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마가복음 2:1-12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막 2:5).
사람들은 외모와 행동을 보고 상대방을 평가합니다. 그래서 성형수술을 하면서까지 겉모습을 가꾸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세상 권세와 명예와 부를 취합니다. 이로 인해 인간성이 고갈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사람의 믿음을 보십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의 중심을 보십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의 마음을 보십니다.
본문을 보면 중풍을 앓고 있는 병자와 그의 네 친구들이 나옵니다. 네 친구들은 그의 병을 고치기 위해 예수님께 데리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너무 많은 사람들로 인해 그를 예수님께로 가까이 데리고 갈 수가 없었습니다. 대개 사람들은 이런 상황일 때 포기하고 돌아갑니다. 그러나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지붕으로 올라가 지붕을 뚫어 친구의 침상을 예수님께로 달아 내렸습니다. 이것은 당시 율법 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의 죄를 사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로 하여금 일어나 걷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대를 가리켜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라고 한탄하셨습니다(마 17:17). 우리가 살고 있는 세대 또한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입니다.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너 나 할 것 없이 믿음보다 감각적이고 원초적인 것에 관심이 많습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 모두가 믿음의 사람이 되어 죄 사함을 받고 자리에서 일어나 청년다운 기상을 가지고 살기를 기도합니다.
중풍병자와 그의 네 친구들
예수님은 나병환자를 고쳐주신 수일 후에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이 집에 계신다는 소문을 듣고 문 앞까지도 들어설 수 없을 만큼 모여들었습니다. 이를 볼 때 예수님의 인기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갑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권세가 있고, 예수님이 각색 병든 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내쫓으시고, 나병환자를 손으로 어루만져주시고, 말씀으로 나병을 깨끗하게 해주셨다는 소식이 온 동네에 전해졌습니다. 이 소문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몰려든 것입니다.
우리가 섬기고 있는 교회의 소문 또한 좋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세상을 향한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이웃에 대해 좋은 영향력을 끼쳐야 합니다. 우리는 말만 잘하는 신자가 아니라 말과 행동이 일치되고, 주일 신자가 아니라 삶으로 영향을 나타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뭔가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예수님께 나아온 사람들은 모두가 인생 문제를 떠안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진리를 알지 못해 방황했습니다. 그들은 치열한 생존경쟁에 지쳐 있었습니다. 그들은 악령에 시달렸고 상처가 많았습니다. 그들은 눈먼 강아지와 같이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몰랐습니다. 그들은 현실의 유익만을 좇았습니다. 그들은 중병에 걸려 있으면서도 중병에 걸렸다는 사실조차 몰랐습니다. 그들은 각자 자신의 각종 질병과 인생 문제를 해결받기 위해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병을 고쳐주시기보다 ‘도’를 말씀하셨습니다. ‘도’란 천국 복음,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도를 말씀하신 것은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천국 복음을 선포하시기 위해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육신의 질병보다 영적 질병을 더 심각하게 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열심히 사람들에게 천국 복음을 전하고 계실 때 한 중풍병자가 네 친구들에 의해 들려 나왔습니다(막 2:3). 요즘 사람들은 이기적이어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싶으면 친구 관계를 맺지 않습니다. 그러나 네 친구들은 조건 없이 중풍병자인 친구를 사랑했습니다. 그들은 그에게 예수님의 소문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계신 데 한번 가 보자고 권했습니다. 그는 비록 병석에 누워 있었지만 주위에 좋은 믿음의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성경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잠 13:20).
좋은 친구를 사귀는 것은 중요합니다. 한 사람이 사회화, 문화화되는 과정의 요인 중 하나가 친구입니다. 친구를 통해 공동체 의식, 수평적 위계질서에의 순응, 타인에 대한 배려와 양보를 배우게 됩니다. 따라서 좋은 믿음의 친구들을 만나 그들과 사귐의 시간을 많이 가져야 합니다.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 있는 사람들은 고집이 셉니다. 본문에 나오는 중풍병자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는 내 눈으로 예수님의 능력을 보지 못해 믿을 수 없다며 완강히 버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친구들의 권고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친구들을 믿고 신뢰했습니다. 그는 친구들이 예수님의 능력을 보았으면 나도 본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간접 전달을 직접 전달로 받아들였습니다. 행복의 원리 중 하나는 간접 원리, 즉 행복이 직접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누구를 통해 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을 직접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도들이 기록한 성경을 통해 믿습니다. 성경은 사도들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예수님의 모든 행하심과 가르치심을 기록한 것입니다. 믿음이란 베드로를 비롯한 열두 사도, 그리고 바울이 보고 경험하고 기록한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의 선배들이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중풍병자의 친구들은 넷이 한 팀이 되어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그를 데리고 나왔습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들의 특징은 절대 혼자 일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팀으로 일합니다. 함께하면 힘이 되고, 위로가 되고, 소망이 생깁니다. 기러기는 창공에 V자를 그리며 날아갑니다. V자 편대를 이루며 날아가면 공기저항을 29% 덜 받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기러기는 V자 편대를 그리면서 소리를 지릅니다. 그 소리는 “힘내라! 우리는 한 팀이다!”라는 응원가라고 합니다. 이처럼 합심하면 놀라운 힘이 생깁니다.
