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성탄 누가복음 1:67~80
돋는 해 예수님, 희망의 예수님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눅 1:78하-79)
1월 1일 새해가 되면 많은 사람이 돋는 해를 보기 위해 정동진으로 갑니다. 동해에 떠오르는 돋는 해는 장관입니다. 저는 10여 전에 시내산에서 돋는 해를 보았습니다. 시내산에서 보는 돋는 해는 동해에서 보는 돋는 해와 달리 장관이었습니다.
새해가 시작되면 누구나 새 희망으로 출발합니다. 희망이란 지금까지 살아온 것보다 앞으로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감입니다. 그런데 지금 코로나 여파로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새해가 다가와도 어느 때보다도 희망보다는 절망이라는 어두움이 우리 사회를 뒤덮고 있습니다. 미래가 불안한 젊은 세대는 영끌 세대로 영혼을 끌어모아 부동산과 주식으로 인생 역전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전에 고통받던 이들에게 더는 흑암이 없고, 멸시 천대를 받던 이들이 명예롭게 되고, 흑암에 있던 이들이 큰 빛을 보게 된다고 선포합니다(사 9:1). 이 전환점은 한 아기 예수님의 탄생으로 시작된다고 말씀합니다.
이 예수님이 돋는 해로 오셨습니다. 돋는 해 예수님은 희망과 영광의 빛, 생명의 빛입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빛입니다. 예수님은 치료의 광선입니다. 예수님은 길과 방향을 제시하는 빛입니다. 돋는 해 예수님을 만나 절망을 이기고 희망의 성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예수님은 구원을 뿔입니다(눅 1:68~78상).
사가랴는 찬송합니다. 그가 찬송한 이유는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돌아보셨기 때문입니다(눅 1:68상). ‘돌아보았다(has come)’는 것은 심방하셨다는 뜻입니다. 전능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찾아오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많은 민족 중에 이스라엘을 특별히 선택하여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런 그들이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의 백성에서 점점 멀어져갔습니다. 이로써 이스라엘은 남북이 분단되고 바벨론, 페르시아, 헬라, 로마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당시에는 로마의 지배 아래 있었습니다. 그들은 로마의 지배 아래 갖은 수모를 겪었습니다. 로마는 그들에게 황제를 숭배하도록 강요했습니다. 말라기 선지자 이후 400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이 시대를 신구약 중간사로 가장 어두운 시기입니다. 이 시대는 하나님 말씀이 없었습니다. 말씀이 없으니 비전이 없고, 비전이 보이지 않으니 희망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절망 중에 심방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늘 영광을 다 버리시고 찾아오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평소에는 무관심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셨습니까? 하나님은 그들이 가장 절망의 시기인 애굽에서 종살이할 때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애굽에 있는 당신의 백성의 고통 소리를 듣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언약을 기억하여 돌보셨습니다(출 2:23~25). 하나님은 그들의 고통과 슬픔과 부르짖음을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때가 되자 예수님은 죄와 죽음과 사탄의 지배 아래 있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유익이 되고 쓸모가 있어야 찾고 전화합니다. 사람들은 처절할 만큼 이기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와 마귀에게 포로 되고 눌려 아무 쓸모 없는 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찾아오신 사람들은 모두가 세상이 외면하고, 사회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상한 갈대와 같고 꺼져가는 심지와 같은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을 찾아오셔서 치료해 주시고, 위로해 주시고, 소망을 심어주시고, 구원하여 무한한 가능성의 존재로 살게 하시고, 자유를 주시고,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하시고, 귀먹은 자에게 듣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병들고 헐벗고 굶주리고 가난하고 사탄에게 눌린 자들을 찾아오신 것으로 끝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속량하셨습니다(눅 1:68하). ‘속량(redeemed)’이란 노예 상태에 있는 자를 일정한 몸값을 지불하고 자유인이 되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에서 사가랴가 속량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볼 때 인간은 누구나 죄의 노예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고 선언하였습니다(롬 3:24). 누구든지 죄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인이 되려면 일정한 죗값을 치러야 합니다. 본래 인간이 죄의 노예가 아니었습니다. 본래 인간은 하나님이 심히 기뻐하신 하나님의 보배로운 존재였습니다. 인간은 에덴 동산에서 무한한 자유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첫 사람 아담이 하나님께 죄를 지어 죄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영국의 설교자 존 헨리 조웨트(John Henry Jowett)는 “죄는 파괴적이다.”라고 했습니다. 죄는 우리의 몸과 인격과 마음과 양심, 그리고 영혼을 파괴합니다. 죄는 인간관계, 사회생활, 심지어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까지도 파괴합니다. 죄는 시각을 파괴하여 분별력을 상실하게 합니다. 죄는 청각을 파괴하여 귀머거리로 만들어 진리를 듣지 못하게 합니다. 죄는 촉각을 파괴하여 감각적인 느낌만을 추구하게 합니다.
