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5:13-20
고난의 때에 기도와 찬송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약 5:13)
“이 세상에 쓰라린 고난의 폭풍우가 나를 에워쌀 때 나는 기도하리라. 마지막 날이 가까워 사탄이 의로운 자를 찾고 거짓 예언자들이 횡행할 때 나는 기도하리라. 이 세상의 맹목적인 냉담이 나를 실망시킬 때 나는 기도하리라. 이기적 욕심과 신앙의 결핍이 나를 위협할 때 나는 기도하리라. 하나님 아버지의 세계의 아름다움이 나를 황홀하게 할 때 나는 기도하리라. 주님의 크신 사랑과 용서와 은혜가 충만할 때 나는 기도하리라.”
우리는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고난을 만납니다. 고난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육체적인 고난이 있고 정신적인 심적 고난이 있습니다. 그리고 영적인 고난도 있습니다. 이런 고난은 사탄이 주는 고난도 있을 수 있고, 죄로 인한 고통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고난들은 가난한 자나, 부유한 자나, 유식한 자나, 무식한 자나, 잘 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예외 없이 찾아옵니다.
사람들은 고난이 닥치면 낙심하고 절망합니다. 고난을 당하면 심지어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행동을 하기 까지 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어려울 때에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기도하고 찬송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도의 성숙한 태도입니다.
1. 고난당할 때 기도하라(약 5:13상)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약 5:13상)
당시 유대인들은 고난이 닥치면 인과응보로 보았습니다. 이것은 유대의 뿌리 깊은 사상이었습니다. 제자들은 날 때부터 소경 거지를 보는 순간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이렇게 된 것이 뉘 죄입니까?” “본인입니까?” “아니면 부모입니까?” 이 때 예수님은 누구의 죄도 아니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9:3).
우리 또한 어려운 일이 생기면 내가 잘못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는 것은 아닌가, 아니면 조상의 죄로 인한 것은 아닌가 생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죄를 지은 결과로 어려운 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본문에서 고난은 죄와 상관없이 찾아오는 고난입니다. 이럴 때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원망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우리말에 “잘 되면 자기 복이고, 안 되면 조상 탓을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야고보는 어떻게 하라고 말씀했습니까? 그는 기도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시편 또한 하나님을 부르라고 말씀했습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5)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두 가지 응답을 받게 됩니다. 하나는 고통이 사라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나음을 받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장에 나병환자가 나옵니다. 예나 지금이나 나병은 천형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가정과 사회로부터 추방되어 외진 곳으로 격리수용했습니다.
사람에게는 몇 가지 기본욕구가 있습니다. 매슬로우는 결핍욕구와 성취욕구가 있는데, 결핍욕구 중에 소속감과 사랑의 욕구(belonging and love needs)가 있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사랑을 받고 싶고, 공동체에 속하고 싶습니다.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사랑은 함께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터치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면 포옹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나병환자와는 누구와도 터치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사랑을 주고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외로웠겠습니까?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그는 이런 고통과 외로움을 안고, 주님께 나아와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간절히 원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불쌍히 여겨 손을 대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막 1:41하)
예수님은 그의 기도를 즉시 응답하사, 그를 본래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깨끗하게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다른 하나는 기도를 해도 고난이 내게서 떠나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경우입니다. 그 대신에 고난을 극복할 힘을 주시고, 그 고난을 피할 지혜를 주십니다.
바울에게는 육체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육체의 가시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어쨌든 그에게는 육체의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주님께 매달려 세 번이나 기도했습니다. 성경에서 셋이라는 숫자는 완전수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바울의 육체의 고통을 제해주시지 않고 바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 12:9상)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바울은 이 말씀을 듣고 약할 때에 강함이라는 역설적인 진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보통 인과론적으로 약한 것은 약하고, 강한 것은 강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은 약한 데서 온전해지고, 약함에서 강해집니다.
