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마가복음 7:1-23
악한 것이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막 7:23).
“인간의 마음과 행동이란 무엇인가?” 생각한다고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이 질문을 해보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인간의 마음이 행동에 미치는 영향을 부단히 연구했습니다. 이것이 심리학(psychology)입니다. ‘심리학’이라는 용어는 헬라어로 ‘프시케’(psyche)와 ‘학문’(logy)의 합성어로서, 영혼에 관한 학문입니다. 헬라 사람들은 영혼이란 인간이 알 수 없는 초자연적인 것이지만 신체에 깃들게 되면 마음과 아울러 모든 활동을 지배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성경을 보면 ‘마음’은 영어로 ‘mind’와 ‘heart’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mind’는 보이는 실체이고 ‘heart’는 보이지 않는 실체를 뜻합니다. 그리고 헬라어로 ‘마음’이란 ‘카르디아’(καρδία), 심장을 뜻합니다. ‘카르디아’는 인간의 정신과 영적인 중심부를 가리킵니다. 이를 바울은 ‘속사람’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인간의 마음에는 감정과 욕망 등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인간은 마음으로 기쁨과 고통, 슬픔, 사랑을 느낍니다. 마음이 탐심을 갖게 합니다. 또한 마음은 이해의 자리, 생각과 반성의 근원지이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마음은 의지의 자리로 결단의 근원이기도 합니다.
더욱이 인간의 마음은 경건한 삶의 근원지로서 하나님이 인간을 만나시는 중심이 됩니다. 인간은 마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을 보시고 우리의 됨됨이를 평가하십니다. 그런데 인간은 스스로 마음을 바르고 깨끗하게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마음은 본질상 악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마음이 본질상 부패하기 때문에 행동이 바를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마음을 깨끗하게 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본문을 통해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전통보다 계명이 우선
본문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제자들을 비판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책잡아 고소하기 위해 예루살렘의 산헤드린 당국으로부터 파송된 조사반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두 눈에 쌍심지를 켜고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아무런 흠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예수님의 제자 중 몇 사람이 손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본 그들은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준행하지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막 7:5).
유대인들이 식사 전에 손을 씻는 것은 단순히 신종플루에 걸리지 않기 위한 위생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종교의식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오래전부터 내려온 장로들의 전통이 있었습니다. 율법에는 문자로 기록된 성문법과 모세 이후에 장로들을 통해 구전으로 내려온 구전법이 있었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람들은 나이 많고 학식과 신앙심이 있는 장로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시대마다 율법을 기초로 실생활에서 지켜야 할 생활규범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구전으로 내려오다가 바벨론 포로 이후부터 성문화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탈무드」입니다. 유대인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율법 이상으로 중요시했고, 성문법이 물이라면 구전법은 포도주와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장로들의 전통은 알게 모르게 그들의 의식 세계를 넘어서 무의식 세계를 지배했습니다.
그들은 아무리 배가 고파도 옷을 걷어 올려 손목까지 씻지 않으면 먹지 않았습니다. 또한 시장에서 돌아와서는 반드시 샤워를 하고 음식을 먹었습니다. 손뿐만 아니라 잔과 주발과 놋그릇까지도 세제로 깨끗이 씻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생활화된 종교의식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를 잘 지키면 믿음이 좋은 줄로 착각했습니다. 처음에 그들이 이렇게 한 것은 거룩한 백성이 되고자 하는 선한 의도에서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점점 형식화되어 사람을 옭아매는 올가미가 되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제자들의 모습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제자들을 부정한 자로 판단하고 정죄해 예수님을 고소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말씀을 기초로 그들의 외식을 책망하셨습니다.
“이르시되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막 7:6-7).
‘외식’이란 연극 용어로, 배우가 본래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가면을 쓰거나 다른 모습으로 변신해 작중 인물 역할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외식이란 겉과 속이 다른 것을 말합니다. 바리새인들은 겉으로는 장로들의 전통대로 부지런히 손을 씻고 목욕하고 그릇을 깨끗하게 씻었기 때문에 믿음이 좋은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내면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시고 심하게 책망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마 23:2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마 23: 27).
예수님의 책망을 통해 그들의 문제가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첫째,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지 않음
그들은 입술로는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존경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었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입술 신앙이었습니다. 그들은 입술만 천국에 갈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는 신앙인 것처럼 행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는 불신자처럼 살았습니다. 그들은 회당에서는 훌륭한 신자였으나 회당을 나서는 순간 이방인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이중적이 된 것은 하나님 앞에서 살지 않고 사람들 앞에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람의 칭찬을 더 구했습니다(요 5:44). 그들은 사람의 인정과 칭찬에 얽매여 양심을 속이고 하나님을 만홀히 여겼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는 생활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랬을 때 자기 자신도 모르게 이중생활을 하게 됩니다.
