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1~11
그의 영광을 나타내신 예수님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나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요 2:11)
4복음서에 35가지의 예수님의 기적이 나옵니다. 이를 공관복음에서는 권능, 능력, 기적이라고 기록했고, 요한복음에서는 표적으로 기록했습니다. ‘기적’은 사건 그 자체를 강조하는 것이라면, ‘표적’은 역사적인 사건인 동시에 인간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사건으로, 표면에 나타나는 것보다 그 사건 속에 담긴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는 일곱 가지의 표적이 나옵니다.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예수님(요 2:1~11), 왕의 신하 아들을 고치신 예수님(요 4:46~54), 오래된 병자를 고치신 예수님(요 5:2~9), 오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요 6:4-~3), 물 위로 걸으신 예수님(요 6:16~21), 날 때부터 맹인된 사람을 고치신 예수님(요 9:1~7)과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요 11:1~44)입니다.
예수님께서 표적을 행하신 근본 목적은 표적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요한복음을 저술한 목적대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는 데 있습니다(요 20:30~31).
예수님께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신 표적은 예수님의 공생애 중에 처음 행하신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왜 처음 표적을 가나 혼인 예식에서 행하셨을까요? 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셨을까요? 가나 혼인 예식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신 사건 속에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 그리고 복음의 본질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기쁨을 상실하고 슬프게 사는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리고 복음은 물이 포도주로 변화되는 것처럼 본질의 변화입니다. 이런 본질의 변화가 있으려면 환경이 갖춰져야 합니다. 환경은 기도와 순종입니다.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표적의 뒤에는 마리아의 주인의식과 기도, 그리고 하인들의 순종이라는 환경의 준비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마리아의 주인의식과 기도, 그리고 하인들의 순종을 배워 물과 같이 무미(無味)하고 무취(無臭)하고 무색(無色)한 본성이 포도주와 같이 예수님을 믿는 맛(有味)과 예수님을 믿는 향내(有香),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색깔(有色)이 있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 포도주가 떨어진지라(요 2:1~3상).
사흘 되던 날에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혼례에 초청을 받아 제자들과 함께 가셨습니다. 거기에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도 있었습니다. 혼례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장 기쁘고 즐거운 날입니다.
당시 유대인의 결혼 잔치는 수요일부터 보통 1주일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신랑과 신부는 아름다운 화관을 쓰고, 보석으로 장식한 옷을 입고, 왕과 왕후와 같은 대접을 받았습니다. 혼인 잔치 기간에는 금식과 같은 종교행사도 면제되었습니다. 사람들은 혼인 잔치에 참석하여 포도주를 마시면서 함께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기쁨이 차고 넘쳐야 할 혼인집에 포도주가 모자라는 문제가 생겼습니다.
포도주는 혼인 집에 없으면 안 되는 음식입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포도주는 기쁨을 상징합니다(시 104:15). 그런 혼인 잔치에 기쁨을 주는 포도주가 떨어져서 파장 위기에 처했습니다. 축복으로 시작된 결혼식이 불평으로 끝날 위기에 이르렀습니다.
포도주가 없다는 것은 기쁨의 동인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기쁨이 없을 때 가장 먼저 찾아오는 현상은 밥맛이 없고, 밥맛이 없으니 살맛이 없고, 살맛이 없으니 인상을 쓰게 됩니다.
사람들은 기쁨을 찾기 위해 수고에 수고를 더합니다. 사람들은 세상의 보이는 데서 기쁨을 찾습니다. 사람들은 명예나 부나 권세에서 기쁨을 찾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얻어지는 기쁨은 마치 비 온 후에 잠깐 비추는 무지개와 같고 잡을 수 없는 신기루와 같습니다.