기독교가 가장 강했던 시절은 환난과 핍박 중에 있었을 때였습니다. 기독교의 생명은 바티칸 성당이 지어졌을 때가 아니라, 고난을 피해 카타콤에 숨어 지낼 때였습니다. 주후 313년에 콘스탄틴 대제가 종교의 자유를 선포하는 순간에 기독교의 생명은 상실되었습니다. 한 교황이 “교회에 이제 금과 은이 없는 가난한 시대도 지났다.”고 하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제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는 시대는 지나갔다.”고 한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실패와 궁핍 속에서 온전히 나타납니다. 등이 따습고 배가 부를 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진주는 조개 속으로 모래가 들어가 만들어집니다. 조개 속으로 모래가 들어가니 얼마나 아리고 아프겠습니까? 이때 조개는 즙을 짜서 모래알을 감싸고 감쌉니다. 이를 1년, 2년, 4년, 5년 계속하게 되면 마지막에 영롱한 진주가 되는 것입니다. 고통의 가시는 오히려 진주와 같은 보배로운 믿음과 인격이 형성됩니다. 약하고 고독하고 힘들고 어려울 때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온전히 나타납니다. 약할 때에 강해집니다. 하나님은 약한 손을 강하게 하여 주시고,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십니다(사 35:3). 피곤한 자에게 능력을 주시고, 무능한 자에게 힘을 더하십니다.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사 40:29)
영국의 청교도 존 번연은 복음을 전하다가 12년 동안 감옥에 투옥되었습니다. 활동적인 그에게 감옥은 지옥과 같았습니다. 그는 그 옥에서 기도하다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말씀을 세 번 들었습니다. 그 때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족한 은혜를 주심을 깨닫고, 낙망과 슬픔과 고독을 넘어서 기쁨으로 옥중 생활을 했습니다. 그는 12년 동안의 옥중생활에서 신령한 은혜를 받고,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면서 성경 다음으로 읽혀지는 그 유명한 ‘천로역정’을 썼습니다.
어떤 분에게 귀한 딸이 있었습니다. 그는 사랑하는 딸을 백혈병으로 잃었습니다. 이는 그에게 큰 가시었습니다. 그 가시는 그를 몹시 힘들게 했습니다. 그 가시는 몇 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를 고통스럽게 하고, 딸이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한 것으로 인해 남을 원망하며 살아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반면에 어떤 이에게는 이 가시가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히 나타나는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미국의 흑인 노예들을 해방시킨 데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해리엣 비처 스토가 쓴 Uncle Tom's Cabin이 그러합니다. 그녀에게는 귀한 딸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딸을 어릴 때에 잃었습니다. 그녀는 딸 생각으로 살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는 딸로 인해 슬퍼하다가 문득 이 세상에 나보다 더 슬픈 여인이 또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그 때 그녀의 눈에 노예들의 불행한 형편이 보였습니다. 흑인의 어머니들은 아들딸들이 죽지 않았는데도, 아들 딸을 떼어놓고 다른 사람에게 팔려 생이별하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그녀는 내 딸이 죽어서 영원한 이별을 하였다지만, 노예들의 어머니는 살아서 이렇게 생이별을 하다니, 그 흑인들의 어머니의 마음이 얼마나 슬프고,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얼마나 아플까? 하는 심정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심정을 소설에 묘사했습니다.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감동을 받아 노예제도는 반드시 폐지되어야 한다는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약한데서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히 나타나 노예 해방의 물결이 일어난 것입니다. 링컨은 그녀가 아주 강한 여인일 것이라고 생각하며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링컨이 본 그녀는 연약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는 여인에게 어떻게 이렇게 연약한 여인이 큰일을 행했습니까? 물었을 때, 하나님이 강하게 하셨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약함에서 온전하고 강함이 됩니다.
우리는 일생동안 가시가 없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먹구름이 있는 것보다는 없는 것이 훨씬 좋습니다. 우리의 삶속에 청명한 날씨가 계속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면서 청명한 날씨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살아가면서 먹구름이 낀 날이 더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존전에 나아가 기도할 때 어둠은 오히려 우리에게 밝은 미래를 여는 기회와 아침의 밝은 빛의 여명이 될 것입니다.
♬약할 때 강함 되시네 나의 보배가 되신 주 주 나의 모든 것 주안에 있는 보물을 나는 포기할 수 없네 주 나의 모든 것 십자가 죄 사하셨네 주님의 이름 찬양해 주 나의 모든 것 쓰러진 나를 세우고 나의 빈 잔을 채우네 주 나의 모든 것 예수 어린양 존귀한 이름 예수 어린 양 존귀한 이름 예수 어린양 존귀한 이름 예수 어린 양 존귀한 이름♬
2. 즐거울 때에 찬송하라(약 5:13하)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약 5:13하)
우리가 고난당할 때에 기도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기도제목이 성취되어 희락을 때에 긴장이 풀려 방종하기 쉽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속성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희락을 때에 찬송하는 것이 성숙한 성도의 태도입니다.
