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부활절 고린도전서 15:4-11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고전 15:4)
Happy Easter! 이 세상에 고정되어 있는 것, 변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 고정되어 있는 것이 딱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죽음입니다.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누구도 자신의 힘으로 죽음을 변경하거나 연장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헤겔은 “인간은 죽기 위해 태어났고, 죽기 위해 살고 있으며, 죽음의 종착역을 향해 달려가는 존재이다.”라고 했습니다.
오늘은 부활절이자 세월호 침몰 3주년을 맞는 날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3년 전 꽃다운 고등학교 2학년생들을 비롯한 304명이 침몰하는 배와 함께 죽어가는 슬픈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죽음은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죽음은 인류의 최대 원수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사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십니다(요 11:25-26).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을 믿어 생명이 가득 넘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1. 성경대로 살아나신 예수님(고전 15:4)
세상은 불평등합니다. 평등을 주장하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사회에도 평등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법아래 평등하다고 하지만, 법이 모두에게 평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무전유죄, 유전무죄라는 말이 틀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인간을 평등하게 하는 것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죽음입니다. 죽음은 왕이라고 봐주지 않습니다. 10대 독자라고 봐주지 않습니다. 새신랑, 새 신부라고 봐주지 않습니다. 어린아이라고 그냥 넘어가지 않습니다.
죽음은 인간이 설명할 수 없는 미지의 세계입니다. 인간이 살아 있는 동안에 죽음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만일 누군가가 죽음을 경험했다면, 그는 더 이상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닙니다. 죽음은 이 세상의 모든 것들과 관계를 끊어버립니다.
그래서 죽음과 결부되면 기쁘다가도 슬퍼집니다. 천하의 알렉산더 대제도 자기의 죽음을 생각하면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그의 절대 권력만큼이나 비례해서 그에게 죽음은 슬픈 사건으로 다가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인류 역사상 죽음이 지배하지 못한, 한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고전 15:4)
20세기 들어와서 과학의 발달은 인류를 희망과 기대에 부풀게 했습니다. 그러나 제 1,2차 대전을 겪으며 사람들은 깊은 좌절과 절망을 겪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미래에 대한 어떤 기대도 갖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now and here”, “이 순간이 중요하다.”, “이 순간 행복이 중요하다.”, “내가 존재하는 것만이 중요하다.”는 실존주의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21세기에 들어와서 감성과 느낌을 강조하는 포스트모던이즘이 일어났습니다. 포스트모던이즘의 명제는 “나는 느낀다. 고로 존재한다.”입니다. 이런 사조가 교회에 들어와 과거의 사실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부활, 지옥, 하나님 나라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지금, 현재, 내게 무엇인가 강하게 느끼는 것만을 중요시합니다. 그러다보니 은사주의가 판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생각하고 느끼는 것이 진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 홀로’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혼자 먹는 혼밥족이 늘어나고, 결혼도 안하고, 혼자 느끼고, 혼자 즐기게 됩니다. 이로 인해 생기는 문제가 자기 세계에 갇히는 자폐증 환자의 증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이런 껍질 속에 갇혀있는 사람을 꺼내어 자신의 진실한 모습을 바로 보게 해줍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역사적인 사실인 것처럼, 예수님의 부활도 객관적이고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는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신구약으로 되어 있습니다.