그들은 한 팀이 되어 중풍병자를 예수님께로 인도했습니다. 믿음이란 현실이라는 시공간을 떠나 예수님께로 더 가까이, 영적으로 더 가까이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것도 예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기 위함입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고 찬양하고 전도하고 헌금하는 것도 예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기 위함입니다. 헌금도 예배입니다. 물질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습니다(마 6:21).
그들은 친구를 데리고 예수님께로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문 앞에서부터 인의 장벽에 부딪쳐 더 이상 나아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매사 무슨 일을 하고자 할 때면 반드시 장벽을 만나게 됩니다. 사업에 성공한 사람들의 자서전을 보면 모두가 장애물을 만났습니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의 자서전의 제목은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입니다. 이 한마디를 통해 그가 회사를 일구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련을 겪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특히 개척자들은 더욱더 그러합니다. 우리 또한 크고 작은 장벽에 부딪칩니다. 가정 문제, 경제 문제, 친구 문제, 직장 문제 등 수많은 장벽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알 수 있는 점은 수비수 하나 없이 골을 넣는 축구선수가 없듯이 우리의 삶도 장벽 하나 없이 모든 일이 탄탄대로, 시온의 대로가 열리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이런 장애물 앞에서 크게 두 가지 자세를 가질 수 있습니다. 뒤로 물러서느냐, 아니면 도전하느냐입니다. 우리가 장벽 앞에 체념하고 포기하면 불신과 패배감에 사로잡혀 운명의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도전하면 길이 생길 뿐만 아니라 창조적인 지혜와 담대한 용기가 생깁니다. ‘믿음’이란 장애물 앞에서 뒤로 물러서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히 10:38-39).
중풍병자를 메고 온 네 친구들은 장애물 앞에서 포기하거나 연기하거나 체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는 절박한 마음으로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이때 지붕이 보였습니다. 그들은 지붕에 올라갔습니다. 그들은 지붕을 뚫었습니다. 그들은 훤하게 뚫린 지붕 아래로 중풍병자를 달아 내려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갔습니다. 그들은 보상해 줄 것을 각오하고 남의 집 지붕을 뚫었습니다. 진정한 친구는 손해를 보며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중풍병자를 예수님께로 데리고 나아가기만 하면 나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세상에 믿음보다 더 강한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친구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있었습니다. 사랑에는 초인적인 힘이 있습니다. 아이가 울 때 다른 사람은 우는 이유를 모릅니다. 그런데 엄마는 오줌 싸서 기저귀를 갈아달라고 우는지, 배가 고파서 우는지, 아파서 우는지 금방 알아챕니다.
믿음과 사랑은 불가능을 도전하게 합니다. 믿음과 사랑은 행동하게 합니다. 믿음과 사랑은 하나가 되게 합니다. 믿음과 사랑은 역사를 창조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네 친구들은 지붕을 뚫고 중풍병자를 달아 내렸습니다. 아무리 좋게 봐주어도 그들의 행위는 무례합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은 갑자기 먼지가 날리고, 쥐똥이 떨어지는 등 아수라장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때 근엄한 바리새인이 있었다면 뭐라고 했겠습니까? “저런 법도 질서도 모르는 무례한 놈들!” 하며 욕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크게 감동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행위를 보고 판단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행위보다 믿음을 보십니다. 사람들은 매너를 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진심을 보십니다. 사람들은 외모와 조건을 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속사람을 보십니다.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가치관을 가지고 판단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사람의 겨자씨만 한 믿음을 보십니다. 사람들은 신장과 용모와 능력을 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면의 중심을 보십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삼상 16:7).
아벨과 가인은 모두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믿음으로 드린 아벨의 제사를 받으셨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의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막 2:5하).
예수님은 믿음을 보시고 그의 죄를 사해 주셨습니다. 그들은 친구의 중풍을 고치기 위해 왔는데 예수님은 그의 죄를 사해 주셨습니다. 그들은 중풍만 나으면 친구의 인생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근본 문제를 죄로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도우실 때 증상의 치료가 아니라 근본 문제를 도우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먼저 그의 죄를 사해 주셨습니다. 중풍병자는 어떤 점에서 죄인입니까?
