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마가복음 6:45-56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이 다 예수를 보고 놀람이라 이에 예수께서 곧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고”(막 6:50).
토끼는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면 몹시 두려워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항상 자기가 다니는 길로만 다닌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길을 벗어나면 죽는 줄로 알기 때문입니다. 이를 안 사냥꾼은 토끼가 다니는 길목에 덫을 놓아 토끼를 잡는다고 합니다. 인간도 토끼와 똑같이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게 되면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의 생각, 자기의 가치관, 자기의 행동패턴을 바꾸려 하지 않습니다. 그 길이 옳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생각과 행동을 바꾸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생각이 굳어 배우려 하지 않게 되고, 배우지 않으니 성장하지 않게 되고, 성장하지 않으니 열매를 맺지 못하고 성공하지 못하게 됩니다.
반면에 두려움을 용기로 극복하고 새로운 세계에 도전한 사람들은 그 시대를 이끌어가는 리더가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두려움은 패배의 근본 원인이요, 우리의 발목을 잡는 끈이 됩니다. 로버트 그린과 피프티 센트는 「50번째 법칙」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두려움은 스스로를 제한된 행동 범위로 한정 짓는 일종의 감옥이다. 두려움을 떨쳐낼수록 더 많은 힘을 얻고 충만한 삶을 살게 된다.” ‘용기’란 두려움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용기란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 중에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의 거장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기도하러 산으로 가신 예수님
예수님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이시고 열두 바구니나 남기는 놀라운 기적을 이루셨습니다. 이를 체험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삼고자 했습니다(요 6:15). 그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자 함은 경제문제만큼은 확실하게 해결해 주시리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경제문제를 해결해 준다면 지도자로 삼고자 하는 것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그들은 5병2어의 기적을 보고 그토록 고대하던 메시아가 바로 예수님이시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들은 드디어 메시아가 오셨으니 이 나라는 곧 메시아 왕국이 될 것이고, 그토록 괴롭히던 로마 군대가 물러갈 것이고, 다윗 왕국과 같은 강대한 나라가 다시 세워질 것이고, 이제 먹고사는 문제는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니 흥분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모두가 기쁨의 탄성을 질렀습니다. 한편 제자들도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게 되든지, 하다못해 장관 자리 하나쯤은 얻게 되리라는 꿈에 부풀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큰 오해였습니다. 메시아는 이스라엘 사람들만을 위한 메시아가 아닙니다. 메시아는 이스라엘 나라만을 강대국으로 만드는 그런 왕도 아닙니다. 메시아는 이 땅에 사는 모든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물론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메시아 왕국이 세워집니다. 그때는 이스라엘 백성들뿐만 아니라 열방을 다스리는 메시아 왕국이 도래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강제로 자신을 왕으로 삼으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서둘러 제자들을 배에 태워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게 하신 후 자신은 홀로 산에 올라가 밤늦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일을 시작하시기 전에 먼저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일어나셔서 기도부터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5이2어를 가지고 먼저 기도하셨습니다. 이제 큰 역사를 마치고 기도하시기 위해 조용한 산으로 가셨습니다.
사람들은 큰일을 마친 후에는 흥분이 되어 잘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바쁘다는 핑계로 기도를 게을리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합니다. “너무 바빠 기도하지 못합니다”(too busy to pray). 그러나 마르틴 루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무 바빠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too busy not to pray). 기도란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감사기도는 기도 중의 기도입니다.
아브라함의 종의 위대함도 기도에 있었습니다. 그는 아브라함의 사명을 따라 이삭의 아내감을 구하기 위해 800㎞나 되는 먼 길인 나홀의 성에 갔습니다. 그는 하룻밤 쉬고 아브라함의 친척 집을 찾아다니며 신붓감을 찾을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나홀의 성에 도착하자마자 곧 하나님께 머리 숙여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일이 순적하게 끝났을 때도 하나님께 감사기도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기도로 시작해 기도로 끝을 맺었습니다.
“그가 이르되 우리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오늘 나에게 순조롭게 만나게 하사 내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창 24:12).
