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마가복음 4:21-29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막 4:26).
조지 휘트필드 목사는 보통 일주일에 40시간 내지 60시간을 설교했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하루에 10시간을 설교했다는 것입니다. 강의나 설교를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하루에 10시간을 강의나 설교를 하게 되면 입에서 단내가 납니다. 그런데 조지 휘트필드는 매일 그렇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녹이 슬어서 없어지느니 차라리 닳아서 없어지는 것이 더 낫다.” 이 말은 평안하게 살다가 늙어 죽느니 차라리 복음을 전하다가 진이 다 빠져 죽는 삶을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는 소원대로 위대한 전도자의 삶을 살다가 56세에 하나님 나라로 갔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런 삶을 살다가 하나님 나라로 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본문은 전파자의 중요성과 말씀의 신비, 말씀의 능력에 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말씀을 전함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본문을 통해 전도의 중요성을 깨닫고 전도를 열심히 하여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기를 기도합니다.
등불과 같은 말씀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에나 평상 아래에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막 4:21).
‘말’(bowl)은 곡물을 측량하는 그릇이고, ‘평상’은 침상을 말합니다. ‘등경’은 등잔걸이입니다. 사람이 등불을 켜는 이유는 어두움을 밝히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예전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등불을 켜서 말 아래나 평상 아래에 두지 않고 말 위에나 평상 위에 놓습니다. 우리 중에 스탠드를 책상 밑에 놓고 쓰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등불의 생명은 어두움을 밝히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는 말은 본래의 위치에 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말씀을 어디에 두어야 합니까? 우리 마음의 첫자리에 두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물질과 명예, 그리고 권세를 마음의 첫자리에 둡니다. 또 이즘과 자기 나름대로의 가치관을 마음의 첫자리에 두고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겉모습은 아름다워 보일지 모르지만 그들의 내면은 어둡습니다. 왜냐하면 등불을 등잔걸이에 두지 않고 평상 아래 두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내면이 어둡기 때문에 방향감각과 분별력이 없어 죄의 유혹에 쉽게 넘어집니다.
그러나 성경말씀을 마음의 첫자리에 두고 사는 사람들은 말씀을 최고의 가치로 여깁니다. 이런 사람들은 말씀을 자기의 삶에 적용합니다. 그러니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게 됩니다. 죄의 소욕을 이기고 거룩한 삶을 살게 됩니다. 분명한 삶의 방향과 목적이 있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선과 악, 참과 거짓,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을 분별해 시대를 본받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이웃과 동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칩니다. 이는 말씀은 등, 곧 빛이기 때문입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습니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어둠’은 사탄이 지배하는 세계입니다. 사탄이 지배하는 세상은 생각이 어둡고 부정적입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우리 자신의 힘으로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빛이십니다. 빛은 어두움을 이깁니다. 빛은 방향과 목적을 제시해 줍니다. 빛은 희망을 주고, 생명을 회생시키고, 생명을 약동하게 하고, 생명을 자라게 합니다. 빛은 어두움을 밝힙니다. 예수님은 빛이시기 때문에 어두운 세력을 이기고 밝고 빛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빛이시기 때문에 무기력한 삶에서 약동하는 삶으로, 절망적인 삶에서 희망찬 삶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예수님은 원망과 불평에서 감사와 기쁨으로, 부정적인 생각에서 긍정적인 생각으로, 낮은 자존감에서 높은 자존감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어두움의 세력, 사탄의 세력을 이기는 빛이십니다.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는 진리를 드러내시기 위함입니다.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막 4:22).
복음은 감추인 보배와 같이 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나 그 비밀을 알 수 없습니다. 말씀을 들을 귀가 있는 자만이 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을 듣든지 스스로 삼갈 때 찾을 수 있습니다.
“또 이르시되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막 4:24상).
‘삼가라’(consider)라는 말은 ‘주의 깊게 생각하라’는 뜻입니다. 마음에 말씀이 심기기까지 말씀을 묵상하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뜻을 더 알게 됩니다. 반면에 생각하지 않으면 있는 것마저도 빼앗깁니다(막 4:25). 영적인 성장은 신앙 연수에 비례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말씀을 깊이 생각하고, 얼마나 말씀을 자신의 삶에 적용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사도행전 17장 10-15절을 보면 베뢰아 개척 역사가 나옵니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행 17:11-12).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도 말씀을 잘 영접했습니다. 그래서 3주 만에 데살로니가 시내가 성경말씀으로 뒤집어졌습니다. 그런데 베뢰아 사람들은 그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받은 말씀이 과연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아무 생각 없이 맹목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탐구하는 자세로 공부했습니다. 말씀을 듣고 배우는 자세가 진지했습니다. 그들이 탐구심을 가지고 말씀을 묵상하고 공부했을 때 구원의 은혜와 믿음의 세계가 깊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깊은 바다와 같아서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습니다(골 2:3). 따라서 우리가 진지한 자세로 성경을 공부하고 듣고 묵상하면 감추어진 하늘의 보화를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씨를 뿌림과 같으니
“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막 4:26).
