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성탄말씀 누가복음 1:1-25
하나님 앞에서 산 의로운 사가랴 부부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눅 1:6)
한국 사람들은 유난히 큰 것, ‘大’字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이름도 대~~한 민국입니다. 대도 큰데 거기다가 넓다는 한이 붙었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다리도 ‘대’자를 꼭 붙입니다. 한강대교, 한강도 크다는 뜻인데 거기다가 다리까지고 대자를 붙이니 얼마나 대자를 좋아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다리만 그런 것이 아니라 길도 강남대로, 그것뿐만 아니라 고개도 대관령, 예배당도 대성전이라고 부릅니다. 한국 사람들은 크고 넓고 많고 화려한 것을 좋아합니다.
이런 영향으로 성도들도 큰 믿음을 원합니다. 큰 믿음을 가져야 축복의 통로가 되는 줄로 압니다. 본문에 보면 주님으로부터 복 받은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나옵니다. 그는 큰 믿음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산 의인이었습니다. 우리가 사가랴와 엘리사벳처럼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 되어 복된 성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살았습니다(눅 1:6).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들 앞에서 사는 사람이요, 다른 하나는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사람 앞에서 사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좋게 보이려고 합니다. 그런 사람의 삶은 타인 중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들의 눈치를 보게 됩니다.
한국인의 특성 중에 하나가 눈치를 잘 보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체면을 중시하는 성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체면문화는 수직적 인간관계, 유교적인 형식문화, 자신의 생각보다 타인으로부터의 평가를 중시하는 타인중심, 감정과 분위기를 중시하는 감정문화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눈치문화가 얼마나 발달되었느냐면 눈치에 따른 속담이 많습니다. “눈치 빠르면 절에 가서도 젓국을 얻어먹는다.” “눈치로 밥 먹고 산다.” “눈치 채지 않도록 하라.” “눈치 것 하라.” “눈치가 없으면 코치라도 있어야 한다.”
요즘 ‘다스는 누구 것인가’가 화두가 되고 있는데 차명계좌, 비자금, 돈세탁, 이중장부, 분식회계, 다운계약 등은 모두가 사람 앞에 사는 데서 오는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사람이 사람 앞에 살게 되면 사람에게 아첨하고 아부합니다. 그러다 보니 비굴하게 됩니다. 사람 앞에서는 잘 하는 척하고 사람이 안 보이면 잘 안합니다. 이것은 노예들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노예는 주인에게 미운 물건이 되지 않기 위해 주인의 눈치를 살핍니다. 이것이 몸에 배이면 노예근성이 됩니다.
사람 앞에서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교회에서는 신자, 교회문 밖을 나서는 순간 세상의 기주대로 살아가는 불신자가 됩니다. 교회에서 찬송가를 부르지만 교회 밖을 나서면 유행가가 입에서 흘러나옵니다. 사회의 분위기를 따라 불신자와 똑같이 쾌락과 허영에 휩쓸려 살아갑니다. 이런 사람은 불신자들에게 좋은 영향력을 끼칠 수 없고, 사회에 소금과 빛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반면에 하나님 앞에 사는 사람은 하나님을 의식합니다. 그런 사람은 무소부재하신 하나님 앞에서 살기 때문에 환경과 상황에 따라 삶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교회에서 신자이면, 학교에서도 신자이고, 직장에서도 신자이고, 가정에서도 신자입니다. 사람이 보든 안 보든 변함없이 신실하고 충성스럽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력을 끼치게 됩니다.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눅 1:6상)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었습니다. ‘의인’이란 말은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에 좌우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살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이 의롭게 살 수 있었던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이들에게 반드시 상을 주신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히 11:6). 믿음의 선진들은 모두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세상에서 좀 손해를 보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살았습니다.
