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성탄 누가복음 1:1-25
축복의 통로로 쓰임 받은 사가랴와 엘리사벳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눅 1:6)
한국 사람들은 유난히 큰 것, ‘大’字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이름도 대~~한 민국입니다. 대도 큰데 거기다가 넓다는 한이 붙었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다리도 대자를 꼭 붙입니다. 인천대교, 한강대교, 한강도 크다는 뜻인데 거기다가 한강대교라고 붙이니 얼마나 대자를 좋아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다리만 그런 것이 아니라 길도 강남대로, 그것뿐만 아니라 고개도 대관령, 예배당도 대성전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영향으로 이단으로 치리 받은 큰 믿음 교회도 다니기도 합니다. 축복의 통로도 믿음이 커야 되는 줄로 알고 큰 믿음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크고 화려한 통로로 역사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작지만 깨끗한 통로를 사용하십니다. 예수님은 큰 믿음을 원하는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눅 17: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은 온전한 믿음, 신실하고 진실하며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믿음을 말합니다.
본문을 보면 깨끗한 축복의 통로의 모델이 나옵니다. 그들은 사가랴와 엘리사벳이었습니다. 그들이 깨끗한 통로가 되었을 때 하나님의 구속역사에 쓰임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어떤 점에서 깨끗한 통로였습니까?
첫째,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살았습니다(눅 1:6).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니”(눅 1:6상)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었습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들 앞에서 사는 사람이요, 다른 하나는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사람 앞에서 사는 사람들의 삶의 표준은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의 눈치를 보게 됩니다.
한국의 문화 중에 하나가 눈치 문화입니다. 그래서 영어 사전에도 눈치가 나옵니다. 눈치 문화가 생긴 것은 체면, 은폐, 표현회피의 성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수직적 인간관계, 유교의 형식주의, 자신의 생각보다 타인의 평가를 중시하는 타인 중심의 문화와 감정과 분위기를 중시하는 감정문화 등으로 눈치 문화가 발달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눈치에 따른 속담도 많이 있습니다. “눈치 빠르면 절에 가서도 젓국을 얻어먹는다.” “눈치로 밥 먹고 산다.” “눈치 채지 않도록 하라.” “눈치가 없으면 코치라도 있어야 한다.” “눈치 없이 저러면 안 된다.”
눈치 문화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는 잘하는 척하지만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로써 차명계좌, 이중장부, 분식회계 등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은 사람 앞에서 사는 데서 오는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사람이 사람 앞에 살게 되면 사람에게 아첨하고 아부하게 됩니다.
이런 모습이 믿는 사람에게도 나타납니다. 교회 안에서는 신실한 신자, 교회 문을 나서게 되면 불신자가 됩니다. 교회에서는 경건하지만 교회 밖을 나서는 순간 불신자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이런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불신자들에게 좋은 모습을 보일 수 없습니다. 사회에 소금과 빛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습니다.
반면에 하나님 앞에 사는 사람은 하나님을 의식합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십니다. 하나님은 교회에만 계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교회 밖에도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히 12:8). 하나님 앞에 살게 되면 환경과 상황, 시간에 따라 삶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교회에서 신자이면, 학교에서도 신자이고, 직장에서도 신자이고, 가정에서도 신자입니다. 사람이 보든 안 보든 변함없이 신실하고 충성스럽습니다. 그러니 불신자들에게 좋은 영향력을 끼치게 됩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었습니다. ‘의인’이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었다는 것은 믿음으로 살았다는 뜻입니다. 당시 시대적인 환경은 헤롯이 통치하던 시대였습니다. 헤롯은 포학하였습니다. 그 시대는 불의했습니다. 그 시대는 어그러지고 거스르던 시대였습니다. 그런 시대에 그들은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살 수 있었던 것은 믿음으로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은 첫째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을 믿어야 합니다. 둘째는 상을 주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상급은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입니다. 지극히 크고 보배로운 약속은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것입니다(벧후 1:4). 그리고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유업입니다(벧전 1:4).
