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마가복음 1:29-39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막 1:38).
현대 사회는 물질문화의 급속한 발달과 더불어 정신적 가치관이 점점 쇠락하고 있습니다. 또한 전통적인 가치관들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방향을 찾지 못해 방황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돈을 벌고 사회적으로 성공해 남부러울 것이 없지만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찾지 못해 우울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20세기가 불안한 세기라면, 21세기는 우울의 세기라고 합니다. 인간은 기쁨을 추구하는 동시에 의미와 목적을 추구하는 존재입니다. 즐겁지만 의미와 목적이 없는 삶은 공허합니다. 따라서 인간의 의미와 목적은 삶의 필수조건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33년입니다. 예수님은 짧은 생애를 사셨지만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셨습니다(요 19:30). 이는 분명한 목적, 분명한 사명, 분명한 의미를 가지고 사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예수님의 분명한 목적과 사명을 배울 수 있습니다.
삶의 의미와 목적, 그리고 사명
제1, 2차 세계대전을 모두 겪은 버나드 쇼의 묘비에는 “우물쭈물 살다 내 이럴 줄 알았지”(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라고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이 묘비는 의미와 목적 없이 우물쭈물 살다가 인생을 허망하게 날려 보내는 사람들에게 주는 메시지입니다. 사람이 의미와 목적 없이 살게 되면 방향을 잃고 방황하게 되어 우울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우울증에 빠지게 되고, 우울증은 자살을 불러일으킵니다. 인간은 재미만을 좇는 존재가 아닙니다. 삶의 의미와 목적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의미와 목적에는 낮은 수준과 높은 수준이 있습니다. 낮은 의미와 목적을 갖게 되면 작은 고난과 역경에 쉽게 좌절합니다. 반면에 높은 의미와 목적을 갖게 되면 어떤 역경에도 넘어지거나 흔들리지 않습니다. 바울은 높은 의미와 목적을 갖고 살았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빌 1:12).
바울은 자신이 당한 고난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옥에 갇힌 바울의 나이는 60세가 훨씬 넘었습니다. 그는 주님과 주님이 피로 사신 교회를 위해 죽도록 충성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늙은 나이에 복음을 전하다가 춥고 어둠침침하고 음울하고 쾨쾨한 감옥에 갇혔습니다. 이쯤 되면 그는 주님께 “주님, 힘듭니다. 저를 감옥에서 내보내주세요” 하고 한마디쯤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도리어’ 자기 자신이 감옥에 갇힘으로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것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도리어’는 의외의 결과를 말합니다. 바울은 ‘그러므로’, ‘그렇기 때문’이 아니라 ‘도리어’,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철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역경을 만났을 때 도리어 역경을 뚫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소극적으로 끌려가는 인생, 쫓기는 인생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환경과 상황을 극복하고 끌고 가는 인생, 좇아가는 삶을 살았습니다.
똑같은 길이라도 가는 길은 멀고 오는 길은 가깝고, 가는 길은 미지의 길이고 오는 길은 아는 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현실 자체는 차이가 없지만 똑같은 길이라도 체감이 다릅니다. 바울이 적극적으로 환경과 상황을 극복해 끌려가는 삶이 아니라 끌고 가는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삶의 의미와 목적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0-21).
바울의 삶의 의미와 목적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삶의 목적은 살든지 죽든지 자기 자신을 통해 그리스도의 이름이 높임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언제 문제에 빠지고 힘들고 갈등하고 괴로워하고 낙심합니까? 이는 내가 무엇이 되고자 할 때입니다. ‘나는 이런 사람이기 때문에 이렇게 되어야 한다’, ‘나는 이런 사람이기 때문에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한다’, ‘나는 이런 사람이기 때문에 나의 장래는 장밋빛처럼 아름답게 피어나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무엇이 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을 위해 사느냐?’, ‘무엇을 위해 공부하느냐?’, ‘무엇을 위해 직장에 다니느냐?’, ‘무엇을 위해 결혼하느냐?’, ‘무엇을 위해 교회에 다니느냐?’ 등 삶의 목적과 의미와 가치관입니다. 다시 말해 나를 통해 그리스도께서 존귀하게 되시고, 나를 통해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나를 통해 주님의 이름이 드러나고, 나를 통해 주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주기도문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요리문답」 제1문,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에 대한 답은 “인간의 제일 되며 가장 높은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를 온전히 즐거워하는 것이다”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바울은 먹는 문제, 마시는 문제, 나아가 어떤 문제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무슨 일을 하든지 이것이 자기의 유익보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가를 분별하고 결정했습니다. 삶의 목적이 오직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주어가 ‘나’가 아니라 ‘주님’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목적어는 ‘나를 위해’가 아니라 ‘주님을 위해’, 즉 주님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죽음은 문제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드릴 수 있었습니다.
