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10:1-18
주 안에서 자랑하는 자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고후 10:17)
과거 헬라인들은 그들의 철학을 자랑하였습니다. 로마인들은 법과 힘을 자랑하였습니다. 현대의 미국은 부유함과 화려함을 자랑합니다. 영국은 기사도를 자랑합니다. 프랑스는 그들의 예술을 자랑합니다. 일본인들은 그들의 경제력을 자랑합니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혈통과 선민사상을 자랑합니다. 우리 민족은 족보를 자랑합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뭔가를 내세워서 자기를 자랑합니다. 그러다보니 내면보다 외모에 신경을 쓰고 외형에 치중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태반주사 백옥주사 마늘 주사 등을 맞습니다. 성경은 이런 우리들에게 네 입술로 자기를 칭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잠 27:2). 그리고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 했습니다(고후 10:17).
우리는 본문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론과 생각들을 그리스도에게 복종시키고, 하나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진 이 시대에 하나님을 자랑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 받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1. 우리의 싸움의 무기(고후 10:1-5)
바울을 대적하는 이들은 바울을 직접 대면하면 유순하지만 떠나 있으면 담대하다고 비난했습니다(고후 10:1-2). ‘유순하다’는 것은 나약하고 비겁하다는 뜻입니다. ‘담대하다’는 것은 목에 힘을 주고 잘난 체 한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교회를 더럽히는 이들을 향해 편지로 질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그들이 회개하도록 함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바울의 진심을 모르고 양들 앞에서는 비겁하게 행하고 안 볼 때에는 목에 힘을 주는 사람이라는 비난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바울이 육신에 따라 행한다고 비난했습니다. ‘육신에 따라 행하다’는 것은 율법을 무시하고 육신의 본성대로 행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들의 눈에 비친 바울은 율법을 무시하고 육신의 본성대로 행하는 것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율법에 금한 음식을 아무 거리낌 없이 먹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율법에 금한 돼지고기로 만든 돈가스와 삼겹살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이를 본 그들은 바울을 육신에 따라 행하는 자라고 비난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스스로 일하며 생명에 위험을 무릅쓰고 고린도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들을 위해 목이라도 내놓고자 할 만큼 그들을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육신에 따라 행한다느니, 비겁하고 야비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에 바울은 참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을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권했습니다. 바울은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고후 10:3-4)
‘육신에 행하다(사르키)’은 것은 육신의 본성을 따라 행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는 세속적인 세상에서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땅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속의 지배를 받기 쉽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세상에 살고 있었지만 육신의 본성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지혜와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과 싸우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무기를 가지고 싸웠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쟁에 있어서 무기는 매우 중요합니다. 모든 전쟁의 승패는 무기에 달려 있습니다. 영적인 싸움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무기를 가지고 싸우느냐로 승패가 좌우됩니다.
당시 거짓 선생들은 육신에 속한 무기를 의지했습니다. 그들은 유창한 언변을 의지했습니다(고전 2:1). 그들은 유명한 사람들이 써준 추천서를 의지했습니다(고후 3:1). 그들은 세상의 학문과 인간의 지식과 인간의 경영을 의지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런 것을 가지고 싸우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고 싸웠습니다. 이 하나님의 능력은 곧 복음의 능력입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롬 1:16). 십자가의 복음, 부활의 복음은 우리의 최대 원수인 죄와 죽음 권세를 박살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은 새 생명을 창조합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은 타락해 가는 도덕과 윤리를 회복합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은 새로운 문명을 창출합니다. 이 복음의 능력은 성령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할 때에 성령을 주십니다. 성령은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성령은 지성인 니고데모를 변화시켰고, 부도덕한 사마리아인을 변화시켰습니다.
또 이 능력은 말씀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합니다(히 4:12). 그렇습니다. 성경 말씀에는 생명이 있고 구원이 있습니다. 성경 말씀은 창조의 역사, 번영의 역사가 있습니다.
또한 이 능력은 하나님을 믿는 능력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막 11:22)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하면 어떻게 된다고 하셨습니까? 그리하면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막11:23)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단순히 믿으면 놀라운 능력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매 순간 의지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또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인 온유와 겸손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능력이 강한 인간성에서 나오는 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능력은 예수님의 성품인 온유와 겸손에서 나옵니다. 예수님은 칼을 든 자는 칼로 망한다고 했습니다. 토인비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용서의 사랑만이 문명의 꽃을 피울 수 있다고 했습니다. 바람은 외투를 벗길 수 없지만 따스한 햇볕은 행인의 외투를 벗깁니다.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은 큰 능력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무기는 모든 것 위에 뛰어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무기를 붙들고 싸울 때 하나님을 대적하는 견고한 진과 이론을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 17장에 다윗의 통쾌한 승리사가 나옵니다. 블레셋 군대가 이스라엘을 위협하였습니다. 그 이름은 골리앗이요, 가드 사람이었습니다. 가드에는 아낙 자손이 살고 있었습니다. 아낙 자손은 장대한 족속이었습니다(민 13:28-33). 그의 신장은 여섯 규빗 한 뼘(3.3m)이요, 머리에는 놋 투구를 썼고, 몸에는 비늘 갑옷을 입었습니다. 갑옷의 무게는 놋 오천 세겔(56kg)이었습니다. 그 다리에는 놋 각반을 쳤고, 어깨 사이에는 놋 단창을 메었는데, 그 창 자루는 베틀 채 같았고, 그 창은 철 육백 세겔(6.7kg)이었습니다. 그는 완전 무장하였습니다. 그 앞에는 방패 든 자가 딱 버티고 있었습니다.
