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마가복음 8:27-38 예수님은 누구신가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막 8:29). 마가복음 1-8장까지는 전반부, 9장부터는 후반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반부에는 ‘예수님은 누구신가’(Who is Jesus), 즉 예수님의 인격에 대한 말씀이고, 후반부인 마가복음 9-16장까지는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는가’(What has Jesus done), 즉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말씀입니다. 본문은 마가복음 전반부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기초가 튼튼해야 합니다. 기초를 소홀히 하면 나중에 큰 낭패를 당하게 됩니다. 이 원칙은 신앙에도 적용됩니다. 신앙의 기초를 튼튼하게 하지 않으면 그 후의 모든 신앙생활이 허사가 됩니다.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기초 중의 기초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이 이 기초 위에 건축되었습니다. 창세기 1장 1절은 신앙의 초석입니다. 그리고 신앙의 기본은 “예수님은 나의 그리스도”라는 고백입니다. 이 신앙고백은 신자의 기초요, 기본이요, 본질입니다. 요즈음 기본에 충실하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이는 신앙의 기본 초석인 “예수님은 나의 그리스도”라는 고백을 날마다 새롭게 하라는 말입니다. 교회를 열심히 다니고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한 그 기초 위에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자기 열심으로 하는 봉사와 헌신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기쁘게 하는 인본주의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신앙생활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받아주지 않습니다. 본문은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예수님을 따르는 자세에 대한 말씀입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해 영생을 얻고 예수님의 제자의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주는 그리스도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빌립보 가이사랴 여러 마을로 가셨습니다. 이 지방은 헬몬 산으로부터 흘러내려오는 풍부한 수자원으로 인해 헬라와 로마 양대 시대에 걸쳐 많은 신전이 지어진 곳입니다. 특히 이곳은 이름이 말해 주듯이 로마 황제 가이사를 주로 고백하는 도시입니다. 그리고 상체는 사람이고 하체는 염소인 판 신을 섬기는 판신전이 있는 지역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우상의 도시에서 갈릴리를 중심으로 제자들에게 한 학기 교육을 마치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기 직전 이곳에서 제자들에게 기말시험을 보셨습니다. 시험 문제는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입니다. 이 질문은 단순히 지적인 내용을 묻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인격을 묻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격을 아는 것은 영생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예수님에 대한 바른 지식, 바른 신앙은 구원과 심판, 영생과 영벌을 결정짓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단들은 모두가 기독론에 문제가 있습니다. 기독론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구원론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당시 영지주의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해 그들은 금욕적이고 쾌락적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대할 때는 어떤 예수님을 믿는가를 분별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3년 반 동안 가르치시고 나서 제자들에게 물으신 질문은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예수님이 무엇을 가르치셨느냐는 물음보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하는 물음이 훨씬 중요합니다. 모든 종교는 그 종교의 교리와 교훈들을 훨씬 중요하게 여기지만 기독교는 예수님의 가르침보다 예수님이 더 중요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 그러면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견해는 어떠합니까? “제자들이 여짜와 이르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막 8:28). 예수님께 대한 사람들의 견해는 대체로 긍정적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례 요한이나 구약의 대표적인 선지자인 엘리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선지자 중의 한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예수님을 위대한 인물 중 한 사람으로 보게 되면 그분이 존경과 흠모의 대상은 되실 수 있지만 찬양과 경배의 대상은 되실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견해를 다 들으시고 나서 제자들의 심중을 물으셨습니다.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막 8:29상). 그러자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막 8:29하). 베드로의 대답은 짧지만 정확했습니다. ‘그리스도’란 ‘기름 부으심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제사장과 왕, 그리고 선지자를 세울 때 기름을 머리에 부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것은 예수님은 제사장이시요, 왕이시요, 선지자시라고 말한 것입니다. 대제사장의 역할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요, 왕의 역할은 통치자요, 선지자의 역할은 하나님의 말씀의 대언자입니다. 그러면 베드로가 고백한 신앙고백이 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10). 우리가 예수님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할 때 죄로부터 구원받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또 이 고백은 신랑 되신 예수님께 대한 사랑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신랑’, 성도를 ‘신부’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신랑 되신 예수님은 거룩하고 영화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거룩하신 예수님의 신부가 되려면 우리 자신이 순결하고 거룩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내면은 죄로 인해 더럽고 추합니다. 프랑스 사상가인 라메네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세 가지 유혹이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거칠고 강렬한 육체적인 욕망이고, 둘째는 스스로 높이고자 하는 교만이며, 셋째는 격렬하고 불순한 이기심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요일 2:16중)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나란 존재는 거룩이라는 단어와는 너무나 먼 존재입니다. 