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5:1-6
성도의 물질관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으로 말미암아 울고 통곡하라.”(약 5:1)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에 한 왕이 있었습니다. 그에게 세 친구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절친한 친구였습니다. 하루도 만나지 못하면 안 되고, 한 시도 떠나면 안 되는 친구였습니다. 또 하나는 늘 가까이 지내지만 소중한 줄 모르던 친구였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먼 친구였습니다. 그래서 일 년에 한번 만날까, 어쩌다 생각나면 한번 만나는 정도의 친구였습니다.
왕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왕이 죽은 다음에 보니 그 절친했던 친구는 그 앞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가까이 지내지만 소중한 줄 몰랐던 친구는 문가에 서있었습니다. 반면에 그리 반갑지 않았던 먼 친구가 찾아와 내세의 길을 동행해주었습니다.
첫 번째 친구는 돈입니다. 세상에 사는 동안 날마다 가까이 하며 절친했던 돈은 내가 세상을 마감할 때 동행해주지 않습니다. 돈은 내가 죽는 순간 나를 외면합니다. 두 번째 친구는 가족입니다. 가족은 평생 가장 가까운 관계였지만 역시 내가 세상을 떠날 때 문가에 서서 울고 있을 뿐 나를 동행해주지 못합니다. 세 번째 친구는 선행입니다. 우리가 가끔 생각나면 자선과 선행을 베풉니다. 그런데 그 선행이 마지막 가는 길까지 동행해줍니다. 본문은 성도의 재물에 대한 자세를 깨우쳐 줍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는 성경에 기초한 바른 물질관을 배울 수 있습니다.
1. 물질을 모으는 목적이 선해야 한다(약 5:1-3)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으로 말미암아 울고 통곡하라.”(약 5:1)
야고보는 책망할 때 ‘들으라’고 경고했습니다. 야고보는 부한 자들에게 ‘들으라’고 경고했습니다. 부한 자들은 현재 부유하기 때문에 안락한 것처럼 미래에도 계속 평안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그들의 장래가 울며 통곡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울고 통곡한다’는 것은 처참한 심판에 대한 울부짖음을 말합니다.
성경에서 최후의 심판은 불 심판이라고 말씀합니다. 장차 진노의 날에는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진다고 했습니다(벧후 3:12). 그곳은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고,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하게 된다고 말씀했습니다(막 9:48-49). 또 그곳은 불과 유황으로 영원히 타는 못이라고 했습니다(계 21:8).
성경에 하나님께서 불로 심판하신 사건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를 불로 심판하셨습니다(창 19:23-28). 그리고 역사적으로 불로 심판하신 사건은 A.D. 79년 8월 24일 폼페이 화산 폭발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앞으로 세상을 심판하신다면 핵으로 심판하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의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폭발되는 순간, 도시 상공에 형성된 열이 무려 섭씨 3만도에 이르렀습니다. 두 도시의 피해는 히로시마는 24만 명 중에 14만 명이 폭탄에 의해 희생되었고, 나가사키에서는 7만 여명이나 희생되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참혹한 환자는 화상을 입은 환자입니다. 그런데 뜨거운 불에 녹아지는 불의 심판을 받는다고 상상해 볼 때, 그 고통과 아픔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우리는 불로 심판하신다는 말씀을 두렵고 떨림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면 그들이 참혹한 불 심판을 받은 원인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첫째는 물질을 모으는 목적이 불의했기 때문입니다.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약 5:2)
그들은 재물을 부지런히 모았습니다. 누구도 재물을 부지런히 모으는 것을 탓할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할 수만 있으면 부지런히 재물을 모아야 합니다. 맹자는 항산항심(恒産恒心)이란 말을 했습니다. 이는 재물이 있어야 여유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재물을 모으는 목적이 불의했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재물을 모으고, 사재기 했는지 재물이 창고에서 썩어갔습니다. 식자재를 얼마나 사재기했는지 냉장고에는 생선과 고기와 음식물이 썩어갔습니다. 옷을 얼마나 사재기했는지 장롱 속에서는 옷이 좀먹고 있었습니다. 입는 옷과 싼 옷은 절대로 좀이 먹지 않습니다. 좀먹는 옷은 입지 않는 옷과 실크나 순모 등 비싼 옷입니다. 그들은 입지도 않는 실크와 순모 옷을 장롱 속에 수북하게 쌓아놓았습니다. 모아놓은 재물과 옷과 식자재가 썩어가자 이제는 녹이 슬지 않는 금과 은으로 금고를 채웠습니다. 금과 은은 당시 화폐의 일종이었습니다.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 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약 5:3)
원래 은과 금은 녹이 슬지 않습니다. 그런데 금과 은이 금고에서 시퍼렇게 녹이 슬었습니다. 돈은 발이 없지만 돌아다니(行)는 동산이 되어야지 부동산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돈은 돌아야 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부한 자들은 돈을 쌓아두기만 했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돈을 왜 그토록 모았습니까? 이는 돈의 엄청난 위력과 괴력 때문입니다. 돈은 사람의 운명을 바꾸고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돈의 한계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돈으로 생명을 연장할 수는 있지만 생명을 살릴 수 없습니다. 돈으로 황금 침대를 살 수 있지만 단잠을 살 수 없습니다. 돈으로 맛있는 음식을 살 수 있지만 음식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식욕은 살 수 없습니다. 돈으로 호화주택을 살 수 있지만 스위트 홈은 살 수 없습니다. 돈으로 보약을 살 수 있지만 건강은 살 수 없습니다. 돈으로 사치를 부릴 수 있지만 문화는 살 수 없습니다. 돈으로 쾌락을 살 수 있지만 행복은 살 수 없습니다. 돈으로 금 십자가를 살 수 있지만 십자가의 복음은 살 수 없습니다.