성경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떠나서 부활을 말할 수 없고, 믿을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 24장 13-35절을 보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나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처절한 모습을 목격하고 시골로 낙향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동행하시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성경 말씀을 풀어 설명해 주셨습니다. 이때 마음이 뜨거워져 머리로 이해할 수 없었던 부활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눅 24:32)
우리가 산에 가서 산 기도한다고, 수도원에 가서 수도를 한다고, 부활을 이해할 수 없고, 부활을 믿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성경말씀을 통해서만이 이해할 수 있고,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부활하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첫째,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 주요, 그리스도이십니다.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 1:4)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통해 나의 죄가 용서함 받았습니다. 그런데 만일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끝났다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용서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전히 죽음이 나를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구원은 미완성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 부활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죄가 다 용서 받았다는 확실한 보증이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의 주가 되십니다. ‘주’란 하나님, 통치자를 말합니다. 과거에는 죄가 우리를 다스렸습니다. 죄가 주인이 되어 우리를 이리저리로 끌고 다녔습니다. 죄가 슬픔과 절망을 심었습니다. 죄가 어둡게 살도록 했습니다. 죄가 운명적인 삶을 살게 했습니다. 죄가 나는 안 된다는 부정적인 생각을 심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 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를 다스리고 지배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를 절망을 이기고 일어나게 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를 어두움과 운명적인 생각, 부정적인 생각에서 밝고 희망이 넘치는 삶으로 인도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탈출구가 없는 동굴에서 터널로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의 그리스도가 되십니다. ‘그리스도’란 구원자란 뜻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죄와 사망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고 승리를 주셨습니다(고전 15:57).
둘째, 부활하신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나도 함께 죽었고, 주님이 부활하실 때 나도 함께 부활했음을 믿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죽으심은 나의 죽음이요, 예수님의 부활은 나의 부활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실 때 나도 함께 죽었기 때문에 죄가 나를 더 이상 지배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는 항상 살아있는 매개체를 통해 활동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나도 죽었기 때문에 죄가 나를 지배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부활할 때 나 또한 부활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부활하여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 15:20)
첫 열매는 매우 중요합니다. 첫 열매가 무엇이냐에 따라 다음 열매가 결정됩니다. 첫 열매가 사과이면 다음의 열매는 반드시 사과가 열립니다. 부활의 첫 열매이신 예수님은 해같이 빛납니다. 부활의 첫 열매이신 예수님은 영광스럽고 찬란합니다. 부활의 첫 열매이신 예수님은 어둠과 절망이 조금도 없으십니다. 부활의 첫 열매이신 예수님은 슬픔과 근심이 조금도 없으십니다. 부활의 첫 열매이신 예수님은 진리요 길이요 생명이요 소망이요 빛입니다.
부활의 첫 열매이신 예수님을 믿는 순간에, 우리 또한 소망과 생명과 밝은 빛이 됩니다. 부활의 첫 열매이신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절망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우리는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우리는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우리는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고전 15:42-44).
셋째,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산 소망을 주십니다.
인간은 소망의 존재입니다. 사람이 소망이 없다면 한 시도 살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의 소망이 무엇입니까? 90년대 한국의 소망은 GDP가 2만 달러였습니다. GDP가 2만 달러만 되면 행복이 미소로 다가오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한국은 GDP가 2만 달러가 넘었습니다. 주택보급률 100%가 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한국이 행복합니까? 양극화 현상으로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에 행복지수가 27위입니다. 영국의 경제학자 허쉬는 ‘성장의 사회적 한계 이론’에서 성장 초반에는 만족감이 있지만 성장이 진전될수록 불만이 증대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게 나라입니까? 조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대통령 후보는 “나라를 나라답게”라는 구호를 내걸었습니다.
이처럼 눈에 보이는 것에서의 행복은 일시적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진다고 했습니다(벧전 1:24). 화무십일홍, 권불십년은 이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우리는 죄와 허물로 죽었던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고 했습니다(엡 2:1-3).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산 소망을 주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 1:3-4)
산 소망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작게는 내 마음에 임하는 하나님 나라요, 크게는 장차 우리가 가야할 본향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내 마음에 말할 수 없는 평안과 화평과 기쁨이 찾아옵니다. 이 기쁨은 누가 가져갈 수 없는 보배로운 것입니다.
그리고 산 소망은 재림하실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장차 천사장의 호위를 받으며 만유의 주요, 영광과 심판의 주로 다시 오십니다. 이때 불신자들에게는 심판,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생명의 부활로 나타나 하나님 나라에서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왕노릇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우리의 상급이 되셔서 우리의 모든 것을 채워주십니다. 이 소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이 소망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어떤 역경도 이길 수 있는 믿음과 힘을 줍니다. 이 소망은 우리를 진실한 삶을 살게 하고, 확신에 넘치는 삶을 살게 합니다.