죄는 은혜롭고 참신하던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표독스럽게 합니다. 죄는 사람을 어둡고 음침한 곳으로 이끕니다. 죄는 어두운 음악과 어두운 생각으로 유도합니다. 죄는 아름다운 하나님의 형상을 앗아갑니다. 죄는 하나님 성경 말씀과 기도를 게을리하도록 합니다. 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원망과 불평이 배어 입은 돼지주둥이처럼 나오게 합니다.
죄는 무엇보다도 생명을 요구합니다. 성경에서 피는 생명입니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습니다(히 9:22). 그래서 구약 시대에는 짐승의 피를 흘려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짐승의 피는 불완전하여 일시적으로 깨끗하게 할 뿐, 사람의 마음을 근본적으로 깨끗하게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죄를 지을 때마다 짐승을 잡아 피를 흘려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인류의 죄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시기 위해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님을 유월절 어린 양으로 보내셨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보배로운 피를 흘리심으로 나의 죄를 속량하셨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율법과 죄로부터 해방되어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해 피를 흘리심을 믿는 순간, 우리는 죄의 사슬에서 풀려 자유인이 되고, 마귀의 지배받던 삶에서 성령의 지배를 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그런 일을 하실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구원의 뿔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눅 1:69)
하나님은 다윗에게 약속하신 대로 다윗의 후손에서 구원의 뿔을 일으키셨습니다(삼하 7:13, 행 13:22~23). 구원의 뿔은 사탄의 뿔에 대칭됩니다. 사람은 한 개의 뿔도 없습니다. 그런데 사탄은 일곱 머리와 열 개의 뿔을 가졌습니다(계 12:3, 13:1).
사탄은 열 개의 뿔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우리의 약점을 찾아 찌릅니다. 한 번에 하나만 찌르는 것이 아니라 정신을 차릴 수 없도록 한 번에 여러 개의 뿔로 찌릅니다. 사탄의 뿔에 찔리면 치명적인 상처를 입습니다. 그리고 사탄의 머리가 일곱이라는 것은 지혜가 출중하다는 것입니다. 머리가 하나뿐인 인간으로서는 사탄의 지략과 권모술수를 당해낼 수 없습니다.
사탄의 뿔에 찔리지 않으려면 사탄의 뿔보다 더 강해야 합니다. 인간은 바이러스 하나 이기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연약한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습니다. 뿔은 힘과 능력을 상징합니다(신 33:17). 밀림의 왕자 사자라도 저돌적으로 달려드는 코뿔소 앞에서는 속수무책입니다. 소는 600kg인데 코뿔소는 3000kg입니다. 투우들의 그 날카롭고 단단한 뿔은 보기만 해도 무시무시합니다. 예수님은 사탄보다 더 강한 구원의 뿔로 오셨습니다. 사탄의 뿔이 염소의 뿔이라면 예수님의 뿔은 코뿔소 뿔입니다.
예수님은 사탄보다 지혜가 뛰어나십니다. 예수님은 지혜와 총명의 신, 모략과 재능의 신, 지식의 신으로 충만하십니다(사 11:2). 귀신의 세력을 물리치시는 영적 권세가 있습니다. 광풍도 잠잠하게 하시는 권세가 있습니다. 어떤 질병도 치료할 수 있는 치료의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의 사슬에서 우리를 해방시키는 죄 사함의 권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최대 원수인 사망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분으로 모든 원수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주이십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이름 권세를 의지해 승리에 승리를 거듭했습니다. 앉은뱅이를 예수의 이름으로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들은 귀신을 내어쫓고 수많은 사람을 회개시키고 죽은 사람을 살렸습니다.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한 예수 그리스도의 무기입니다. 이 무기는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모든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합니다(고후 10:4~5).
성경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며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합니다(히 4:12). 우리가 주의 말씀을 의지하고 나가면 원수 마귀가 떨고 지옥 권세가 흔들립니다.
출애굽기를 보면 바로의 세력은 강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의 세력보다 강합니다. 하나님은 강한 손입니다(출 6:1). 강한 손으로 10가지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하나님은 마침내 장자를 죽이는 피의 재앙을 통해 바로의 세력을 꺾고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켰습니다(출 12:13).
어린 양의 피는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배로운 예수님 피의 예표입니다. 예수님 피는 모든 사람에게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예수님 피는 우리의 죄악된 본성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합니다. 아무리 추한 죄라 할지라도 예수님 피는 모든 죄를 사해 주십니다(롬 3:25).