신앙생활이란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마음(심장)으로, 가슴으로 주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찬양하고 가슴으로 양들을 돕는 것입니다. 가슴신앙은 따뜻합니다. 심장신앙은 뜨겁습니다. 주님은 가슴신앙, 심장신앙을 원하십니다. 마음도 없는 입술신앙은 하나님이 원하지 않으시고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해 있고, 뜨거운 심장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심장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때 우리의 심중에 기쁨과 감사와 찬양이 가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을 어디에 두고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가슴으로, 심장으로 주님을 사랑하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말씀보다 형식을 중히 여김
종교는 의식도 중요하고 그에 비례해 내용도 중요합니다. 의식이 없는 내용은 경박합니다. 반면에 내용이 없고 의식만 있으면 위선이 되고 형식적이 됩니다. 문제는 그들이 내용보다 의식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람들이 만든 전통과 의식에 더 관심이 많았습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난 것은 가톨릭이 성경보다 전통과 의식을 더 중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가톨릭에는 복음 진리는 없고 의식만 남았습니다. 알맹이는 없고 껍데기만 남았습니다. 이때 마르틴 루터가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의식을 버리고 순수하게 본질로 돌아가자. 순수 복음 진리로 돌아가자. 즉 ‘오직 믿음’( Sola Fide ), ‘오직 성경’( Sola Scripture ), ‘오직 은혜’( Sola Gratia ), ‘오직 하나님께 영광’( Sola Deo Gloria )으로 돌아가자”고 하며 일어선 것이 종교개혁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전통을 지키고자 하나님의 계명을 버린 구체적인 예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출 20:12상)고 하셨습니다. 이 계명은 누구도 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의 유익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폐했습니다. 당시에 ‘고르반’이라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이는 ‘예물’이란 뜻으로, 하나님께 드린 것을 사람이 개인적인 용도로 쓸 수 없도록 한 서약 양식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그 어떤 것보다 높이고 절대적으로 섬기는 데서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를 악용해 부모님을 부양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이로써 그들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폐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어떤 것보다도 우선되어야 하며 우리가 경외심을 가지고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는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사람들의 칭찬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신앙의 기초를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내려야 합니다. 말씀이 우리 삶의 규범이 되고, 말씀이 우리의 의식 세계와 무의식 세계를 지배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을 생활화해야 합니다.
사람을 더럽게 하는 근원은 마음
예수님은 무리를 다시 불러 말씀을 환기시키셨습니다.
“무리를 다시 불러 이르시되 너희는 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하시고”(막 7:14-16).
예수님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음식이 마음으로 들어가지 않고 배에 들어가 뒤로 나가기 때문입니다. 우리 몸에 더러운 것이 들어가면 백혈구가 이물질과 싸웁니다. 그래서 이물질을 정화시킵니다. 그래도 안 되면 설사를 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비록 몸에 좋지 않은 음식물이 혹 들어갔다 할지라도 사람의 마음을 더럽게 하지는 못합니다. 모든 식물은 하나님이 선하게 창조하신 것이기 때문에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딤전 4:3-4). 예수님은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무리를 떠나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 때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그 하신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 물었습니다(막 7:17). 이에 예수님은 제자들이 가식적인 종교지도자들의 악영향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 자세하게 풀어서 말씀하셨습니다.
“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막 7:20-23).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열두 가지 악들을 열거하셨습니다. 이런 것들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관계입니다. 그래서 게리 스몰리는 「관계 DNA」에서 “인생은 관계이고, 나머지 모든 것은 부수적인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카네기는 「인간관계론」에서 15%는 자기 실력이고 85%는 인간관계라고 했습니다. 이만큼 인간관계는 중요합니다.
십계명 중에 제1계명에서 제4계명까지는 하나님과의 관계이고, 제5계명은 제6계명부터 제10계명까지의 원론이고, 제6계명부터 제10계명은 한마디로 인간관계에 관한 말씀입니다. 열두 가지 악들은 모두가 십계명 중에 속해 있습니다. ‘살인’, ‘질투’, ‘비방’, ‘악독’, ‘교만’, ‘우매함’은 제6계명에 속한 것입니다. ‘질투’는 시기심을 말하고, ‘비방’은 남을 헐뜯고 남의 일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악독’은 악에 대한 일반적인 용어이며, ‘교만’은 다른 사람보다 자신을 높여서 타인을 경멸하는 것입니다. ‘우매함’은 도덕적, 영적 무감각을 의미하는 어리석음을 말합니다.
