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마가복음 1:40-45

 

깨끗함을 받으라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1:41).

 

성경에는 예수님이 병든 자를 치료해 주시고 귀신 들린 자를 온전하게 하시는 사건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런 초자연적인 역사가 일어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을 믿으면 이런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온전한 삶, 건강한 삶, 행복하고 깨끗한 삶, 정결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그런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주님의 생각과 나의 생각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거기에는 조금의 의심이나 회의, 불신도 없어야 합니다. 주님의 생각이 내 생각이 되고, 내 생각이 주님의 생각과 합일될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주님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알고 주님의 뜻과 하나가 되면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놀라운 은혜를 베푸십니다.

본문에는 나병으로 만신창이가 된 한 나병환자가 나옵니다. 우리는 이 나병환자의 모습에서 죄로 인해 만신창이가 된 한 인간의 자화상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시는 예수님을 통해 죄로 인해 추하게 된 인간을 향한 주님의 사랑을 배우게 됩니다.

 

예수님께 간구하는 나병환자

 

예수님이 온 동네에 다니시며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시고 한 동네에 계실 때였습니다. 한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나아와 꿇어 엎드려 간구했습니다.

 

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1:40).

 

나병은 부정한 병입니다(13:14-15). 그래서 나병환자가 사람들을 보게 되면 나는 부정하다! 나는 부정하다!” 하고 외쳐야 했습니다. 이 병에 걸리게 되면 상처 난 피부를 통해 전염되기 때문에 가정과 사회로부터 추방되어 진 밖에서 외롭게 살아야 했습니다.

아브라함 매슬로우는 사람에게는 몇 가지 기본 욕구가 있는데, 그중에 결핍 욕구와 성취 욕구가 있다고 했습니다. 결핍 욕구 중에 소속감과 사랑의 욕구(belonging and love needs)가 있습니다. 사랑은 터치입니다. 사랑하면 터치하고 싶습니다. 사랑하면 손을 잡고 싶고 포옹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나병환자와는 터치할 수 없습니다. 그는 사랑을 주거나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외로웠을까요? 무엇보다 그 당시는 나병을 하나님의 저주로 인한 질병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래서 나병환자는 일생 동안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았다는 죄의식에 시달리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나병은 몸의 말초부터 결점이 생기다가 결점이 터지면 궤양이 생겨 고름이 되어 흘렀습니다. 이 병은 피부뿐만 아니라 연골 조직과 신경을 썩게 하기 때문에 코가 문드러지고 손가락과 발가락이 떨어져 나가고, 눈썹이 빠지고, 시신경이 파괴되어 시력도 잃게 됩니다. 나병에 걸리면 눈이 나빠져도 코가 없기 때문에 안경을 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신경이 마비되어 통증을 느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온몸에 나병이 들었습니다(5:12). 그러므로 그의 온몸에서 궤양으로 인해 고름이 흘러나왔을 것이고, 살이 썩어 냄새가 진동했을 것입니다. 눈썹은 다 빠지고, 코는 문드러지고, 손가락은 잘려 그의 흉한 모습은 차마 두 눈 뜨고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의 몸이 문드러진 것처럼 그의 정신과 영혼 또한 파괴될 대로 파괴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고통을 견디다 못해 자살을 여러 번 시도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진 것이 생명인지라 죽지도 못하고 하루하루를 살았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죄로 인해 저주를 받았을 때 나병이 발한다고 되어 있는데(12:9-10, 대하 26:19), 나병의 증상은 죄와 매우 흡사합니다.

 

첫째, 죄는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함

인간은 하나님의 제품이 아니라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걸작입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의 얼굴을 한번 쳐다보십시오. 눈 위에 조화 있게 그려진 눈썹, 빗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들어간 눈, 안경을 쓸 수 있도록 얼굴 중앙에 우뚝 선 코와 두 귀, 굳게 다문 입. 그런데 나병에 걸리면 이러한 아름다운 모양이 보기 흉한 모습으로 바뀝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은 인간은 순수하며 진실합니다. 사랑이 풍성하고 거룩함을 사모합니다. 은혜와 진리가 겸비되어 있습니다. 책임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죄는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합니다. 그래서 죄지은 인간은 음란합니다. 사랑보다 정죄, 감사보다 원망과 불평, 겸손보다 교만, 용서보다 미움, 긍정보다 부정, 진실보다 거짓됩니다. 죄는 사람의 마음과 양심, 그리고 인격과 영혼을 추하게 만듭니다.

