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마가복음 9:14-29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막 9:23).
고든 맥도날드는 「내면세계의 질서와 영적 성장」에서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형태를 두 가지로 나누었습니다. ‘충동에 이끌리는 삶’(driven life)과 ‘소명에 이끌리는 삶’(calling life)입니다. 충동에 이끌려 살아가는 사람은 매사 일을 그르치게 되고, 상처를 주고받게 되고, 반드시 낭패를 당하게 된다고 합니다. 반면에 소명에 이끌려 살아가는 사람은 무엇을 먼저 해야 할 것인가를 알고,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비전을 알며, 하나님 나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는 것을 안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말을 경청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말에 좌우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생각과 뜻보다 하나님의 뜻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께 기도해 하나님의 뜻을 찾아 확인하고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간다고 합니다.
일에 쫓겨 사는 사람은 여유가 없고 늘 조급해 삶에 질서가 없고 충동에 이끌려 살아갑니다. 그러나 소명에 이끌려 살아가는 사람은 바쁜 중에도 여유가 있고 질서 있는 삶을 살아갑니다. 이런 삶을 만들어주는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는 낭비가 아니라 확실한 투자이고 가장 지혜로운 일입니다.
본문은 변화산 사건과 대조됩니다. 라파엘은 변화산의 영광스러운 예수님의 광경과 산 아래의 참경을 대조적으로 화폭에 담았습니다. 변화산에는 영광과 거룩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산 아래는 치욕과 슬픔과 낙심으로 가득합니다. 이는 믿음이 없고 기도하지 않는 세대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통해 믿음의 기도를 하는 사람에게, 믿음의 기도를 드리는 곳에, 믿음의 기도를 드리는 그 시간에 능력을 나타내시는 주님을 배울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여
예수님은 세 명의 제자들과 함께 올라가신 변화 산에서 무리와 제자들이 기다리고 있는 산 아래로 내려오셨습니다. 이때 아홉 명의 제자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비지땀을 뻘뻘 흘리며 서기관들과 변론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말 못하게 귀신 들린 어린아이를 고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를 본 서기관들은 기회를 잡았다는 듯이 조롱하며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너희가 무슨 권세로 귀신을 내쫓아!” 이때 제자들은 뒤질세라 열변을 토하며 변론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변론을 경계합니다.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딤후 2:23).
변론은 자기를 광내고, 자신의 무능력과 잘못을 합리화하고자 하는 데서 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오직 능력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전 4:20).
제자들이 서기관들과 침을 튀기며 변론할 때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무리들은 예수님의 얼굴에서 거룩함과 영광을 보고 심히 놀라며 인사했습니다. 또 제자들은 한참 몰리고 있는 상황에서 예수님이 오시니 참으로 반가웠습니다. 이에 무리 중 하나가 예수님께 나아와 딱한 사정을 호소했습니다.
“무리 중의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말 못하게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나이다 귀신이 아디서든지 그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해지는지라 내가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내쫓아달라 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막 9:17-18).
그러면 제자들이 왜 아이를 고치지 못했을까요? 그들은 귀신을 내쫓고 병자를 고친 적이 있었습니다(막 6:7-13). 그들의 능력의 소식이 헤롯 궁에까지 들어가 헤롯이 두려움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그런 능력을 행한 그들이 왜 이번에는 고치지 못하고 쩔쩔매고 있었을까요? 이는 귀신 들린 어린아이를 고치고자 하는 동기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목자의 심정보다 자기 광을 내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순수한 마음으로 그를 돕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동기와 목적이 순수할 때 능력을 행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은 과거의 경험을 의지했기 때문에 고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인간의 역사가 아니라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위로부터 능력이 임해야 합니다. 그들은 처음 전도여행을 할 때는 오직 예수님만을 의지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예수님보다 경험을 의지했습니다. 자신의 머리와 지혜를 의지했습니다. 그때 두 명이 합심해 큰일을 행했던 그들이 아홉 명이 합심해도 귀신 하나조차 내쫓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과거에 큰일을 행했어도 현재 믿음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붕어빵을 만드는 기계처럼 능력을 복제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현재의 산 믿음을 통해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의 문제보다 믿음이 없는 세대를 보시고 탄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고 하셨습니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막 9:19).
