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18:1~20:42
다윗과 요나단의 사랑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니라.”(삼상 18:1)
명심보감에 급난지붕(急難之朋)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급(急)하고 어려울(難) 때 힘이 되어주는 친구(朋)라는 뜻입니다. 영어로 하면 A friend in need입니다. 반면에 술 마시고 밥 먹을 때에는 형, 동생이라고 하는 카톡 친구는 수 백 명이 있지만, 급하고 어려울 때 나를 도와줄 친구는 한 명도 없다는 급난지붕일개무(急難之朋一個無)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주식형제(酒食兄弟)를 갖고 있습니까? 아니면 급난지붕(急難之朋)을 갖고 있습니까? 우리 모두가 어려울 때 힘이 되어주는 급난지붕(急難之朋)이 되었으면 합니다.
본문에 요나단과 다윗의 아름다운 우정이 나옵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은 기이한(wonderful) 사랑입니다. 이 우정은 마음이 하나가 되어 사랑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우정입니다. 이 우정은 시련 중에 발전하고 꽃을 피운 아름다운 사랑입니다. 낙엽이 다 진 가로수처럼 삭막하고 메마른 시대, 은혜를 헌신짝처럼 저버리는 시대, 급난지붕, 어려울 때 돕는 친구, 다윗과 요나단과 같은 아름다운 우정을 나누어 하나님 역사를 창조해 나가기를 기도합니다.
1.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한 요나단(삼상 18:1~4)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니라.”(삼상 18:1)
이 말씀은 사무엘상 17장과 연결됩니다. 17장에서 다윗은 믿음으로 도전하여 물맷돌 하나로 골리앗을 통쾌하게 넘어뜨렸습니다. 다윗은 골리앗의 머리채를 들고 사울 왕 앞에 나아가 자초지종을 이야기했습니다. 옆에서 이를 듣고 있던 요나단의 마음과 다윗의 마음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나가 되었다’는 것은 사슬로 고리를 맺어 끊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처음 만났지만, 마음이 하나가 되어 끊을 수 없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했습니다.
어떻게 요나단이 다윗을 처음 보고 하나가 되고 자기 생명같이 사랑할 수 있습니까? 그들의 신분으로는 하나가 될 수 없었습니다. 요나단은 왕자요, 다윗은 목동입니다(삼상 18:23). 요나단은 베냐민 지파요, 다윗은 유다 지파로 시골 베들레헴 출신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요나단에게는 다윗을 향하는 사랑에 장애가 될 수 없었습니다.
요나단이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은 다윗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요나단은 골리앗에게 도전하는 다윗에게서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과 믿음과 용기를 보았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군사를 모욕하는 할례 없는 블레셋 군대에 대한 분노를 보았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의 얼굴과 눈빛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뻤습니다.
요나단도 믿음으로 혼자 적진을 돌파하여 블레셋 군대를 파했습니다(삼상 14:6). 요나단은 믿음이 있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영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영의 사람은 서로 통하는 바가 있습니다. 영의 사람은 모든 것을 초월하여 마음이 통합니다. 믿음이 있는 영의 사람은 인간 조건과 이해관계를 떠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믿음 하나로 사랑하고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요나단은 다윗과 언약을 맺었습니다(삼상 18:3~4). 요나단은 다윗을 친구로 삼았습니다. 요나단은 다윗과의 우정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영원히 지속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그는 언약을 맺었습니다. 요나단은 언약의 징표로 자기의 입었던 겉옷을 벗어서 다윗에게 주었습니다. 그는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주었습니다. 겉옷은 왕자의 의복입니다. 이는 누구나 입을 수 없습니다. 그는 다윗에게 왕의 자리까지도 주고자 했습니다. 또 군복과 칼과 활은 자기 생명과 같습니다. 그는 생명까지도 다윗에게 주고자 했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을 위해 명예와 생명까지도 다 줄 수 있고 희생할 수 있을 만큼 사랑했습니다.
그는 장부답습니다. 만일 그가 졸장부였다면 모든 사람이 다윗을 흠모했을 때에 다윗을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다윗과 같은 믿음의 용사를 받아들일 내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요나단과 다윗의 사랑은 하나님 안에서 맺어진 참된 사랑입니다.