첫째, 무기력
중풍은 여러 원인으로 뇌혈관이 터져서 팔다리 등 신체의 일부가 마비되는 것입니다. 중풍의 특징은 마음과 팔다리가 제각기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인터넷 게임을 하지 말아야지’ 하지만 여전히 손은 자판에 가 있습니다. 신체가 자기 마음대로 안 되기 때문에 무기력하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라 할지라도 무기력한 삶은 하나님 앞에서 죄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립적인 존재로 지으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죄를 지으면 무기력해집니다. 힘이 장사였던 삼손도 스캔들에 빠졌을 때 힘을 잃었습니다. 지혜의 왕이라고 불리던 솔로몬도 이방 여인에게 마음을 뺏겼을 때 지혜와 총명을 잃어버리고 어리석은 자가 되었습니다. 죄는 사람을 무기력하게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죄 사함을 받으면 무력한 삶에서 독수리가 하늘을 나는 것과 같은 힘찬 삶을 살게 됩니다.
둘째, 의존심
중풍병자는 어쩔 수 없이 남의 도움을 받아가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로 인해 의존심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의존적인 사람은 능히 할 수 있는 것도 스스로 하지 않고 손을 먼저 벌립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립적인 존재로 지으심을 받았습니다. ‘자립’이란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 때는 반드시 뭔가를 의지하기 마련입니다. 사람을 의지하든지 물질을 의지하든지 자신의 인간조건을 의지합니다. 사람이 뭔가를 의지하게 되면 의지하는 대상의 노예가 됩니다. 사람을 의지하면 사람의 노예가 되고, 물질을 의지하면 물질의 노예가 되고, 강대국을 의지하면 강대국의 노예가 됩니다. 그러나 죄 사함을 받으면 의존심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립적인 사람이 됩니다.
셋째, 감사하지 않음
중풍병자는 처음 도움을 받을 때는 감사하는 마음을 가집니다. 그런데 점점 도움을 받다 보면 도움을 받는 것이 체질화가 되어 도움을 아주 자연스럽게 여깁니다. 이제 도와주지 않으면 안 도와준다고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그러다 보면 원망과 불평이 체질화되어 남을 원망하다가 하나님이 주신 능력과 은사를 한 번도 써보지 못하고 고귀한 삶을 다 허비하게 됩니다.
그러나 인간은 어떤 환경 중에도 감사해야 합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일이 잘될 때나 안 될 때도 감사해야 합니다. 죄의 뿌리는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는 것입니다(롬 1:21). 그런데 범사에 감사한다는 것은 사실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향하신 뜻은 범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살전 5:18). 죄는 사람을 원망과 불평하도록 만들지만 죄 사함을 받게 되면 범사에 감사하게 됩니다.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알게 모르게 죄를 짓습니다. 죄를 짓고 죄의식에 시달립니다. 우리는 어떻게 죄와 죄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죄는 인간의 힘, 노력, 의지, 엄격한 종교행위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사해 주셔야 합니다. ‘죄’란 너와 나의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달란트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인간 상호 간의 빚은 100데나리온에 불과하지만 하나님께 대한 빚은 1만 달란트입니다. 100데나리온은 약 1,000만 원에 해당합니다. 이는 노력하면 능히 갚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금 1만 달란트는 250년의 품삯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갚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나아오면 모든 빚을 탕감해 주십니다(마 18:21-35).
예수님은 죄를 사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습니다. 이 보혈의 피는 어떤 죄인이라 할지라도 깨끗하게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능력의 피요, 구원의 피요, 용서의 피입니다.
예수님이 중풍병자에게 죄 사함을 선포하시자 그곳에 앉아 있던 어떤 서기관들이 듣고 깜짝 놀라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막 2:7).
그들의 견해는 맞습니다.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구도 죄를 사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이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신 줄을 몰랐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속마음을 아시고 그들에게 반문하셨습니다.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막 2:9).
둘 다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알게 하시기 위해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막 2:11).
그러자 중풍병자는 무기력의 상, 의존심의 상, 불평과 원망의 상을 들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당당히 걸어갔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죄의 역사가 중풍병자가 일어나 걷게 되는 외적인 역사로 나타났습니다. 사람이 사죄의 은혜를 받으면 외적인 변화가 수반됩니다. 불평하던 사람이 범사에 감사하게 되고, 무기력하고 의존적인 사람이 자립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중풍병자의 네 친구들은 중풍병자를 데리고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죄를 사해 주셨습니다. 그러자 그가 곧 상을 들고 일어나 걸어갔습니다. 예수님은 죄를 사하실 수 있는 권세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믿음으로 나아와서 죄 사함을 받고 일어나 걷는 역사가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