‘믿음이 없다’(απιστος)란 믿음이 고갈되어 믿음이 전혀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세대’란 동시대에 사는 모두를 포함합니다. 제자들과 서기관들, 아이와 아이의 아버지, 그리고 무리들을 포함합니다. 특히 서기관들과 제자들을 가리킵니다. 서기관들은 그 시대의 양심의 상징이요, 시대의 목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그들을 보시고 믿음이 없음을 책망하셨습니다.
믿음이란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만물에 대한 바른 자세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바른 자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명령을 기뻐하며 순종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말씀을 따라 살아갑니다. 또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뢰하며 살아갑니다. 재물과 소산물을 주와 복음 역사와 어려운 이웃을 위해 사용합니다. 그리고 인간에 대한 바른 자세는 서로 사랑하는 것이고, 만물에 대한 바른 자세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창조질서 속에서 다스리는 것입니다. 이 질서를 지키는 것이 믿음입니다.
오늘의 사회가 왜 이처럼 윤리와 도덕이 붕괴되었습니까? 오늘날 가정과 사회가 왜 이처럼 흔들리고 있습니까? 이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는 죄악이 가득합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는 슬픔과 절망이 곳곳에 산재되어 있습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는 절대적인 가치관이 붕괴되어 혼돈과 공허와 어두움이 가득합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는 악령이 판을 칩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는 소돔과 고모라와 같이 성도덕이 타락해 동성연애가 성행합니다.
그러면 병든 사람과 병든 사회를 어떻게 치료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로 돌아와 믿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야 합니다. 내면에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과 거룩함이 임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이때 바른 가정, 바른 사회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있습니까? 혹시 믿음의 흉내만 내는 것은 아닙니까? 믿음이 없는 이 세대가 믿음을 소유함으로 하나님과의 바른 자세, 인간과 인간과의 바른 자세, 만물과의 바른 자세를 갖기를 기도합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아버지가 예수님께 아이를 데리고 오자 귀신은 더 발작해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엎드러져 구르며 거품을 흘리게 했습니다(막 9:20). 이때 아버지는 예수님께 데리고 와도 소용이 없구나 하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예수님은 아버지에게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는가 물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죽어가고 있는 이 아이가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는가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장 시급한 것은 아이가 빨리 고침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고 물으셨기 때문에 이에 대해 답하려면 한참 걸리게 됩니다. 그러면 이 아이의 문제는 종 치고 막 내리게 됩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이 아이의 상황에 대해 자세히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몰라서 물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아버지와 관계성을 맺고자 하심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보실 때 아이의 병도 병이지만 아버지의 믿음을 돕는 것 또한 중요했습니다. 이때 아버지가 예수님께 대답했습니다.
“이르되 어릴 때부터니이다 귀신이 그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막 9:21하-22).
귀신의 목적은 죽이고 파괴하는 것입니다. 귀신은 인간성을 파괴하고 영과 육을 파괴합니다. 귀신은 고귀한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합니다. 아버지가 예수님의 질문에 대답을 하다 보니 예수님과의 관계성이 형성되었습니다. 그러자 아이의 아버지가 예수님께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께 전제를 붙였습니다.
아버지는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이라는 가정법을 사용해 제자들과 같이 고치실 수 없으면 그만두시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괜히 고친다고 하셨다가 못 고치시면 창피만 당하실 수 있으니 아예 처음부터 그만두시라는 것이었습니다. 반면에 고치실 수 있으면 한번 고쳐보시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믿음이 좋고 겸손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는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를 어떻게 도우셨습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막 9:23).