이런 골리앗이 나타나 베틀 채 같은 창을 휘두르며 이스라엘을 향하여 “양 진영의 챔피언끼리 싸워서 진편은 이긴 편의 종이 되자.”고 소리 질렀습니다. 골리앗은 당장 공격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엄포만 놓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한 번만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40일간을 조석으로 나타나 위협했습니다. 골리앗이 조석에만 나타나는 것은 체구를 더 크게 보이고 위엄 있게 보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는 고도의 심리전을 펼쳤습니다. 사울은 골리앗을 볼 때마다 겁에 질려 감히 싸울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이 골리앗 앞에 선 다윗은 군에도 갈 수 없는 소년에 불과했습니다. 그는 형들이 군에 입대하자 집에서 아버지의 양을 치다가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형들을 면회를 가게 되었습니다. 그가 형들과 이야기하고 있을 때에 마침 골리앗이 나타나서 백성들을 위협하고 모욕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사울과 백성들은 기가 죽어 아무 소리도 못하였습니다. 다윗은 이 모습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분연히 일어났습니다.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누구이기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삼상 17:26하)
다윗은 그를 할례 받지 않은 자로 보았습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의 대상이었습니다. 반면에 이스라엘을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군대로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선택된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을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군대로 바라보았을 때에 골리앗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외쳤습니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삼상 17:45)
골리앗은 칼과 창과 방패로 무장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이 주는 무기를 버렸습니다. 사람들은 전쟁의 승패가 칼과 창에 있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오직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믿는데 있음을 알았습니다.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믿음만이 승리할 수 있음을 믿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을 때 개 한 마디 때려잡을 수 없는 막대기와 물매로 골리앗을 이길 수 있음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할 때 어떤 대적도 이길 수 있음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전쟁은 수에 있는 것이 아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전쟁은 하나님을 믿는 자들을 통해 역사하심을 믿었습니다. 다윗이 만군의 여호와 이름으로 나갔을 때 골리앗을 물매로 그 자리에서 때려눕혔습니다.
영적인 전쟁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라 사탄과의 싸움입니다. 따라서 만군의 여호와를 믿을 때 사탄의 권세를 제압할 수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믿을 때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고, 나의 보호자가 되시고, 나의 구원자가 되시고, 나의 목자가 되시고, 나의 방패가 되시고, 나의 생명의 구주가 되시고, 항상 내 편이 되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매사 승리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용서와 사랑은 사탄의 진지를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앞에 있는 견고한 진은 무엇입니까? 명박 산성입니까? 하나님을 부정하는 모든 이론입니다. 이 진지는 여리고 성과 같이 견고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복음의 능력이 이 진지를 파했습니다.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나니”(고후 10:5)
당시 헬라 사람들은 창조주 하나님을 부인하고 자연철학을 통해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헬라의 신화를 보면 얼마나 많은 신들이 나옵니까? 우상은 반드시 쾌락을 수반합니다. 고린도의 신전에는 공창들인 여사제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인간의 이성을 중시하는 인본주의를 발전시켰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성령의 능력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였습니다(고전 2:2-5). 이 때 헬라 지역을 지배하던 무신론의 진지가 무너졌습니다. 교만한 인간의 온갖 이론이 허물어졌습니다. 결국 복음이 승리하였고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지금도 고린도교회에 여러 온갖 문제가 많지만 결국 복음이 승리하고, 모든 고린도 성도들이 복음에 복종하게 될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복종하지 않을 때 벌하겠다고 경고하였습니다(고후 10:6).
지금 우리 주위에는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이론들이 견고한 철옹성과 같이 버티고 서 있습니다. 그 중에 물질주의와 쾌락주의가 여리고 성과 같이 버티고 서 있습니다. 포스트 모던이즘 이론에 기초한 상대주의가 교회에 만연합니다. 이단들이 우후죽순처럼 뻗어나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농담으로 여깁니다. 이런 사상들은 절대적인 단어를 거부하고 모든 것을 상대화시킵니다. 이런 사상들은 사람의 마음을 부패시키고 완악하게 만듭니다. 이런 사상과 가치관과 이념들이 좀처럼 무너질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 그리고 성령의 능력과 말씀의 능력은 이런 사상을 파하고 그리스도에게 복종시키고 하나님 나라를 굳게 세울 수 있습니다. 복음은 죄와 싸워 죄악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여 넘어뜨려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능력이 있습니다(렘 1:8). 복음은 능력이 있어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은 진지를 파할 수 있습니다.
