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신년 사도행전 2:42-47
초대 교회의 특징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행 2:42).
건강한 교회하면 초대교회입니다. 초대교회는 예루살렘교회와 안디옥교회를 일컫습니다. 본문은 예루살렘교회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초대교회의 예루살렘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교회는 십자가와 부활을 경험하고 목격하고 체험한 사람들의 산 증언을 통해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교회는 예수님의 교훈을 듣기 위해, 좋은 생활규범이나 윤리를 배우기 위해 모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강렬하게 느끼고 의식하며 모였습니다. 그들은 영적 생명을 얻고, 영생을 얻기 위해 모였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와 동행하시고 함께 하심을 의식하며 모였습니다.
우리는 금년에 초대교회인 예루살렘교회의 아름다운 모습을 배우는 한 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삶속에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심을 느끼고 체험하며 살기를 기도합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구체적인 특징은 여섯 가지였습니다.
첫째, 사도의 가르침을 받은 교회였습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They, devoted themselves to the apostle's teaching and to the fellowship, to the breaking of bread and to prayer}.”(행 2:42)
‘힘쓰다(devoted)’는 헌신하다는 뜻으로, 이 문장의 주동사입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는데 헌신했습니다. 그들은 서로 교제하는데 헌신했습니다. 그들은 떡을 떼는데 헌신했습니다. 그들은 기도하는데 헌신했습니다. 그리고 헌신은 시간과 물질과 자신을 드리는 것을 포함합니다.
그들은 사도들로부터 성경을 배우는 데 헌신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배우는데 시간을 드렸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배우는데 물질을 드렸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배우는데 자신의 마음을 드렸습니다. 대개 성령 충만하다고 하는 사람들은 배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나는 직통 계시를 받는다며 자신의 주관적 체험에 만족하여 성경을 읽거나 배우려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은 성령 충만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성령을 체험한 그들은 더욱더 열심히 사도들로부터 성경을 공부했습니다.
우리가 그 사람의 건강을 알아보는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밥맛이 있는가, 없는가를 보면 압니다. 밥맛이 없으면 일단 건강에 문제가 있다고 보면 됩니다. 건강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맛이 없습니다. 반면에 건강한 사람은 무엇이든지 맛있게 잘 먹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영적으로 건강하지 않은 사람은 말씀을 배우거나 듣지 않습니다. 말씀을 들으며 딴생각을 합니다. 말씀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고 듣습니다. 말씀을 듣지 않으니 말씀이 들리지 않습니다. 말씀이 들리지 않으니 믿음이 성장하지 않고, 믿음이 성장이 없으니 영적인 기쁨이 없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말씀이 꿀처럼 답니다. 다윗은 주의 말씀이 내 입에 꿀보다 더 달다고 했습니다(시 119:103). 성경 공부가 지루하지 않습니다. 청교도들의 예배 시간은 2, 3시간이었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 들어도 더 듣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듣지 않고 배우지 않는 사람은 영적으로 배부른 사람입니다. 배가 부르다는 것은 영적으로 교만하다는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의 특징은 배우려하지 않습니다. 교만의 반대는 겸손인데, 겸손한 사람은 배우는 마음이 있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다 안다며 배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겸손한 사람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고개를 숙이고 배우려고 합니다. 가르치기에 앞서 먼저 듣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에게 천국이 임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
시장이 반찬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배가 부르면 진수성찬을 차려놓아도 먹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장하면 꽁보리밥을 찬물에 말아먹어도 맛이 있습니다. 이처럼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성경만 읽어도 눈물을 흘리며 은혜를 받습니다. 북한 지하교회 성도들은 말씀만 읽어줘도 눈물 콧물 흘리며 은혜를 받는다고 합니다.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은 심령이 갈급했기 때문에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는데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했습니다.
사도들은 학문이 없는 갈릴리 어부 출신들이었습니다. 사도들이 성령 충만하여 말씀을 전했을 때 저들이 학문이 없는 갈릴리 촌놈들이 아니냐고 조롱했던 그들이었습니다. 그런도 그들은 베드로 무릎 아래에서 배웠습니다. 베드로와 요한 앞에서 겸손하게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세상 학문을 배우고 신학 사상을 듣기 위해 모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은사를 받기 위해 모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듣고 배우기 위해 모였습니다. 십자가와 부활과 보혈의 능력을 듣고 배우기 위해 모였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어떠해야 합니까? 우리는 금년 한 해에 말씀을 듣고 배우는데 헌신해야 합니다. 예수님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권능과 십자가의 고난까지도 배우는데 자신의 삶을 헌신해야 합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신 사랑과 은혜를 경험하기 위해 헌신해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배우고 가르침을 받는데 시간을 드리고 물질을 드리고 자신을 드릴 때에 구원과 영생, 중생을 체험하고 성화에 이를 수 있습니다.