“이에 그 사람이 머리를 숙여 여호와께 경배하고 이르되 나의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나이다 나의 주인에게 주의 사랑과 성실을 그치지 아니하셨사오며 여호와께서 길에서 나를 인도하사 내 주인의 동생 집에 이르게 하셨나이다 하니라”(창 24:26-27).
우리는 일을 다 끝내고 기도하는 그림, 밀레의 <만종>을 잘 압니다. 그 그림을 보면 붉은 해가 지평선 너머로 살그머니 꼬리를 감추고 있을 때 노을이 곱게 물든 들판에서 하루 일을 끝낸 부부가 주님께 감사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기도하는 부부의 모습이 경이롭기만 합니다. 밀레는 매사에 감사하는 농부들의 모습을 그리게 된 이유를 친구에게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옛날에 저녁 종 울리는 소리가 들리면 할머니는 한 번도 잊지 않고 일손을 멈추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곤 했다네.”
우리는 일을 시작하기 전에 기도로 시작하고, 일을 마치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늘 감사기도를 드리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감사기도는 기도 중에 가장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물 위를 걸으신 예수님
예수님이 밤에 기도하실 때, 즉 밤 사경쯤(오전 3-6시)에 제자들이 탄 배에 위기가 닥쳤습니다. 거센 바람과 심한 풍랑으로 인해 제자들은 노를 젓고, 한편으로는 배 안에 찬 물을 퍼내며 혼비백산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혹시 배가 뒤집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과 메시아 왕국도 보지 못하고, 장관도 해보지 못하고 이 밤에 죽는 것은 아닌가 하는 실망과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에 사로잡힌 채 별별 생각을 다했습니다. 낮만 같아도 그 공포가 덜할 것인데 당시는 칠흑 같은 밤, 새벽 4시경이었습니다. 그 시간은 119로 SOS를 쳐도 긴급 출동을 하기 어려운 시간입니다.
이런 와중에 예수님은 기도를 마치시고 제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바다 위로 걸어 제자들에게 다가가셨습니다. 이를 본 제자들은 유령이 나타난 줄로 알았습니다. 뱃사람들은 밤에 바다에 유령이 나타나면 배가 파선한다는 전설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를 안 제자들은 두려움과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힌 채 외쳤습니다. “유령이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을 즉시 안심시키셨습니다.
“이르시되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고”(막 6:50하).
바로 이때 성질 급한 베드로는 주님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마 14:28) 하고 외쳤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말씀만 하시면 모든 자연 속에서 초자연적인 현상도 일으키실 전지전능한 창조주이심을 믿었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오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주님만 바라보며 파도로 흉흉한 바다를 걸어 주님께 다가갔습니다. 그러나 심한 바람으로 출렁이는 파도를 내려다본 순간, 즉시 물에 빠졌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처한 환경을 바라보면 두렵습니다. 나의 처지를 보면 불가능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오직 주님,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면 불가능해 보이고, 두렵게 느껴지는 것들이 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환경을 바라보지 말고 그 환경의 배후에서 일하시는 주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똑같은 상황과 사건 속에서도 주님을 바라보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다윗은 하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위대한 손길을 느꼈습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시 19:1-4).
우리는 하나님을 보고 나서 나를 보고, 가정을 보고, 직장을 보고, 캠퍼스를 보고, 이웃을 봐야 합니다. 땅을 보고 나서 세상을 보고, 나를 보고, 가정을 보고, 이웃을 보고, 나를 보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을 보고 나서 땅을 보게 되면 그 순간 마음에 기쁨과 찬송, 감사가 나옵니다. 그리스도를 뵙고 나서 나를 보게 되면 용서와 사랑, 자유와 평안이 생깁니다. 그리스도를 보고 나서 이웃을 보게 되면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멧돼지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도토리입니다. 멧돼지는 땅에 떨어진 도토리를 다 먹으면 땅을 파기 시작합니다. 도토리가 땅에 있는 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도토리는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 떨어집니다. 멧돼지가 도토리를 먹으려면 땅을 팔 것이 아니라 도토리나무의 밑동을 쳐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도 멧돼지와 같다는 사실입니다. 땅을 열심히 뒤지고 땅을 바라봅니다. 그러나 땅을 아무리 뒤져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습니다. 온갖 좋은 것들은 위로부터 옵니다(약 1:17).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땅이 아니라 하늘에 있습니다. 암반을 오를 때 땅을 내려다보면 추락합니다. 위만 바라봐야 합니다. 우리는 파도가 흉흉한 세상을 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볼 때 승리할 수 있습니다.