미다스(Midas) 손이란 말이 있습니다. 미다스는 술신 디오니소스에게 손에 닿는 모든 것을 황금으로 변하게 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디오니소스는 그의 소원을 들어주었습니다. 미다스가 만지는 대로 황금이 되었습니다. 정원수, 조각물, 가구할 것 없이 만지기만 하면 그의 손으로 황금이 되었습니다. 미다스는 신이 났습니다. 그런데 예기치 않은 문제가 생겼습니다. 만지기만 하면 황금이 되니 도대체 음식을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빵을 만지니 황금빵으로 변했고, 사과를 만지니 금사과가 되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원했던 금은 산더미처럼 쌓여있는데 그 금을 바라보면서 굶어죽게 되었습니다. 그는 상심한 나머지 무심코 아내의 손을 잡았다가 기겁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부인이 금덩어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뒤늦게 지나친 욕심을 반성한 미다스는 디오니소스에게 다시 원래대로 되돌려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 뒤 다시는 헛된 욕심을 부리지 않았습니다. 여기에서 유래하여 미다스 터치(Midas touch)란 숙어가 생겼습니다.
최순실의 국정농단사태는 대통령이나 재벌이나 너나 할 것 없이 불의한 목적으로 배를 채우고, 불의한 목적으로 돈을 벌고자 하는 탐욕에서 생긴 전무후무한 사건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보면서 탐욕은 결국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 더 나아가 공동체가 존폐위기에 처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탐욕은 우상숭배입니다(골 3:5하). 우리는 지금 물신을 섬기는 황금만능주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신도 모르게 돈신을 숭배하고, 탐욕의 노예가 되기 쉽습니다. 우리는 이런 시대에 불의한 목적으로 돈을 모으고자 하는 탐욕을 날마다 회개하고, 선한 목적으로 돈을 모으고 알뜰하게 저축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계부를 써서 수입과 지출의 흐름을 파악해서 지출을 주일 것은 줄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들이 참혹한 불 심판을 받은 두 번째 원인은 물질을 모으는 방법이 불의했기 때문입니다.
2. 물질을 모으는 방법이 선해야 한다(약 5:4,6)
“보라 너희 밭에서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그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너희는 의인을 정죄하고 죽였으나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였느니라.”(약 5:4,6)
성경은 이웃을 압제하지 말며, 해가 지기 전에 임금을 지불하도록 말씀했습니다(신 24:14-15; 레 19:13). 왜냐하면 당시 노동자들은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일을 하고 품삯을 받지 못하면 부양가족들이 굶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품삯을 떼먹지 말도록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노동자의 임금을 착취했습니다. 그들은 받을 때에는 현금으로 받고, 품삯을 줄 때에는 6개월짜리 어음을 끊어주었습니다. 어떤 부한 자들은 아예 품삯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가난한 자들을 등치고 가난한 자들의 얼굴에 맷돌질하여 돈을 모았습니다. 노동자들이 품삯을 주지 않아 관가에 탄원서를 제출하면, 오히려 그들은 관원들에게 뇌물을 주고 명예 훼손죄로 집어넣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돈이 된다 싶으면 주식 투기, 환투기, 땅 투기, 아파트 투기 등 각종 투기로 돈을 모았습니다. 이처럼 불의한 방법으로 돈을 모은 부자들은 반드시 불 심판을 받게 됩니다.
