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 1:1~5
산 소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벧전 1:3)
마귀도 기사와 이적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마귀가 못하는 게 셋이 있습니다. 하나는 감사하지 못하고, 다른 하나는 사랑하지 못하고, 또 다른 하나는 용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거듭난 성도라면 이 세 가지를 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감사, 사랑, 용서는 성도의 성숙의 척도입니다.
속담에 “사랑하면 허물은 보이지 않고 모든 게 다 좋게 보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에게 사랑이 없으면 우울증이 생깁니다. WHO 2016년 조사보고에 의하면 우울증 환자가 214만 5000명(전체 성인 4.54%)입니다. 우울증은 미움에서 옵니다. 용서하고 사랑하면 우울증이 치료됩니다. 혹여 사랑할 대상이 없으면 꽃이라도 사랑하면 됩니다.
감사가 없으면 스트레스가 생깁니다. 감사가 없는 것은 죄의 원인이 되고, 스트레스는 모든 질병의 원인입니다. 한국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가 66.7%입니다. 이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안은 감사입니다. 1958년 스트레스 연구로 노벨의학상을 수상한 한스 셀리에는 하버드대학교 고별강연회에서 스트레스 해소 방안을 한 마디로 “Appreciation.”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그의 크신 긍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을 주신 하나님을 감사 찬송할 때 모든 질병이 사라집니다.
소망에는 산 소망과 죽은 소망이 있습니다. 죽은 소망을 붙들면 낙심하고 절망하다가 소망의 등불이 사그라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십자가와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산 소망을 가질 때 우리의 소망이 봄의 새싹처럼 파릇파릇하게 됩니다. 이 산 소망은 반드시 성취됩니다. 이 산 소망은 고난 중에도 기쁨과 감사로 연결됩니다. 십자가와 부활로 산 소망을 주신 하나님을 감사 찬송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산 소망을 가진 사람이 복되다.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146:5)
누가 복된 사람입니까? 하나님을 도움으로 삼고, 하나님에게 소망을 두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미래의 희망을 주십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의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 29:11)
성경 말씀과 성령은 우리에게 미래의 소망을 줍니다. 소망의 반대는 절망입니다. 절망하는 사람과 소망하는 사람은 삶의 근본 태도가 다르고 행동이 다릅니다(욥 4:6). 미래의 소망을 가진 사람은 낙심하지 않습니다(시 42:11). 미래의 소망을 둔 사람은 하나님을 바라봅니다(시 62:5). 소망은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소망은 항상 소망을 품고 하나님을 찬송하게 합니다(시 71:14).
늘 하나님께 기도하게 합니다(딤전 5:5). 요즘은 핸드폰(hand phone)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핸드폰이 손에 쥐어지지 않으면 불안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핸드폰(hand phone)보다 헤븐폰(heaven phone)을 즐거이 하여 하나님과 수시로 기도하고 대화하게 하십니다. 시편에서 다윗을 보면 어려우면 하나님께 원망도 하고 원수를 갚아달라고 탄원합니다. 그러면 주님은 내가 방패요 피난처요 바위이시고 구원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우리가 어떤 어려움 중에도 마음을 굳게 하여 인내하며 견디게 합니다(약 5:7~8). 그래서 결국 승리자가 됩니다.
그 막강했던 로마제국이 왜 멸망했습니까? 그들이 이 땅에 죽은 소망을 붙들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다 사그라집니다. 한편 초대 성도들은 그 모진 박해와 핍박 속에서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았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을 때 여러 핍박과 박해에서도 굳게 견디어 마침내 승리했습니다.
복음이 마침내 승리하여 로마제국이 기독교 국가가 되었고, 오대양 육대주와 세계 곳곳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이처럼 땅에 소망을 두었던 로마제국은 사라졌지만,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복음은 승리하여 세계 곳곳에서 지금도 부활절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소망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서 이렇게 결과가 달라집니다. 영국의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불행을 고치는 약이 있다면, 그것은 소망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불행하고 외롭고 슬프게 사는 사람에게 처방전은 소망입니다. 왜 살면서 삶의 보람을 느끼지 못합니까? 왜 기쁨이 없습니까? 왜 행복하지 않습니까? 이는 소망이 없기 때문이고, 소망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 땅에 죽은 소망을 붙들고 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면 하나님의 도움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은총 베푸시고 승리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복과 사랑을 체험하게 됩니다. 전화위복이 되어 복된 사람이 됩니다. 우리가 부활절을 맞아 땅에 소망을 두지 말고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어 하나님과 늘 동행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산 소망은 썩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이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 1:4)
‘유업’(inherit)은 법률 용어로 부모나 조상으로부터 상속받은 재산을 말합니다. 신학 용어로는 하나님께서 그의 약속을 따라 순종하는 백성에게 주시는 선물이나 재산을 말합니다.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받았던 가나안 땅입니다. 신약에서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즉 구원과 영생과 하나님 나라의 유업입니다.