두려움은 사람을 병들게 하고 인간의 실존을 상실하게 합니다. 두려움은 우리를 멸망의 길로 인도하는 가장 큰 원수입니다. 반면에 믿음은 힘과 능력을 줍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입니다(딤후 1:7). 그러므로 신앙생활이란 두려움과 싸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두려움에 사로잡힌 우리에게 명령하십니다.
“이르시되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막 6:50하)
두려움은 백해무익합니다. 두려움은 만병의 근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안심하라”(take courage), “힘내라”, “기운을 내라”, “용기를 가지라”고 하십니다. 두려움은 어디서 옵니까?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 아름다운 에덴동산을 창조하시고 그곳에서 복을 마음껏 누리며 살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인간의 내면에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두려움은 하나님과의 단절에서 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두려움을 해결하려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그것은 교만과 탐욕과 불순종입니다.
주님이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그쳤습니다(막 6:51). 바람을 누가 만드셨습니까? 모든 자연과 천지만물을 누가 만드셨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곧 하나님이십니다. 천지만물을 만드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돌풍을 잠재우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사 9:6중). 제자들은 바람이 그치는 것을 보고 심히 놀랐습니다. 이는 그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게네사렛에 이르러 배에서 내리셨습니다(막 6:53). 예수님이 배에서 내리시자마자 사람들이 예수님이신 줄을 알고 병든 자를 침상째로 메고 나아왔습니다. 그리고 병자를 시장에 두고 예수님께 그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게 간구했습니다(막 6:56상). 게네사렛’이란 열정이란 뜻입니다. 그들은 지역의 이름처럼 열정적으로 주님께 나와 간구했습니다. 그때 그들이 예수님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는 자마다 다 성함을 얻었습니다(막 6:56하). 주님은 열정과 진심을 가지고 간구하는 자마다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우리는 세상을 바라보지 말고 주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때 믿음이 생기고 강해집니다. 근심도 사라지고 두려움도 없어집니다. 마음에 평강과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우리 모두가 시험과 환난이 올수록 세상을 보지 말고 위의 것을 찾고 하나님을 바라보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열정과 진심을 가지고 간구하기를 기도합니다.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 3:2).
25 마가복음 7:1-23
악한 것이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막 7:23).
“인간의 마음과 행동이란 무엇인가?” 생각한다고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이 질문을 해보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인간의 마음이 행동에 미치는 영향을 부단히 연구했습니다. 이것이 심리학(psychology)입니다. ‘심리학’이라는 용어는 헬라어로 ‘프시케’(psyche)와 ‘학문’(logy)의 합성어로서, 영혼에 관한 학문입니다. 헬라 사람들은 영혼이란 인간이 알 수 없는 초자연적인 것이지만 신체에 깃들게 되면 마음과 아울러 모든 활동을 지배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성경을 보면 ‘마음’은 영어로 ‘mind’와 ‘heart’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mind’는 보이는 실체이고 ‘heart’는 보이지 않는 실체를 뜻합니다. 그리고 헬라어로 ‘마음’이란 ‘카르디아’(καρδία), 심장을 뜻합니다. ‘카르디아’는 인간의 정신과 영적인 중심부를 가리킵니다. 이를 바울은 ‘속사람’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인간의 마음에는 감정과 욕망 등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인간은 마음으로 기쁨과 고통, 슬픔, 사랑을 느낍니다. 마음이 탐심을 갖게 합니다. 또한 마음은 이해의 자리, 생각과 반성의 근원지이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마음은 의지의 자리로 결단의 근원이기도 합니다.