둘째, 교제하는 교회였습니다.
교제는 노닥거리는 것이 아닙니다. 교제는 헬라어로 코이노니아(κοινωνία)인데 하나님의 가족에 참여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교제는 우리가 그리스도께 하듯이, 서로에게 헌신하는 사이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요일 3:16).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가족으로 태어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가 됩니다. 성도는 믿음뿐만 아니라 소속이 중요합니다. 혈육은 세상으로 끝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의 가족은 하나님 나라에 이르기까지 영원합니다.
성도의 교제가 필요한 것은 첫째로 인간은 서로 필요로 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홀로 살아가도록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함께 동행자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서로가 돌봐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둘째로 교제를 통해 안전하고 더 멀리 걸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혼자 여행한다는 것은 지루합니다. 혼자는 멀리 걷지 못합니다. 그러나 둘이 여행하면 피곤한 줄 모릅니다. 둘이 걸으면 더 멀리 걸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여정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 여정은 길고 깁니다. 혼자는 걸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여정은 서로가 서로에게 격려하며 걸어야 하는 순례의 길입니다.
셋째로 교제는 시너지 효과가 있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의 합심은 놀라운 시너지 효과가 있습니다. 하나의 눈송이는 무력하나 많은 눈송이가 뭉쳐지면 교통이 마비됩니다. 말 한 마리는 통상 2톤의 무게를 끌 수 있다고 합니다. 산술적으로 말 두 마리가 끌면 4톤의 무게를 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두 마리가 같은 방향으로 끌면 무려 24톤의 무게를 끌 수 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둘이서 마음을 모아 합심하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납니다.
제자들이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썼을 때 오순절에 성령이 임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수에 있지 않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기도제목을 같이하고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할 때 예배당의 빈자리는 경한 일이요 인하대 인천대 연대 고려대 서울대 그리고 열방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할 수 있습니다. one mind, one Spirit로 기도하고 도전하고 놀라운 역사를 이룰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전 4:9).
넷째로 나와 함께 기뻐하고 울어줄 사람들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벧전 3:8). 우리가 기쁠 때 함께 기뻐해주면 그 기쁨이 배가 되고, 어려울 때 함께 울어주면 그 슬픔이 반으로 줄어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교회는 가족 공동체입니다. 그러면 그들의 구체적인 교제가 어떠합니까? 그들은 서로 배려했습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행 2:44-45).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상을 보면 한쪽에서는 먹을 것이 없어서 죽어가고, 다른 한 쪽에서는 잉여농산물이 넘쳐나서 버리는 모순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기심과 욕심을 버리고 서로 필요를 따라 나눠줬습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자세입니다.
셋째, 기도하는 교회였습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행 2:42).
예루살렘교회는 성령 충만을 위해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성령 충만했기 때문에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특별한 소원이 있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교회의 부흥과 성장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핍박을 이기기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기도했습니다.
기도는 신앙생활의 척도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기도생활이다.”는 말이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기도에 대해 많은 언급이 있습니다. 성경은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고 했습니다(엡 6:18). 예수님은 내 집은 만인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는 신앙과 비례합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이 기도하고, 기도하는 사람이 믿음이 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신뢰가 갑니다. 모세는 기도의 비밀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여호수아를 전쟁터에 보내 놓고 자신은 기도하러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때 모세가 산에 올라가서 두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그의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겼습니다(출 17:10-11). 모세가 손을 들었다는 것은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딤전 2:8).
우리가 한 해 승리하려면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 하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일하십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이 나 대신 싸우십니다. 윌리암 카우퍼는 승리의 비결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기도를 하지 않는 것은 싸우기를 중단하는 것,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병기를 번쩍이게 만드는 것, 사탄이 보고 두려워하는 것은 가장 연약한 성도가 무릎을 꿇을 때이다.”
승리의 비결은 기도에 있습니다. 영혼의 구원은 기도에 있습니다. 성공 또한 기도에 있습니다. 공부를 잘하는 것 또한 기도에 있습니다. 공부는 노력만으로 되지 않습니다. 집중력과 지혜와 전략이 필요합니다. 기도하면 지혜와 전략과 집중력이 생깁니다.
기도의 손은 하나님의 손입니다. 기도의 손은 능력의 손입니다. 기도의 손은 긴 손입니다. 기도할 때 우리의 영향력은 전 세계를 향하고 영원을 향하게 됩니다. 기도하는 곳에 성령의 역사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기도하는 시간을 아까워해서는 안 됩니다. 피곤한 무릎을 꿇고 기도해야 합니다.
