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마가복음 9:30-37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막 9:35).
맹사성은 19세에 장원급제해 20세에 군수영감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젊은 맹사성이 나이 많은 선비를 찾아가 물었습니다. “어른께서는 군수가 삼아야 할 좌우명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선비가 대답했습니다. “그건 어렵지 않습니다. 나쁜 일을 하지 않고 착한 일을 많이 베푸는 일입니다.” 맹사성은 “그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이치가 아닙니까? 먼 길을 걸어 찾아왔는데 제게 고작 그 말씀을 하시다니요?” 하며 거만하게 일어섰습니다. 선비는 차 한 잔을 빌미로 맹사성을 붙잡았습니다. 맹사성이 자리에 앉자 선비는 차를 따랐습니다. 선비는 찻잔이 넘치는데도 차를 따라 상이 넘치고 방바닥을 적셨습니다. 맹사성이 선비를 향해 소리쳤습니다. “어르신, 지금 찻물이 넘쳐 방바닥을 적시고 있습니다!” 맹사성이 소리쳤지만 선비는 계속 찻물을 따랐습니다. 선비는 화가 난 맹사성을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군수영감, 찻물이 넘쳐 방바닥을 적시고 있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어찌하여 지식이 넘쳐 인품을 망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습니까?”
사람이 많이 안다고 해서 인품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것을 가졌다고 해서 삶이 넉넉한 것은 아닙니다. 높은 지위에 올랐다고 해서 행복한 것은 더욱더 아닙니다. 따라서 조금 안다고, 조금 높아졌다고, 조금 가졌다고, 조금 배웠다고 우월감에 젖으면 안 됩니다. 이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런 어리석은 실수를 반복합니다. 세상은 자기를 자랑하는 교만한 사람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말할 것도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사람을 아주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은 겸손하고 섬기는 사람을 좋아하십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가 섬김의 자리에 서는 겸손한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십자가를 가르치신 예수님
예수님은 말 못하게 귀신 들린 어린아이를 고쳐주신 후 그곳을 떠나 갈릴리 가운데로 지나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목적지로 해 비장한 모습으로 이곳을 지나가셨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으셨습니다. 이는 제자들을 집중적으로 가르치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내용이 무엇입니까?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더라”(막 9:31).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의 진리를 반복해서 가르치셨습니다(막 8:31, 9:9-13). 예수님은 또다시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의 진리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왜 계속해서 제자들에게 십자가와 부활을 말씀하셨을까요? 이것이야말로 복음의 핵심이요, 구원과 생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십자가의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했습니다. 마태복음에는 제자들이 매우 근심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마 17:23).
예수님은 변화 산 위에서 영광을 체험한 후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를 향해 걸으시면서 자신이 져야 할 십자가를 생각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전혀 딴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왕이 되실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기들이 한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다고 자주 말씀하시니 제자들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예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십자가의 의미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21장 23절을 보면,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당시 십자가형은 가장 참혹한 형벌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이렇게 비참하게 돌아가신다는 것을 상상하기조차 싫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그것을 영접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입니다(고전 1:18, 24). 그리고 복음에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있습니다(롬 1:16). 십자가는 미움을 사랑으로, 분열을 통합으로, 갈등을 화해로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존 뉴턴은 노예를 파는 선장이었습니다. 그는 십자가의 도를 영접한 후 변화를 받아 생명을 살리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변하여 새사람이 된 후에 그 은혜가 너무나 놀랍고 감격스러워 이렇게 찬양했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Amazing grace how sweet the sound! That saved a wretch like me! I once was lost, but now am found, Was blind, but now I see]♬(새찬송가 305장).
아무도, 그 어느 사상도 그를 변화시킬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로 하여금 변하여 새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십자가는 변화의 능력이 있습니다.
첫째가 되는 길을 가르쳐주신 예수님
예수님은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 때 제자들에게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질문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이는 길에서 누가 크냐는 문제로 쟁론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길에서까지 누가 크냐를 가지고 쟁론한 것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도착하시자마자 당장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었습니다(눅 19:11).
