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3:1-18
말에 실수가 없는 자가 되라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약 3:2)
말이란 단순히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아닙니다. 말은 그 사람의 인격과 사상의 표현입니다. 속된 사람은 속된 말(비속어)을 쓰고 속된 행동을 합니다. 그러나 고상한 사람은 고상한 말과 고상한 행동을 합니다. 평범한 사람은 평범한 이야기와 평범한 행동을 합니다. 그러나 위대한 사상을 가진 사람은 위대한 말과 위대한 행동을 합니다. 성숙하지 못한 성도는 성숙하지 못한 말과 행동을 합니다. 그러나 성숙한 성도는 성숙한 말과 행동을 합니다. 말은 단순히 소리가 아니라 행동을 하게 하는 원인입니다.
그리고 말은 스트레스를 푸는 도구이기도 합니다. 존 그레이는 화성에서 온 남자와 금성에서 온 여자에서 여자들은 말로 스트레스를 푼다고 했습니다. 김형자의 남과 여의 과학을 보면 남자는 하루에 약 7,000단어, 여자는 20,000단어를 사용하고, 남자들은 25,00마디, 여자들은 30,000마디를 사용하며, 여자는 양쪽 뇌로 듣고 남자는 한쪽 뇌로 듣는다고 했습니다. 말로 스트레스를 풀 수 있다면 말을 많이 하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을 하되 실수가 없도록 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온전한 성도는 말에 실수가 없어야 합니다.
1.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약 3:1)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유대인들의 열망 중의 하나는 선생, 곧 랍비가 되는 것입니다. 랍비란 ‘나의 선생님’, ‘나의 주인’이란 뜻으로 지도자 위치에 있는 사람을 일컫습니다. 그런데 지도자가 되고자 하는 것은 비단 유대인들만의 소망은 아닐 것입니다. 요즘 우리나라에 너나 할 것 없이 대통령이 되어 국가를 위기에서 건지겠다고 대선출마를 선언합니다. 우리 또한 교회의 기둥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자녀들이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말게 해달라고 기도를 드리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왜 이처럼 지도자가 되려고 합니까? 물론 국가와 민족을 위해 정말 참된 지도자가 되고자 하는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주와 복음을 위해, 교회를 위해 지도자가 되고자 하는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개 지도자가 되고자 하는 것은 지도자로서의 특권을 누리며 존경과 섬김을 받고자 함일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누구나 지배욕이 있는데, 지배하고 싶은 욕망 때문에 지도자가 되고자 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고 했습니다. ‘말라(μἠ)’는 권고가 아니라 금지 명령어입니다.
야고보는 왜 선생이 되지 말라고 명령했습니까? 이는 선생된 자가 더 많은 심판을 받기 때문이었습니다. 왜 심판을 많이 받습니까? 이는 선생은 말이 많은 반면에 실천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은 말에 있지 않고 믿음의 행함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만 하고 불법을 행하는 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더라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2-23)
신앙고백은 아름답고 고귀합니다.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릅니다(롬 10:10). 그런데 저들은 입으로 주여 주여 하지만 마음에 믿음이 없었습니다. 입으로 ‘주여 주여’ 고백하지만 이는 참된 신앙고백이 아니었습니다. 찬양은 하지만 그 찬양은 단순한 노래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주여 주여 하면서 귀신을 쫓아내는 많은 권능을 행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고 불법을 행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책망하시고 내게서 떠나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현상에 약합니다. 한번 현상을 보고, 한번 경험을 하게 되면 이것이 정말 성경에 기초한가, 사실 확인도 안 하고 무조건 믿고 따라갑니다. 이단들은 이런 현상과 체험에 약한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미혹합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어떤 현상과 기적을 보면 그 기적이 무엇에 근거한 것인가, 성경에 근거한 것인가, 성령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을 받고 있는가, 아니면 심리적인 감정과 자기 최면에 속한 것인가 살펴봐야 합니다.
