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2:14-26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26)
야고보서의 주제는 ‘믿음의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의와 상반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믿음을 경원하지 않습니다. 행함의 전제가 믿음이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믿음이 반드시 행함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의 문제는 믿음의 행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말만의 종교가 아니라 믿음의 행함의 종교입니다. 예수님은 주옥같은 산상수훈의 말씀을 하시고 마지막 결론이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가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7:24). 그리고 바울도 모든 서신의 전반부에서는 믿음으로 구원의 진리를 선포하고, 후반부에서는 믿음의 행함에 대해 말씀했습니다.
믿음은 행함이 뒤따라야 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추상적이고 공허합니다. 입으로만 믿음을 말하고 행함이 없으면 그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믿음의 행함의 중요성을 배울 수 있습니다.
1. 행함이 없는 믿음은 유익이 없다(약 2:14-20)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약 2:14)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없이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구원은 오직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에만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이외에 다른 구원의 길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12)
그리고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히 11:6).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에 이릅니다(롬 1:17). 십자가의 복음을 통해서만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게 됩니다. 구원은 율법의 행함에 있지 않습니다. 만일 구원의 주체가 행함에 있다면 구원의 주체가 내가 됩니다.
인류의 역사를 보면 많은 사상과 이즘들의 부딪침이 있었습니다. 그 많은 사상과 이즘들의 뿌리를 살펴보면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헬레니즘은 인본주의요, 헤브라이즘은 신본주의입니다.
헬레니즘은 인간을 최고 권위에 두고 인간 중심으로 생각하는 반면에 헤브라이즘은 하나님을 최고 권위에 둡니다. 그리고 최고의 가치와 윤리를 하나님 안에서 찾습니다. 이 두 사상이 인간의 구원 문제에 부딪치면 극과 극으로 치닫게 됩니다. 헬레니즘은 ‘내’가 구원의 주체가 됩니다. 이런 사고의 기초 위에서 예수님을 믿게 되면 내가 무엇을 해야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반면에 성경은 “내가 어떻게 구원받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이 어떻게 구원을 베푸셨는가?”를 말씀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주신 복음을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말씀했습니다. 믿어 의롭게 된다고 하는 그 믿음도 내 의지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셔야 합니다. 다시 말해 구원은 인간의 행위를 100% 배제합니다. 구원은 내 의지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은사, 곧 선물입니다.
이제 믿음의 의인이 되었으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오직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로마서 1-4장의 내용은 믿음의 구원의 원리에 대한 말씀이고, 로마서 5-8장은 믿음으로 구원받은 삶에 대한 말씀입니다. 로마서 1-4장에는 ‘믿음’과 ‘산다’는 단어가 25대 2, 5-장에서는 2대 25의 비율로 사용했습니다. 이는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으며,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았으면 오직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으면 삶도 의로워야 합니다. 어린 시절에 어머니는 늘 똑바로 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머니의 “똑바로 살라”는 말씀은 “삼강오륜”에 기초한 삶이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으면 성경에서 말씀하신 대로 똑바로 살아야 합니다.
지금 성도들이 사회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여기에는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믿음의 행함이 없는데서 온다고 봅니다. 우리가 조건 없이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면 이제 조건 없이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 때 예수님의 아름다운 덕이 드러나게 됩니다.
세상 어느 종교도 한번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법은 없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에만 있는 유일무이한 진리입니다. 그렇다면 이를 자랑만 하고 행함이 없다면 그 믿음은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 받았다면 이제 배고픈 사람에게 밥을 주고, 헐벗은 사람에게 옷을 입혀주어야 합니다(약 2:15-17).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입니다.
어느 날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찾아와 어떻게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를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심중을 아시고 율법의 핵심이 무엇이냐고 반문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는 주저 없이 율법의 핵심을 정확히 알고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눅 10:27)라고 대답했습니다. 율법의 핵심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대답을 들으시고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눅 10:2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문제가 알고만 있지 행하지 않는 것을 아시고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행하라’는 것은 현재 명령형으로 계속 행하라는 것입니다. 죽을 때까지 하나님 사랑,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이를 행하지 않았습니다(눅 11:46). 그는 입과 머리만 있었지 뜨거운 가슴이 없었습니다. 이러고도 그는 자신이 그 누구보다도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으로 착각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을 비유하여 말씀하셨습니다(눅 10:25-37).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간 것을 보면 유대인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까지는 약 27km가 됩니다. 이 길은 가파르고 바위가 많고 계곡이 깊어 강도들의 출현이 많아 일명 ‘피의 길’이라고 해습니다. 강도들은 한 유대인의 돈을 뺏고 옷을 벗기고 때려서 실신 상태가 이르게 만들었습니다. 그를 내버려 두면 죽게 되었습니다. 그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거룩한 제사장 옷을 입은 제사장이 지나가다가 강도 만나 피투성이가 되어 신음하는 그를 보았습니다. 그는 제사장으로서 마땅히 도와주어야 옳습니다. 강도를 만난 사람은 그들이 혐오하는 이방인이나 사마리아인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보고도 지나갔습니다.