‘음란’, ‘간음’, ‘음탕’은 제7계명에 속합니다. ‘음란’은 여러 종류의 부정한 성적 행위를 말하고, ‘간음’은 결혼한 사람의 부정한 성적 관계를 의미하며, ‘음탕’은 공공연한 비도덕적인 행위를 뜻합니다. ‘도둑질’은 제8계명, ‘속임’은 제9계명, ‘탐욕’은 제10계명에 각각 속합니다. 이런 악들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로, 손을 씻는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중요한 진리를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 사람을 더럽게 하는 근원은 마음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되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그 내면이 거룩하고 아름답고 순결하고 고결하게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하얀 백지와 같이 깨끗하고 순결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며 무한한 기쁨과 자유와 행복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말씀에 불순종하게 되자 마음이 부패해졌습니다. 마음에 교만, 의심, 불신, 탐욕 등 온갖 죄 균(菌)이 서식해 더러워졌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점점 멀어져 선을 사모하고 의를 행하기보다 악을 찾고 불의를 행하기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 6:5).
인간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은 항상 악했습니다. 그들은 지고의 선이신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하나님 없이 살고자 했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대로 행했습니다. 노아 시대에는 음란과 강포와 부패가 온 땅에 충만해 마침내 하나님이 홍수로 멸하시지 않으면 안 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창 6:3, 11-13). 마음이 바르고 깨끗해야 행동이 바르게 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눅 16:15).
다윗은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 하는 자가 얼마나 부패한가를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시 14:1-3).
인간의 본성은 동물보다 더 탐욕스럽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탐욕스러운지, 학은 위의 80%를 채우고, 돼지는 100% 채우고, 사람은 120%를 채운다고 합니다. 그래서 바다는 메울 수 있지만 사람의 욕망의 바다는 누구도 메울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이 욕망의 바다로 빠져들게 되면 그 누구도 미혹되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고 했습니다(렘 17:9). 이처럼 인간의 마음은 악합니다.
둘째, 사람의 마음을 정결하게 할 수 있는 예수님의 피
사람에게는 육신의 소욕대로 살고자 하는 욕망이 있는 반면에 의롭고 순결한 인생을 살고자 하는 거룩한 소원도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거룩한 소원과 육신대로 살고자 하는 소욕 간의 갈등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거룩한 소원이 죄의 소욕에 완패를 당한다는 것입니다(롬 7:18, 22-23). 사람이 죄의 소욕에 완패를 당하게 되면 양심의 고통으로 인해 죄 씻음 받고자 노력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자선사업과 같은 선한 일을 통해 죄를 상쇄해 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고행으로 죄의 대가를 치르고자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일에 몰두해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자 합니다. 어떤 사람은 멀리 이민을 떠나 잊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 어떤 노력으로도 우리의 마음을 깨끗하게 할 수 없습니다. 울어도 안 됩니다. 머리를 쥐어뜯어도 안 됩니다. 이는 우리의 죄가 너무 지독해서 피 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기 때문입니다(히 9:22). 그래서 구약 시대에는 물건을 정결하게 할 때나 부정한 자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는 반드시 짐승의 피를 뿌렸습니다. 짐승의 피는 그 효과가 일시적이고 온전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인간을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시어 하나님의 제단에 자신의 피를 뿌리심으로 온전하고도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습니다(히 9:12).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히 9:13-14).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만이 죄로 더러워진 마음을 흰 눈같이 정결하게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만이 조상이 물려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벧전 1:18-19).
셋째, 마음을 굳게 지켜야 함
신앙생활이란 정욕과 욕심과 유혹으로부터 마음을 지키고 다스리는 것입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언 16:32).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고 지킬 수 있습니까?
첫째로, 우리의 마음을 말씀으로 채워야 합니다. 마음은 빈 항아리와 같아서 무엇인가로 채워야 합니다.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과 의와 거룩함과 사랑으로 채워야 합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라고 고백했습니다(시 119:9).
둘째로, 영의 생각을 해야 합니다. 생각은 사상을 가져오고 사상은 문화를 만들고 창달합니다. 이처럼 생각은 중요합니다. 무엇을 생각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이 달라집니다. 따라서 생각이 자유라고 해서 함부로 해서는 안 됩니다. 육신의 생각은 인생을 파멸로 이끕니다. 그러나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입니다(롬 8:6). 그러기 위해서는 기도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됩니다.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영의 생각을 하게 하는 귀한 자리입니다.
마음이 청결해야 바른 삶을 살게 됩니다. 마음이 청결하기 위해서는 주님의 보배로운 피로 죄 씻음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버리고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말씀과 기도의 자리를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 십자가에 흘린 피로써 그대는 씻기어 있는가 더러운 죄 회개하는 능력을 그대는 참 의지하는가 예수의 보혈로 그대는 씻기어 있는가 마음 속의 여러 가지 죄악이 깨끗이 씻기어 있는가♬(새찬송가 259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