2. 부활의 증인들(고전 15:5-11)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더 확실하게 증명하기 위해 부활의 증인들을 소개했습니다. 부활은 의학과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부활은 경험입니다. 파스칼은 "신앙은 경험이다.“라고 했습니다(Faith is experience). “내가 봤다!”, “내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 예수님은 먼저 베드로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여종 앞에서 세 번씩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런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원수들 앞에서 담대하게 부활하신 예수님, 회개와 심판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열 두 제자에게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바닷가에서 떡과 생선을 잡수셨습니다.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동시에 보이셨습니다. 그 당시, 그 중에 250명 이상의 증인들이 살아 있었습니다.
그 후에 예수님은 동생 야고보에게도 보이셨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까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세상에서 출세하도록 종용했습니다. 그런 그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에 부활의 증인 되어 예루살렘교회의 초대 감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얼마나 기도했던지 그의 무릎은 낙타 무릎같이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바울을 변화시키셨습니다. 부활이 아니고서는 바울의 변화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을 핍박하고, 스데반을 죽이는 데 앞장을 섰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성도들을 죽이기 위해 원정을 떠났습니다. 그가 다메섹 가까이 이르렀을 때,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었습니다. 찬란한 빛이 비추자 그는 땅에 엎드러졌습니다. 이 때 바울에게 소리가 들렸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행 9:4-5)
예수님은 교회를 박해하고 주님을 박해하던 바울을 부활의 증인으로 삼으셨습니다. 이것은 바울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바울은 이 은혜가 너무나 놀라워 이렇게 간증하였습니다.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전 15:8)
전에는 바울 자신이 최고인 줄로 알았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을 잘 믿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자신이 얼마나 덜 된 자인가를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그러므로 나나 그들이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고전 15:9-11)
요즈음 미세먼지는 우리를 두렵게 합니다. 청년들에게 취업난은 여간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3,40대의 내 집 마련은 태산처럼 느껴집니다. 자녀 교육 또한 우리의 마음을 지치게 합니다. 50대의 직장생활은 스트레스로 다가옵니다. 60대는 노후생활이 준비가 되지 않아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모들은 자녀들이 조금만 아파도 혹시나 하는 두려움이 몰려옵니다.
사람들은 두려움을 심리적인 현상으로 봅니다. 그러나 두려움은 죽음이 가져다주는 실체입니다. 죽음은 두려움이란 무기로 우리를 괴롭힙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두려움에 더 이상 시달릴 필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이제 죽음이 가져다주는 두려움과 슬픔과 절망이 나를 괴롭힐 수가 없습니다.
미국의 제16대 대통령인 링컨은 변호사 시절에 주 의회 의원에 출마했다가 낙방하고, 하원의원에 출마했다가 또 낙방했습니다. 이러기를 몇 차례 거듭하자, 그는 좌절과 절망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주변 친구들은 그를 염려했습니다. “저러다 링컨이 자살하는 건 아니야?” 친구들은 링컨이 목숨을 끊을까봐 자기들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보살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링컨은 친구들의 염려대로 “나는 지금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삶을 살고 있다. 어떠한 개선이나 향상을 기대할 수 없다. 나는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 있다.”라고 자신의 심정을 토로했습니다.
이런 링컨이 어떻게 재기하여 미국의 대통령까지 될 수 있었습니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성경을 읽고, 그 속에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에게 용기와 희망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시 공화당에 입당하였고, 대통령 후보 지명을 받아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의 희망이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용기를 주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로 하여금 필연적인 삶을 살게 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를 인생역전이 되게 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나와 세상을 보는 시각을 바꾸어주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좁은 시야를 넓게 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민족을 가슴에 품고 기도하게 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열방을 품고 기도하게 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위대한 일을 시도하게 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위대한 역사를 써내려가는 위대한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부활하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