그 후 레위인이 그 장소를 지나갔습니다. 레위인은 성전에서 하나님의 일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 또한 마땅히 그를 돌보아 주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도 못 본 척하고 지나갔습니다. 아마 그들의 머리에서는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이 맴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보고 그대로 지나쳐 버렸습니다.
왜 그리 했을까요? 이는 그를 돕다가 강도를 만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과 나 말고 다른 사람이 도와주겠지 하고 지나쳐버렸는지도 모릅니다. 그들의 문제는 한 마디로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경건한 모습은 있었지만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이기적이고 계산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시간과 물질을 계산했습니다. 그들은 희생을 싫어했습니다. 그들은 입바른 말은 잘 했지만 내면에 사랑이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뜨거운 가슴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레위인과 제사장을 욕하기 쉽습니다. ‘아니 그런 사람이 어디 있어!’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제사장과 레위인은 우리의 모습이요, 나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바쁜 마음과 부담스러운 마음으로 인해 지나친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2016년 8월에 대전에서 택시 기사가 심장에 문제가 있어 다른 차를 들이받고 택시가 멈추었습니다. 그 택시를 탔던 승객 두 명은 자기 가방을 들고 내려 다른 차를 타고 가버렸습니다. 한참 후 길 가던 사람이 119에 신고했지만 이미 그는 심장이 멈춘 상태였습니다. 그 택시에 탔던 승객이 빨리 신고만 했다면 그는 살 수 있었습니다. 그 승객은 왜 신고를 하지 않았는가를 물었더니 인천공항에 시간에 맞춰 가려니 바빴고 또한 다른 사람이 신고할 줄로 알고 그대로 갔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어떤 사마리아인이 여행 중에 그곳을 지나가다가 그를 보았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과 유대인들과는 서로 상종하지도 않았습니다. 아마 사마리아인이 강도를 만난 사람을 도와주려고 하다가도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냥 지나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겼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그의 마음은 그의 곁을 그대로 지나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그를 돕도록 했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그가 유대인인지, 이방인인지, 어떤 신분인지 전혀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가까이 가게 했습니다. 그를 돕다가 드는 시간과 비용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그로 하여금 모든 것을 초월하여 순수하게 도울 수 있게 했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이해득실을 넘어서게 했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나중에 어떻게 될 것인가에 개의치 않게 하였습니다.
그는 즉시 달려가서 포도주와 기름을 상처 부위에 발라 주었습니다. 포도주는 소독제 역할을 하고, 기름은 진통제 역할을 합니다. 그는 즉시 응급조치 하고 자기 짐승에 태워서 주막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는 데리고 가서 밤새 간호했습니다. 이튿날에는 두 데나리온(장정 이틀 분의 품삯)을 주막 주인에게 주고 이 사람을 잘 돌보도록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치료비가 더 들면 일을 마치고 돌아올 때에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는 끝까지 책임성 있게 돌봐주었습니다. 그는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선한 일을 했습니다.
사람이 의무적으로, 선한 마음으로 돕는 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몇 번 하다가 피해의식이 들어 도울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상황을 넘어서서 도울 수 있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이요,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과 영생을 얻었습니다(요 3:16). 예수님은 이 비유를 말씀하신 후에 그에게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냐고 물으셨습니다. 이에 그는 자비를 베푼 자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대답을 들으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눅 10:37하)
우리의 이웃은 누구입니까? 바로 지금 내 주위에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강도를 만난 사람들이 많습니다. 많은 이들이 각종 사탄의 뿔에 찔려 신음하고 있습니다. 정욕의 뿔, 허무의 뿔, 절망의 뿔, 욕망의 뿔, 무기력의 뿔, 두려움의 뿔, 염려의 뿔, 의심의 뿔, 불신의 뿔, 그리고 각종 이단의 뿔에 찔려 영혼과 가정이 파괴되어 신음하고 있습니다.
누가 믿음의 사람입니까? 지금 현재 여기(now and here)에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돕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지금 말씀으로 그들을 도와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기도로 그들을 도와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사랑으로 그들을 도와야 합니다. 사랑이란 실제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을 돕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많은 장애와 장벽을 넘어서서 돕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역동적으로 행하고 베풀고 섬기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혀로만 하지 않고 진실함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런 사람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거하게 됩니다. 만일 믿음의 행함과 사랑이 없다면 그 믿음은 귀신적인 믿음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약 2:18-20)
하나님께 대한 지식은 귀신도 잘 압니다. 마가복음에 귀신 들린 젊은 청년이 나옵니다(막 5:1-11). 귀신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귀신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귀신은 말씀에 반발하고 불순종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알고도 행하지 않고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허탄한 사람(foolish man),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이런 믿음은 아무 쓸모없는 헛것(useless)입니다. 이런 믿음은 교리적인 믿음, 지식적인 믿음, 귀신적인 믿음, 헛된 믿음입니다.