성경에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산 두 인물이 있습니다. 한명은 노아이고 따른 한명은 요셉입니다. 노아시대에는 온 땅이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모습을 보시고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고 말씀했습니다(창 6:3상).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고 동물처럼 되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고귀함과 아름다움은 늙어 썩어질 육신이 아니라 영적인 생명에 있습니다. 육신의 아름다움은 젊었을 때뿐입니다. 늙으면 화장도 잘 받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살라는 말은 아닙니다. 품격이 있는 옷차림, 고매한 모습으로 가꿔야 합니다. 문제는 육체 자체에 목적을 두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를 일컬어 1차원적인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시대라고 하셨습니다(눅 17:27).
이런 시대에 하나님께 은혜 입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바로 노아였습니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였습니다(창 6:9상). 노아는 타락한 시대에서 그래도 흠이 없고 허물없이 살았습니다. 그는 불의한 시대에 진실하고 신실하게 살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당대에 완전한 자라는 칭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창 6:9하). 그는 세상 가치관과 본성을 따라 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고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 육신의 욕망과 감정대로 살아갈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귀를 기울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술과 방탕과 쾌락에 빠져 살았지만 그는 경건한 자세로 하나님의 심판의 날을 준비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노아의 홍수에서 구원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쓰셨습니다.
요셉은 노예로 팔려 보디발의 가정 총무가 되었습니다. 요셉은 용모가 준수하고 아담한 젊은 청년이었습니다. 이런 요셉에게 반한 보디발의 처가 요셉을 끈질기게 날마다 유혹했습니다. 이 유혹은 혈기 왕성한 20대 청년인 요셉에게는 힘든 시험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여인의 말을 듣지도 않았을 뿐더러 경계했습니다.
하루는 요셉이 시무하러 집에 들어갔는데 두 사람만 있게 되었습니다. 보디발의 처는 요셉의 옷을 붙들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주인의 은혜를 기억하고 주인에게 범죄치 않고자 했습니다(창 39:8~9). 무엇보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살았습니다. 젊은 청년 요셉은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창 39:9하)라고 거절했습니다. 사람들이 죄를 짓는 것은 나 한 사람밖에 모르거나, 너와 나밖에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하나님이 지금 보고 계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랬을 때 감히 죄를 지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사람 앞에서 살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살았습니다. 사람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더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여인과 함께 있지도 않았고 여인이 그의 옷을 붙잡고 놓지 않자 옷을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보디발 부인이 요셉에게 “나와 둘만이 있다. 내가 섬기는 신은 옷으로 가리면 된다. 너와 나밖에 없다.”고 유혹했습니다. 그때 요셉은 “당신이 섬기는 신은 가리면 못 볼지 모르나 내가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은 지금도 나를 지켜보신다.”고 했습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살았을 때 예수님의 예표가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승진을 하기 위해 고위층의 사람을 찾아가 뇌물을 주면서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으니 받으시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정색을 하면서 “아무도 보는 이가 없다니요. 세 사람이 보고 있어요, 첫째는 내가 알고 당신이 보고 있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보고 있어요”라고 하며 그 뇌물을 거절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살아계셔서 지금도 나를 지켜보시고 나와 함께 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 상을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살 때 축복의 통로로 쓰임 받게 됩니다.