그들은 예수님이 내각 편성을 하실 때 누가 높은 자리를 차지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신경이 날카로워졌습니다. 특히 예수님이 세 명의 제자들만 데리고 변화 산에 올라가신 사건은 그들 간의 경쟁심을 더욱 유발시켰습니다. 제자들은 세 제자와 아홉 제자로 나뉘어 다투었고, 또 세 제자들 간에도 치열한 헤게모니 쟁탈전이 벌어졌습니다. 제자들은 모두가 자기가 가장 높은 자리에 앉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들은 아무도 둘째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사는 곳에는 언제나, 어디나 ‘누가 크냐?’의 문제가 대두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는 항상 권력 다툼이 생깁니다. 앨빈 토플러는 「권력 이동」에서 “권력은 모든 사회제도와 모든 인간관계에 고유한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세상은 서로 헤게모니를 잡기 위해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합니다. 제가 아는 한 사람은 어느 선교기관의 장이 되고자 갖은 권모술수를 다 썼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장이 되지 못했습니다. 이런 문제는 거지 사회에서도 일어납니다. 거지 대장이 되고자 치열한 암투가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누가 크냐?’는 문제 때문에 공동체 내에 싸움과 분열이 일어나고 서로 원수가 됩니다. 예수님은 ‘누가 크냐?’ 하며 다투는 제자들에게 첫째가 되는 길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막 9:35).
예수님이 “첫째가 되고자 하면”이라고 하신 것을 보면 예수님은 첫째가 되는 것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원하고 계셨습니다. 또한 “누구든지”라고 하신 것을 보면 누구든지 첫째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어떻게 첫째가 되느냐입니다. 예수님은 세상과는 정반대로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첫째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첫째가 되는 길은 무엇입니까?
첫째, 섬기는 삶
야고보와 요한은 어머니를 내세우면서까지 예수님의 오른편에 누가 앉고, 왼편에는 누가 앉을 것이냐는 문제로 제자들과 치열하게 암투를 벌였습니다(막 10:37). 그런데 이것은 당시 제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 나의 문제요, 가정의 문제요, 교회와 사회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가정에서 부부간의 갈등, 고부간의 갈등, 부모와 자식 간의 갈등이나 다툼에 깊이 들어가 보면 결국 자리다툼입니다. 자리다툼은 거의 다 계급구조와 권력구조 속에서 나옵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대들 때 속상해합니다. 자녀들을 생각하는 마음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계급구조가 밑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네가 감히 부모에게! 감히 부모의 권위에 도전을 해!”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감히 대통령에게? 아니 어른에게? 선배에게? 감히 교수에게?”
우리 사회에 이런 계급의식과 권력구조가 저변에 깔려 있는 것은 유교문화의 영향 때문입니다. 유교문화의 특징 중 하나는 출세주의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출세를 등용문으로 생각하고 여기에 목숨을 겁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서열주의입니다. 사람들은 만나기만 하면 제일 먼저 “죄송하지만 연세가 어떻게 되십니까?” 하고 묻습니다. 일가친척을 만나면 “항렬이 어떻게 되십니까?” 하고 묻습니다. 젊은이들도 어른들을 닮아서 만나면 “몇 학번입니까?” 하고 묻습니다. 특히 해병대 출신들은 만나면 즉시 “몇 기입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래서 자기보다 학번이나 기수, 항렬이나 서열이 아래다 싶으면 그때부터 대하는 태도가 달라집니다.
이것이 교회 안에 그대로 들어와 교회의 직분을 하나의 계급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교회의 직분은 섬김받는 자리가 아니라 섬기는 봉사의 자리입니다. 주님은 누구든지 먼저 섬기라고 하셨습니다. 섬기는 자가 큰 자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섬김의 자리 맨 앞에 서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진정으로 큰 자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맨 앞의 섬김의 위치에 서는 사람입니다. 허리에 수건을 동이고 낮아져서 섬기는 사람입니다.