이제 우리가 알고 믿으면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그런데 그 행함도 믿음에 기초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행함은 자선사업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믿음에 기초해서 행함이 있을 때 성숙한 사람이 됩니다.
2.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약 2:21-26)
야고보는 산 믿음을 아브라함과 라합의 예를 들어 말씀했습니다(약 2:21-24). 아브라함은 자기 현실 문제에 빠져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아브라함의 손을 이끌고 밖으로 나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창 15:5상)
하나님은 현실 문제인 자식 문제에 빠져 있는 아브람을 높고 깊고 광대한 하나님의 세계, 믿음의 세계로 인도하셨습니다. 아브람은 밤하늘에 영롱하게 빛나는 수많은 별들과 수많은 별들로 수놓인 은하수를 보았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원대하심을 찬양하는 별들의 합창소리가 아브람에게 들려왔습니다.
아브람은 별들을 헤아려보았습니다. 별 하나, 별 둘, 별 셋! 그러자 그는 별들이 자식으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별 하나 자식 하나, 별 둘 자식 둘, 별 셋 자식 셋! 아브람의 좁아진 마음 문이 열려 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영롱한 믿음의 세계, 하나님의 장엄한 비전과 구원의 세계로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 15:5하)
이 말씀은 현재 자녀 하나 없는 아브람에게 있어서는 황당무계한 말씀이었습니다. 아브람은 자신의 형편과 처지를 넘어서서 이를 믿었습니다. 그는 뭇 별을 통하여 심령에 비쳐오는 한 줄기 빛을 보았습니다. 이 빛은 생명의 빛이요, 딱딱한 아브람의 마음을 녹이는 사랑의 빛이었습니다. 새로운 영적 세계에 대한 소망의 빛이었습니다. 아브람은 이 빛을 통하여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과 충만한 사랑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믿음을 보시고 아브람을 의로 여기셨습니다(창 15:6). 하나님은 그를 행위로 의롭다 하지 않으시고 오직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하셨습니다(롬 4:1-2). 하나님은 이 믿음을 기초로 아브람을 열국의 아버지요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온전하게 된 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시험을 받고 나서 이삭을 하나님께 받쳤을 때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물로 드린 것을 보시고 그의 믿음을 인정하셨습니다(창 22:12하). 믿음은 지식이나 이론이 아닙니다. 믿음은 실제적인 행동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약 2:25)
가나안의 두 정탐꾼은 라합이란 기생집에 들어가서 유숙하였습니다. 이 때 라합은 두 정탐꾼을 숨겨 두느냐 아니면 경찰에 신고해야 하는가의 갈림길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고자 결단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조국을 배반하면서까지 두 정탐꾼을 숨겨주었습니다.
라합이 모순을 극복하면서까지 정탐꾼들을 은닉시켜 준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그녀는 이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셨음을 믿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행하신 이적을 들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홍해 물을 가르셔서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키신 사실도 들었습니다. 그녀는 ‘여호와는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하나님’이심을 믿었습니다. 그녀는 가나안의 신들은 모두 가짜 신들이요,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심을 믿었습니다. 그랬을 때 그녀는 정탐꾼들을 숨겼습니다. 무엇보다도 그의 믿음이 드러난 것은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숨겨 준 후에 무사히 이스라엘 진영으로 보낸 것이었습니다(수 2:1-7). 온전한 믿음은 실질적인 행함에 있습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26)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죽은 사람은 악취가 납니다. 이처럼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은 악취가 납니다.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은 다른 사람에게 혐오감을 줍니다.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산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향내를 풍기어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력을 끼칩니다.
지금 우리 조국이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믿는 성도들이 세상을 이끌고 가야 하는데 오히려 끌려가고 있습니다. 믿음의 거장들의 외침이 들리지 않습니다. 젊은이들은 산야를 포효하는 호랑이와 같은 야성이 없습니다. 정치 경제 문화 교육 사회 전 분야에 적신호가 켜져 있습니다. 거기다가 지금 남북이 어느 때 보다도 적대적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습니까? 성도들이 믿고 아는 만큼 행하지 못한 것을 통회하고, 이제 믿고 알고 있는 만큼 행하면 됩니다. 언제나 민족의 위기를 극복하는 중심에는 항상 믿음의 거장들이 있었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아무 이익이 없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원을 받았으면 이제는 믿음의 행함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믿고 아는 만큼 지금 가서 행하는 것이 성숙한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