요셉은 용모가 준수한 청년이었습니다. 이런 요셉에게 반한 보디발의 처가 요셉을 끈질기게 날마다 유혹했습니다. 이는 혈기왕성한 20대 청년 요셉에게는 견디기 힘든 유혹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여인의 말을 듣지도 않았을 뿐더러 함께 있는 기회를 갖지 않았습니다. 하루는 요셉이 시무하러 집에 들어갔는데 두 사람만 있게 되었습니다. 보디발의 처는 요셉의 옷을 붙들고 나와 너만 있다고 유혹했습니다. 그러자 요셉이 “당신이 믿는 신이 쳐다보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그 신을 이불로 덮어 우상의 눈을 가렸습니다. 그러자 요셉은 내가 믿는 하나님은 지금 불꽃같은 눈으로 나를 보고 계신다.”고 대답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결단코 죄 짓지 않고자 했습니다.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창 39:9하)
사람들이 죄를 짓는 것은 나 한 사람밖에 모르거나, 또는 너와 나밖에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하나님이 지금 나의 모습을 보고 계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랬을 때 감히 죄를 지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사람 앞에서 살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살았습니다. 사람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더 두려워했습니다. 그때 그는 온몸으로 죄를 거부했습니다.
죄의 소욕은 불과 같아서 언제든지 타오릅니다(잠 6:27-28). 특히 젊은 시절은 더욱더 그러합니다. 이 유혹은 나의 의지나 힘으로 물리칠 수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으로만 이길 수 있습니다(시 119:9-10).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살면 성령 충만하게 되고 성령 충만하게 되면 죄의 소욕을 이기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살 수 있습니다.
둘째, 그들은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눅 1:6하).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그들은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했습니다.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눅 1:6하)
‘흠이 없다’는 말씀 앞에 철저하게 회개하여 깨끗한 그릇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회개는 하나님과 나 사이의 통로가 깨끗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지난주에 오수배관에서 물이 새는 것을 고치면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교회 지은 지 25년이 되었습니다. 25년간 배관에 이물질이 조금씩 끼인 것이 이제는 오수가 내려가지 못할 정도로 배관이 막혀 있었습니다. 이물질은 미세한 머리카락과 물티슈가 쌓이고 쌓여 배관 자체를 막혔던 것입니다. 배관을 뚫으니 오수가 시원스럽게 잘 빠졌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심령에 작은 죄를 회개하지 않게 되면 이것이 쌓이고 쌓여 하나님과의 통로가 점점 막혀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으니 말씀에 순종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 순종하지 않으니 주님으로부터 복을 받을 수도 없습니다. 회개는 주님으로부터 복을 받는 통로입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 부부가 말씀을 좇아 사는 것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편하고 쉽게 살고 싶습니다. 이런 본성을 극복하고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말대로 쉽지 않습니다. 특히 모든 것을 상대적으로 생각하는 사회에서는 더욱 더 그러합니다. 당시 제사장은 대부분 사두개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세속 정치세력과 결탁하여 뇌물을 받고 쾌락을 즐겼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들고 다녔지만 그 말씀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세상은 하나님 말씀보다 세상의 분위기와 세상의 요구대로 살기를 원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미움 받고 때론 불이익을 당하기도 합니다. 이런 사회에서 출세하려면 적당히 타협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지키며 살았습니다.
말씀은 그들에게 슬픔 중에 위로가 되었습니다. 말씀은 낙심과 좌절 중에 힘이 되었습니다. 말씀은 환난과 핍박 중에 소망이 되었습니다. 말씀은 세상에서 지치고 눌린 그들의 영혼을 소성시켰습니다. 말씀은 그들의 삶에 지혜가 되었습니다. 말씀은 그들의 발에 등이고, 그들의 길에 빛이었습니다. 말씀은 그들의 삶을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이 생명력이 넘치게 하였고, 의의 열매를 맺도록 했습니다. 말씀은 나이 늙은 그들을 항상 젊은이와 같이 생동감이 넘쳐나게 했습니다.
신앙생활이란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약 2:17). 말씀을 많이 아는 사람, 말씀을 열심히 가르치는 사람이 의인이 아닙니다. 말씀대로 행하는 사람이 의인입니다. 그들은 말씀을 실천하여 의인의 칭호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회개하고 말씀대로 행하고 지켜서 깨끗하고 맑은 복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셋째,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기도했습니다(눅 1:13).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믿음으로 살았지만 그들에게 심각한 인생 문제가 있었습니다. 엘리사벳이 잉태하지 못해 자녀가 없었고, 두 사람의 나이가 많았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잘 믿는데도 아들이 없다는 것은 사가랴 가문의 수치였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운명주의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기도로 운명을 극복했습니다.