친구는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영어에 make friends라는 말이 있습니다. 진실한 친구는 투자해야 만들어집니다. 예수님은 불의한 물질로 친구를 만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친구를 얻기 위해 아낌없이 자신을 투자합니다. 여러분은 친구를 얻기 위해 어느 정도 투자합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이런 진실한 친구를 가지고 있습니까? 함석헌 서생은 ‘그 사람을 가졌는가’라는 이런 시를 남겼습니다.
“만리 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도 ‘저 맘이야’ 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不義)의 사형장에서 다 죽여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두거라’ 일러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 하며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사람들은 자기가 필요하면 가까이하다가도 유익이 되지 않는 듯싶으면 미련없이 떠납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마음이 서글퍼집니다. 선교사로 파송 받을 때는 파송을 받고 교회가 필요로 하여 귀국하라고 하면 여러 이유를 들어 거절합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내게 진정한 동역자가 있는가 슬픈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요한복음 15장 13절을 묵상하며 위로를 받습니다. 예수님은 좋은 나의 친구입니다. 예수님은 좋을 때도 함께 하시지만 어렵고 힘들 때 더 가까이 다가오시고 위로와 사랑의 손길로 보듬어주십니다.
좋은 친구를 만들어가야 하지만, 없다고 절망하지 맙시다. 우리에게 좋은 친구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위해 목숨까지 아끼지 않고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좋은 친구 나의 친구입니다.
2. 시기심으로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사울(삼상 18:5~30)
사울은 다윗이 전쟁터에 보내는 곳마다 가서 승리한 그를 군대장으로 삼았습니다(삼상 18:5). 하루는 다윗이 블레셋과 싸워 이기고 돌아올 때 여인들이 소고와 경쇠를 가지고 춤을 추며 환영했습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삼상 18:7)
여인들은 사울 왕보다 어리지만 믿음이 있는 다윗을 더 인정했습니다. 남자들은 여인들의 인기에 아주 민감합니다. 사울은 여인들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자 시기심이 생겼습니다. 그는 시기심으로 미칠 것만 같았습니다. 그때 악신이 사울에게 들어갔습니다. 이튿날 다윗이 사울 앞에서 수금을 타고 있을 때 수금 소리가 여인들의 소리처럼 들렸습니다. 그는 악령에 사로잡혀 다윗에게 창을 두 번이나 던져 죽이고자 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로 사울의 손에서 벗어났습니다. 두려움에 빠진 사울은 다윗을 천부장으로 강등시켰습니다. 사람들은 강등이 되면 밥맛과 살맛을 잃어 일할 의욕이 없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전과 다름없이 백성 앞에 출입하며 모든 일을 지혜롭게 행했습니다(삼상 18:14). 그는 사람들 앞에 살기보다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살았습니다. 그는 내가 무엇이 되느냐보다 어떻게 사는가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사울은 블레셋 군대의 손에 다윗을 죽이려고 했으나 실패했습니다. 그러자 자기 딸 미갈을 아내로 주어 다윗을 죽이고자 했습니다(삼상 18:17). 사울은 다윗을 시기함으로 평생 대적이 되었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미워하면 할수록 다윗은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습니다. 이럴수록 사울의 시기심은 더 심해져 다윗을 죽이고자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시기심이 얼마나 큰 죄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시기심은 경쟁의 대상들 사이에서 일어납니다. 처음에는 선의의 경쟁을 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시기심이 생기게 됩니다. 시기심으로 상대를 따라잡고자 하면 간격은 점점 벌어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심적인 고통은 더 커가기만 합니다. 시기심이 생기면 빨리 회개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사탄의 밥이 됩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도 시기심 때문입니다. 시기심은 사람에게 죄를 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대적하는 죄입니다. 그래서 시기심이 생기면 내 안에 성령이 떠나고 악령에 시달리게 됩니다. 우리가 어떻게 시기심을 극복할 수 있습니까?
사람들은 시기심을 상대적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시기심은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도전입니다. 하나님은 각자 믿음의 분량과 은사에 따라 직분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상대방을 시기할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믿음을 갖고자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은사를 귀히 여기고 인정하고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최선인 것으로 여기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현재 다른 사람보다 가진 것이 없다면, 이는 장차 많은 복을 담을 수 있도록 큰그릇을 준비하고 계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
모세는 40년간 광야에서 양똥이나 치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는 그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모세에게 그 기간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는 목자로 세우기 위한 기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게 두신 하나님의 뜻을 다 알고 이해할 수 없지만, 앞으로 가장 좋은 것을 주실 하나님을 바라보며 감사해야 합니다.