대개 성령역사를 ecstasy로 생각합니다. 우리는 신들렸다, 신접했다, 신 내렸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을 것입니다. 제가 어린 시절에 동네에 신들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귀신처럼 알아맞힌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신접하게 되면 자기가 상실되어 ecstasy, 즉 무아도취의 상태에 빠지어 황홀지경에 이르고 혼미하게 됩니다. 그리고 최면을 거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가 사람들에게 눈을 감으라 하고 오른 손을 들라, 왼 손을 들라 하는 등 이것저것 몇 번 따라 하다보면 나중에는 자신의 인격과는 전혀 상관없이 그가 시키는 대로 울라하면 울고 웃으라고 하면 웃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정신을 맑게 합니다. 성령은 지정의를 가진 인격입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별칭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께로 인도합니다. 성령은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때문에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게 합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기 때문에 십자가의 은혜가 더 선명하게 느껴지고 가까이 다가서게 합니다. 성령은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여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도록 합니다. 그리스도의 성품은 사랑, 희락, 화평, 인내,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입니다.
성령은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깨우쳐 주십니다. 성령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을 죄로 깨우쳐 주시고 회개하여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도록 하십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께로 나갈 수 있는 ‘의’가 됨을 깨우쳐 주십니다. 성령은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줍니다. 성령은 박해와 고통과 환난 중에서도 최후 순간까지 승리하게 하십니다.
성경에 기초하지 않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성령과의 바른 관계를 맺고 있지 않은 이적과 권능은 모두가 사이비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참된 사람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 기초한 바른 신학과 바른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선생(master, KJV)’의 반대는 종(servant)입니다.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이 말씀은 바꿔 말하면 “종이 많이 되라.”는 뜻입니다. 종은 섬기는 사람입니다. 섬기는 사람은 말보다 행함이 앞섭니다. 반면에 선생(master)은 말이 많습니다. 특히 목사와 선생은 옳은 말을 제일 많이 합니다. 그리고 정치인은 허언(虛言)을 많이 합니다. 그래서 정치인이 물에 빠지면 ‘입’만 둥둥 떠다닌다는 말이 있습니다. 말보다 행하는 사람이 은혜롭고, 듣고 행하는 사람이 지혜롭습니다(마 7:24).
선생이 많은 곳은 어느 사회나 시끄럽습니다. 우리 속담에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올라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교회에 기둥이 많으면 십자가와 강대상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기둥이 많으면 거추장스럽습니다. 그렇다고 기둥이 필요가 없다고 모두 잘라내면 삼풍백화점처럼 무너지게 됩니다. 기둥은 적당히 있어야 하고, 불필요한 기둥은 모두 숨어 종이 되어 섬겨야 합니다. 섬기는 자가 좋은 지도자입니다. 예수님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막 10:44-45).
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눅 20:46)
우리는 말을 많이 하는 선생보다 낮아져 섬기는 섬김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직장이나 사회에서도 섬기는 사람이 인정을 받습니다. 우리가 직정에서 섬김으로 존경을 받고 교회에 와서는 직분에 연연하지 않고 낮아져서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유익을 얻기보다 손해를 보고자 하는 사람이 좋은 지도자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많이 모인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2. 말에 실수가 없는 자가 되라(약 3:2-12)
병원에는 각종 신체의 기관을 치료하는 전공의가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혀를 치료하는 설(舌)과가 없습니다. 혀는 우리 신체 중에 3치 밖에 안 되는 작은 것이지만 혀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사람과 역사가 달라집니다.
