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수감사 절기 1강 시편 126:1~6
보상의 법칙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 126:5~6)
우리가 살아가면서 여러 법칙을 만나게 됩니다. 그 중에 인과의 법칙이 있습니다. 삶의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축적의 법칙도 있습니다. 내가 하는 모든 일에 긍정이든 부정이든 모든 것이 차곡차곡 쌓여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상의 법칙이 있습니다. 내가 하는 것만큼 보상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노력할수록 더 많은 결실을 맺게 되고, 많이 줄수록 더 많이 받게 되고, 다른 사람을 섬기면 섬길수록 섬김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보상의 법칙은 신앙의 영역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의 왕이신 예수님은 하늘 나라의 모든 영광을 버리고 낮아져 이 땅에 오셨고, 주님이 쓰신 관은 가시 면류관이었고, 주님이 지신 것은 십자가 형틀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와 가시 면류관은 승리의 면류관, 영광의 십자가가 되었습니다.
초대 성도들은 햇볕도 들어오지 않는 어둡고 캄캄한 로마의 카타콤과 갑바도기아의 데린구유에서 신앙의 순결을 지켰습니다. 그 때 그분들이 겪은 고난이 얼마나 컸을까요? 초대 성도들의 순교의 피는 헛되지 않아 A.D. 313년에 종교의 자유가 선포되었습니다. 우리가 땀 흘려 씨를 뿌리면 반드시 기쁨으로 결실을 맺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환경에서도 기쁨으로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있고 주님과 교회와 이웃을 섬기고 헌신하고 봉사하고 섬길 수 있습니다.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된 기쁨을 노래하는 시입니다. 이 시에는 히브리인들의 기쁨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눈물로 씨를 뿌리면 반드시 기쁨으로 거둔다는 보상의 원리를 마음에 새겨 환경과 조건을 넘어서서 복음의 씨를 뿌리기를 기도합니다.
1. 선민의 기쁨(시 126:1~3)
히브리인들이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해방되어 시온으로 돌아올 때의 기쁨이 어떠했습니까?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시 126:1~2상)
히브리인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시온을 향해 돌아올 때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습니다. 사람이 너무 기쁘면 ‘이것이 꿈이냐 생시냐’하며 자기 몸을 꼬집어봅니다. 그들도 자기들의 볼을 꼬집어보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꿈이 아닌 현실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B.C. 568년 바벨론 침략으로 파괴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금과 모든 그릇들이 바벨론으로 옮겨졌습니다. 당시 왕인 시드기야는 두 눈이 뽑혀서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백성의 고관들과 귀족들, 그리고 쓸 만한 사람은 모두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그들은 70년간 나라를 잃고 바벨론에 끌려가 노예생활을 했습니다. 이때의 슬픔을 노래한 시가 시편 137편입니다. 그들은 시온을 기억하며 슬피 울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쁘게 해드려야 할 노래가 이방인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불리는 것을 한탄하며 서러움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하나님은 때가 되자 그들을 위해 큰일을 행하셨습니다.
“그 때에 뭇 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일을 행하셨도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시 126:2하~3)
큰일은 바벨론으로부터의 해방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페르시아 제국을 일으키셔서 바벨론을 멸망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은 고레스 왕을 쓰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키셨습니다. 이때 그들의 기쁨은 마치 우리나라가 일본에서 해방될 때의 기쁨과 같았습니다. 그들의 고난과 슬픔이 컸던 만큼 기쁨도 컸습니다. 이들이 해방되어 고국으로 돌아올 때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혀에는 찬양이 가득 찼습니다. 이 웃음과 찬양은 기쁨을 얻은 자만이 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영어성경에서는 기쁨의 노래(Songs of Joy)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얼굴 근육이 약 80개라고 합니다. 사람이 웃으면 50개가 움직이기 때문에 주름살이 안 생기고, 사람이 한 번 웃을 때 엔도르핀과 면역력이 증가하여 에어로빅 5분한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웃음은 만병을 치료하는 약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웃으면 혈액순환과 신진대사가 활발하여 노화가 방지됩니다.