우리는 자본주의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소유를 향해 질주하고, 살벌한 경쟁사회로 치닫게 됩니다. 특히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이솝우화에 나오는 토끼와 거북이의 예를 들어 경쟁에서 승리하는 자만이 선이고 정의라고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자본주의는 나눔과 배려 및 동감(同感)입니다. 자본주의의 창시자 애덤 스미스는 그의 저서 국부론를 쓰시 이전, 1759년에 도덕감정론에서 인간의 사회적 덕성을 동정(同情)과는 질적으로 다른 동감(同感)에서 찾았습니다. 그리고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트와 자본주의에서 자본주의는 경건한 성도들이 한 푼 두 푼 모아 은행에 저축한 것이 자본이 되어 산업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모으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모으는 방법이 정직해야 합니다. 우리는 불의한 방법인 투기로 돈을 모으고자 하는 생각은 꿈에서 조차도 갖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투기 심리가 있지만, 투자는 하되 투기는 절대 금해야 합니다. 투자는 장기적인 안목으로 저축하는 것이라면 투기는 단기적으로 일확천금을 벌고자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단기적으로 일확천금을 벌고자 하는 투기 심리와 도둑심보를 버리고 노력한 만큼 벌고자 해야 합니다. 물질을 소유하는데 정직하고 투명할 때 그 사람과 사회를 신뢰할 수 있습니다. 신용(credit card)이란 물질에 있어서의 투명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참혹한 불 심판을 받은 세 번째 원인은 물질을 불의한 곳에 허비했기 때문입니다.
3. 물질을 선하게 사용해야 한다(약 5:5)
우리 속담에 “개같이 벌어 정승같이 쓰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버는 것도 불의했고, 쓰는 것도 불의했습니다.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방종하여 살륙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찌게 하였도다.”(약 5:5)
그들은 불법으로 모은 돈으로 사치하고 방종했습니다. 그들은 룸살롱에 가서 고량진미와 산해진미에다 몇 백 만 원짜리 술을 마시고, 술시중 드는 여자들에게 몇 십만 원의 팁을 주면서 육신의 탐욕을 즐겼습니다. 몇 수십 평짜리 아파트를 위 아래로 사서 털어 풀장을 만들고, 이태리에서 수입한 값비싼 가구로 호화롭게 꾸몄습니다. 그들은 도박관광, 골프관광, 보신관광을 일삼아 그들의 배는 나오다 못해 축 늘어져 있었습니다. 사람이 불의한 방법으로 돈을 모으게 되면 향락과 쾌락에 탐닉하는 것이 변하지 않는 공식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향락산업의 천국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그 많은 돈을 물 쓰듯이 펑펑 쓸 수 있습니까? 어떻게 몇 백 만 원짜리 술을 마시며 육신의 쾌락을 탐닉할 수 있습니까? 피땀 흘려서 번 돈이나, 정상적인 번 돈으로는 그렇게 흥청망청 쓸 수가 없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쓸 수 있는 것은 불의한 방법으로 돈을 벌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돈을 모으는 방법과 쓰는 방법을 동시에 말씀했습니다.
세계 어느 나라를 가든지 강줄기의 끝은 바다로 이어집니다. 강물은 흘러가면서 주변을 옥토로 만들고, 많은 생물들을 살리다가 바다로 들어갑니다. 한강이 태백의 검룡소에서 발원하여 주변을 옥토로 만들고 2,000만 명을 살리고 서해로 흘러갑니다.
이스라엘의 요단강은 헬몬산에서 발원하여 갈릴리 호수를 만들고, 갈릴리 호수는 다시 사해로 내보냅니다. 그런데 사해는 밖으로 흘러 내보내지 않습니다. 사해의 특징은 받기만 합니다. 그래서 사해는 죽음의 바다가 되었습니다. 사해는 물이 짜서 고기가 살 수 없고, 주변에 풀 한포기도 없고 사람도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갈릴리 호수는 헬몬산에서 흐르는 물을 받아 밖으로 흘러 보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젖줄이 되고, 각종 물고기가 서식하며, 주변을 초원으로 만들어 양떼들이 뛰놀고 나무들이 자랍니다.
성경은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고, 너그러운 자가 되라고 했습니다(딤전 6:17-18). 그리고 예수님은 친히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행 20:35)고 말씀하셨습니다.