요즘 생기발랄한 대학생들이 어깨를 축 늘어뜨린 모습으로 등하교를 합니다. 직장인들은 석고상같이 굳은 모습으로 출퇴근을 합니다. 이는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공부하고, 어쩔 수 없이 직장에 다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공부하고 직장에 다니는 차원 높은 분명한 목적과 의미를 갖게 된다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차원 높은 의미와 목적은 바로 사명입니다. 사명이란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그것을 하나님의 소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명은 우리에게 넘치는 활력을 불어넣어줍니다. 소명은 흥미를 갖도록 합니다. 소명은 열정을 쏟도록 만듭니다. 소명은 집중하도록 합니다. 집중할 때 성공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짧은 생애에 하나님의 뜻을 완수하실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라는 분명한 목적과 사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막 1:38).
삶의 우선순위
예수님은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하루 종일 말씀을 가르치시고 심방하시고 각색 병든 자들을 일일이 고쳐주셨습니다(막 1:21-34). 이렇게 되면 다음 날 일찍 일어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셨습니다.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막 1:35).
예수님은 기도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셨습니다. 기도란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기도하심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통해 영적인 쉼과 힘을 공급받고 방향을 잡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 속에서 하루의 우선순위를 정하셨습니다.
그 사람의 삶의 우선순위를 보면 그 사람의 수준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은 무엇을 추구하느냐에 따라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물질을 추구하는 유형입니다. 이런 사람은 오직 먹고사는 것에만 신경을 쓰며 살아갑니다. 둘째는 지식을 추구하는 유형입니다. 이런 사람은 지식만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셋째는 가치를 추구하는 유형입니다. 이런 사람은 어떤 것이 가치가 있는가를 생각하고 그 가치를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지금 나는 어떤 유형입니까?
우리는 육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먹고살아야 합니다. 반면에 인간은 영을 가진 영적인 존재입니다. 이를 전도서에서는 하나님이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전 3:11). 따라서 인간은 영원을 추구해야 하고, 또한 영적인 욕구가 충족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인생은 길지 않습니다. 전도서 저자는 인생이 잠시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나 연기, 물거품, 뜬구름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청년의 때에 창조주를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전 12:1).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안개와 같은 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삶의 우선순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경 곳곳에서 삶의 우선순위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에 몰입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인생을 살면서 최선의 것은 최선의 자리에 놓아야 하고, 차선의 것은 차선의 자리에 놓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문제에 실패하기 때문에 성공하지 못합니다.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 인간이 너무 약해서 실패하는 것보다 우선순위가 잘못되어서 실패하는 경우가 더 많다.”
우리가 살아가는 과정에서 긴급한 일이라고 해서 다 중요한 일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이보다 더 중하고 긴급한 일은 없습니다. 성경학자 앤드류 보나의 생활원칙은 이러했습니다. “첫째, 예수님께 먼저 말씀드리기 전에는 누구에게도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둘째, 무릎을 꿇기 전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셋째, 성경을 읽기 전에는 어떤 책도 읽지 않는다.”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을 할 때 아름다운 내일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범인이 되느냐, 비범한 사람이 되느냐는 바로 우선순위를 어디에 두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아기와 자기에게 우선순위를 두면 아기와 자기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 우선순위를 두면 하나님의 사람이 됩니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습니까? 우리는 지고의 선이요, 지고의 가치이신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만나는 데 우선순위를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기도를 마치시자 시몬과 제자들이 예수님의 뒤를 따라와 말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막 1:37).