미국의 스탠포드 대학 윌리엄 프라이교수는 “약으로서의 웃음”이란 책을 썼는데, 웃음이 건강에 유익한 점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어린아이는 하루에 400번씩 웃습니다. 자면서도 웃는데 이것을 배내짓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아이들이 많이 웃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그런 행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른은 하루에 10번밖에 웃지 않습니다. 그나마 우리나라 사람들은 한번밖에 웃지 않아 어린아이들보다 병이 많습니다. 웃음은 실패자에게는 없습니다. 웃음은 승리한 사람에게만 있습니다. 그리고 성공의 비결중 하나가 언제나 웃는 것입니다.
웃음은 하나님이 사람에게만 주신 축복의 선물입니다. 짐승에게는 웃음이 없습니다. 원숭이 실험을 했는데 원숭이에게는 웃음보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개가 웃는 것을 보셨습니까? 돼지가 웃는 것을 보셨습니까? 어떤 사람은 제사상에 올린 돼지의 모습이 웃는 모습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웃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만이 웃을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만 주신 웃음의 선물을 마음껏 사용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속담에 “웃는 얼굴에 침 못밷는다.” 말이 있지 않습니까? 히브리인들의 기쁨의 원천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시 126:3)
이는 하나님께서 큰일을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기쁨의 궁극적인 원인은 하나님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이사야 35장 10절을 보면 “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도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기쁨과 희락을 주시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12장 3절에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빌립보서 4장 4절에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구원의 기쁨만이 진정한 기쁨입니다. 사람이 성공했어도 구원의 기쁨이 없으면 성공이 아닙니다. 사업을 해서 돈을 많이 벌었어도 구원의 기쁨이 없으면 성공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죄와 죽음의 권세로부터 구원 받은 데서 오는 감격과 기쁨이 진정한 기쁨입니다. 영화 ‘벤허’에서 주인공 벤허는 그의 친구 메살라를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라는 용서의 기도를 듣는 순간, 그의 손에서 분노와 복수의 칼을 놓았습니다. 그는 용서에서 오는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 기쁨은 누구도 뺏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구원받은 구원의 기쁨과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즐거워해야 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무엇입니까? 인생의 목적은 첫째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둘째가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하신 십자가의 구원의 은혜를 인격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이 만남이 있을 때 참된 기쁨의 웃음을 지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처음 만났을 때의 그 감격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즐거워하여 기쁨을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2. 선민의 각오(시 126:4~6)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려 보내소서!”(시 126:4)
이는 선택한 백성의 기도입니다. 이스라엘이 귀환할 때 히브리인 모두가 귀환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 이유로 많은 동족이 남아 있었습니다. 시인은 남은 자들을 남방시내들 같이 회복시켜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남방은 메마르고 황폐한 지역으로, 평상시에는 전혀 물이 흐르지 않는 건조한 지대입니다.
그러나 이 땅도 가을이 되면 많은 비가 내려 말랐던 시내가 불어나 생명의 땅으로 변하였습니다. 시인은 마치 남방의 시내처럼 메마르고 황폐해버린 히브리인들에게 은혜의 단비를 내리어 남은 백성들도 함께 구원의 기쁨을 누리도록 기도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 126:5~6)
히브리인들이 해방이 되어 기쁨으로 고국에 돌아왔지만 고국은 성전과 예루살렘성이 파괴되고 농토는 황폐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전을 짓고 당장에 먹고살기 위해 황무지가 되어버린 땅을 일구고 씨를 뿌려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우리나라와 같이 옥토가 아닌 돌이 많고 척박한 땅입니다. 이런 황무지에서 가을에 수확하기 위해서는 가시와 잡초를 뽑고 땅을 파서 일구고 씨를 뿌리고 곡식이 자라도록 땀을 흘려야 합니다. 비전과 소망이 있었지만 그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야말로 눈물로 씨를 뿌리는 아픔과 수고를 감당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소망을 이루기 위해 어떤 각오를 했습니까?
첫째, 장래 소망에 all in했습니다.