3. 다윗을 심히 기뻐한 요나단(삼상 19:1~20:42)
한편 요나단은 다윗을 심히 기뻐했습니다(삼상 19:1). 그는 다윗의 믿음과 지혜에 감동했습니다. 시기심이 가득한 사울은 신하들에게 다윗을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 이를 안 요나단은 다윗을 은밀한 곳에 숨겼습니다. 요나단은 더 나아가 아버지에게 다윗을 칭찬하며 죽이는 죄를 짓지 말라고 간청했습니다(삼상 19:4).
요나단은 자기 아버지 편을 들지 않고 다윗 편에 섰습니다. 요나단은 사사로운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진리 편에 섰습니다. 요나단은 부자 관계를 넘어서서 다윗을 쓰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요나단은 혈과 육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는 믿음의 사람, 진리의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죽임당할 위기의 순간에 아내 미갈의 재치로 생명을 구하고 사무엘이 있는 나욧으로 갔습니다. 다윗은 영적인 아버지 사무엘로부터 위로와 영육간에 힘을 얻었습니다(삼상 19:8~10). 어려움이 있을 때 영적인 아버지에게 가서 위로와 힘을 더하는 것은 아름답습니다.
사울도 다윗을 잡기 위해서 나욧으로 왔습니다. 그런데 그는 오히려 사무엘 앞에서 벗은 몸으로 미치광이가 되어 예언했습니다. 그러자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하는 속담이 나왔습니다. 이로써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생명을 지키시고 보호해 주셨습니다. 다윗은 라마에 더는 은신할 수 없었습니다(삼상 20:1). 그는 그곳에서 도망하여 요나단에게 와서 그의 고통을 토로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였으며 내 죄악이 무엇이며 네 아버지 앞에서 내 죄가 무엇이기에 그가 내 생명을 찾느냐.”(삼상 20:2)
다윗은 지금까지 사울에게 충성했습니다. 다윗에게 죄가 있다면 전쟁에 나아가 힘을 다해 싸워서 승리한 죄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그가 사울의 시기심으로 잡혀 죽을 것 같은 상황에 놓여 있으니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다윗은 하나님과 사울을 원망하고 사울처럼 미치기 쉬웠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런 중에도 친구 요나단을 찾아가 자신의 어려움을 털어놓았습니다.
사실 같은 친구끼리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고 도움을 요청한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닙니다. 자존심이 상합니다. 약점을 친구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습니다. 요나단이 친구라 할지라도 그의 아버지가 자기를 죽이려고 하니 그를 믿을 수 없습니다. 친구에게 부담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요나단을 찾아가 괴로움을 토로하고 도움을 청했습니다. 이는 요나단을 믿고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요나단은 다윗의 속마음의 고통을 알고 그를 도와주었습니다. 시련의 날에 다윗을 향한 그의 우정은 아름답기만 합니다. 시련의 날에 다윗을 향한 요나단의 우정이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첫째, 요나단은 다윗이 시련의 날에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붙잡도록 했습니다.
요나단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버지 사울을 왕으로 세워 함께 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하시기를 원했습니다(삼상 20:13하). 그는 하나님께서 다윗의 적을 지면에서 끊어 버리시는 날에 내게 인자를 베풀어 생명을 보호해 달라고 청했습니다(삼상 20:14~15). 요나단이 쫓기는 다윗에게 이런 간청을 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윗이 요나단에게 도움을 청할 입장입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다윗에게 두신 하나님의 주권을 영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이 그의 아버지 사울을 버리고 다윗에게 기름 부었을 때 그는 자신이 왕의 계승자가 아님을 알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선하신 주권을 인정했습니다. 그는 왕좌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친구를 사랑했습니다. 그가 다윗에게 하나님의 뜻을 말해 주고 은혜를 구한 것은 시련 중에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두신 뜻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함이었습니다.