혀에 대한 우화가 있습니다. 어느 날 가위와 톱과 혀가 서로 힘을 자랑했습니다. 먼저 가위가 입을 열어 자랑했습니다. “나는 어떤 천이라도 내 이로 끊어낼 수 있다.’ 이 말을 들은 톱이 ‘그래, 내 이는 장작과 고물도 깨끗하게 베어낼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를 듣고 있던 혀가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 ‘너희들이 아무리 자랑해도 나하고는 비교가 안 돼, 나는 남들이 쌓아 놓은 명성과 명예, 우정 등을 단번에 무너뜨리는 힘을 가졌거든. 내가 끼어들면 죽마고우도 하루아침에 원수가 되고, 눈앞에 둔 대권도 순식간에 물거품이 되는 것 몰라! 가위야, 너는 옷을 썰다 보면 이가 상하고 녹슬고, 톱은 굳은 것을 썰고 나면 망가지기도 하지만 나는 아무리 지껄여도 닳고 파손되는 일이 없어! 나는 내 생명이 다 할 때까지 활동하지!’”
입은 다른 기관과 달리 두 가지 기능이 있습니다. 먹는 기능과 말하는 기능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말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입 두었다 뭐하려고 해.” 합니다. 한편 금언에 “침묵은 금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을 하되 실수가 없도록 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약 3:2)
특히 지도자는 말에 실수가 없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지도자란 말을 많이 하는 위치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말의 실수는 지도자뿐만 아니라 인간 모두의 문제입니다. 사람이 말에 실수가 있게 되면 은 몸에 굴레를 씌우게 됩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말(馬), 배(船), 불(火), 샘(泉)에 비유하여 말에 실수가 없도록 말씀했습니다(약 3:2-12). 말에 실수가 있으면 전인격에 중대한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반면 말에 실수가 없으면 온 몸이 온전하게 됩니다.
첫째, 말(馬)의 비유
“우리가 말(馬)들의 입에 재갈 물리는 것은 우리에게 순종하게 하려고 그 온 몸을 제어하는 것이라.”(약 3:3)
말들의 입에 재갈을 먹이지 않은 채 놓쳤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많은 인명피해와 재물의 손실을 가져오게 됩니다. 말의 특징은 고함과 앞 뒷발을 차는 것입니다. 재갈 풀린 말이 뒷발질하면 당할 장사가 없습니다. 그러나 말의 입에 재갈을 물리면 어린아이도 부릴 수 있습니다. 사람이나 짐을 실어 나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말(言語)은 굴레 없는 말(馬)과 같아 제어하지 않으면 우리 인간 자체를 쓸모없게 만듭니다. 그래서 잠언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잠 10:19)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니 입술을 벌린 자를 사귀지 말지니라.”(잠 20:19)
그리고 성경은 함부로 말을 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입을 지키는 자는 자기의 생명을 보전하나 입술을 크게 벌리는 자에게는 멸망이 오느니라.”(잠 13:3)
그러므로 입에 재갈 물려야 합니다. 그래야 삶에 실수가 없습니다.
둘째, 배(船)의 비유
“또 배(船)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써 사공의 뜻대로 운전하나니”(약 3:4)
바다 위에 떠다니는 거대한 배도 작은 키 하나에 따라 방향이 결정됩니다. 배의 키를 잘못 잡으면 암초에 걸려 파선할 위험이 있습니다. 광풍에 표류되어 화를 당할 수 있고, 적진에 들어가 포로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키는 작고 또 배의 뒤쪽에 있지만 이 키에 의해 거대한 선체가 움직일 수 있는 것처럼 혀 또한 작지만 중요한 인생행로를 결정지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혀는 한 치 밖에 안 되지만 우리의 온 몸의 행동을 지배합니다. 전 세계를 지배하는 사람도 자기 혀를 지배하지 못하면 비극의 종말을 맞게 됩니다. 우리는 혀의 중요성을 깨닫고 말에 실수가 없어야 합니다.