나란 존재는 정욕과 자기 자랑과 교만과 이기적인 욕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런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순간, 십자가의 보혈로 죄 씻음 받고 정결한 그리스도의 신부가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격이 안 되고 수준이 미달이어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막 8:31). 예수님은 자신이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이 그리스도로서 반드시 겪어야 할 과정임을 강조하셨습니다. 왜 예수님이 이처럼 많은 고난을 받으시고, 버린 바 되시고, 죽임을 당하시고, 부활하셔야만 합니까? 이는 인간의 근본 문제인 죄와 죽음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시기 위함입니다. 사람들은 많은 문제를 안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인간의 심각하고 근본적인 문제는 바로 죄 문제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죄에서 헤어나올 수 없습니다. 이로 인해 인간은 죄의 세력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죄의 세력은 거룩하게 살고자 하는 우리의 양심을 파괴시키고 원하지 않게 우리를 동물만도 못한 자로 전락시킵니다. 죄의 세력은 너무 강해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면 칠수록 더 깊은 죄의 늪으로 빠져들게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죄를 미워하면서도 계속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즐기고, 강렬한 육체적 욕망, 높아지고자 하는 교만, 격렬하고 불순한 이기심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죄를 지으면 죄의식으로 괴로워합니다. 사람들은 죄의식을 잊고자 술을 마시고 노래방에서 춤추며 노래를 부릅니다. 게임에 몰두하기도 하고 여행을 다니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하루에 12시간씩 잠을 자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한다고 해서 죄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죄는 시간이 간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죄는 환경과 조건을 개선한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스스로 합리화하고 덮어둔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쁜 기억들을 다 지워버리고 좋은 추억들로 간직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런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죄로부터 구원할 메시아를 보내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죄의 대가는 죽음, 곧 피입니다.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 구약 시대에는 죄를 정결하게 하기 위해 양이나 염소 등 동물을 잡아 피를 흘렸습니다. 그런데 이는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속죄를 위한 예표입니다. 그 효과는 일시적이요, 제한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죄를 지을 때마다 양을 계속 잡아 피 흘림의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때가 되자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심으로 속죄의 피를 흘리게 하셨습니다. 일찍이 이사야 선지자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당하실 수난을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5-6).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 마지막 만찬에서 제자들에게 자신이 십자가에서 흘릴 피의 의미를 분명히 가르쳐주셨습니다. “이르시되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막14:24). 예수님의 십자가는 대속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끝나지 않고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인류의 최대 원수는 죄와 사망입니다. 지금까지 사망은 모든 인류를 공동묘지로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우리의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12). 누구든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을 믿을 때 죄와 죽음으로부터 벗어나 거룩한 주님의 자녀가 됩니다. 신랑 되신 예수님의 순결한 신부가 됩니다. ♬내 마음에 주를 향한 사랑이 나의 말엔 주가 주신 진리로 나의 눈에 주의 눈물 채워주소서 내 입술에 찬양의 향기가 두 손에는 주를 닮은 섬김이 나의 삶에 주의 흔적 남게 하소서 하나님의 사랑이 영원히 함께하리 십자가의 길을 걷는 자에게 순교자의 삶을 사는 이에게 조롱하는 소리와 세상 유혹 속에도 주의 순결한 신부가 되리라 내 생명 주님께 드리리♬(복음성가). 그런데 사람들은 “왜 꼭 예수님만이 유일한 그리스도신가? 다른 것도 구원자가 될 수 있지 않는가?” 하고 격하게 반응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 외에도 구원자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물질과 명예, 그리고 권세와 쾌락을 구원자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죽을 줄도 모르고 불에 뛰어드는 불나방같이 물질과 명예와 권세와 쾌락을 좇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세상이 뒤집어져도 사랑하는 사람만 옆에 있어준다면 그 사랑이 자신을 영원히 구원할 줄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랑에 미쳐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우리의 그리스도가 될 수 없습니다. 돈과 명예, 그리고 쾌락과 권력은 순간적인 기쁨과 편안함을 줄 수는 있지만 결코 참 만족과 행복을 주지는 못합니다. 특히 돈은 우리에게 편안한 생활을 제공해 주지만 평안을 주지는 못합니다. 이것이 돈이 가져다주는 한계입니다. 2009년 건강의날을 맞아 실시한 정신건강에 대해 조사에 의하면, 날이 갈수록 우울증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특히 십 대 여성들 가운데 우울증이 빠르게 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지역별로는 서울이 77만 건, 경기도가 60만 건으로 높게 나타났습니다. 서울과 경기권에 우울증 환자가 많다는 것은 무엇을 보여줍니까? 물질만능이 결코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물질이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것은 거짓 그리스도입니다. 