지정되어 있다.
한산도 대첩 1592년 임진왜란 때 한산도 앞바다에서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대파한 해전이다. 이순신은 경상남도 공선의 견내량에 있던 왜국 함대 70척을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한 뒤 학익진으로 일본 수군을 크게 물리쳤다. 임진왜란 3대첩중 하나이다. 명량대첩 1597년 9월16일 백의 종군에서 풀려나 통제사로 돌아온 이순신 장군은 단 13척의 배를 이끌고 왜 133척에 맞서 싸웠고 31척을 격침시키는 대승리를 거두었다. 이 싸움으로 인해 조선은 해상권을 되찾을 수 있었다. 노량해전 1598년 11월 19일 조선 수군가 일본함대가 벌인 마지막 해전이다. 전투는 승리했으나 이순신장군은 이 싸움에서 전사하셨다. 전사하실 때 이순신 장군은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마라”라는 명언을 남기셨다. 세계 해 전사에서 가장 이름난 전쟁 넷을 고르면 살라 마스 해전, 칼레해전, 한산대첩, 트하팔가르 해전이 있다. 그런데 역사가들은 이 가운데서도 한산대첩을 가장 뛰어난 해전으로 손 꼽았다. 그 이유는 다른 해전과 달리 물에서 쓰기 힘든 진법을 바다에서 써서 이긴 전쟁이기 때문이지요. 더구나 쇠로 지은 전함도 아니고 또 기계로 움직이는 배도 아니고 오직 바람과 사람의 힘으로 노를 저어 움직이는 나무배를 가지고서 말이다. 이순신 장군은 명량대첩 때 13척에 배로 133척에 배에 맞서 싸워 대승리를 거두었다. 이로 인해 해상권도 되찾았다고 하니 정말 대단한 것 같고 사람들이 이순신 장군은 존경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또 어렸을 때부터 용감하고 리더십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순신 장군이 없었더라면 그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의 나도 존재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이순신장군님, 감사합니다!
․ 조선 수군의 찬란한 등불 이순신과 명량대첩 - 윤영수
․ 이순신의 거북선을 수호하라 – 강용범, 선희영
․ 우리 겨레 역사 인물 100(이순신) - 백명식
․ 거북선을 만든 바다의 명장 이순신 – 미추홀역사편찬 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