둘째, 그들은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눅 1:6하).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눅 1:6하)
‘흠이 없다’는 말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말씀 앞에 회개했다는 말입니다. ‘회개했다’란 하나님과 나 사이의 통로가 깨끗하고 바르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고독할 때나 낙심될 때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사는 것이 생명의 길이요, 행복의 길이요, 승리의 길임을 확신했습니다. 그들은 시편 1편을 사랑했고 묵상했고 읊조렸습니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시 1:2)
사가랴와 엘리사벳 부부가 말씀을 좇아 살 때 어려움도 없지 않아 있었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고 안일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할 수만 있으면 편하고 쉽게 살고 싶습니다. 이런 본성을 극복하고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말대로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당시에 제사장들은 대부분이 사두개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세속적인 정치세력과 결탁하여 세상의 뇌물과 쾌락과 재미를 즐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들고 다녔지만 폼으로 들고 다녔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같은 제사장의 신분으로 유별나게 신앙생활한다며 존경은 커녕 따돌림과 미움받기 십상입니다. 우리도 직장이나 학교에서 말씀대로 살고자 할 때 어려움에 부딪칩니다. 세상은 하나님 말씀보다 세상의 분위기와 세상의 요구대로 살기를 원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미움을 받고 때로는 불이익을 당하게 됩니다. 이런 세상에서 출세하려면 적당히 타협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를 지키며 흠없이 살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여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을 준행하고 가르치기에 힘썼습니다. 그때 말씀은 슬픔과 고독 중에 위로가 되었고, 낙심과 좌절 중에 힘이 되었으며, 환난과 박해 중에 소망이 되었습니다. 말씀은 세상에서 피곤하고 지치고 눌린 영혼을 소성시켰습니다. 그들의 삶에 지혜가 되었습니다. 말씀은 그들의 발에 등불이요, 그들의 길에 빛이었습니다.
말씀은 그들의 삶을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이 생명력이 넘치게 하였고, 의의 열매를 맺도록 했습니다. 말씀은 나이 늙은 그들을 젊은이와 같이 생동감이 넘쳐나게 했습니다. 신앙생활이란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야고보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말씀대로 행하는 사람이 의로운 사람입니다. 한 말씀이라도 실천하고 순종할 때 축복의 통로가 됩니다.
셋째,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기도했습니다(눅 1:7~25).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믿음으로 살았지만 그들에게 인생 문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엘리사벳이 수태를 못하여 자녀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거기다가 두 사람의 나이가 많았습니다. 오늘날에는 무자식이 상팔자라고 하지만, 당시에는 제사장 가문에 자녀가 없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운명주의에 빠지기 쉬웠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기도로 운명을 극복했습니다.
어느 날 당번 차례가 되어 사가랴가 성소에서 분향하는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분향은 성도의 기도를 의미합니다(계 5:8). 사가랴가 성소에서 백성을 대표하여 기도하고 있을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주의 사자가 향단 우편에 서서 말하였습니다.
“천사가 그에게 이르되 사가랴여 무서워하지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눅 1:13)
하나님은 그에게 너의 간구함이 들렸다(Your prayer has been heard.)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자식문제를 놓고 과거부터 이제까지 기도해오고 있었으며, 하나님은 과거부터 이제까지 계속 듣고 계셨습니다.
보통 결혼한 지 2년이 지나도록 자녀가 없으면 문제의식을 가지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천사의 말에 사가랴가 자기와 아내가 늙어 자식을 가질 수 없다고 대답한 것을 볼 때 이들은 나이가 많이 들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오랜 세월 자신의 인생문제를 놓고 기도했습니다. 강산이 몇 번 바뀌어도 한 가지 기도 제목을 놓고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늙어 자식을 가질 형편이 안 되도 변함없이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절박한 문제라고 해도 응답 없어 보이는 기도를 10년 이상 계속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이 정도면 사람들이 여기에는 하나님의 뜻이 없다고 판단하며 기도를 포기합니다. 아브라함은 십년 동안 기도하다가 포기하고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사가랴, 엘리사벳 부부는 10년이 아니라 얼굴에 주름살이 늘고 머리가 백발이 되었을지라도 기도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때가 되자 하나님은 드디어 그 가정에 메시야의 선구자 세례 요한을 주셨습니다.
송나라 때의 벽안록에 줄탁동시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알 속에서 자란 병아리가 부리로 껍질 안쪽을 쪼아 알을 깨고 세상으로 나오려고 하는 것을 줄, 어미닭이 품고 있는 알 속의 병아리가 부리로 쪼는 소리를 듣고 밖에서 알을 쪼아 새끼가 알을 깨는 행위를 도와주는 것을 탁, 곧 어미닭이 알을 쪼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 줄탁의 시작은 알 속의 병아리가 그 연약하기 그지없는 부리로 먼저 시작해야 합니다. 병아리의 ‘줄’이 있어야 비로소 바깥 어미닭의 ‘탁’이 시작됩니다. 줄이 없으면 탁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구멍을 뚫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병아리의 ‘줄’이 아니라 어미닭의 ‘탁’입니다.