사람이 시련에 처할 때 자신에게 두신 하나님의 뜻을 잊기 쉽습니다. 그래서 요나단은 이런 다윗에게 시련의 때에 하나님의 뜻을 붙잡도록 도왔습니다. 세상은 친구를 모함하여 자리를 뺏아 차지하고 자기 자리를 보존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시련의 때에 다윗을 도왔습니다. 이는 기이한 아름다운 사랑입니다.
둘째, 요나단은 다윗에게 사랑을 확신시켰습니다.
“다윗에 대한 요나단의 사랑이 그를 다시 맹세하게 하였으니 이는 자기 생명을 사랑함 같이 그를 사랑함이었더라.”(삼상 20:17)
요나단은 다윗을 처음 만났을 때, 그와 사랑을 언약하고 평생 생명을 함께 할 것을 맹세했습니다. 그 후 다윗을 향하는 요나단의 마음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사랑을 맹세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가 다윗과 다시 맹세한 것은 다윗을 자기 생명과 같이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지금 아무도 믿을 사람이 없습니다. 친구 요나단도 믿을 수 없습니다. 요나단은 이런 다윗의 마음을 헤아렸습니다. 그는 불신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다윗의 심정을 이해했습니다. 요나단은 이런 친구를 위해 다시 사랑을 고백하여 사랑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요나단은 절망하고 있는 다윗에게 사랑을 확인시켜 줌으로 위로와 힘을 주었습니다. 요나단은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사랑의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아마 두손을 모아 기도하는 그림을 봤을 것입니다. 이 그림은 듀러가 그린 한스의 손입니다. 독일의 듀러는 유명한 화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그는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시골에서 도시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화가 지망생인 한스를 만났습니다. 그들은 절친한 친구가 되어 함께 생활을 했습니다. 그들은 가난하여 돈을 벌어야 했기에 제대로 그림 공부를 할 수 없었습니다.
어느날 한스가 듀러에게 “네가 먼저 공부하거라. 내가 일해서 너를 도울 테니. 네가 화가가 되어 그림이 팔리면 그때 내가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라고 간곡히 권했습니다. 듀러는 그럴 수 없다고 거절했지만 한스의 진심을 받아들이고 열심히 그림 그리기에 전념했습니다. 듀러가 그림 공부를 열심히 하여 공부를 마칠 즈음 그림이 팔리기 시작했습니다. 듀러는 그림이 잘 팔려 한스를 돕기 위해 집을 찾아갔을 때 한스가 두손을 모아 기도하는 것을 모습을 보았습니다.
“주님, 이제 제 친구 듀러가 공부를 마치고 화가가 되어 그림이 잘 팔리니 감사합니다. 저는 그동안 노동으로 손마디가 뒤틀려 그림을 그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제 친구 듀러가 앞으로도 유명한 화가가 되게 해주십시오. 제게 이렇게 기도할 수 있는 두 손을 남겨 주신 주님께 감사합니다.” 한스가 이런 기도하는 모습을 본 그가 눈물을 흘리며 두손 모아 기도하는 모습을 그림으로 남겼습니다. 이 기도하는 손이 바로 듀러와 한스의 급난지붕(急難之朋)에서 태어난 그림입니다.
요나단은 다윗을 처음 만난 그 순간 이후 변함없이 사랑했습니다. 다윗의 승리가 곧 자기의 승리요, 다윗의 기쁨이 자기의 기쁨이 되었습니다. 또 다윗의 시련과 고통이 자기 고통이 되어 다윗과 생사고락을 함께했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처럼 사랑했습니다. 이 사랑은 남녀간의 사랑보다 승한 기이한 사랑입니다. 다윗과 요나단 같은 친구가 있는 자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요나단에게서 죄인들을 사랑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느낍니다. 하나님은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죄인들을 무조건 사랑해 주셨습니다. 죄인들을 죄와 사망 가운데서 구원해 주기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향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낸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니라.”(요 15:13~14)
예수님은 우리를 친구 삼으시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그 고귀한 목숨을 희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위대한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예수님의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험한 세상에 우리에게 친구 예수님이 계신다는 것은 큰 복입니다. 친구이신 예수님과 동행하며 거룩한 순례의 길을 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요나단과 다윗과 같이 하나님 안에서 아름다운 우정을 나누어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