어느 날 차례가 되어 사가랴가 성소에서 분향하게 되었습니다. 분향은 기도를 의미합니다(계 5:8). 사가랴가 성소에서 기도하고 있을 때 주의 사자가 향단 우편에 서 있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이 때 천사가 말했습니다.
“천사가 그에게 이르되 사가랴여 무서워하지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눅 1:13)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Your prayer has been heard).’는 현재 완료형입니다. 그들은 자식문제를 놓고 과거부터 이제까지 기도했고, 하나님은 과거부터 이제까지 계속 듣고 계셨습니다. 그들은 오랜 세월 자신의 인생문제를 놓고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늙어 자식을 가질 형편이 안 됨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때가 이르자 마침내 하나님께서 메시야의 선구자 세례 요한을 주셨습니다.
송나라 때의 벽안록에 줄탁동기, 줄탁동시, 줄탁지기라는 사자성어가 있습니다. 어미 닭의 품속에서 자란 병아리는 어린 부리로 껍질안쪽을 쪼아 알을 깨고 세상으로 나오려고 합니다. 이를 ‘줄’이라고 합니다. 이에 어미닭은 품고 있는 알속의 병아리가 부리로 쪼는 소리를 듣고 어미 닭이 알을 쪼아 병아리가 알을 깨는 행위를 도와주는 것을 ‘탁’이라고 합니다. ‘줄탁’은 알 속의 병아리가 연약한 부리로 먼저 시작합니다. 병아리의 ‘줄’이 있어야 어미닭의 ‘탁’이 시작됩니다. 줄이 없으면 탁도 없습니다. 그러나 병아리가 구멍을 뚫고 나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병아리의 ‘줄’이 아니라 어미닭의 ‘탁’입니다.
기도도 바로 ‘줄탁동시’와 같습니다. 현재 처한 삶에서 내가 먼저 ‘줄’해야 하나님이 ‘탁’하십니다. 하나님은 내가 먼저 ‘줄’하기를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은 내가 처한 캄캄한 어두움에서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끊임없이 기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렘 29:12, 33:3). 상황이 어렵고 소망이 보이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먼저 ‘줄’하면 하나님은 ‘탁’하십니다.
저는 목회생활을 하면서 크고 작은 질곡을 많이 겪었습니다. 제가 1982년 10월 17일에 4평정도 낡은 숭의동 허름한 2층에서 인하대학생 1명, 인천 교대육대학생 1명, 졸업생 2명, 저의 부부와 2살된 아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다음 주 1982년 10월 24일의 수첩에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사회 우남식, 찬송가 32장, 기도 우남식, 찬송가 219장, 메시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4-20). 헌금 기도 안은경, 참석자는 우남식, 안은경, 우다윗 3명이었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교사직을 포기하고, 제 아내 또한 중학교 영어 교사를 포기하고 UBF의 간사(목자)로, 아무연고도 없는 인하대학교 복음화를 위해 용달차에 짐을 싸들고 대전에서 왔습니다. 제 아내는 법원 형사과장 외동딸로 별로 어려움이 없이 자랐는데 대학선교 간사의 남편을 둔 아내로서의 어려움은 제가 겪은 어려움보다 훨씬 컷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번도 내게 내색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백도 없고 권세도 없고 돈도 없고 명함도 없는 별이 없는 별볼일없는 사람으로 가진 것은 성경 말씀이고 할 수 있는 것은 기도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비록 내 메시지를 듣는 사람은 세 사람이지만 A4용지 6페이지 반의 분량의 메시지를 볼펜이 아니라 펜으로 매주 정성을 다해 종이를 오려 풀로 붙여 고치고 또 고치기를 여러번 고친 원고를 가지고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이를 무려 10여년을 계속했습니다. 10년이 지난 때부터는 전동타자기로, 지금은 컴퓨터로 메시지를 쓰지만 지금도 12포인트의 6페이지 반을 반드시 써서 전합니다. 그것이 모인 것을 편집하여 “∼만난 복음” 시리즈가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 나가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주님은 ‘탁’하시고 문제를 해결하여 주시곤 하셨습니다. 여러분에게 문제가 있습니까?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연약한 마음과 몸으로 연약한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줄’하십시오. 그때 하나님은 ‘탁’하시고 여러분의 기도 제목에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깨끗한 그릇이 되었을 때 위대한 세례 요한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위대한 인물이 나오기를 바라지, 그릇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릇이 없이 물건을 담을 수 없듯이, 그릇이 준비되지 않으면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없고, 위대한 사람을 키울 수 있는 도구가 될 수 없습니다. 내가 깨끗한 복의 통로가 되어야 역사적인 위대한 인물이 되고 인물을 키울 수 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18세기에 미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신학자요 철학자요 사상가요 복음 전도자였습니다. 