 

둘째, 죄는 양심과 영혼을 무감각하게 만듦

나병은 신경을 파괴시키기 때문에 처음에는 고통을 느끼지만 조금 지나면 전혀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이처럼 죄도 처음 지을 때는 죄의식이 듭니다. 양심에 찔림이 있습니다. 그러나 반복해서 죄를 짓다 보면 죄에 대한 감각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용감하게 죄를 짓고 아무 문제가 없는 듯이 살아갑니다. 그러나 고통이 없다고 해서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실상은 보이지 않지만 그 내면은 죄로 썩어가고 악취가 납니다.

 

셋째, 죄는 사람을 추하게 만듦

사람은 누구나 아름다워지고 싶은 마음에 거울을 보며 자신의 얼굴을 가꾸고 매만집니다. 추억을 남기기 위해 사진을 찍어 앨범을 만들고, 비디오 촬영도 합니다. 그러나 나병환자는 거울을 보거나 사진 찍기를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모습이 너무 추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나병이 사람을 추하고 더럽게 만들듯이 죄도 사람을 추하고 더럽게 만듭니다. 사람이 죄를 짓게 되면 성경말씀 보기를 꺼려합니다. 그리고 맑고 밝은 얼굴이 추해집니다. 아무리 겉모양을 꾸미고 향수를 뿌려도 죄가 풍기는 악취는 숨길 수 없습니다.

 

넷째, 죄는 관계성을 단절시킴

나병이 사람과 단절시키듯이 죄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것은 생명의 근원에서 끊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죄지은 인간은 꽃병에 꽂혀 있는 꽃과 같습니다. 살아 있으나 죽은 인생입니다. 또 죄는 인간 상호 간도 단절시켜 서로 미워하고 분열하고 다투게 합니다.

나병이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은 것 같지만 결과가 치명적이듯이 죄도 처음에는 별것 아닌 듯하지만 나중에는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옵니다. 성경은 죄의 삯은 사망이요, 사망 이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작은 죄라도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됩니다.

어느 날 나병환자에게 놀라운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몹쓸 병도 고쳐주시고, 어떤 몹쓸 죄인도 따뜻이 용서해 주신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이 소식은 그를 고무시켰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데는 몇 가지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첫째로, 무리라는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둘째로, 자의식의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더러운 몸을 사람들에게 보인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셋째로, 불신과 회의의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주님이 자기와 같은 사람을 영접해 주실 것인가에 대한 회의, 예수님이 자신의 고질병을 고치실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불신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으로 모든 장애물을 극복하고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그는 주위를 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만 바라보고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왔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와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에 대고 엎드려 간구했습니다.

 

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1:40).

 

그는 자신의 추한 모습이 깨끗하게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원하시기만 하면 깨끗하게 될 줄로 믿었습니다. 그는 겸손하게 은총과 긍휼을 구했습니다. 주님은 겸손하게 자비와 긍휼을 구할 때 응답하십니다(18:9-14).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시는 예수님

 

첫째, 나병환자를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1:41).

 

불쌍히 여기다’(filled with compassion)라는 말은 단순한 동정을 뜻하지 않습니다. 이는 심장이 흔들리고 찢어지는 고통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불쌍한 마음과 동정으로 가득 차서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나병환자를 지극히 불쌍하게 여기셨습니다. 그의 고통이 예수님의 고통이 되었고, 그의 슬픔이 예수님의 슬픔이 되었으며, 그의 고독이 예수님의 고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불쌍히 여기다라는 말은 탕자의 비유에서 측은히 여기다’(filled with compassion)라는 말과 똑같습니다. 아들은 아버지가 싫어서 집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이 집을 나간 그날부터 날마다 문을 열어놓고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아버지는 작은 바람 소리에도 혹시 아들이 아닐까 하는 마음으로 자다가도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거지가 되어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아버지는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들을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보고 측은히 여겨 냄새나는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측은히 여겨 아들의 누더기를 벗기고 제일 좋은 옷을 입혔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측은히 여겨 손에 가락지를 끼웠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측은히 여겨 더러워진 발을 씻기고 신을 신겼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측은히 여겨 모든 권리를 회복시켰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사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5:8).

 

우리가 큰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주님께 돌아오기만 하면 무조건 용서해 주십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후 5:17).

 

예수님은 지금도 하나님을 떠나 탕자처럼 사는 인간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예수님께 나아오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측은히 여기시고 받아주시며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시키십니다.