조상으로부터 받은 유업은 시간이 지나면 썩고 더럽혀지고 닮고 쇠해집니다. 한국에 한때 흥왕했던 재벌들, 기업들이 지금은 망해서 건물도 없어지고 회사 이름마저도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대표적으로 대우 그룹입니다. 대우가 잘 나갈 때는 루마니아 공항에서 입국할 때 프리 패스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부자가 3대 못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모두 부의 대물림, 세습에서 옵니다. 유대인들은 부를 자녀에게 과도하게 대물림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러 세대에 걸쳐 기업이 보존되고 있습니다. 권력도 10년도 못가기에 권불십년이란 말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유업은 이 세상의 유업과 다릅니다. 이생에서 시작되어 저 하늘나라까지 계속 이어지는 영원한 유업이요, 하나님께서 보장하시는 유업입니다. 그래서 완전하고 온전한 유업, 영생의 유업입니다.
“이제 너희는 온 이스라엘 곧 여호와의 회중이 보는 데에서와 우리 하나님의 들으시는 데에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구하여 지키기로 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이 아름다운 땅을 누리고 너희 후손에게 끼쳐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역상 28:8)
하나님은 모든 계명을 지키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에게는 후손에게 영원한 기업을 주십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약 2:5)
하나님께서 가난한 사람을 택하십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을 택하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십니다. 더 나아가 하늘나라를 상속받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지금 좀 가난하다고 낙심하지 마셔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면 부요하게 됩니다. 하나님 날에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유업을 주십니다. 따라서 좀 힘들지라도 믿음을 갖고, 기도하고, 하나님께 더 충성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사시기를 기도합니다.
사람들은 이 땅에서 유업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아등거리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수고하여 돈을 벌어 아름답고 큰 집을 장만합니다. 최고급 자재로 건물 짓고, 정원을 만들어 갖가지 색깔의 꽃들, 그리고 파란 잔디로 정원을 꾸밉니다. 여러 가지 가구와 장식품으로 응접실과 거실을 갖추어 놓습니다.
그러나 돈을 벌어서 훌륭한 저택을 만들었다고 해도 세월이 지나면 두고 가야 합니다. 이 세상 집은 영원한 내 집이 아닙니다. 나이를 먹어 언젠가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두고 가야 합니다. 돈도, 재물도, 보석도, 집도, 땅도, 문서도 다 놓고 가야 합니다.
소유는 한순간입니다. 세상에 보물을 쌓아 두는 것은 안전하지 못합니다. 보물은 재물뿐만 아니라 명예와 권세도 포함합니다. 세상에는 약탈자들이 있습니다. 죽음과 질병, 사고 등이 언제든지 덮칩니다. 예수님은 너희를 위해 보물을 땅에 쌓지 말고 하늘에 쌓아 두라고 하셨습니다.
미국에 라이만 비처라는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그는 신학교에서 학장까지 지낸 훌륭한 교수였으며,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위대한 설교가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자녀들을 대단한 열정으로 일곱 아들을 모두 목사로 키웠습니다. 그런 목사님이 목소리조차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노쇠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한 아들의 교회에서 다음과 같리 간증하여 많은 성도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여러분, 나는 지난 수년 동안 지상에서 천상으로 이사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시력도 하늘로 올라가고, 청력도 대부분 올라갔습니다. 체력도 거의 운반이 끝났고, 목소리도 지금 하늘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이제 나는 저 천국에 아름다운 저택이 준비되어 그곳으로 이사할 겁니다. 이 지상에는 아무것도 남을 것이 없습니다. 얼마 있지 않아 나도 곧 하나님 나라, 영원한 본향으로 올라갈 겁니다. 나는 이 땅의 집보다 하늘나라의 집을 더 동경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수십 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끝나면 저 세상, 하나님 나라로 올라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망을 하나님 나라, 저 천국에 두어야 합니다. 우리의 재산도, 재능도,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도 언젠가는 하나님 나라로 옮겨 놓아야 합니다. 우리는 늘 이사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이는 일찍 가고 좀 늦게 갈 뿐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다 하나님 나라에 갑니다. 우리의 종착점은 이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입니다.
우리는 언젠가 떠나야 할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아등거리며 욕심과 탐욕을 부리며 살지 맙시다. 주님의 은혜를 배반하며 사는 배은망덕한 삶을 살지 맙시다. 우리의 영원한 유업은 하늘나라, 천국에 있다는 것을 늘 기억하여 넉넉한 마음을 가지고 사랑하며 섬기며 복되게 삽시다.
예수님의 사역은 부활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하늘나라에 올라가신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데리러 다시 오십니다. 이것이 재림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사건을 믿으면, 예수님의 재림하실 것도 믿어야 합니다.