예수님의 피가 우리 마음속에 있을 때 하나님은 이 피를 보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십니다. 예수님의 피는 믿는 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인격적으로 역사하여서 죄로 병든 마음, 삐뚤어진 마음, 상처 입은 마음을 치료하여 주시며 소생시켜 주십니다. 예수님의 피는 연약한 자를 강하게 하고 완악한 마음을 부드럽게 합니다. 예수님의 피는 우리를 죄로부터 보호하여 주시고, 죄와 싸워 이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구원의 피, 생명의 피, 은총의 피, 능력의 피입니다. 예수님의 구속의 은혜의 피가 심장에서 박동할 때 죄 사함의 은혜가 넘칩니다. 내 안에 예수님의 피의 은혜에 감사할 때 죄의 파도와 싸워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에서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흘리신 예수님을 영접할 때, 그 사랑에 감격할 때, 생명을 드리기까지 예수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회복과 치료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피는 강한 죄의 사슬을 끊는 힘이 있습니다. 구원의 뿔, 예수님은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강한 원수의 손에서 구원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심은 두려움이 없이 일생 하나님을 섬기도록 함에 있습니다. 이 모두는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입니다(눅 1:71~78상).
둘째, 예수님은 돋는 해입니다(눅 1:78하~79).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눅 1:78하-79).
예수님은 돋는 해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돋는 해가 되셔서 어두움의 세력을 물리치고 세상을 환하게 비추십니다. 돋는 해, 예수님은 에너지의 원천입니다. 예수님은 삶의 희망입니다. 예수님은 치료하는 광선입니다(말 4:2). 예수님은 갈등에서 평화의 길로 우리를 안내합니다. 예수님은 개개인과 민족과 인류의 희망이십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어두움이 있습니다. 갖가지 운명의 어두움이 있습니다. 자기가 범한 죄로 인한 어두움이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한 어두움이 있습니다. 아무도 이 어두움과 그늘에서 스스로 벗어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둠을 물리치는 돋는 아침 해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돋는 해로 나의 내면에 비추면 마음에 있는 모든 어두움이 아침 안개와 같이 사라집니다.
하나님이 없는 세계는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와 같습니다. 죽음의 세력이 지배합니다. 죽음의 세력이 주는 이름은 ‘무’자와 ‘허’자, 그리고 ‘절’자 돌림입니다. 무의미, 무기력, 무능력, 무표정, 허무, 허탈, 허망, 좌절, 절망입니다.
돋는 해, 예수님이 오셔서 내면을 비취는 순간, 죽음의 세력이 주는 이름이 ‘희’와 ‘소’의 이름으로 바뀝니다. 희망, 희락, 소망, 소원, 소생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일그러진 표정이 환한 표정으로 바뀝니다. 이는 마치 외양간에서 풀려나온 송아지같이 껑충껑충 뛰게 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돋는 해로 오신 예수님을 큰 빛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큰 빛이라고 표현한 것을 보면 작은 빛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달은 태양과 비교해 작은 빛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상과 이즘과 종교는 나름대로 빛을 역할을 하는 작은 빛입니다. 큰 빛 예수님이 비추는 순간 작은 빛들은 금새 그 힘을 잃습니다. 큰 빛 예수님이 내 안에 오시는 순간 어둠과 흑암이 순식간에 물러갑니다.
그런데 사람이 어두운 곳에 살다 보면 빛으로 나오기를 싫어합니다. 영화 빠삐용을 보면 한 늙은 죄수는 그곳에서 오래 살다 보니 그런대로 살만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탈출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사람이 빛 앞에 나오기를 싫어하는 것은 죄에도 죄의 낙이 있기 때문입니다. 죄가 벌레 씹는 것처럼 흉하면 죄를 즐기고 짓는 사람이 한 명도 없을 것입니다. 또 무언가 켕기는 것이 있을 때 사람을 피하고, 어두운 곳에 서 나오려고 하지 않고, 감추려고 하며 밝은 빛의 세계로 나오려고 하지 않습니다.
아담이 죄를 범한 후, 무화과나무 밑에 숨었습니다. 이때부터 인간은 하나님께로 나오기를 싫어하고, 말씀 앞에 나오기를 부담스러워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거부하며 어둠의 세계에 머물러 있고자 합니다. 성경은 이를 가리켜 ‘흑암에 앉은 백성’, ‘죽음 안에 있는 존재’, ‘어두움에 속한 존재’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큰 빛입니다. 예수님이 지배하는 세상은 거룩함과 의입니다. 영광의 광채입니다.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창 1:3) 하시매 빛이 있었습니다. 이 빛은 예수님의 원초적인 생명의 빛입니다. 이 빛은 예수님의 존귀와 위엄의 빛입니다. 이 빛은 예수님의 영광의 빛입니다.