그는 미국 제1차 영적 대각성운동을 일으킨 선두주자이기도 합니다. 20세기 영국의 유명한 목사였던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는 그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청교도들을 알프스에 비유하고, 루터나 칼빈을 히말라야에 비유하며, 조나단 에드워즈는 에베레스트 산에 비유하고 싶다. 그러나 그는 바울을 가장 닮은 사람이다.” 그런 그가 탄생되기 위해서는 그 배후에 위대한 믿음의 부모들이 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 디모데 에드워즈는 63년 동안 목회한 청교도의 경건한 목사였으며, 그의 어머니 에스더는 회중교회 목사인 솔로몬 스토다드의 딸로 조나단 에드워즈가 청교도적 경건과 학문에 관심을 갖도록 훈련하였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그는 어릴 때부터 하루에 5번씩 기도하였으며, 9세 때 벌써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또한 6세 때 아버지로부터 라틴어를 배워서 13세가 되기 전 이미 라틴어, 헬라어, 히브리어를 통달하여 원어성경을 읽었습니다.
여러분이 자녀들을 위대한 인물로 키우고 싶습니까? 여러분이 위대한 인물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먼저 깨끗한 그릇이 되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말씀대로 살며 기도하고 날마다 회개하여 깨끗한 통로가 되십시오.
넷째, 그들에게 세례 요한을 주셨습니다(눅 1:13-25)
세례 요한의 태어남은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기뻐하리라고 했습니다. 어떤 점에서 그렇습니까?
“이는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그들의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눅 1:15-16)
첫째는 그가 하나님 앞에서 큰 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가 이룰 사역을 말합니다. 둘째는 그가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않는 나실인으로 하나님께 헌신된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헌신된 사람은 술을 마셔 정신을 혼미하게 하지 않고, 쾌락에 몸을 던지지 않습니다. 셋째로 모태로부터 성령에 충만한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의 사역의 위대성은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길을 예비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리라.”(눅 1:17)
그에게는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과 믿음, 불의와 죄에 대한 분노, 그리고 백성들에 대한 뜨거운 목자의 심정이 있었습니다.
이세벨의 충동을 받은 아합왕은 온 백성이 바알 앞에 절하게 하였습니다. 이에 분노한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명을 상대로 어느 신이 진짜인가 기도의 싸움을 하였습니다. 그는 모여든 백성들을 책망했습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하나님이면 그를 좇으라고 했습니다(열상 18:21). 그는 회색분자가 되지 말라고 책망했습니다.
그는 먼저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 되심과 내가 주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날 알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는 이 백성이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저희의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열상 18:36-37). 하나님은 엘리야의 기도에 불로 응답하셨습니다. 엘리야는 그 자리에서 바알 선지자들을 기손 시내로 끌어다가 다 죽였습니다. 엘리야는 이런 심령과 기도의 능력, 믿음의 능력을 통해 그 시대 백성들에게 도전하고 여호와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했습니다.
당시 많은 아버지가 자식들을 돌보지 않고 죄에 빠졌습니다. 젊은이들은 이에 반발하며 의인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자기감정대로 행했습니다. 그런 시대에 요한은 엘리야와 같은 특심한 열심을 가지고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그는 백성들의 죄를 책망하며 온 이스라엘을 회개시키며 주의 길을 예비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가슴이 뻥 뚫리는 말씀을 듣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부흥회를 쫓아다니고 교회를 옮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가나안 신자가 됩니다. 성령 충만한 삶은 지속적인 말씀 묵상과 개인 기도생활, 그리고 절제된 생활을 할 때만이 엘리야의 심령을 덧입고 시대의 죄악과 싸우며 성령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2017년 성탄을 맞아 깨끗한 통로가 되어 복된 성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 깨끗한 축복의 통로. 당신을 통하여서 열방이 주께 돌아오게 되리. 당신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 깨끗한 축복의 통로. 당신을 통하여서 열방이 주께 예배하게 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