셋째, 산 소망이신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여 주신다.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벧전 1:5)
말세는 예수님 재림의 임박함을 말하는 시기입니다. 말세에 하나님은 믿음을 가진 자에게 하나님께서 능력을 베풀어 주시고, 또한 그 믿음으로 보호하시고 도와주십니다. 부활은 반드시 십자가의 고난을 통과해야 합니다. 4cm의 산도의 고난을 통과해야 새 생명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사고와 위험에서 보호하시고, 죄악으로부터 보호하시며, 마귀의 조롱과 공격에서 우리를 지키고 보호해 주십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신 32:10)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시되 방패로 보호하여 주십니다(창 15:1). 높은 산성으로 보호하여 주십니다(시 9:9). 하나님은 우리를 요새와 피난처가 되셔서 보호하여 주십니다(시 18:2, 사 25:4). 또한, 하나님은 우리를 목자가 되셔서 보호하여 주십니다(사 40:11). 하나님은 암탉이 병아리를 품는 것처럼 우리를 품어 주십니다.
눈동자와 같이 지켜주십니다. 눈동자는 전자동으로 되어 있습니다. 눈에는 30만 개의 회로와 1억 만개의 신경세포가 있습니다. 무엇이 들어오려고 하면 눈이 자동으로 감기고 보호합니다. 바로 하나님은 이 눈동자와 같이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이것은 일방적인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수없이 거역하고 배반하고 눈만 뜨면 원망하고 불평하는 우리를 사랑으로 용서하시고 용납하시고 받아 주시고 보호하여 주시고 지켜주십니다.
기독교는 철학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사상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명상의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도움과 보호를 받는 사랑의 종교입니다. 믿음의 부모가 있는 자녀는 부모의 도움과 사랑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우리가 은행에 돈을 예금하면 돈을 보호해 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인출하지 못하도록 비밀번호를 줍니다. 또한, 좋은 자동차일수록 운전자와 승객을 보호해 줍니다. 그래서 안전띠를 매면 사고가 나도 웬만해서는 다치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입니다.
사고와 위험이 닥칠 때 누가 나를 보호해 주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보호하여 주십니다. 하나님은 믿음이 있는 사람을 보호하십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보호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어려울 때 헤븐 폰을 붙들고 간절히 부르짖고 기도하는 사람을 도와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을 도와주십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해도 순종하지 않는 자녀를 도와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순종하면 도움을 받습니다. 성경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했습니다(삼상 15:22). 말씀을 듣고 회개하는 사람을 도우십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 1:23)
하나님은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 마음에 찔림을 받고,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말씀으로 십자가의 대속의 은총을 깨닫고, 말씀으로 그의 흘리신 피가 내 죄를 사했다는 사실을 믿을 때 도와주십니다.
성경 말씀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면 우리 영이 살아나고, 영이 살아나면 예수님이 나의 영원한 생명, 나의 소망, 삶의 의미요 가치요, 나의 힘이요, 지혜요 나의 모든 것이 됩니다. 죽었던 양심도 살아납니다.
죽은 양심은 감각이 없습니다. 십자가 이야기를 해도, 부활을 이야기해도 감각이 없습니다. 죄를 지어도 부끄러워할 줄을 모릅니다. 하나님 두려워할 줄을 모릅니다. 화인 맞은 양심, 굳은 양심, 죽은 영은 그러합니다. 양심이란 함께 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알고 내가 압니다. 영이 살아나면 양심이 회복됩니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습니다.
선한 양심을 가진 사람은 어떤 일을 눈가림으로 적당하게 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보든, 안보든 언제나 자기와의 약속을 성실하게 지킵니다. 이는 양심이 회복된 것입니다. 요즘 세상이 양심, 도덕 불감증에 걸렸습니다. 죄를 지어놓고도 뻔뻔스럽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와 부활로 산 소망을 소유하면 영이 회복되어 양심이 살아납니다.
그리고 왜 살기가 어렵습니까? 이는 이웃에 대한 사랑이 없어서입니다. 그런데 다행인 것은 강원도 산불 이재민들에게 온정의 손길이 끊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는 귀한 것입니다. 그런데 북한 동포 돕자고 하면 좌빨이니 종북이니 매도합니다. 북한은 타도의 대상이 아니라 끌어안고 기도해야 할 사랑의 대상입니다. 지금 북한이 어렵잖아요. 북한은 우리 동포입니다. 우리는 이데올로기를 벗어나 배고픈 어린이들을 도와야 합니다. 어린이들이 무슨 죄가 있어요? 이번 부활절 헌금으로 그들을 조금이라도 위로의 손길로 돕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할 때 우리의 눈과 생각이 주님의 시각으로 바뀝니다. 절망이 소망으로 변합니다. 죽은 소망이 산 소망으로 변합니다. 미움이 사랑의 마음으로 변합니다. 원망이 감사 찬송으로 변합니다. 우리가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님을 만날 때 감사 찬송이 넘치고 주님의 도우심과 보호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영이 회복되어 양심과 이웃 사랑이 회복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