요즈음 사람들이 삶의 방향을 상실했습니다. 삶의 희망을 상실했습니다. 삶의 의욕을 잃어 초조하고 불안합니다. 그러나 큰 빛 되신 예수님, 생명의 빛, 소망의 빛, 능력의 빛, 영광의 빛이 우리에게 임하면 우리의 어두운 얼굴이 광채가 나고, 어두운 눈동자가 빛나는 눈동자, 우리의 어두운 마음이 밝은 마음의 창으로 변합니다. 돋는 해, 예수님을 만나면 상처받은 마음이 치료되고 우울증이 치료됩니다. 운명과 슬픔이 사라지고 밝은 자화상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노예선의 선장에서 변화되어 한평생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쓰임 받은 죤 뉴턴이 있습니다. 죤 뉴턴은 어린 시절 독실한 어머니로부터 성경과 찬송을 배우며 자랐습니다. 그런 어머니가 일곱 살 때 세상을 떠났습니다. 11살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배를 타게 되었습니다. 그는 배를 타고 다니면서 예수님을 떠나 거칠고 난폭한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그는 노예무역선의 선장이 되었습니다. 그가 얼마나 악명이 높았던지, 노예들은 그를 사람 잡아먹는 사람이라고 부를 정도로 노예들을 악랄하게 다루었습니다. 반항하면 가차 없이 총으로 쏴 죽여 바다에 던졌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고향으로 돌아오는데 대서양 한복판에서 큰 풍랑을 만났습니다. 그는 “내가 여기서 죽는구나.” 그때 하나님 앞에 엎드려 회개합니다. “하나님 저는 당신의 은혜를 받을만한 가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저를 불쌍히 여기고 살려주시옵소서. 그러면 제가 새사람이 되겠습니다.” 이 풍랑을 헤쳐 나가는 데 무려 18일이 걸렸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풍랑을 벗어나 새 사람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가 조지 휫필드 목사님의 말씀에 크게 감명을 받고 1764년 39세에 올니 교구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가 설교할 때마다 이렇게 말한 후에 시작했습니다. ‘저는 항상 술 취한 자, 방탕한 자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자신이 죄 많은 인간이었음을 고백하고 설교를 시작했는데, 그의 설교는 많은 사람에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는 노예매매를 반대한 존 웨슬리의 글을 읽고 죽기까지 노예매매 선장에서 노예 반대 운동하다가 1807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해 영국에서 노예거래 금지법이 제정되었습니다. 그는 생애, 300여 편의 찬송가를 지었는데 54세에 자기의 자서전과 같은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작시했습니다. 이 찬송은 신자나 불신자나 모두가 부릅니다.
2001년 9.11 테러로 3000여 명이 희생되었을 때, 미국 대통령을 비롯한 각료들이 모여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불렀습니다. 2015년 6월에 흑인 교회에서 총을 난사해 많은 피해자가 나왔을 때, 오바마 대통령도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불렀습니다. 이 찬송이 미국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묶었습니다. 이처럼 돋는 해, 예수님이 노예 선장, 한 사람의 내면을 비췄을 때, 그가 변하여 많은 사람을 변화시키고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그가 82세가 되던 해 12월 마지막 설교에서 고백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 기억은 이제 희미해지지만, 지금도 똑똑히 기억하는 두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는 ‘내가 과거에 엄청난 죄인이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럼에도 하나님은 나를 버리지 않고, 불쌍히 여기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를 구원하셨다’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과 만난 후의 삶, B.C.와 A.D.가 분명했습니다. 그의 자전과 같은 ‘어메이징 그레이스’ 가사에도 그의 B.C.와 A.D.가 분명히 드러나 있습니다. 그의 변화된 삶을 볼 수 있습니다. I once was lost(B.C.), but now I am found(A.D.) Was blind(B.C.), but now I see(A.D.). 이는 그가 큰 빛 예수님을 만난 간증이요 고백입니다.
지금은 코로나의 비대면으로 정서가 메말라가고 있습니다. 지금은 능력주의로 한번 낙오하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패자 부활전이 없습니다. 이로써 삶이 두렵습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구원의 뿔, 돋는 해로 오셨습니다. 우리가 돋는 해, 큰 빛 예수님을 만나면 패배감에서 오는 절망을 이기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희망입니다. 다같이 외칩시다. “예수님은 돋는 해, 희망의 예수님이다. 어둠이여, 영원히! 절망이여 영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