찬송은 예배를 향기 나게 합니다. 찬송은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평안해지고 기뻐해지고 놀라운 은혜를 받도록 인도합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위대하시다 하리니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야훼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시 69:30-31)고 했습니다. 합니다. 그리고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야훼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시 100:4-5)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감사함으로 들어오고 찬송함으로 궁정에 들어오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찬송하는 사람을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을 대대에 미치게 하십니다.
그리고 찬양은 입술의 고백입니다.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 13:15)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엡 5:19-20)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
하나님은 우리의 입술을 통해 찬송을 듣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하면 하나님이 만족하십니다. 감사와 찬양은 마귀가 견디지 못합니다. 또 감사와 찬양은 우리의 양식입니다. 병든 사람에게는 약이 되고, 힘이 없는 사람은 영양분이 되고, 마음에 즐거움이 없는 사람에게는 즐겁게 합니다. 그리고 고난을 당할 때 찬송해야 합니다. 어떻게 고난과 시련이 닥칠 때 찬송할 수 있습니까? 기독교는 역설적인 진리입니다. 고난과 시련 속에서 찬양할 때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사도행전 16장을 보면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를 개척하다가 매를 맞고 옥에 투옥되었습니다. 그런데 바울과 실라의 입에서는 신음소리가 아니라 기도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입에서는 사람들을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감사 찬양이었습니다(행 16:25). 그들은 몇 번이라도 죽어 마땅한 죄인을 용서하시고, 복음을 전하게 하신 주님의 은혜를 찬양했습니다. 바울의 찬양은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나오는 찬양이었습니다. 바울의 찬송은 적막한 옥사에 울려 퍼졌습니다. 죄수들이 이들의 찬송소리를 들었습니다. 죄수들도 그들의 찬송에 크게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원망과 절망의 때에 찬양하고, 울어야 할 시간에 기뻐하며, 정죄해야 할 때 기도했습니다. 바로 그 때 옥문이 열렸습니다. 주님의 능력이 주님을 찬양하는 그들 속에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은 찬양 속에 거하십니다. 하나님은 찬양을 기뻐하십니다. 찬양할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다윗이 사울 앞에서 수금을 타며 찬송을 불렀을 때, 악신이 떠나고 사울은 상쾌해졌습니다(삼상 16;23). 시편의 약 3분의 2가 다윗의 작품입니다. 그 중에 시편 103편은 다윗의 유명한 찬양 시입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시 103:1).
다윗은 내 속에 있는 것들에게 다 하나님을 송축하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했습니다. 다윗이 많은 고난을 당하면서도 그 고난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전심전력으로 하나님을 찬양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은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고자 함입니다(사 43:21).
기적에는 반드시 과정이 있습니다. 주님을 감동시키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할 수 시킬 수 있는 요인 중의 하나는 기도와 찬송입니다. 기도와 찬송은 능력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려면 절망과 낙심 중에도 기도와 찬송을 드려야 합니다.
이제 우리가 고난 중에 기도하여 고난이 해결됐다면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더 나아가 고난 중에 기도한 후에는 기도가 이미 이루어진 줄로 믿고 감사와 찬양을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찬송을 하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영국은 독일에게 공격을 당해서 런던이 다 파괴되고 국민들은 낙심천만해서 전쟁할 용기도 없어지고 이럴 때 영국의 대장군 몽고메리가 어찌할 바를 몰라서 어려운 고비에 처했습니다. 그런데 신문 기자들이 2차 대전의 영웅 몽고메리 장군에게 물었습니다. “우리 국민들이 해야 될 태도를 가르쳐 주십시오. 이 전쟁은 누가 이기겠습니까? 독일이 이기겠습니까? 영국이 이기겠습니까?” 그것 어려운 질문 아닙니까? 그러자 몽고메리 장군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독일이 이길 수도 있고 영국이 이길 수도 있는데요. 노래를 잘 부르는 쪽이 이길 것입니다.” 위기의 순간에도 찬송하면 승리합니다. 원망, 불평, 탄식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찬송하면 우리에게 더욱 축복과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3. 병들었을 때 기도하라(약 5:14)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약 5:14)
야고보는 병들었을 때 장로들을 초청하여 기도를 요청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기름’은 의약품을 말합니다. 당시 길르앗의 유향을 의약품으로 사용했습니다.