 

둘째, 손을 내밀어 대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단순히 불쌍히 여기실 뿐만 아니라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셨습니다. 손을 대셨다는 것은 건성으로 대신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대시다는 헬라어로 헾사토’(ψατο)로서, ‘붙잡다’, ‘아픈 곳을 골고루 만져주다라는 뜻입니다. 그 누구도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손을 대기는커녕 가까이 가기조차 꺼려했습니다. 아마도 사람들은 나병환자와 어쩌다가 악수라도 하게 되면 비누로 씻고 수세미로 문지르고 그것도 부족해 살균세정제로 깨끗이 닦을 것입니다. 그러고도 밤에 악몽에 시달릴 것입니다. 손을 대는 것은 사랑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또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는 것은 율법에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게 손을 대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초월해 그를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고독한 내면을 보셨습니다. 그의 깊은 슬픔을 아셨습니다. 그가 사랑에 굶주려 울고 있는 것을 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아시고 궤양이 나서 진물이 샘물처럼 흐르는 그의 상처를 어루만지셨습니다. 예수님의 손길은 사랑과 은혜의 손길이었습니다. 구원과 긍휼의 손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손이 그에게 닿는 순간, 예수님의 저미는 사랑의 전율이 온몸에 흘렀고, 그의 고독과 절망과 슬픔이 눈 녹듯 사라졌습니다. 그 저미는 사랑에 감동되어 그의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나왔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오염될 것을 염려하신 나머지 “5m 떨어져! 내가 말씀으로 고쳐주마하셨다면 나병환자의 병은 나음을 입었겠지만 그 내면에 입은 상처는 영원히 치료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저미는 사랑으로 내면의 상처를 먼저 치료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이처럼 사랑할 수 없는, 가까이할 수 없는, 만질 수 없는 사람을 사랑으로 어루만져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한다면 예수님의 저미는 사랑을 가지고 도울 수 있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누가 죄를 짓게 되면 판단하고 정죄하고 가까이하려 하지 않습니다. 심리학에 낙인이론이라고 있습니다. 한 번 전과자로 낙인찍히면 영원한 전과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떤 몹쓸 인간이라도 사랑으로 감싸주십니다. 예수님은 음행 중에 잡힌 여인을 사랑으로 감싸주셨습니다(8:1-11). 예수님은 매국노인 세리 레위도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이십니다.

 

셋째,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신 예수님

내가 원하는 것과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이 일치될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이 원하시는 것과 나병환자가 원하는 것이 일치됨을 선포하셨습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1:41).

 

예수님은 그가 믿음으로 나아왔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소극적으로 고쳐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그를 고쳐주셨습니다. “내가 원하노니”(I am willing). 예수님은 그가 낫기를 원하는 것 이상으로 그를 깨끗하게 해주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는 몸이 깨끗하게 되기를 원했지만 예수님은 그의 몸뿐만 아니라 마음과 영혼까지도 깨끗하게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라는 말씀에는 예수님의 의지와 소원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깨끗하게 하심으로 본래의 하나님의 형상대로 회복되기를 원하십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온전한 희생 제물이 되셨습니다(1:29).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맑고 깨끗한 보배 피를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주님의 형상으로 회복시키시기 위해 보배로운 피를 흘리셨습니다. 십자가에 흘리신 피 속에 주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십자가에 흘리신 피 속에 구원과 영생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영원하고 완전합니다(9:12). 예수님의 피는 단번에 모든 죄를 깨끗하게 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은 죄가 너무 커서 죄를 좀 닦고 예수님께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있는 모습 그대로 예수님께 나아가면 예수님은 우리를 받아주시고 죄를 말갛게 씻어주십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께 진실되게 죄를 고백할 때 예수님은 모든 불의와 죄악에서 깨끗하게 해주십니다(요일 1:9-10). 예수님의 피는 죄인을 변화시켜 새사람이 되게 합니다. 예수님의 피는 순결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합니다.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는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벗어나게 합니다(1:18-19). 예수님의 피는 거룩한 소원을 주어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합니다(9:14). 예수님의 피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목하게 합니다. 예수님의 피는 인간 상호 간에도 화목하게 합니다. 예수님의 피는 어떤 몹쓸 죄인도 구원해 새사람이 되게 합니다.

예수님이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시자 곧 나병이 떠나갔습니다. 그러자 그의 살은 갓 태어난 어린아이의 살과 같이 깨끗해졌습니다. 그는 이제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 기쁜 소식을 전하고 싶어서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엄히 경고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가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있도록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것을 주어 건강진단서를 받도록 하셨습니다(1:44).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 이 일을 전했습니다. 이 일로 인해 예수님의 사역이 방해를 받았습니다(1:45). 여기에서 자기 나름대로 하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나름대로 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이 내게 무엇을 원하시는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나병과 죄의 증상은 매우 비슷합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깨끗하게 하시기 위해 십자가상에서 맑고 깨끗한 보배 피를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순결한 보배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의 추하고 더러운 모든 죄를 깨끗하게 해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 속에 주님의 사랑과 구원과 영생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나아가 죄 사함을 받아 우리의 모습이 깨끗해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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