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마가복음 4:35-41
잠잠하라 고요하라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막 4:39).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하나님 나라에 관한 많은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말씀을 들고 삶의 현장으로 가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을 듣고 이론으로 끝나버리면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현실에 적용해야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약 2:17).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 삶의 현장으로 가고자 하셨습니다.
본문은 갈릴리 항해 중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혹자는 인생의 여정을 항해로 비유합니다. 항해를 하다 보면 크고 작은 사건들을 자주 만나게 됩니다. 미풍도 만나고 큰 광풍도 만나게 됩니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을 만날 때 취하는 태도도 천차만별입니다. 어떤 사람은 광풍 앞에 운명적이 되어 체념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믿음으로 그 문제를 풀어갑니다. 제자들은 항해 중에 갑자기 큰 광풍이 불자 예수님을 원망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울부짖는 음성을 듣고 일어나셨고, 말씀 한마디로 광풍을 잔잔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셨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은 자신이 만물의 창조주요, 자연을 다스리는 분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우리가 삶의 여정에 일어나는 사건 속에서 하나님을 믿음으로 역경을 이기고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기를 기도합니다.
두려워하는 제자들
예수님은 말씀을 마치시고 저녁때가 되자 제자들에게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배를 준비해 예수님을 모시고 항해를 시작했습니다. 그날따라 붉게 물든 저녁노을이 장관이었습니다. 이곳저곳에서 갈매기가 날아다니고 물새들이 노래하며 산들바람까지 불었습니다. 그 광경은 실로 한 폭의 그림과 같았습니다. 제자들은 겨자씨 비유를 통해 믿음의 거목이 될 소망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신이 나서 힘차게 노를 저었습니다. 배는 잔잔한 바다를 미끄러지듯 나아갔습니다. 그들의 입에서는 절로 찬송이 흘러나왔습니다.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속에 그리어볼 때 하늘의 별 울려 퍼지는 뇌성 주님의 권능 우주에 찼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새찬송가 79장).
실로 행복의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행복은 큰 광풍으로 인해 순식간에 날아가 버렸습니다. 바다 한가운데 이르렀을 때 잔잔한 물결이 갑자기 큰 광풍으로 돌변해 파도가 일어 배를 삼킬 것만 같았습니다. ‘큰 광풍’이란 헬라어로 메가톤급의 광풍을 말합니다. 제자들은 어부 생활을 통해 광풍을 자주 만났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들은 그 위기를 모면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의 광풍은 예전과 달랐습니다. 그들은 옛 전공과 경험을 의지해 큰 광풍으로 삼킬 듯이 밀려오는 세찬 파도와 싸웠습니다. 그러나 광풍 앞에서 그들의 상식과 경험, 전공과 노력, 힘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배가 금시 뒤집혀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제자들의 내면에는 두려움의 광풍, 의심의 광풍, 절망의 광풍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얼굴은 죽음의 공포로 사색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위기 중에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하루 종일 말씀을 가르치셨기 때문에 너무 피곤하셔서 배가 출발하자 곧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셨습니다. 이 안식은 열심히 일한 후에 맛볼 수 있는 안식입니다. 이 안식은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함으로 하나님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참된 안식입니다. 생존경쟁과 불확실성의 시대에 살고 있는 많은 현대인들은 불면증에 시달립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맡은 사명을 힘을 다해 섬기면 드러눕는 순간 잠이 듭니다. 사람이 눕자마자 단잠을 자는 것은 행복 중의 행복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준다고 하셨습니다(시 127:2).
이때 제자들은 울부짖으며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막 4:38하).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마태는 돈벌이가 좋은 세리 직업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큰 광풍으로 죽게 된다고 생각하니 자신도 모르게 원망의 소리가 튀어 나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탄 배에 큰 광풍이 이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예수님이 타신 배에 큰 광풍이 이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으면 잘나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하는 제자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믿으면 아프지도 않고, 성적도 좋고, 돈도 많이 벌고, 좋은 직장도 구하고, 좋은 배우자를 만나고, 승진도 잘되고, 어떤 사고도 없이 잘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기치 않게 병마와 죽음, 화재, 부모님의 사업 실패, 불의의 사고, 낮은 성적 등 여러 가지 어려움을 당할 때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한편 광풍을 만날 때 죄를 지어서 그런 것은 아닌가 하는 인과응보적인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물론 죄에 대한 징계로 인한 광풍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광풍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아닙니다. 한 예로, 욥은 죄를 지어서 큰 시련을 만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욥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의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사탄이 욥의 신앙을 시기해 그를 넘어뜨리고자 시련을 준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련의 광풍에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광풍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을 순수하게 하시고 성숙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광풍을 통해서 헛된 소망을 버리고 하나님 나라의 산 소망을 갖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광풍을 통해서 기도의 능력을 체험하게 하시고 믿음의 용사로 키우십니다.