대개 믿음이 있다는 사람들 중에는 약을 먹으며 기도하면 믿음이 없다고 비난합니다. 그리고 약을 먹지 말고 오직 믿음, 오직 기도만 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감기만 걸려도 기도원으로 달려갑니다. 그러나 약을 복용했다고 믿음이 없는 사람처럼 매도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정당하게 약을 복음하면서 기도하도록 했습니다. 성경은 약을 쓰는 것은 믿음이 없는 것이고, 의사를 의지하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병원에도 가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람과 의학을 사용하지 않고자 하는 그 마음만큼은 귀합니다. 그러나 언제나 모든 일을 그렇게 이해하고 행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여호와증인이 수혈을 반대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위장과 자주 나는 병을 위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고 했습니다(딤전 5:23). 그 당시에 의약품이 두 가지가 있었는데 포도주와 기름이었습니다. 이는 의학적인 수단이 전혀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의사의 필요성을 인정했기에 “병든 자라야 의원이 쓸데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의사인 누가와 평생 동행했습니다. 육체의 가시 때문에 의사 누가와 동행했던 것 같습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도 포도주와 기름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의사나 약품도 하나님이 함께 하셔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크리스천 의사 암브로스 파레는 그의 진료실 문에 이런 문구를 붙여놓고 환자들을 진료했다고 합니다. “나 파레는 상처를 돌볼 뿐이요, 병을 낫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의사는 상처를 돌볼 뿐 진정한 치료는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라파(출 15:26), 여호와 하나님은 치료자이십니다.
4. 서로 기도하라(약 5:15-20)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약 5:15-16)
기도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가 죄를 범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됩니다. 치료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단절되면 우리의 기도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에 앞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주님께 진실하게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믿음의 기도는 하나님의 보좌를 흔듭니다. 기도를 받는 사람이 믿음이 있으면 더 좋지만, 그렇지 않아도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는 사람의 믿음을 보시고 응답하십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이를 구원하시고, 병든 이를 일으켜 세우십니다. 우리가 병 낫기를 원한다면 기도해야 합니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큽니다. 야고보는 기도의 모범을 엘리야의 기도에서 찾았습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약 5:17-18)
우리가 기도할 때 경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 같은 사람의 기도를 하나님이 응답해 주실까 하는 불신입니다. 그러나 엘리야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기도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응답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었습니까? 목청을 높여 기도해서 그랬습니까? 열왕기상 18장을 보면 바알 선지자들의 목청이 훨씬 더 컸습니다. 그들은 칼과 창으로 피를 흘리기까지 몸을 상하면서 큰 소리로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우상은 응답이 없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이 믿는 우상은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였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였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였고, 코가 있어도 냄새를 맡지 못하였고,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였고,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였고, 목구멍이 있어도 소리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시 115:4-7).
“그들의 우상은 은과 금이요 사람이 손으로 만든 것이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냄새 맡지 못하며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이 있어도 작은 소리조차 내지 못하느니라.”(시 115:4-7)
사람들은 생명이 없는 신들을 의지합니다. 기도해도 대답이 없는 신들에게 기도합니다. 현대인들은 돈과 권력과 지성과 기술문명을 신으로 섬깁니다. 그러나 이런 신들에게 아무리 부르짖어도 응답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기도의 용사인 엘리야는 어떻게 기도의 응답을 받았습니까?
“저녁 소제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주의 종인 것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 알게 하옵소서.”(왕상 18:36)
엘리야는 언약을 성취하시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했습니다. 그는 바알이 하나님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 되심을 알도록 심령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는 엘리야가 주의 종이 됨과 엘리야가 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것임을 알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존귀하신 이름과 명예와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고자 기도했습니다(왕상 18:37). 그는 자기 이름을 드러내고자 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는 백성이 있을까 하여 “자기는 오직 하나님의 종으로서 일을 한다.”고 했습니다.
그의 마음은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께 향했습니다. 그의 기도는 중언부언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기도는 짧았습니다. 그의 기도는 짧았지만 간절했습니다. 그의 기도는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기도였습니다. 그의 기도는 겸손했습니다. 그는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그의 기도는 주님께 복종하는 기도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기도는 부르짖는 기도였습니다. 울부짖는 기도는 통회하는 기도입니다.