그들은 예수님의 인기가 올라가자 자신들도 유명인사가 된 듯 가슴이 뿌듯했습니다. 그들은 군중의 인기에 우선순위를 두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한 삶의 목적에 우선순위를 두셨습니다.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막 1:38).
예수님은 내가 전도하러 왔기 때문에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고 하셨습니다. ‘다른 가까운 마을’이란 복음을 아직 듣지 못한 곳이요, 복음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곳입니다.
오늘날 세계는 지식정보사회와 교통의 발달로 인해 지구촌이 되었습니다. 단 몇 초 만에 세계의 모든 정보를 찾을 수 있습니다. 지식정보사회는 국가 개념이 없습니다. 먼 나라, 가까운 나라가 없습니다. 지금 세계는 모두가 가까운 이웃이요, 가까운 마을입니다. 가까운 마을은 복음을 듣지 못한 곳이요, 복음이 절실히 필요한 곳입니다. 지도를 펴놓고 보면 복음을 듣지 못한 곳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가야 합니다. 우리가 가지 않으면 아무런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러므로 너희는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8:19). 우리가 열방으로 가서 복음을 전할 때 구원 역사가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가버나움에 복음이 전파된 것으로 만족해 안주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버나움에 복음이 전파되자 갈릴리 전역에 복음이 전파되기를 원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은 온 세계가 복음화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목적이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의 요구에 중심을 잃기 쉬우셨습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의 요구대로 사시게 된다면 예수님의 인기는 대단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길을 택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전도인의 길을 택하셨습니다. 이 길은 인기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이 길을 택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이 길을 걷는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명을 끝까지 붙드셨습니다. 사람들이 실패하는 것은 실력이 부족하고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중도에 사명을 포기하고 방향을 바꾸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오직 한 일’(one thing, one point)에 집중했습니다(빌 3:13). 그는 목적을 위해 자신의 전부를 쏟아부었습니다. 유능한 사냥꾼은 두 마리의 토끼를 좇지 않는다고 합니다. 서울대학교 이면우 교수는 「신사고 이론 20」에서 송곳이론을 정립했습니다. 이는 한 가지 일에 몰두하고 집중하면 반드시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목적, 사명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의 삶을 결산할 그날에 우리의 목표 그 이상 배가한 역사로 결산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놓고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기까지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막 14:36하).
예수님은 기쁨으로 십자가를 선택하시고, 기쁨으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에 오르셨습니다. 이 길은 외롭고 힘든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비록 고난의 길이라 할지라도 끝까지 이 땅에 오신 목적대로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때 십자가는 영광의 십자가, 생명의 십자가, 구속의 십자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부활시키시고 영광스러운 주님의 보좌 오른편에 앉히셨습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이 되셔서 중보기도 하시고, 때가 이를 때 심판의 주로 다시 오십니다.
저는 44년 전에 예수님을 믿고 캠퍼스 선교, 세계 선교의 소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1982년 10월 17일에 아내와 한 살 먹은 다윗과 태중에 있는 딸 조은이와 함께 인하대학교 복음화를 위해 대전에서 인천에 왔습니다. 인하대학에서 처음 만난 학생은 1학년 김봉중 형제였는데, 그는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천은 대전과 다릅니다. 이곳은 수도권입니다. 대전으로 내려가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다음 해에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1983년 7월에 전북 위도에서 대전지구 수양회가 있었는데 그곳에 18명이 참석했고, 그다음 해에는 공주 금벽초등학교 수양회에 35명이 참석했습니다.
제가 아는 한 선교단체는 본래의 사명을 잊어버리고 방과후학교나 아버지학교 등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초심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the mission)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굶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사명을 좇아 살아야 합니다. 사명은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나타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부르심의 목적을 끝까지 지켜나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최고 가치에 우선순위, 하나님 나라에 우선순위, 전도에 우선순위를 두고 살기를 기도합니다. 가정 복음화, 캠퍼스 복음화, 직장 복음화, 더 나아가 세계 복음화에 우선순위를 두기를 기도합니다.
♬이 몸의 소망 무언가 우리 주 예수뿐일세 우리 주 예수밖에는 믿을 이 아주 없도다 주 나의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새찬송가 488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