더욱이 인간의 마음은 경건한 삶의 근원지로서 하나님이 인간을 만나시는 중심이 됩니다. 인간은 마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을 보시고 우리의 됨됨이를 평가하십니다. 그런데 인간은 스스로 마음을 바르고 깨끗하게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마음은 본질상 악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마음이 본질상 부패하기 때문에 행동이 바를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마음을 깨끗하게 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본문을 통해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전통보다 계명이 우선
본문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제자들을 비판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책잡아 고소하기 위해 예루살렘의 산헤드린 당국으로부터 파송된 조사반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두 눈에 쌍심지를 켜고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아무런 흠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예수님의 제자 중 몇 사람이 손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본 그들은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준행하지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막 7:5).
유대인들이 식사 전에 손을 씻는 것은 단순히 신종플루에 걸리지 않기 위한 위생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종교의식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오래전부터 내려온 장로들의 전통이 있었습니다. 율법에는 문자로 기록된 성문법과 모세 이후에 장로들을 통해 구전으로 내려온 구전법이 있었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람들은 나이 많고 학식과 신앙심이 있는 장로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시대마다 율법을 기초로 실생활에서 지켜야 할 생활규범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구전으로 내려오다가 바벨론 포로 이후부터 성문화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탈무드」입니다. 유대인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율법 이상으로 중요시했고, 성문법이 물이라면 구전법은 포도주와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장로들의 전통은 알게 모르게 그들의 의식 세계를 넘어서 무의식 세계를 지배했습니다.
그들은 아무리 배가 고파도 옷을 걷어 올려 손목까지 씻지 않으면 먹지 않았습니다. 또한 시장에서 돌아와서는 반드시 샤워를 하고 음식을 먹었습니다. 손뿐만 아니라 잔과 주발과 놋그릇까지도 세제로 깨끗이 씻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생활화된 종교의식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를 잘 지키면 믿음이 좋은 줄로 착각했습니다. 처음에 그들이 이렇게 한 것은 거룩한 백성이 되고자 하는 선한 의도에서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점점 형식화되어 사람을 옭아매는 올가미가 되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제자들의 모습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제자들을 부정한 자로 판단하고 정죄해 예수님을 고소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말씀을 기초로 그들의 외식을 책망하셨습니다.
“이르시되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막 7:6-7).
‘외식’이란 연극 용어로, 배우가 본래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가면을 쓰거나 다른 모습으로 변신해 작중 인물 역할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외식이란 겉과 속이 다른 것을 말합니다. 바리새인들은 겉으로는 장로들의 전통대로 부지런히 손을 씻고 목욕하고 그릇을 깨끗하게 씻었기 때문에 믿음이 좋은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내면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시고 심하게 책망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마 23:2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마 23: 27).
예수님의 책망을 통해 그들의 문제가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첫째,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지 않음
그들은 입술로는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존경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었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입술 신앙이었습니다. 그들은 입술만 천국에 갈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는 신앙인 것처럼 행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는 불신자처럼 살았습니다. 그들은 회당에서는 훌륭한 신자였으나 회당을 나서는 순간 이방인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이중적이 된 것은 하나님 앞에서 살지 않고 사람들 앞에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람의 칭찬을 더 구했습니다(요 5:44). 그들은 사람의 인정과 칭찬에 얽매여 양심을 속이고 하나님을 만홀히 여겼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는 생활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랬을 때 자기 자신도 모르게 이중생활을 하게 됩니다.