하나님의 나라는 막연하고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말씀의 씨를 뿌리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일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부뚜막의 소금도 집어넣어야 짜다”라는 속담처럼 말씀이 빛이고 그 안에 생명이 있다 할지라도 전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봄에 농부가 씨를 뿌려야 가을에 열매를 거두듯이 성경말씀을 전해야 생명의 역사, 구원의 역사, 믿음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박국이 살았던 시대는 강포와 간악과 패역과 변론과 분쟁 등으로 죽은 상태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거기에다 언제 바벨론의 침략을 받아 성전이 파괴될지 모르는 지경이었습니다. 그는 조국이 망하고 하나님의 성전이 파괴되는 현실을 목도하는 순간 기도했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합 3:2).
그는 부흥에 대한 소망이 얼마나 간절하고 절박했던지 반복해서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부흥이란 죄인들이 회개하고 거듭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흥이란 변화와 풍성한 삶을 의미합니다. 부흥이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의와 진리의 거룩함과 사랑입니다(레 11:45-46, 엡 4:24, 요일 4:16, 계 4:8). 그리고 인간은 위대한 사명을 가진 존재입니다(창 1:28). 부흥이란 바로 하나님이 나에게 두신 위대한 사명, 가정에 두신 사명, 캠퍼스에 두신 사명, 교회에 두신 사명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부흥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요청이자 절박한 소원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어느 시대보다 교회의 부흥이 절실히 요청되고 있습니다. 한국의 기독교 인구는 861만 6,000명(18.3%), 가톨릭은 514만 6,000명(10.9%), 그리고 불교는 1,072만 6,000명(22.8%)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통계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기독교 인구 1,000만 명대가 무너졌다는 것이고, 가톨릭의 놀라울 정도의 성장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위기일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전체의 위기입니다. 세계지도를 펴놓고 동남아시아, 중남미를 보면, 중남미는 모두가 가톨릭 국가이고 동남아는 불교 국가입니다. 중남미와 동남아시아가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안정되어 있습니까? 그 나라들은 부존자원이 풍부하지만 항상 불안합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그 시대의 문제는 종교와 궤를 같이합니다. 가톨릭은 믿음으로 구원받는 기독교 진리보다 행위를 앞세웁니다. 어떤 점에서 불교와 같은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톨릭은 거대한 정치 집단입니다. 각 나라에 대사를 파견하고 있고, 각국 정치 지도자들이 교황을 만나려고 줄을 서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현실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합니까? 지금은 하박국 선지자의 탄원의 기도를 드려야 할 때입니다. 지금은 부흥을 위해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교회가 부흥하면 사회의 변화도 동시에 일어났습니다. 웨슬리의 영적 부흥 운동은 영국을 피의 혁명에서 건졌습니다. 찰스 피니, D. L. 무디 등이 주도한 회개와 부흥 운동이 미국을 오늘의 강국으로 만들었습니다. 찰스 피니의 부흥 운동이 일어났을 때 그 지역사회의 술집은 손님이 없어 문을 닫게 되었고 교도소에는 죄수가 들어오지 않으니 간수가 앉아서 졸았다고 합니다. 존 칼빈이 스위스에서 목회할 때는 그 도시에 범죄가 없었다고 합니다.
1970년대부터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대학 2학년 이상은 전도해 일대일로 후배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것은 기본이요, 필수였습니다. 그리고 졸업한 목자들은 퇴근하자마자 곧 교회에 와서 후배들을 말씀으로 돕고, 자매들은 아기를 서로 봐주며 전도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에는 이런 모습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우리가 전도하지 않고 말씀을 공부하지 않는 것은 어떤 이유로도 변명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유언적인 말씀이 무엇입니까? 복음서의 끝 장은 모두 “전도하라”라는 명령으로 마무리됩니다(마 28:20, 막 16:15, 눅 24:47, 요 21:15). 그리고 사도행전에서 예수님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행 1:8).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유언했습니다.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딤후 4:1-2상).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열심히 전도해 교회를 살리고, 캠퍼스를 살리고, 우리 민족을 살려야 합니다.
프랑스의 극작가 장 콕토는 세상을 향해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만약 당신의 집에 불이 났다면 당신은 먼저 무엇을 갖고 나오겠는가?” 이에 사람들의 대답은 각양각색이었습니다. “그야 말할 것도 없이 귀중품부터 챙겨야지”, “보석이나 땅문서를 가지고 와야지” 등등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각기 다른 대답을 했습니다. 그런데 장 콕토의 대답은 아주 특이했습니다. “나는 불을 갖고 나오겠소.” 이 말의 의미는 불을 갖고 나와야 불을 끌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불의 열정을 말합니다. 그는 비록 불 속에서 모든 것을 잃었다 할지라도 그 속에서 불의 열정만 건진다면 잃은 것의 모든 것보다 더 큰 것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다시 한 번 전도의 열정이 살아나 불안한 조국을 살리고, 깨져가는 가정을 살리고, 위기의 캠퍼스를 살리고, 힘든 직장을 새롭게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성장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막 4:27).