넷째, 떡을 떼며 기뻐하는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었습니다(행 2:42후,46). ‘떡을 떼었다’는 것은 성찬과 애찬을 의미합니다. ‘성찬’은 구원의 의미를 새롭게 하는 것과 더 나아가 성도가 한 형제임을 확인하고 사랑의 나누는 것입니다. 그들은 매순간 주님의 보혈로 구원받은 은혜와 기쁨을 새롭게 하고, 한 형제가 되었음을 확인했습니다.
다섯째, 하나님을 경외하는 교회였습니다.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행 2:43).
‘두렵다’(awe)는 것은 경외심을 뜻합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영적인 권세에 대한 경외심이 있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집입니다. 따라서 교회에 들어설 때마다 경건함이 있어야 합니다. 이러기 위해 하나님의 임재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너는 하나님의 전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전 5:1상).
그리고 예루살렘교회는 사도들로 인해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권능이 있었기 때문에 표적이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표적하면 치유와 회복만을 생각하는데, 치유와 회복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실패의 이적도 있고, 살리는 이적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이적도 있습니다. 아나니아 삽비라가 한 예입니다. 하나님은 영적 생명을 살리기 위해 때로 실패도 주시고, 질병도 주시고, 고통도 주십니다. 우리는 여러 이적을 통해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해야 합니다.
여섯째, 칭송받는 교회였습니다.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행 2:47상).
‘백성들에게 칭송을 받았다’는 것은 세상에 영향력을 끼쳤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믿는 사람으로서 사람들에게 말과 삶의 태도와 행동에 있어서 뭔가 달랐습니다. 그들은 매력 있는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기 위해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먼저 언어가 달라져야 합니다. 언어는 마음과 생각에서 나옵니다. 언어 속에 그 사람의 존재와 그가 생각하는 소원과 그의 기질, 지식, 사고의 틀과 태도, 그리고 습관이 담겨져 있습니다. 언어를 통해 우리는 그 사람의 정신세계와 믿음의 세계를 알 수 있습니다. 죽고 사는 것이 우리의 혀에 달려 있습니다(잠 18:21).
언어는 생명입니다. 언어는 작은 씨앗과 같지만 씨앗 속에 생명이 약동하는 것처럼 언어 속에 생명이 약동하고 있습니다. 언어를 심으면 그 언어가 생명이 되어 열매를 맺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종류의 언어를 심느냐가 중요합니다. 죽은 언어를 심으면 죽게 되고, 사는 언어를 심으면 살게 됩니다.
그리고 언어는 창조하는 능력입니다. 예수님은 “네 믿음대로 될지라.”고 했습니다. 우리 속담에 말이 씨가 된다는 말도 있습니다. 우리의 언어는 믿음을 반영합니다. 우리의 말 속에 꿈이 담겨져 있고, 우리의 말 속에 미래가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언어를 따라 행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말을 들으시고 그 말을 따라 행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언어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영향력을 끼치기 위해서는 언어생활을 삼가야 합니다.
제임스 맥도날드는 축복받는 삶을 위한 5가지 습관에서 언어의 위험성을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그 중에 비방입니다. 대개 비방하는 사람은 가까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은 사랑하고 아끼고 귀하게 여겨야 하는데 비방으로 나타납니다. 우리는 가까이 있는 사람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리고 악평입니다. 악평은 좋은 것을 좋게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을 나쁘게 평가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좋은 점을 좋게 여기기보다는 나쁘게 여기는 좋지 못한 단점이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싫어하면 무조건 악평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다음은 원망입니다. 원망의 뿌리는 악평에 있습니다. 악평하다 보면 원망합니다. 비방과 원망과 악평은 결국 불신앙에서 비롯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할 수 있는 대로 믿음의 언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믿음의 언어는 할 수 있다는 긍정의 언어, 헌신의 언어, 감사, 칭찬 등입니다. 이런 언어는 천국방언입니다. 우리의 입술 속에 하나님의 이름이 담겨져 있습니다(골 3:17).
초대 성도들은 부정적인 언어를 긍정적인 언어로, 비방하는 언어를 감사로, 불신의 언어를 확신의 언어로, 자기중심의 언어를 헌신의 언어로, 주신 것을 늘 감사했습니다. 그들의 그런 삶은 다른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그리고 초대 교회의 특징은 찬양하는 교회였습니다. 모이기를 힘쓰는 교회였습니다. 예배를 사랑하고 전도하는 교회였습니다.
초대 교회는 배우는 교회였습니다. 초대 교회는 교제하는 교회였습니다. 초대 교회는 기도하는 교회였습니다. 초대 교회는 떡을 떼며 기뻐하는 교회였습니다. 초대 교회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교회였습니다. 초대 교회는 칭송 받는 교회였습니다. 초대 교회는 예배와 찬양과 전도하는 교회였습니다. 우리가 초대 교회를 배워 한 마음 한 뜻으로 기도하여 하나님의 놀라운 기도제목을 체험하는 한 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