세상에 솔로몬처럼 부귀영화를 누린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 그가 말년에 “헛되고 헛되며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meaningless! meaningless! meaningless! everything is meaningless.)”(전 1:2)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소유했지만 헛되다는 것을 깨달은 후에 청년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너는 청년의 때에 너희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전 12:1~2)
그러면 기쁨은 어디에 있습니까? 기쁨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기쁨은 영어로 JOY, ‘Jesus-first, Others-second, Yourself-third’라는 질서 속에 살 때 주어집니다. 다시 말해 기쁨은 추구의 대상과 목적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사는 삶의 결과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위해 살면 기쁨이 있는 줄로 알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의 포만감은 그 순간뿐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을 마음의 첫 자리에 놓고 다른 사람을 섬기고 돕고 베풀고 사랑하면 할수록 그 기쁨은 갑절로 더해집니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시 4:7)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가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진 잔치집처럼 기쁨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이는 눈에 보이는 무언가 소유에 집착했기 때문입니다. 명예와 권력과 재물에 집착하면 기쁨이 사라지고 잠을 설치게 됩니다. 특히 돈에 집착하면 기쁨이 사라집니다. 돈이 필요하고 중하지만 하나님 자리에 놓을 수 없습니다. 내 마음의 첫 자리에 놓은 것이 우상입니다. 우상을 섬기면 누구를 막론하고 기쁨이 없습니다. 우리는 늘 내 마음의 첫 자리에 성삼위 하나님을 모시고 이웃을 섬기는 삶에 기쁨이 있습니다. 예수님-> 이웃-> 나 자신의 질서를 지켜 기쁨이 충만하여 살 맛이 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2, 마리아의 기도(요 2:3하~5)
예수의 어머니가 잔치집에 포도주가 없는 것을 알고 예수님께 이 사실을 조용히 알렸습니다. 마리아는 주인이 아니라 하객입니다. 그런데도 마리아는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마리아가 어떻게 포도주가 없는 것을 알았을까요?
잔치집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잔치집에 포도주가 있건 없건 그저 먹고 마시는데 정신이 팔린 사람이 있는 반면에 주인의식을 가지고 살피고 섬기는 사람입니다. 이는 잔치집 뿐만 아니라 모든 공동체, 교회에서도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주인의식이 없는 사람은 방관자가 되어 관심과 책임감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인의식을 가진 사람은 무엇이 없고, 무엇이 필요한가를 살핍니다. 문제가 생기면 그 문제를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측면에서 생각하고 기도합니다.
주인의식으로 채워진 공동체는 흥하고 발전합니다. 어느 회사에는 쓰레기통이 없다고 합니다. 모두가 휴지를 버리지 않고 자발적으로 깨끗하게 하려는 마음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 절실히 필요한 것은 주인의식을 가지고 희생하고 섬기는 사람입니다.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말만 요란하지 섬기는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 교회와 직장은 어떤가요? 우리가 주인의식을 가지고 교회 구석구석을 살피기를 기도합니다.
마리아는 관심을 가진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 문제를 놓고 조용히 예수님께로 나가 기도했습니다. 마리아의 아름다움은 조용히 기도하는데 있습니다. 대개 사람들은 사랑이 없으면 “왜 이렇게 사랑이 없지!” 은혜가 없으면 “왜 이렇게 은혜가 없지!” “이게 문제야!” 합니다. 요즘 모든 문제를 문재인 대통령을 빗대어 “이게 문재야!”합니다. 바로 그 문제를 놓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때 삶이 달라지고 생활의 리듬이 달라집니다. 마리아가 이처럼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은 기도하면 반드시 들어주실 것을 믿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요 2:4)
예수님이 어머니를 여자라고 한 것은 불손한 말인 것 같지만 당시 부인에 대한 최고의 존칭어입니다. ‘내 때’란 헬라어 카이로스(καιροζ)로 메시아의 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영광이 가장 잘 나타날 때를 뜻합니다. 예수님은 어머니의 요구라 할지라도 어머니의 요구로 일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또 하나님의 영광을 잘 드러내실 때를 좇아 일하십니다(요 12:23, 요 17:1). 그리고 환경이 갖춰졌을 때 일하십니다. 다시 말해 성령의 그릇이 이루어져야 역사하십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청을 거절한 것처럼 보입니다. 이때 마리아는 낙심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을 믿고 신뢰했습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때가 이르면 반드시 응답해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하인들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순종하도록 마음을 준비시켰습니다(요 2:5).