요셉은 풍년의 때에 물질을 허튼 데 쓰지 않고 7년간 열심히 저축했습니다. 그리고 모은 재물을 흉년 들었을 때 만민을 먹여 살리는데 요긴하게 아낌없이 썼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야곱과 그의 형과 아우들을 섬겼습니다. 이는 단순히 아버지와 형제들을 섬긴 것이 아닙니다. 이는 세계 만민 구속역사를 섬긴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해 세계 만민을 구원하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존 웨슬리는 “열심히 일을 해서 돈을 모으라. 그리고 저축하라. 그 후에 하나님과 의를 위하여 쓰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청교도 정신은 청빈과 절제입니다.
우리나라는 압축 성장으로 인해 10대 경제국가로 도약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생겼는데, 그 중의 하나는 분배의 불균형과 다른 하나는 비정규직 문제입니다. 분배의 불균형에서 파생된 것이 양극화 문제입니다. 그리고 비정규직 문제로 인해 노동시장의 불안입니다. 노동자들이 갑자기 해고됐을 때에 가정에 미치는 영향은 심각합니다. 이제 기업주는 이윤만을 생각하지 말고, 좀 더 양보하여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돌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웃을 섬기고 돌본 경주의 최부자 이야기를 들어봤을 것입니다. 경주 최부자 최준(崔浚)의 가훈 6가지가 나옵니다. 첫째, 과거시험은 보되 진사 이상 벼슬을 하지 말라. 둘째, 만석 이상을 모으지 마라. 셋째, 과객(過客) 대접을 소홀히 하지 마라. 넷째, 흉년에 땅을 사지 마라. 저는 이를 경매물건을 사지 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다섯째, 며느리가 시집 와서 3년간 무명옷을 입도록 하라. 여섯째, 사방 100리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이 같은 가훈에 따라 최부잣집 사랑채는 늘 수백 명의 과객들이 숙식으로 붐볐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안희제(安熙濟) 편에 백범 김구 선생에게 독립자금을 전달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만석꾼 재산 중에 독립자금에 쓰고 남은 돈과 재물을 모두 대구대학의 설립자금으로 헌납하여 오늘의 영남대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그가 대학을 세운 것은 후손들이 배워서 다시는 나라를 빼앗기는 설움을 겪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한국유리의 창업자인 최태섭 장로의 사랑에 빚진 자에서 “다른 사람보다 무언가 더 가진 사람은 그것이 힘이든, 돈이든, 지식이든 상관없이 그것을 사회와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데 사용해야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적어도 기업 이윤의 20%는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또 그러기 위해 노력해 왔다. 부유하기 때문에 남을 도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남을 돕기 때문에 부유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남을 돕는데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쓸 줄 아는 사람은 참된 부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찰스 F 피니는 자신의 소유한 전 재산인 약 9조원을 기부했습니다. 그는 1982년부터 익명으로 27억 달러(3조2000억 원)를 5개 대륙의 1000여개 기관에 기부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느 곳도 명예의 전당에 그의 이름을 올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2016년 연말에 700만 달러(약 83억 원)를 모교인 코넬대학에 마지막 재산을 환모두 원했습니다. 그는 거액을 기부했지만 그의 삶은 소박했습니다. 그는 현재 샌프란시스코의 임대아파트에서 부인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여행할 때 버스를 타고, 비닐 가방에는 항상 책 한 권이 들려있습니다. 뉴욕에 살 때는 맨해튼 변두리의 허름한 식당에서 햄버거를 즐겨 먹었습니다. 그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최소한의 생활비 외의 돈은 내게 필요하지 않다. 부자라고 양복 두벌 입지 않는다.” 그는 자신에 대해 인색했지만 타인을 위해서는 부유했습니다. 이런 사람이 진정 부유한 사람, 성숙한 사람입니다.
성도는 물질관이 분명해야 합니다. 성도는 탐욕을 버리고 정직한 목적으로, 정직한 방법으로 돈을 모아 하나님 나라와 어려운 이웃과 그리고 하나님께 드릴 것은 정확하게 드리고 선한 사업에 알뜰하게 써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알뜰하게 가정을 이끌려면 가계부를 써야 합니다. 주는 것이 복이 있습니다.
♬나의 보화드리니 주여 받아 주셔서 하늘 나라 위하여 주 뜻대로 쓰소서♬(새찬송가 213장 4절)
생각하기
1. 그들은 물질을 모으는 목적이 불의했습니다(약 5:1-3). 성도의 물질에 대한 바른 목적에 대해 말해 보시오.
2. 그들은 물질을 모으는 방법이 불의했습니다(약 5:4,6). 성도의 물질을 모으는 바른 법에 대해 말해 보시오.
3. 그들은 물질을 불의한 곳에 허비했습니다(약 5:5). 성도의 물질을 바르게 쓰는 법에 대해 말해 보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