예수님은 그의 불신을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불신을 가장 미워하십니다. 예수님은 믿음 없음을 가장 슬퍼하십니다. 반면에 믿음이 있는 자들을 기뻐하십니다. 불신은 가장 큰 죄입니다. 불신은 도덕적인 죄보다 더 큰 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실패한다고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눈에 보이는 업적을 따라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불신을 책망하십니다. 예수님께는 가정이 없습니다. 예수님께는 조건이 붙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는 부정이 없습니다. 예수님께는 늘 긍정과 가능성만이 존재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믿음은 모든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듭니다. 믿음은 현재의 상황이 문제 되지 않습니다. 믿음은 현재의 역경을 디디고 일어서게 합니다. 믿음은 어떤 절망도 극복하게 합니다. 믿음은 자신의 지혜와 능력으로 할 수 없는 것을 하게 합니다. 믿음은 연약함과 한계를 극복하게 합니다. 믿음은 불가능에 도전하게 합니다.
우리는 현실 상황이라는 복병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현실 상황이 문제 되지 않습니다. 믿음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믿음은 주님의 뜻과 일치된 믿음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100% 온전한 믿음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온전하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면 그렇게 된다고 하셨습니다(눅 17:6). 우리에게 우주만 한 믿음이 있다 할지라도 1%의 불신이 있으면 아무런 일도 행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겨자씨만 한 믿음이라도 온전한 믿음을 원하십니다.
우리는 내 힘과 내 지혜와 열정과 젊음을 가지고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살다 보면 나의 힘과 능력과 지혜로 할 수 없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특히나 영적 세계는 더욱더 그러합니다. 우리의 지혜는 한계가 있습니다. 나의 힘은 한계가 있습니다. 나의 능력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온전한 믿음을 소유할 때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서 큰일을 행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고자 할 때 싸워야 할 대적은 의심입니다. 믿음이란 의심과 싸우는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약 1:6-8).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막 11:22-23).
기도 외에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책망을 들은 아이의 아버지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하더라”(막 9:24).
아버지가 소리를 질렀다는 것은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전심으로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는 절박한 심정으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절박한 심정으로 드리는 기도에 응답해 주십니다. 예레미야서는 이렇게 말하십니다.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렘 29:13).
엘리야가 갈멜 산에서 절박한 심정으로, 전심으로 하나님께 기도했을 때 하나님이 불을 내려주셨습니다(왕상 18:36-37, 42). 우리에게 절박한 기도제목이 있다면 전심으로 기도하면 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절박한 기도를 들으시고 아이에게서 귀신을 내쫓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집에 들어가시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는가를 조용히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대답하셨습니다.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막 9:29).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이를 고치지 못한 원인은 기도하지 않은 데 있음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기도란 예수님을 의지하는 믿음의 표현이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의 표현입니다. 기도는 믿음을 지속시킬 수 있고 모든 불신과 부정, 운명적인 생각과 죄의 소욕을 이길 수 있습니다.
「무릎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의 저자인 무명의 그리스도인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하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데 대해 놀라지 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기도하지 않는 이유가 “아마 그들이 기도 응답을 한 번도 체험해 보지 못했거나 그런 것을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기도 응답을 체험하면 계속 기도하게 됩니다. 따라서 기도의 응답을 체험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기도 응답의 체험은 신앙생활의 핵심으로 들어가는 출발점이요, 우리의 믿음을 건강하게 세우는 중요한 열쇠입니다. 우리가 자주 패배하는 이유는 기도를 너무 적게 하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세상을 움직이는 하나님의 손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같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은 아이를 고치지 못한 이유를 묻는 제자들에게 믿음이 작은 까닭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7:20). 우리는 믿음이 작아 기도하지 않고, 기도하지 않아 우리 앞에 가로놓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며, 문제에 눌려 핍절한 삶을 살아갑니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는 믿음의 기도를 통해 우리 앞에 놓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믿음과 기도가 없는 세대는 죄와 귀신이 득세합니다. 기도와 믿음이 없는 세대는 혼돈과 어두움이 가득합니다. 이런 곳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기도를 하는 사람에게, 믿음의 기도를 드리는 곳에, 믿음의 기도를 드리는 그 시간에 그분의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우리 모두가 믿음이 없는 불신의 시대에 믿음의 기도를 드려 기도의 응답을 받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