마리아가 하인들에게 순종하도록 가르친 것은 마리아가 일찍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눅 1:38). 순종은 믿음의 결과이고, 순종하여 믿음을 경험한 사람만이 순종할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 순종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3. 하인들의 순종(요 2:6~10)
예수님은 때가 되자 마리아의 기도를 들으시고 일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6개가 비어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1통은 10 가론, 약 3드럼이 됩니다. 결례란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는 것으로, 이는 위생상의 문제 그 이상의 종교의식이었습니다(막 7:3~4). 예수님은 하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요 2:7하)
예수님의 말씀은 하인들이 순종하기 힘든 명령입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포도주인 데 물을 채우라 하시니 이해가 안 갑니다. 또 3드럼이나 되는 물을 채운다는 것 또한 쉽지 않습니다. 오늘날에는 수도꼭지만 틀어 놓으면 물을 받을 수 있지만, 당시에는 1km 이상 걸어서 20~30m의 깊은 우물에서 두레박으로 길어 올려야 했습니다.
또 잔치집에서는 하인들이 가장 바쁩니다. 바쁠 때 필요 없는 일을 시키면 순종이 체질화된 사람도 순종하기 쉽지 않습니다. ‘왜 이렇게 해야 합니까?’ ‘꼭 해야 합니까?’ ‘그것은 당신의 생각입니다’ 하며 여러 이유를 들어 거절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인들은 아귀까지 채웠습니다. 아귀까지 채웠다는 것은 기쁨으로 자발적으로 100% 순종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이 어떻게 순종할 수 있었습니까? 사람들은 합리적이고 유익이 있어야 순종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유익이 있다고 순종하는 것은 아닙니다. 순종은 믿음과 신뢰가 있을 때에만 할 수 있습니다.
불교과 천주교에서는 내면을 비우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성경은 채우라고 가르칩니다.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빈 항아리는 사람들의 공허한 내면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근본적으로 내면이 공허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공허한 내면을 채우기 위해 무척 애를 씁니다. 어떤 사람은 명예나 권력과 물질로 채웁니다. 어떤 사람은 학문과 예술로 채웁니다. 어떤 사람은 고상한 생각으로 채웁니다. 어떤 사람은 맥주나 막걸리로 채웁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우리의 공허한 내면을 채울 수 없습니다. 설령 채운다고 해도 채우면 채울수록 내면은 더욱더 공허합니다. 왜 재벌 2세들이 마약에 손을 대 본인은 물론 가문을 망칠까요?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으로 내면을 채워야 합니다. 말씀으로 채워야 합니다. 시와 찬미로 채워야 합니다. 예수님의 아름다운 성품으로 채워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와 진리로 채워야 합니다. 하인들이 순종하여 아귀까지 항아리에 물을 채웠을 때 하인들에게 또 명령하셨습니다.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요 2:8)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라는 말씀이 경험과 상식과 싸움이라면 ‘갖다 주라’는 말씀은 내 문제로 끝나지 않고 나와 너와의 관계 문제입니다. 만일 손님에게 물을 갖다 주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그들은 위험과 모순이 있었으나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갖다 주었습니다. 하인들이 말씀에 순종했을 때 어떻게 되었습니까?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감탄사를 발하며 신랑을 불러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라고 칭찬했습니다. 보통 먼저 좋은 것을 내고 취하게 되면 물 탄 술을 내어놓습니다. 세상의 것들은 처음에는 좋으나 끝은 좋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만드신 포도주는 맛과 향취와 색깔에 있어서 세상의 그 어떤 포도주와 비교할 수도 없는 최상품 포도주였습니다. 이 포도주로 잔치의 기쁨과 축복이 더욱더 고조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은 최고의 것, 최고의 사랑, 최고의 기쁨, 최고의 은혜, 최고의 행복입니다.
하인들은 순종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순종은 하루아침에 되지 않습니다. 순종은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도 순종을 배우셨습니다(히 5:8). 이때 예수님은 십자가까지도 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순종의 사람을 쓰십니다. 대개 사람들은 항아리에 물을 채우는 데까지는 순종합니다. 그러나 제2단계인 갖다 주라는 말씀까지는 순종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기적을 체험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끝까지 순종하는 사람만이 믿음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순종하되 끝까지 순종하는 순종의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시골 농가의 주인이 섣달 그믐날에 하인들을 불러놓고 “너희와 약속한 기간이 다 됐다. 내일 고향으로 돌아가는 자유의 몸이다”라고 말하며, 하인들에게 마지막으로 밤사이에 새끼를 꼬라고 했습니다. 가급이면 길고 단단하게 꼬라고 했습니다. 주인이 그 자리를 뜨자 하인들이 “악질이야. 집에 가기 전날까지 부려 먹어!”하고 불평했습니다. 화가 난 하인은 아무렇게나 새끼를 꼬았고, 어떤 하인은 아예 새끼를 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떠한 하인은 “그렇게 불평만 할 게 아니야. 세상에 우리 주인처럼 고마운 사람도 그리 흔하지 않아. 우리를 자유의 몸으로 고향에 보내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마지막으로 시키시는 일이니 잘 해보자고!”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다른 하인과 달리 밤 늦도록 열심히 새끼를 단단하게 또 길게 꼬았습니다.