온실의 화초는 연약합니다. 그러나 풍상을 겪으며 자란 나무는 어떤 광풍 가운데서도 끄덕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여러 번 죽을 고비를 겪었습니다. 그런 바울은 광풍의 의미를 깨닫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고후 1:9).
다윗도 광풍의 의미를 깨닫고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
우리는 광풍을 만날 때 예수님이 모르고 계시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광풍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면 광풍을 왜 빨리 잔잔하게 하지 않으셨을까, 제자들을 죽도록 고생시키다 도와주시는 잔인한 분이 아니신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예수님은 잔인한 분이 아니시고 사랑의 주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광풍을 빨리 잔잔하게 하시고 안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입니다. 그들은 마땅히 주무시는 예수님을 더 염려했어야 옳습니다. 그들은 두 눈을 뜨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정 안 되면 배에서 뛰어내려 헤엄을 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속된 말로 예수님은 앉아서 당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정말 예수님의 제자라면 예수님을 더 걱정했어야 옳습니다. “예수님, 지금 이렇게 주무시면 위험합니다” 하고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워 위기를 모면하시도록 했어야 옳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주무시는 예수님께 원망을 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배들도 있었습니다(막 4:36). 그들이 정말 목자라면 다른 배들의 사람들도 걱정했어야 옳습니다. 그런데 자신들만 죽게 되었다고 원망했습니다. 이처럼 원망은 자신만을 생각할 때 생깁니다. 남을 먼저 생각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있을 때 원망하지 않게 됩니다.
또 제자들은 자신들이 죽으면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끝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를 돌보지 않고 주무시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빠져 죽어도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중단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인간들의 형편에 따라 좌우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사람들에 의해 중단되거나 실패하지 않습니다. 광풍 중에도 주님의 뜻은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광풍 중에도 예수님을 원망해서는 안 됩니다. 원망 섞인 기도를 하거나 남을 원망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한 역사를 바라보며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감사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살전 5:18). 감사는 그 사람의 신앙 척도입니다. 그래서 유대 격언에 “감사라는 말이 혀에 붙어 있기 전까지는 아이에게 어느 것도 가르치지 말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절망 중에도 하나님의 뜻을 찾고 감사하는 것이 성숙입니다. 고통 중에도 하나님이 진정한 도우심과 피난처가 되심을 믿고 감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광풍을 잔잔하게 하신 예수님
예수님은 제자들의 원망의 절규를 들으시고 눈을 뜨셨습니다. 일어나신 예수님이 먼저 무엇을 하셨습니까?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에게 명하셨습니다.
“잠잠하라 고요하라”(막 4:39).
그러자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해졌습니다. 주님의 말씀 한마디로 메카톤급 광풍이 잔잔해졌습니다. 이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첫째, 자연을 지배하시는 권능의 예수님
현대 과학이 아무리 발달했다 할지라도 태풍의 발생 지점과 시간, 경로 등을 알 수 있을 뿐 태풍을 잔잔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으로 광풍을 잔잔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지배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태초에 말씀 한마디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으로 온 땅이 뒤덮여 있을 때 “빛이 있으라” 하고 말씀하시자 순식간에 흑암의 세력이 물러가고 온 세상을 밝히는 빛이 생겼습니다. 우리는 예기치 않은 광풍을 만날 때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어느 날 이한나 선교사의 편지가 왔습니다. “요셉 선교사의 주인은 경기가 좋지 않다며 그만두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다시 새 직장을 구해야 했습니다. 노동비자와 취업비자를 다시 받아야 하고, 변호사 비용을 다시 지불해야 했습니다. 저는 이런 상황에서 남편을 원망하며 어둠의 세력에 묻혀 지난 한 주간을 보냈습니다. 이 늦은 나이에 왜 캐나다로 와서 일자리, 비자문제로 고생을 해야 하는지 이해가 안 갔습니다. 정작 기도해야 될 때, 믿음으로 주님만을 바라보고 감사해야 될 때 저는 현실만을 바라보고 남편만을 원망했습니다. 이때 아침에 요셉 선교사가 사무엘을 학교에 보내고 기도 모임 갖자고 제안했습니다. 우리는 요한이와 함께 세 명이 무릎을 꿇고 《일용할 양식》을 보았습니다. 9월 3일자 양식 말씀을 펴니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다는 말씀이었습니다(막 9:14-29). 저는 믿음이 없음을 회개하고 믿음으로 주님만을 바라보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말씀에는 역사하는 힘이 있어 저의 어두움이 사라지고 하나님을 감사 찬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다음 날 일자리를 주시는 사인을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일수록 말씀을 읽고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둘째, 사탄의 세력을 꾸짖으시는 예수님
‘잠잠하라’란 귀신을 내어쫓을 때 쓰는 단어입니다. 사탄은 예수님과 제자들을 바다에 빠뜨려 죽게 함으로 인류 구속 역사를 끝장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결코 예수님이 타신 배를 파선시킬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사망 권세를 이기신 부활의 권능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틈만 있으면 우리를 믿음에서 떠나도록 미혹합니다. 그러나 사망 권세를 이기신 예수님과 함께 있는 한 그 어떤 세력도 우리를 넘어뜨릴 수 없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간증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5-39).