셋째, 불(火)의 비유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약 3:5-6)
성냥 한 개비의 불이 비록 작은 것이지만 온 집을 태우고, 더 나아가 온 동리를 태우고, 전 세계를 태울 수 있습니다. 불이 지닌 파괴력은 엄청납니다. 그래서 불을 보고 겁내고 피하고 ‘꺼진 불도 다시 보자’는 표어가 있기도 합니다. 우리의 혀도 이처럼 큰 힘을 발휘합니다. 타오르는 불길이 퍼질 때 그것을 끄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처럼 혀도 다스리기 어렵고 화재가 남긴 비참한 현장처럼 혀도 사람들에게 재앙과 상처와 비극을 가져다줍니다. 성경에 혀를 불에 비교한 말씀은 곳곳에 있습니다.
“불량한 자는 악을 꾀하나니 그 입술에는 맹렬한 불 같은 것이 있느니라.”(잠 16:27)
“횃불을 던지며 화살을 쏘아서 사람을 죽이는 미친 사람이 있나니 자기의 이웃을 속이고 말하기를 내가 희롱하였노라 하는 자도 그러하니라 나무가 다하면 불이 꺼지고 말쟁이가 없어지면 다툼이 쉬느니라.”(잠 26:18-20)
말쟁이가 없으면 평화가 오고, 말쟁이가 많으면 다툼이 확산됩니다. 도둑질과 거짓말 중에 어느 것이 더 나쁩니까? 물론 도둑질도 나쁘지만 거짓말은 더 나쁩니다. 이는 도둑질은 도둑질한 물건을 갖다 놓으면 되지만 한번 내뱉은 말은 다시 담을 수 없고, 말로 사람에게 인격에 커다란 상처를 주었다면 다시 회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 “무심코 저 사람 빨갱이야!” 말하면 살아가기 힘듭니다. 따라서 우리는 말에 실수가 없어야 합니다.
넷째, 샘(泉)의 비유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고 길들여 왔거니와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약 3:7-8)
사나운 짐승을 잘 길들이면 효용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길들여지지 않는 짐승들은 난폭합니다. 그런데 짐승을 길들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훈련시키면 또 됩니다. 그런데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습니다. 오늘날 과학이 아무리 발달하고, 인공지능이 발달했어도 혀를 제어하는 과학은 아직 발달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혀가 훈련되지 않을 때 어떻게 됩니까?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냐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약 3:9-12)
훈련되지 않은 혀는 하나님 아버지를 찬송하다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은 사람을 저주합니다.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옵니다. 같은 샘에서 단 물(fresh water)과 쓴 물(salt spring)이 동시에 나올 수 없습니다. 단 샘에서 단 물이 나오고 쓴 샘에서 쓴 물이 나옵니다. 무화과나무에서 감람 열매를 맺을 수가 없고, 포도나무에서 무화과가 맺을 수 없습니다. 무화과나무에서 무화과를, 포도나무에서 포도가 열리고, 단 샘에서 단 물이 나오고, 쓴 샘에서 쓴 물이 나오는 것은 자연의 일관성 원칙입니다. 일관성이 없으면 신뢰할 수 없습니다. 특히 자녀교육에서의 중요한 원칙은 일관성입니다. 일관성이 없으면 자녀들은 양가감정에 시달리게 됩니다. 양가감정은 동일 대상을 향해 동시적으로 두 가지 존재하는 감정상태를 말합니다. 우리가 무화과를 심었는데 감람 열매가 맺혔다면 그것은 감람나무를 심은 것입니다.