농부가 씨를 뿌리고 가꾸고 여러 모양으로 수고를 하지만 자라나게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씨앗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알곡을 거둬들이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씨를 뿌리고 가꾸어도 하나님이 비를 내리지 않으시고, 햇빛을 주지 않으시면 소용이 없습니다. 그리고 씨에는 생명이 있기 때문에 햇빛과 물, 그리고 땅에서의 수분과 무기질 등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배젖이 썩음으로 배가 껍질을 비집고 나와 싹을 틔웁니다. 싹이 자라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습니다. 생명이 자라는 과정은 신비롭습니다. 오늘날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생명을 창조할 수 없고 자라게 할 수 없습니다. 다만 오늘의 과학은 생명은 생명에서 나온다는 법칙만을 밝힐 뿐입니다.
이처럼 말씀도 그 자체에 생명이 있습니다. 생명이 있기에 자랍니다(히 4:12). 말씀은 생명이 있어 우리의 내면에 떨어지게 되면 자기도 모르게 자랍니다. 주일학교 때 떨어진 말씀이 대학생이 되어 싹이 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몇 년 전 여름수양회 때 받은 말씀이 오랜 후 싹이 나고 자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말씀을 전해도 싹이 전혀 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실망하곤 합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말씀이 싹이 나서 자라게 됩니다. 이것이 생명의 역사, 말씀의 역사입니다. 이것이 생명의 능력, 말씀의 능력입니다. 이것이 생명의 신비, 말씀의 신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때로 내가 말씀의 씨를 뿌렸기 때문에 내가 사람을 키우는 것처럼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는 큰 착각입니다. 우리는 생명을 자라게 하는 데 전혀 개입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말씀의 씨가 잘 성장하도록 환경을 만들어줄 뿐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 3:7).
생명에는 세 가지 신비, 즉 발생의 신비, 자람의 신비, 사망의 신비가 있습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신비로운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을 때 우리는 전도의 열매에 연연하지 않고 말씀을 전할 수 있습니다.
씨는 진실합니다. 씨는 결코 비약하는 법이 없어 과정을 거쳐 단계적으로 성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단계에 맞게 양육해야 합니다.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막 4:28-29).
첫 단계는 싹입니다. 일반적으로 싹은 연약하기 때문에 섬세히 돌봐주어야 합니다. 어린 싹에 비료를 주면 타 죽듯이 말씀도 적당히 주어야 합니다. 전도를 받은 지 얼마 안 된 어린 신자들에게 “자기 부인을 하라”고 하면 자기 아내와 이혼하라는 말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말씀도 너무 많이 주면 안 됩니다. 그리고 곡식마다 특성이 있듯이 양들도 다 특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똑같은 말씀이라도 그 사람에게 맞도록 전해야 합니다.
두 번째 단계는 싹이 난 후 잎사귀를 낸 후의 이삭 단계입니다. 꽃이 피고 열매를 막 맺으려 할 때는 유난히 병충해와 폭풍우를 겪게 됩니다. 이 시기에는 농부들의 많은 손길이 필요합니다. 이처럼 말씀을 공부하고 어느 정도 자라게 되면 세상으로부터 많은 유혹을 받습니다. 이때는 그를 위한 기도와 집중적인 돌봄이 필요합니다.
세 번째 단계는 이삭 단계를 지나 곡식이 익는 단계입니다. 이때는 햇빛을 많이 받아야 할 시기이며 때를 잘 맞추어 추수를 해야 합니다. ‘추수’란 한 개인이 말씀을 듣고 구원받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고, 또 최후 심판의 날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최후 심판의 날이 이르면 예수님이 심판장이 되셔서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시고, 쭉정이는 불에 태워버리십니다(눅 3:17). 우리가 두렵고 떨림으로 열매 맺는 생활을 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처럼 작든 크든 생명 역사에는 과정이 있습니다. 처음부터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자녀를 기르는 것도 과정이 있습니다.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곧 성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회화와 문화화 과정을 거쳐서 성인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성숙한 신앙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계속 먹게 되면 믿음이 자라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원하는 만큼 믿음이 자라지 않을 때 답답해합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싹이 나고, 자라서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고, 열매가 익으면 수확하게 됩니다. 콩을 심으면 그 열매도 콩이고, 밀을 심으면 그 열매도 밀입니다. 생명을 심어 생명을 거두고, 복음을 심어 복음을 거두고, 그리스도를 심어 그리스도와 같은 인격이 맺힙니다.
우리는 말씀을 마음의 첫자리에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말씀에는 생명이 있기 때문에 전해지면 싹이 나고, 자라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습니다. 이 모든 과정은 친히 하나님이 이루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할 일은 말씀을 부지런히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때가 이를 때 반드시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 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