예수님은 성난 광풍을 잔잔하게 하신 뒤 제자들을 위로하셔야 옳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셨습니다.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막 4:40).
이는 풍랑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문제요, 믿음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광풍이 없을 때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광풍 앞에서는 하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했습니다. 이는 맑은 날씨에는 태양이 있다는 것을 믿지만 먹구름이 끼고 비바람이 칠 때는 태양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청명한 날씨에도 태양은 떠 있고, 비바람이 치는 날에도 태양은 존재합니다. 다만 구름에 가려서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상황에 따라 계시고 안 계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나와 항상 함께하십니다.
셋째, 제자들에게 두려움을 극복하게 하시는 예수님
믿음이란 예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어떤 상황에서도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이 세상 끝날까지 나와 함께하심을 의심하지 않는 것입니다(마 28:19-20). 예수님은 제자가 된 지 1년 만에 물고기 밥이 되게 하시려고 그들을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들은 광풍이라는 두려움 앞에 지금까지 체험한 믿음을 다 날려보냈습니다. 낮에 들었던 은혜로운 말씀도 다 잊어버렸습니다. 믿음이란 실전에 강해야 됩니다. 말씀을 삶의 현장에 적용해야 합니다. 청명한 날씨에 믿는다면 폭풍우 치는 칠흑 같은 밤에도 믿어야 됩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말씀을 삶의 현장에 적용해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두려움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사람은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마음이 오그라들고, 손발이 마비되고, 부정적인 생각을 하게 됩니다. 원망하고 마음이 완악해집니다. 갑자기 얼굴이 어두워지고 말과 행동이 거칠어집니다. 사람은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능히 할 수 있는 것도 못합니다. 하나님은 이 두려움을 가장 싫어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쓰임 받기 위해서는 두려움을 반드시 극복해야 됩니다.
우리에게는 많은 두려움이 있습니다. 장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자녀들에 대한 두려움, 직장에 대한 두려움, 건강에 대한 두려움, 자신의 성격으로 사회생활을 잘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 치열한 생존경쟁 사회에서 잘살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 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현대 의학과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두려움을 해결할 수는 없고, 다만 그 증상만 알 뿐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나의 내면에 있는 두려움을 해결해 줄 수 있습니다.
다윗은 그 생애에 많은 죽을 고비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힘과 의지로는 내면의 두려움을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힘 되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했을 때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모든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시 18:1-2).
넷째, 제자들이 믿음의 능력을 갖도록 도와주시는 예수님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막 4:40).
이는 믿음의 능력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믿음은 한마디로 능력입니다. 믿음이 있을 때 어떤 광풍 가운데서도 요동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자는 미풍 앞에서도 짠물을 마시고 익사하게 됩니다. 우리가 믿음만 있으면 어떤 광풍도 이기고 하나님 나라를 향해 힘차게 전진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산을 옮겨 바다에 던져지게 할 수도 있고(막 11:23) 역경도 이기게 합니다.
히브리서 11장에는 믿음의 영웅들이 나옵니다. 믿음의 영웅들은 믿음으로 세상의 모든 악을 이겼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모든 연약함을 극복하고, 절망을 극복하고, 불가능을 극복하고 새 역사를 창조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30년간의 노예생활로 인해 노예근성에 찌들어 있었습니다. 그들의 삶은 육신적이었습니다. 내일에 대한 희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하나님만을 믿는 믿음이 있었을 때 그들은 홍해를 육지같이 건널 수 있었습니다. 노예 백성에서 강한 하나님의 군사가 되었습니다. 믿음은 건강하지 못한 생각, 사상, 습관 등을 180도 바꾸어놓습니다. 믿음은 불가능에 도전하게 하고, 불가능을 가능하게 합니다.
다섯째, 제자들을 믿음의 용사로 키우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론이 아니라 실제의 삶에서 산 믿음을 갖도록 제자들을 광풍으로 몰아넣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광풍 훈련을 통해서 제자들이 광풍 중에도 요동하지 않고 믿음의 용사들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사자가 백수의 왕자가 되고, 독수리가 하늘의 왕자가 되는 것은 우연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피나는 훈련을 통해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때로 우리가 광풍을 만나 고통스러워할 때 침묵하기도 하십니다. 제자들은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을 기이히 여기고 예수님의 인격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막 4:41).
‘심히 두려웠다’는 것은 메가톤급의 경외심을 말합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예수님의 인격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었고 눈에 보이는 사건에만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제자들은 예수님을 경외하고 예수님의 인격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이 일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계기 중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광풍을 잔잔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연까지도 지배하시는 전능한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믿음의 용사로 키우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앞으로 닥칠 무서운 풍랑 속에서도 요동하지 않는 믿음의 용사로 키우십니다.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믿음의 용사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