그들은 요행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눈물을 흘리며 밭에 나가 씨를 뿌렸습니다. 그들은 장래의 소망에 자신을 드렸습니다. 그들은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면 추수 때에는 반드시 기쁨으로 곡식 단을 거두게 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행운과 행복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행운은 수고 없이 우연히 거저 얻어지는 것이고, 행복은 애쓰고 수고하고 눈물을 흘리는 데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사도 야고보가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꾸라고 한 것도 여기에 있습니다(약 4:9).
땅은 정직합니다. 땅은 심은 대로 거둡니다. 땅은 대가를 지불한 만큼 결과를 가져다줍니다. 농부들은 이런 확신과 소망이 있기에 힘들지만 오늘도 내일도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고 땀 흘려 농사를 짓습니다. 농부들은 이른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봄부터 늦가을까지 일합니다. 그들이 얼마나 땀을 흘려 씨를 뿌리고 부지런히 돌보느냐에 따라 가을의 작황은 확연히 달라집니다. 게으른 농부의 논에는 뿌린 씨가 별로 없어 벼들이 듬성듬성하고 김을 잘 매주지 않아 잡초가 많고 제 때에 방제를 하지 않아 병충해로 알곡이 충실치 못해 수확량이 적습니다.
부지런한 농부의 논은 많은 씨를 뿌렸기에 논에 벼가 빽빽하여 아름다운 황금물결이 굽이치고 이삭도 탐스럽습니다. 이때 농부는 지난날 땀 흘려 고생하고 수고한 시름이 말끔히 씻겨 지고 얼굴에는 기쁨이 가득하게 됩니다.
이것은 매사가 다 그러합니다. 다음주 고3 학생들이 수능을 봅니다. 그간 열심히 공부한 학생들은 수능 성적이 좋을 것이고, 열심히 하지 않은 학생들의 수능 성적은 별로 좋지 않을 것입니다. 영적인 수확도 마찬가지입니다. 디모데후서 2장 6절에는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습니다. 열심히 전도하고 또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순종한 사람들에게는 많은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No cross, no crown, No pain, No Gain”이란 말이 있습니다. 십자가와 고통이 없이는 영광과 얻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둔다고 했습니다(갈 6:7). 우리 속담에 콩 심은 곳에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이 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씨 뿌리는 고난 없이 열매를 얻고자 합니다. 열심히 공부하는 것도 없이 좋은 성적을 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수고와 노력 없이 결실을 걷을 수 없다는 성경의 진리를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말씀, 전도의 씨를 뿌리고, 그리고 전공의 씨앗을 뿌릴 때 반드시 기쁨으로 그에 합당한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열매는 그 씨를 심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불행의 씨를 심어 불행을 거두고, 행복의 씨를 심어 행복의 결실을 거둡니다. 과거의 모든 행동이 오늘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 6:8)고 했습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해 심는 자는 육체에게서 멸망을 거둡니다. 육체의 정욕을 심는 자는 정욕의 열매를 맺습니다. 원망과 미움, 불평 등을 품으면 그런 열매를 맺습니다. 반면에 성령을 위해 심는 자는 영생을 얻습니다. 성령을 위하여 심는다는 것은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 위엣 것을 사모하는 것을 말합니다.
과거에 심은 것은 오늘 거두게 되고, 오늘 심는 것은 내일 거두게 되고, 이생에 심는 것은 내세에서 거두게 됩니다. 그러므로 종자를 잘 선택하여 심어야 합니다. 종자가 나쁘면 나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영국에 이런 속담이 있습니다. “생각을 심어 행동을 거두고, 행동을 심어 습관을 거두고, 습관을 심어 성결을 거두고, 성결을 심어 운명을 거둔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 20:5~6)
인간에게는 일의 총량법칙이 있습니다. 일의 총량을 채우지 않으면 늙어서 고생합니다. 따라서 노년에 행복한 삶을 살려면 젊었을 때 땀 흘려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가 장래 소망이 나의 것이 되기 위해서는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고자 하는 각오와 결단,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이솝의 우화 중에 매미와 개미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더운 여름날이었습니다. 매미는 시원한 나무 가지에 올라 앉아 흥겹게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런데 나무 아래서는 개미가 무거운 짐을 끌고 가느라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습니다. 한 마리가 앞에서 끌고 두 마리가 뒤에서 밀지만 짐이 크고 무거워서 잘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개미들은 있는 힘을 다해 짐을 옮기고 있었습니다.