기도도 바로 ‘줄탁동시’와 같습니다. 현재 처한 삶속에서 내가 먼저 ‘줄’해야 하나님이 ‘탁’하십니다. 하나님은 내가 먼저 ‘줄’ 하기를 기다리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내가 처한 캄캄한 어두움의 현장에서 나아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끊임없이 이를 강조하고 있습니다(렘 29:12; 33:3). 비록 상황이 어렵고 소망이 보이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먼저 ‘줄’하면 하나님은 ‘탁’하시어 마침내 기적이 일어납니다. 우리에게 문제가 있습니까?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그때 하나님은 탁! 하시고 기도를 응답하십니다.
넷째, 맡은 일에 충성했습니다.
그는 성소에서 분향하는 일을 충성스럽게 섬겼습니다. 제사장이 하는 일은 여러 일이 있습니다. 그는 성소에 분향하는 일이었습니다. 이 일은 크게 다른 사람에게 부각되는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그는 맡은 일에 충성했습니다. 하나님은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했습니다.
영국 런던의 켄더베리 교회에 '니콜라이'라는 집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열일곱 살에 교회를 관리하는 사찰집사가 되어 평생을 교회 청소와 심부름을 하였습니다. 그는 교회를 자기 몸처럼 사랑하고 맡은 일에 헌신하였습니다. 그가 하는 일 중에 시간에 맞추어 교회종탑의 종을 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교회종을 얼마나 정확하게 쳤든지 런던의 시민들은 자기 시계를 ‘니콜라이’ 집사의 종소리에 맞추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교회에서 충실하게 그리고 열심히 하며 키운 두 아들은 캠브리지 대학교과 옥스퍼드 대학교의 교수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 두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습니다. “아버지, 이제 일 그만 하세요.” 그러나 아버지는 “아니야, 나는 끝까지 이 일을 해야 해.” 그는 76살까지 종을 치며 교회를 사랑하고 관리하였습니다. 그가 노환으로 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을 때 가족들이 그의 임종을 보려고 모였습니다. 아버지는 종칠 시간이 되자 일어나 옷을 챙겨 입더니 비틀거리며 밖으로 나가 종을 쳤습니다. 얼마동안 종을 치다 종탑 아래서 그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엘리자베스 여왕은 감동을 받고 영국 황실 묘지를 그에게 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가족들을 귀족으로 대우하여 주었으며, 모든 상가와 시민들은 그날 하루는 일을 하지 않고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습니다. 심지어 유흥주점도 영업을 하지 않자 자연히 그가 세상을 떠난 날이 런던의 공휴일로 되었습니다. 열일곱 살 때부터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사람들에게 종을 쳤던 ‘니콜라이’가 죽은 날이 공휴일이 된 것이다. 엘리자베스여왕 시대에 수많은 성직자들이 죽었으나 황실의 묘지에 묻히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하찮게 보이는 작은 교회의 종치기를 충성스럽게 한 그는 황실의 묘지에 묻히는 영광과 자기가 죽은 날이 공휴일이 된 명예도 함께 얻었습니다.
우기는 하나님께 쓰임 받으려면 깨끗한 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딤전 2:20~21)
우리가 위대한 인물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우리 자녀들이 위대한 인물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먼저 좋은 그릇이 됩시다. 먼저 깨끗한 축복의 통로가 됩시다.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말씀대로, 날마다 기도하고 맡은 일에 충실하여 깨끗한 통로가 되도록 기도합시다.
♬당신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 깨끗한 축복의 통로. 당신을 통하여서 열방이 주께 돌아오게 되리. 당신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 깨끗한 축복의 통로. 당신을 통하여서 열방이 주께 예배하게 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