신앙생활이란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마음(심장)으로, 가슴으로 주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찬양하고 가슴으로 양들을 돕는 것입니다. 가슴신앙은 따뜻합니다. 심장신앙은 뜨겁습니다. 주님은 가슴신앙, 심장신앙을 원하십니다. 마음도 없는 입술신앙은 하나님이 원하지 않으시고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해 있고, 뜨거운 심장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심장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때 우리의 심중에 기쁨과 감사와 찬양이 가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을 어디에 두고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가슴으로, 심장으로 주님을 사랑하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말씀보다 형식을 중히 여김
종교는 의식도 중요하고 그에 비례해 내용도 중요합니다. 의식이 없는 내용은 경박합니다. 반면에 내용이 없고 의식만 있으면 위선이 되고 형식적이 됩니다. 문제는 그들이 내용보다 의식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람들이 만든 전통과 의식에 더 관심이 많았습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난 것은 가톨릭이 성경보다 전통과 의식을 더 중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가톨릭에는 복음 진리는 없고 의식만 남았습니다. 알맹이는 없고 껍데기만 남았습니다. 이때 마르틴 루터가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의식을 버리고 순수하게 본질로 돌아가자. 순수 복음 진리로 돌아가자. 즉 ‘오직 믿음’( Sola Fide ), ‘오직 성경’( Sola Scripture ), ‘오직 은혜’( Sola Gratia ), ‘오직 하나님께 영광’( Sola Deo Gloria )으로 돌아가자”고 하며 일어선 것이 종교개혁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전통을 지키고자 하나님의 계명을 버린 구체적인 예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출 20:12상)고 하셨습니다. 이 계명은 누구도 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의 유익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폐했습니다. 당시에 ‘고르반’이라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이는 ‘예물’이란 뜻으로, 하나님께 드린 것을 사람이 개인적인 용도로 쓸 수 없도록 한 서약 양식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그 어떤 것보다 높이고 절대적으로 섬기는 데서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를 악용해 부모님을 부양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이로써 그들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폐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어떤 것보다도 우선되어야 하며 우리가 경외심을 가지고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는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사람들의 칭찬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신앙의 기초를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내려야 합니다. 말씀이 우리 삶의 규범이 되고, 말씀이 우리의 의식 세계와 무의식 세계를 지배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을 생활화해야 합니다.
사람을 더럽게 하는 근원은 마음
예수님은 무리를 다시 불러 말씀을 환기시키셨습니다.
“무리를 다시 불러 이르시되 너희는 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하시고”(막 7:14-16).
예수님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음식이 마음으로 들어가지 않고 배에 들어가 뒤로 나가기 때문입니다. 우리 몸에 더러운 것이 들어가면 백혈구가 이물질과 싸웁니다. 그래서 이물질을 정화시킵니다. 그래도 안 되면 설사를 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비록 몸에 좋지 않은 음식물이 혹 들어갔다 할지라도 사람의 마음을 더럽게 하지는 못합니다. 모든 식물은 하나님이 선하게 창조하신 것이기 때문에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딤전 4:3-4). 예수님은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무리를 떠나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 때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그 하신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 물었습니다(막 7:17). 이에 예수님은 제자들이 가식적인 종교지도자들의 악영향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 자세하게 풀어서 말씀하셨습니다.
“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막 7:20-23).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열두 가지 악들을 열거하셨습니다. 이런 것들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관계입니다. 그래서 게리 스몰리는 「관계 DNA」에서 “인생은 관계이고, 나머지 모든 것은 부수적인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카네기는 「인간관계론」에서 15%는 자기 실력이고 85%는 인간관계라고 했습니다. 이만큼 인간관계는 중요합니다.
십계명 중에 제1계명에서 제4계명까지는 하나님과의 관계이고, 제5계명은 제6계명부터 제10계명까지의 원론이고, 제6계명부터 제10계명은 한마디로 인간관계에 관한 말씀입니다. 열두 가지 악들은 모두가 십계명 중에 속해 있습니다. ‘살인’, ‘질투’, ‘비방’, ‘악독’, ‘교만’, ‘우매함’은 제6계명에 속한 것입니다. ‘질투’는 시기심을 말하고, ‘비방’은 남을 헐뜯고 남의 일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악독’은 악에 대한 일반적인 용어이며, ‘교만’은 다른 사람보다 자신을 높여서 타인을 경멸하는 것입니다. ‘우매함’은 도덕적, 영적 무감각을 의미하는 어리석음을 말합니다.
‘음란’, ‘간음’, ‘음탕’은 제7계명에 속합니다. ‘음란’은 여러 종류의 부정한 성적 행위를 말하고, ‘간음’은 결혼한 사람의 부정한 성적 관계를 의미하며, ‘음탕’은 공공연한 비도덕적인 행위를 뜻합니다. ‘도둑질’은 제8계명, ‘속임’은 제9계명, ‘탐욕’은 제10계명에 각각 속합니다. 이런 악들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로, 손을 씻는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중요한 진리를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 사람을 더럽게 하는 근원은 마음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되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그 내면이 거룩하고 아름답고 순결하고 고결하게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하얀 백지와 같이 깨끗하고 순결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며 무한한 기쁨과 자유와 행복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말씀에 불순종하게 되자 마음이 부패해졌습니다. 마음에 교만, 의심, 불신, 탐욕 등 온갖 죄 균(菌)이 서식해 더러워졌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점점 멀어져 선을 사모하고 의를 행하기보다 악을 찾고 불의를 행하기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 6:5).