요즈음 ‘파괴’라는 용어를 많이 씁니다. 주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심으로 신분을 파괴하셨습니다. 주님은 직접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으로 체면 파괴, 서열 파괴, 자리 파괴를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속에 잠재되어 있는 우월의식과 계급의식, 그리고 서열의식을 파괴하고 섬김의 자리에 서야 합니다. 섬김의 자세가 되어 있지 않으면 주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겸손의 표본이십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겸손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예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시지만 사람의 모양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땅에 오시되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자의 모습으로 오시지 않고 섬기는 종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태어나실 때부터 사람이 거할 곳이 못 되는 말구유에서 나셨습니다. 그리고 죄인들을 겸손하게 섬겨주셨습니다. 부담스럽고 비천한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셨고, 고뇌하는 지성인 니고데모에게 밤이 맟도록 거듭남의 진리를 가르치셨습니다. 이기적인 세리 레위를 제자로 부르시고 함께하심으로 그의 깊은 내면의 상처를 치료해 주셨습니다. 세리와 창기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겸손한 분이시기 때문에 가장 위대하신 분이십니다. 섬기는 사람이 위대합니다. 그 사람의 위대성은 직책이나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섬김의 내면성에 있습니다.
요셉은 어디를 가든지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애굽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노예로 있을 때나 감옥의 죄수로 있을 때나 애굽의 총리가 되어 모든 국정을 다스릴 때도 섬겼습니다. 그는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다른 사람들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다른 사람들을 섬겼습니다. 그때 그는 모든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가 출옥할 때 죄수들이 자기들과 더 있어달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떠날 때 평가됩니다. 누군가 떠날 때 그 사람이 가서 시원하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면에 더 있어달라고 소매 자락을 붙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소매 자락을 붙들며 더 있어달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섬긴 사람입니다.
둘째, 이기심의 극복
우리의 섬김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이기심입니다. 자기 과시, 은근히 대접받고 싶어하는 것은 모두가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는 생각들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섬김은 자기를 과시하고자 하는 이기심을 깨고 궂은 일, 힘든 일, 얼굴이 드러나지 않는 일을 기쁨으로 하는 것입니다. 열심히 봉사하고도 욕을 듣는 것, 그것이 진짜 봉사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섬기셨고 봉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병자를 고쳐주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먹을 것을 주시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욕을 들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욕을 듣지 않을 만큼, 무시당하지 않을 만큼 섬기는 것은 진정한 섬김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섬기실 때 확실하게 섬기셨습니다. 마음도 섬김의 마음이요, 복장도 섬김의 복장을 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실 때 그렇게 하셨습니다. 만일 위치를 생각하시고, 자존심을 찾으시고, 자리를 생각하셨다면 어떻게 제자들의 냄새나는 발을 씻어주실 수 있었겠습니까? 섬김에는 반드시 자기 부인, 자기 포기, 내려놓음, 자기 죽음, 십자가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섬기시기 위해 십자가에 철저하게 죽으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밑에서 조롱하는 무리들, 창 들고 저 잘난 멋으로 사는 그들을 보시고 예수님은 저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눅 23:34상). 예수님은 끝까지 이기심을 깨고 저들을 섬기셨습니다. 섬기기 위해서는 이기심을 깨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린아이 하나를 제자들 중에 세우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막 9:37).
우리가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마음은 기쁠지 모르지만 당장 돌아오는 이익은 하나도 없습니다. 반면에 어떤 유명인사를 대접하면 자기 신분도 올라가고 자랑거리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이보다 유명인사 대접하기를 원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대접을 하면서도 그 밑바탕에 이기심이 깔려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유익을 따라 섬깁니다.
그러나 이것은 섬김이 아닙니다. 이름 모르는 한 사람을 대접하는 것, 조건 없는 섬김, 남이 나를 알아주든지 알아주지 않든지 상관없이 섬기는 삶이 진정한 섬김입니다. 그것이 순수한 봉사입니다. 인기 없고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에 손길을 뻗치는 섬김이 진정한 섬김입니다. 그때 나의 삶이 아름답게 됩니다.
우리는 섬김받고 인정받고 싶습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의 공통적인 모습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섬기는 사람이 위대하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내 안에 뿌리박고 있는 우월의식과 서열의식, 그리고 이기심을 버리고 섬김의 자리, 봉사의 자리로 가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처럼 늘 섬김의 사람, 겸손한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