한때 사람들은 공산주의를 유일한 구원자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자본주의를 구원자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공산주의 사상은 폐품이 되었고, 자본주의도 우리의 구원자가 될 수 없음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예수님만이 나의 유일한 구원자이시요, 나의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유일한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 예수님은 베드로라는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울 것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 위에 교회를 세울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신앙고백 위에 세워질 교회가 ‘내 교회’, 곧 ‘예수님의 교회’라고 하셨습니다. ‘교회’란 헬라어로 ‘에클레시아’(ἐκκλησια)인데, 이는 ‘∼으로부터’(^ek^)와 ‘부르다’(^caleo^)의 합성어입니다. 이는 세상으로부터 하나님의 나라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의 모임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음부의 권세가 교회를 이기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음부의 권세’란 죽음의 권세, 사망의 권세,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들입니다(히 2:14). 음부의 권세는 처음부터 교회가 세워지는 것을 막으려고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음부의 권세는 결코 교회를 이길 수 없습니다. 세상 나라는 부침(浮沈)이 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는 영원무궁합니다. 하나님은 친히 교회를 세우시고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이루어가십니다.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 예수님이 드러내 놓고 고난받으실 것과 십자가에 관한 말씀을 하시자 베드로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는 이런 일이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된다며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베드로를 보시고 꾸짖으셨습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막 8:33). 예수님은 베드로의 말속에 사탄의 유혹이 들어 있음을 아시고 단호하게 이를 물리치셨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책망하신 내용은 곧 그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의 일’이란 사람이 항상 추구하는 것으로서 좀 더 쉽게, 좀 더 편하게, 고난을 덜 받으면서 좀 더 영광을 누리고자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인간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자연스러운 생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생각을 하는 베드로를 보시고는 사탄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리고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예수님을 따르는 자가 가져야 할 기본자세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 8:34). 첫째, 자기 부인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내 생각과 주님의 생각이 다를 수 있습니다. 내 뜻과 주님의 뜻이 충돌할 때가 있습니다. 이때 사람들은 자기 생각을 앞세웁니다. 자기 뜻을 앞세웁니다. 자기 고집을 앞세웁니다. 그러나 신앙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앞세우고, 주님의 뜻을 앞세우고, 주님의 생각을 앞세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자기 뜻을 부인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시고 순종하셨습니다. 이러한 자세가 자기 부인입니다.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막 14:36). 둘째, 자기 십자가 사람에게는 모두 자기 십자가가 있습니다. 부모로서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학생으로서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직장인으로서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게 되면 예수님을 믿는 이로서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십자가는 고난입니다. 십자가는 주님이 가신 고난의 길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험난합니다. 희생의 길입니다. 그러나 이 길은 영광의 길, 생명의 길입니다. 영광은 고난을 통해서만 옵니다. 이 사상은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적극적으로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십자가를 사랑해야 합니다. 십자가에 구원이 있습니다.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 8:35). 사람의 목숨은 온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소중하고 고귀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생명에 대해 애착이 강합니다. 세상을 거꾸로 매달려 살아도 어찌하든지 살고자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이 안 죽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에는 다 죽습니다. 우리는 결국 죽을 생명을 가지고 살기 위해 발버둥 쳐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목적대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단 한 번밖에 없는 고귀한 생명을 주신 목적은 생명 그 자체를 보호하고 보존하라는 의미에서가 아닙니다. 생명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생육하고 번성해 많은 열매를 맺으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생명이 한 알의 밀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자기 생명을 보존하고자 자기를 위해 사는 자는 자기 생명을 잃게 되고 아무 열매도 맺을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한 번밖에 없는 고귀한 목숨을 주와 복음 역사를 위해 사용하는 자는 자기 생명을 보존하게 되고, 또 그 과정에서 많은 열매를 맺고 영생을 얻게 됩니다. 세상은 음란합니다. 죄가 팽배해 있습니다. 십자가의 길을 조롱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부끄러워하기 쉽습니다(막 8:38).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부끄러워하게 되면 장차 예수님이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오실 때 우리가 부끄러움을 당하게 됩니다. 우리가 주와 복음을 위해 살 때 주님은 우리를 기억하시고 우리를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유일한 생명의 구주요, 참 경배의 대상이십니다. 예수님이 이 시간 조용히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우리는 확신 있게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끝까지 따라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