인간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은 항상 악했습니다. 그들은 지고의 선이신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하나님 없이 살고자 했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대로 행했습니다. 노아 시대에는 음란과 강포와 부패가 온 땅에 충만해 마침내 하나님이 홍수로 멸하시지 않으면 안 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창 6:3, 11-13). 마음이 바르고 깨끗해야 행동이 바르게 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눅 16:15).
다윗은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 하는 자가 얼마나 부패한가를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시 14:1-3).
인간의 본성은 동물보다 더 탐욕스럽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탐욕스러운지, 학은 위의 80%를 채우고, 돼지는 100% 채우고, 사람은 120%를 채운다고 합니다. 그래서 바다는 메울 수 있지만 사람의 욕망의 바다는 누구도 메울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이 욕망의 바다로 빠져들게 되면 그 누구도 미혹되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고 했습니다(렘 17:9). 이처럼 인간의 마음은 악합니다.
둘째, 사람의 마음을 정결하게 할 수 있는 예수님의 피
사람에게는 육신의 소욕대로 살고자 하는 욕망이 있는 반면에 의롭고 순결한 인생을 살고자 하는 거룩한 소원도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거룩한 소원과 육신대로 살고자 하는 소욕 간의 갈등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거룩한 소원이 죄의 소욕에 완패를 당한다는 것입니다(롬 7:18, 22-23). 사람이 죄의 소욕에 완패를 당하게 되면 양심의 고통으로 인해 죄 씻음 받고자 노력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자선사업과 같은 선한 일을 통해 죄를 상쇄해 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고행으로 죄의 대가를 치르고자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일에 몰두해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자 합니다. 어떤 사람은 멀리 이민을 떠나 잊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 어떤 노력으로도 우리의 마음을 깨끗하게 할 수 없습니다. 울어도 안 됩니다. 머리를 쥐어뜯어도 안 됩니다. 이는 우리의 죄가 너무 지독해서 피 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기 때문입니다(히 9:22). 그래서 구약 시대에는 물건을 정결하게 할 때나 부정한 자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는 반드시 짐승의 피를 뿌렸습니다. 짐승의 피는 그 효과가 일시적이고 온전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인간을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시어 하나님의 제단에 자신의 피를 뿌리심으로 온전하고도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습니다(히 9:12).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히 9:13-14).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만이 죄로 더러워진 마음을 흰 눈같이 정결하게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만이 조상이 물려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벧전 1:18-19).
셋째, 마음을 굳게 지켜야 함
신앙생활이란 정욕과 욕심과 유혹으로부터 마음을 지키고 다스리는 것입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언 16:32).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고 지킬 수 있습니까?
첫째로, 우리의 마음을 말씀으로 채워야 합니다. 마음은 빈 항아리와 같아서 무엇인가로 채워야 합니다.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과 의와 거룩함과 사랑으로 채워야 합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라고 고백했습니다(시 119:9).
둘째로, 영의 생각을 해야 합니다. 생각은 사상을 가져오고 사상은 문화를 만들고 창달합니다. 이처럼 생각은 중요합니다. 무엇을 생각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이 달라집니다. 따라서 생각이 자유라고 해서 함부로 해서는 안 됩니다. 육신의 생각은 인생을 파멸로 이끕니다. 그러나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입니다(롬 8:6). 그러기 위해서는 기도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됩니다.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영의 생각을 하게 하는 귀한 자리입니다.
마음이 청결해야 바른 삶을 살게 됩니다. 마음이 청결하기 위해서는 주님의 보배로운 피로 죄 씻음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버리고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말씀과 기도의 자리를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 십자가에 흘린 피로써 그대는 씻기어 있는가 더러운 죄 회개하는 능력을 그대는 참 의지하는가 예수의 보혈로 그대는 씻기어 있는가 마음 속의 여러 가지 죄악이 깨끗이 씻기어 있는가♬(새찬송가 259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