성도의 말이 원망, 불평, 불신, 그리고 부정적이고 복음적이지 못하면 그 사람은 예수 나무를 심은 것이 아니라 육신의 나무를 심은 것입니다. 아무리 주여 주여 외쳐도 입이 할례를 받지 못하면 그 사람은 예수 나무를 심지 않은 것입니다. 한 마디로 일구이언, 일관성이 없는 사람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집사의 자격을 말할 때 “이와 같이 집사들도 정중하고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딤전 3:8)라고 했습니다. 온전한 성도는 일구이언하지 않습니다. 우리 속에 악과 선이 공존할 수 없습니다. 두 가지가 동시에 나온다는 것은 중대한 잘못입니다.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눅 6:45)
악을 쌓으면 악한 말을 하고 악한 행동을 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선한 말을 하고, 선한 행동을 하려면 선을 쌓아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창고와 같아서 무엇인가를 쌓아야 합니다. 선을 쌓으면 선한 사람이 되고, 악을 쌓으면 악한 사람이 됩니다. 선은 예수님의 성품, 성령의 열매, 성경 말씀입니다. 그리고 기도생활입니다. 쌓는다는 것은 계속적인 뜻이 있습니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도 하루아침에 지어지지 않았습니다. 벽돌 한 장 한 장 쌓음을 통해 지어졌습니다.
이처럼 선한 마음은 갑자기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선한 생각을 계속할 때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물량주의 영향을 받아 작은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공이산(愚公移山)’이라는 말처럼 매일 끊임없이 조금씩 쌓게 되면 선한 인격이 형성됩니다. LG그룹 창업자 구인회 회장은 큰돈보다 작은 돈을 귀히 여겼다고 합니다. 그 때 그는 대기업의 총수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믿음, 사랑, 진실, 겸손, 온유, 섬김, 인내, 절제 등을 마음에 조금씩 쌓으면 믿음의 사람, 사랑과 의의 사람, 겸손한 사람, 온유한 사람이 됩니다.
혀를 잘 훈련시켜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내 입의 말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는 의지적인 결단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나의 반석이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시 19:14)
주님은 강포를 행하지 않으시고 그 입에는 궤사가 없으십니다(사 53:9). 우리는 주님의 아름다운 언어생활을 배워서 궤사를 행하던 혀가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도구가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3.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이라(약 3:13-18)
지혜란 단어가 많이 나오는데 지혜는 혀와 같은 뜻을 내포합니다.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약 3:13)
사람이 아무리 지혜가 많아도 그것이 삶에 나타나지 않으면 그 지혜는 무의미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지혜 있다고 하면서도 그의 삶에 자신의 지혜를 나타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이라고 했습니다(약 3:13하). 온유함은 유약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람으로 길들여지게 합니다. 지혜는 이 세상 어느 것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잠언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대저 지혜는 진주보다 나으므로 원하는 모든 것을 이에 비교할 수 없음이라.”(잠 8:11)
지혜에는 참 지혜와 거짓 지혜, 하늘의 지혜와 땅의 지혜, 하나님께 속한 지혜와 사탄에게 속한 지혜가 있습니다. 에머슨은 “라파엘은 지혜로 그림을 그렸고, 헨델은 지혜로 노래했고, 셰익스피어는 지혜로 썼고, 콜럼버스는 지혜로 항해했고, 루터는 지혜로 설파했고, 워싱톤은 지혜로 무장했고, 왓트는 지혜로 기계화했다.”고 했습니다. 지혜는 인간 활동의 모든 분야를 지배하는 매우 귀중한 요소입니다. 성경은 땅의 지혜와 하늘의 지혜를 말씀했습니다.
첫째, 땅의 지혜는 바람직하지 못한 지혜
땅의 지혜는 독한 시기입니다(약 3:14-16). 시기는 그릇된 열심을 말합니다. 시기는 진리를 거슬려 거짓말합니다.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만 있을 뿐입니다.
둘째, 위로부터 오는 참 지혜는 하나님의 지혜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약 3:17-18)
하나님의 지혜의 첫째는 성결입니다. 둘째는 화평입니다. 셋째는 관용입니다. 넷째는 양순입니다. 다섯째는 긍휼과 선한 열매입니다. 선한 열매는 긍휼의 결과로 나타납니다. 여섯째로 편견과 거짓이 없습니다. 위로부터 난 지혜의 결과는 화평과 의의 열매입니다.
우리는 말이 많은 지도자보다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혀를 제어하여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이 온전한 성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