2. 주 안에서 자랑하는 바울(고후 10:6-18)
그들은 바울을 외모로 판단했습니다(고후 5:7, 12). 그들은 추천서를 보고 판단했습니다(고후 3:1). 그들은 바울이 지식에는 능하지만 말주변이 없다고 비판했습니다(고후 11:6). 그래서 바울의 사도권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런 자들에게 너희들이 사도권을 받았다면 나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사도권을 가지고 하나님의 교회를 파괴하고 양떼들을 실족시켰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도권을 주신 목적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주께서 주신 권세는 너희를 무너뜨리려고 하신 것이 아니요 세우려고 하신 것이니 내가 이에 대하여 지나치게 자랑하여도 부끄럽지 아니하리라.”(고후 10:8)
그러므로 주님께서 주신 권세를 가지고 교회를 이간질시키고 파괴시키는 데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주신 권세를 교회를 세우는데 사용했기 때문에 지나치게 자랑해도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었습니다. 또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사도권을 가지고 편지로 그들의 죄를 질책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바울이 편지로 겁만 주는 허풍쟁이에 불과하다고 비난했습니다. 더 나아가 편지로는 무게가 있고 힘이 있지만 얼굴로 대면할 때에는 약하고 말도 시원스럽지 않다고 비난했습니다(고후 10:10). 실제로 일설에 의하면 바울은 왜소하고 대머리에다 코는 긴 매부리코에 안경을 쓰고 안질로 인해 늘 눈곱이 끼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런 바울을 보고 비난하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들에게 떠나 있으나 함께 있으나 동일했습니다(고후 10:11). 바울은 결코 비겁한 자나 나약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언제 어느 때나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양떼들을 사랑하고 대적하는 자를 섬겼습니다. 그들은 자화자찬하였지만 바울은 그들과 달랐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분량으로 나누어 주신 그 범위의 한계를 따라 하노니 곧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 우리가 너희에게 미치지 못할 자로서 스스로 지나쳐 나아간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고후 10:13-14)
‘분수’란 영역이란 뜻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영역은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선교영역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선교 영역을 주실 때에 두 가지 영역을 주셨습니다. 하나는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신 것입니다(행 19:15).
또 하나는 다른 사람이 개척한 곳에 가서 교회를 세우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 분수에 따라 일생 동안 미개척지에 가서 교회를 세웠습니다. 이 영역을 따라 고린도에까지 와서 고린도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는 자기 임의로 고린도교회를 개척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교회를 세웠습니다.
“우리는 남의 수고를 가지고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믿음이 자랄수록 우리의 규범을 따라 너희 가운데서 더욱 풍성하여지기를 바라노라 이는 남의 규범으로 이루어 놓은 것으로 자랑하지 아니하고 너희 지역을 넘어 복음을 전하려 함이라.”(고후 10:15-16)
그들은 남이 수고하여 개척한 것을 가지고 자기들이 개척했다고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남이 수고한 것을 가지고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믿음이 더욱 더 자라서 활동 범위가 더 넓게 확장되어 더욱 풍성해지를 원했습니다. 더 나아가 바울은 고린도 지역을 넘어서 로마, 서바나까지 복음이 전파되기를 원했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복음으로 세계를 개척하고자 하는 큰 비전이 있었습니다. 그의 가슴에는 세계를 복음화하려는 비전이 불타고 있었습니다.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고후 10:17-18)
바울은 자기를 자랑하는 자들에게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예레미야 9장 23-24절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치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학자들은 지혜가 좀 있다고 지혜를 자랑하고, 용사들은 힘이 좀 있다고 힘을 자랑하고, 부자들은 돈이 좀 있다고 돈을 자랑합니다. 그리고 권세가 있는 자는 권세를 자랑합니다. 자기 외모를 자랑합니다. 자기 자식을 자랑합니다. 자랑하되 과대 포장하여 자랑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자랑할 것이 못됩니다. 돈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습니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합니다(고전 8:1).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입니다(잠 16:18).
반면에 천국은 겸손한 자의 것입니다(마 11:25). 하나님은 힘 있는 강한 자를 쓰시지 않고 약한 것들을 택하여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십니다(고전 1:27). 하나님은 약한데서 온전하게 하시고, 약할 때 강하게 하십니다(고후 12:9-10).
우리는 이제 무엇을 자랑해야 합니까? 하나님을 아는 것을 자랑해야 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기 때문입니다(잠 1:7). 그리고 나를 구원하신 주님을 자랑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자기를 자랑하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복음의 비밀을 깨닫고 변하여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하)
세상의 모든 것은 헛되고 우리 주님만이 영원합니다. 우리가 일생동안 나를 구원하신 주님만을 자랑하며 살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나를 죄에서 구원하여 하나님 자녀 삼으신 하나님, 십자가의 복음 부활의 복음을 자랑하고 선포하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벧전 1:2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