그가 기도했을 때 사탄의 권세에 매인 백성들이 하나님께 돌아왔습니다. 그가 기도했을 때 바알 선지자들이 멸절했습니다. 그가 기도했을 때 3년 6개월 동안의 기근이 풀리고 큰 비가 내렸습니다. 그의 기도는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였습니다. 이처럼 엘리야의 기도를 응답하신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의인의 기도를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죄인들이 미혹의 길에서 돌아서게 되고, 사망에서 구원을 받습니다(약 5:19-20).
“여호와를 의지하라. 생명의 하나님을 의지하라. 창조의 하나님을 의지하라. 우주를 섭리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라.”(시 115:9-18)
그리고 하나님은 어려운 난관에 부딪쳤을 때 하나님께 나아가 부르짖도록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부르짖으라’는 것은 절규한다, 애통하고 통회하며 소리 높여 하나님 앞에 소원을 아뢴다는 뜻입니다. 자식을 잉태하지 못한 한나가 “하나님이여, 내게 자식을 주시옵소서.”하며 울부짖었던 그런 모습입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사모하여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것처럼, 죄인이 하나님 앞에 나와 갈급한 심령으로 죄를 토설하면서 간절히 구하는 눈물의 기도를 말합니다.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소리를 높여 드리는 간절하고 뜨거운 기도를 말합니다. 시편은 하나님이 부르짖는 기도에 기울이시고 부르짖을 때 구원하신다고 말씀했습니다.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 귀는 저희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시 34:15)
“나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로다.”(시 55:16)
예수님께서 여리고성을 지나실 때였습니다.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큰소리로 부르짖었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막 10:47) 예수님은 그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맹인의 눈을 고쳐주셨습니다. 부르짖는 기도는 능력이 있습니다. 부르짖는 기도는 성령을 선물로 받습니다.
그리고 ‘부르짖으라’는 것은 명령형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를 말씀하실 때 명령형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 7:7)
기도는 성도들에게 선택 사항이 아니라 절대 필수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되 크고 비밀한 일을 보여주십니다.
사랑의 표현은 기도입니다. 한나는 아들 사무엘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기도의 증인이 될 만큼 로마 성도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롬 1:8-9). 모니카는 아들 아우구스티누스를 사랑했기 때문에 방탕한 그를 위해 30년 동안 포기하지 않고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수잔나는 그의 자녀들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기도했을 때 존 웨슬리와 찰스 웨슬리는 위대한 믿음의 거장들이 되었습니다. 기도보다 더 귀한 사랑은 없습니다.
사무엘은 사울이 잘못했을 때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삼상 12:23상)라고 말씀했습니다. 바울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고 말씀했습니다. 부모가 쉬지 않고 기도할 때 자녀들은 곁길로 가지 않습니다. 설령 곁길로 가다가도 오늘도 나를 위해 엎드려 기도하시는 부모님을 생각하여 그 길에서 벗어나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됩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자녀를 위해 기도하는 어머니가 있는 그 자녀는 절대로 그릇된 길로 가지 않는다.”
믿음의 기도에 대한 시가 있습니다. “믿음의 기도는 유창한 말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많은 말이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조리 있게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정열적인 기도는 더 더욱 아닙니다. 믿음의 기도는 자신을 십자가에 굴복시키는 것입니다. 믿음의 기도는 소원들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내려놓는 것입니다. 믿음의 기도는 자신의 요구를 관철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기도는 그리스도께서 앞서 가셨던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가는 것입니다. 믿음의 기도는 자기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난 중에 기도하고, 고난 중에 찬양해야 합니다. 그리고 병들었을 때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서로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믿음의 기도와 의인의 기도는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기도를 기뻐하시고 능력으로 응답하십니다.
♬마음 속에 근심 있는 사람 주 예수 앞에 다 아뢰어라 슬픈 마음 있을 때에라도 주 예수께 다 아뢰어라 주 예수 앞에 다 아뢰어라 주 우리의 친구니 무엇이나 근심하지 말고 주 예수께 아뢰라♬(새찬송가 365)
생각하기
1. 성도는 고난의 때 기도하고 기도 응답을 받았을 때 찬송해야 합니다(약 5:13). 기도와 찬송의 중요성에 대해 말해보시오.
2. 성도는 병들었을 때 기름을 바르며 기도해야 합니다(약 5:14). 기름을 바르며 기도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지 말해보시오.
3. 성도는 서로 기도해야 합니다(약 5:17-20). 믿음의 기도의 중요성을 말해보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