이를 본 나무 위의 매미는 개미를 보며 너희들이 땀을 흘리며 힘들어 하는 것을 보노라니 나까지 덥네. 더운 날에는 나처럼 놀고 쉬어야 하는 거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개미는 ‘쉬라는 말은 고맙지만 여름에 부지런히 일을 해야 겨울에 양식을 걱정하지 않게 됩니다. 매미 아저씨!’ 하며 일을 계속했습니다. 이를 들은 매미는 삶에는 여유가 있어야 하는 거야, 그리고 삶을 즐길 줄 알아야지 하며 맴맴 하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여름이 가고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더니 서리가 내리고 첫눈이 내리니 겨울이 시작되었습니다. 개미들은 저녁을 먹고 난로가에 앉아 이야기 꽃을 피웠습니다. “그 여름날에 맴맴 하고 노래를 부르던 그 매미 친구는 지금 무엇을 할까? 지금도 노래를 부르고 있을까?”
이야기 꽃을 한참 피우고 있을 때 누군가가 집 문을 두드렸습니다. 개미들은 “이 추운 겨울밤에 누가 찾아왔지?” 하며 문을 여니 찬 바람에 파리해진 얼굴에 헤진 누더기 옷을 걸친 매미가 서 있었습니다. 매미는 굽신 절하고 배가 고파 찾아왔으니 먹을 것을 좀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개미들은 매미를 찬찬히 살펴보니 바로 여름에 자기에게 놀린 바로 그 매미였습니다. 개미들은 “그 여름에 그렇게 멋지게 놀며 삶이란 즐기은 거야 하며 편히 지내더만 왜 그런 꼴이 되었습니까? 엔터테인먼트라도 차리시지?” 하고 물었습니다. 매미는 너무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했습니다.
개미는 매미에게 빵 한 덩어리를 주며 이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우리가 여름날에 땀 흘리며 일한 것은 겨울에 굶주리지 않으려고 한 것입니다. 우리가 당신처럼 시원한 그늘에서 즐기며 노래를 부를 줄 몰라 그런 것이 아니오. 다가올 겨울을 대비하여 일을 한 것입니다.”
우리는 다가올 인생의 마지막 시간, 노년의 시간, 주님 앞에 섰을 때를 기억하며 젊은날, 일할 수 있는 시간에 열심히 씨를 뿌려 주님의 일을 하여 많은 열매를 맺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울며 씨를 뿌릴 때 얼마나 낙심이 되었겠습니까? 씨를 열심히 뿌리지만 눈에 보이는 열매가 없었습니다. 그때 해도 안 된다는 불신에 사로잡혀 포기하기 쉬웠습니다. 그들은 절망하기 쉬웠습니다. 그들은 낙심하기 쉬웠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소망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지금은 싹이 나지 않아 열매가 보이지 않지만 언젠가는 싹이 나고 열매를 맺을 것이라는 소망이 있었습니다.
우리도 열심히 공부해도 성적이 오르지 않고, 또 열심히 전도를 해도 뚜렷한 열매가 없을 때 맥이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낙심하지 않고 선을 행할 때 언젠가는 반드시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합니다(갈 6:9~10).
그리고 고어에 ‘德不孤 必有隣-덕은 외롭지 않고 반드시 이웃이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시편 37편 25절에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고 했습니다. 3대가 적선을 하면 남향집에 산다는 말도 있습니다. 우리가 낙심하지 않고 눈물로 씨를 뿌릴 때,기쁨으로 단을 거둔다는 비밀을 마음으로 영접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주위를 보면 마치 황무지와 같습니다. 캠퍼스는 영적으로 황무합니다. 가정은 개인 채무로 황무해지고 있습니다. 직장도 황무지처럼 황량합니다.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 혼자 구원 받은 것으로 만족해야 합니까? 우리는 눈물로 씨를 뿌려야 합니다. 지금 당장 무엇이 보이지 않을지라도 보상의 원리를 마음에 새겨 내일을 위해 복음의 씨를 뿌리면 반드시 열매를 거둘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복음의 씨을 뿌리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