다음 날 아침 주인은 하인들을 불러 모아 금고를 열고 너희들이 꼰 새끼에 마음껏 엽전에 꿰어가라고 했습니다. 불평만 하고 새끼를 짧게 꼰 하인의 새끼에는 엽전 몇 개밖에 꿸 수 없었고, 아예 새끼를 꼬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가져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불평하지 않고 길고 단단하게 새끼를 꼰 하인은 다른 이들보다 몇십 배 많은 엽전을 가져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주인을 전폭적으로 신뢰했습니다. 주인에 대한 신뢰는 순종은 축복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연회장은 이 포도주가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최고의 포도주 맛을 즐겼으나 그 비밀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인들은 순종으로 그 비밀을 알았습니다. 연회장은 포도주의 근원을 알지 못하고 마셨으나 하인들은 그 근원을 알고 기뻐했습니다. 연회장은 한 번 마신 것으로 끝났지만 하인들은 예수님의 능력, 사랑, 기쁨의 근원을 알았으므로 언제든지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세상은 연회장이 주역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주역은 주인의식을 가진 마리아와 순종하는 하인들입니다.
4.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신 예수님(요 2:11~12)
그러면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신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첫째, 예수님은 참된 기쁨을 주시기 위해 오신 기쁨의 원천입니다.
예수님께서 처음 표적을 가나 혼인 잔치집에서 행하심으로 모든 사람에게 기쁨을 주셨습니다. 또 최후의 표적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죽음의 권세를 파하시고, 가장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주셨습니다. 이 기쁨은 사망 권세를 이긴 승리의 기쁨이요, 세상에서 누릴 수 없는 행복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변화의 능력자입니다.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신 것은 본질적인 변화입니다. 포도주는 맛이 있고, 향기가 있고, 색깔이 아름답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본성을 변화시켜 주시되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변화입니다(고후 5:17). 예수님은 교만한 자를 겸손하고, 쓸모없는 자를 유용한 사람으로 변화시키십니다. 예수님은 변화의 능력자이십니다.
셋째, 예수님은 우리에게 최고의 것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채워 주시되 가장 좋은 것으로 풍족하게 가득 채워주십니다. 예수님은 말씀과 성령, 기도, 진리와 은혜, 사랑과 용서, 인내와 이해, 충성, 기쁨, 비전으로 채워 주십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으로 채워 주십니다. 예수님은 최고의 것을 채워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순전한 기독교의 작가 C. S. 루이스(1898~1963)는 기독교 가정에서 성장했습니다. 그런 그가 청소년 시절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과 멀어졌습니다. 그는 무신론자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런 그가 옥스퍼드대학 마지막 학기 어느 날 밤이었습니다. 루이스는 여호와 하나님은 유일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루이스는 그날 밤 마지못한 회심이었으나 하나님은 얼마나 겸손하신지 나와 같은 그런 꼴의 회심자라도 받으셨다고 기쁨을 회고했습니다.
그가 회심하여 무신론자에서 유신론자로, 불신자에서 예수님을 순전하게 믿는 성도가 되었고, 기독교 변증가로 많은 사람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포도주와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게 전부를 다오. 나는 너의 시간, 돈, 일을 그다지 원하지 않는다. 나는 너 자신을 원한다. 순결하다고 생각하는 욕구는 물론 사악하다고 생각하는 욕구까지 모두 내게 넘겨다오. 그러면 나는 대신 새로운 자아를 네게 주겠다. 그러면 내 의지가 너의 것이 될 것이다.”
예수님은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심으로 그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이 영광은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심으로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었습니다. 우리가 기도와 말씀에 순종함으로 삶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답게 색깔 나는 삶으로 변화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