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마가복음 9:38-50
소금을 두고 화목하라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막 9:50).
너무 흔해서 쉽게 접하게 되면 그 가치를 모르기 마련입니다. 그중 하나가 소금입니다. 소금은 우리 하루하루의 삶에서 결코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생필품입니다. 중국에서는 기원전 3,000년부터 소금을 생산해 냈습니다. 가장 오래된 소금 산지는 사천성 지방입니다. 이 지역 사람들은 이때부터 야채를 소금에 절인 음식을 즐겼습니다. 절인 야채가 훗날 ‘쓰촨’ 요리라는 중국의 대표 음식으로 발전했습니다.
소금으로 고기와 생선을 저장한 최초의 나라는 고대 이집트입니다. 그들은 소금을 이용해 미라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저장 기능과 방부제 역할 덕분에 소금은 서양에서 항구불변의 상징으로 통했습니다. 고대 로마는 병사들에게 급료로 소금을 주었습니다. 여기에서 ‘봉급’(salary), ‘병사’(soldier), ‘샐러드’(salad)가 나왔습니다. 이 단어들은 모두 ‘sal’(소금)이라는 라틴어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는 마태복음 5장 13절 말씀을 비롯해“소금 기둥”(창 19:26), “소금 언약”(민 18:19) 등 소금에 관한 이야기가 30여 곳 나옵니다. 소금은 음식의 맛을 내고, 또 음식물의 부패를 방지해 줍니다. 그리고 소금은 뻣뻣한 채소를 부드럽게 해 하나로 통합하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나라는 지구상 유일하게 동족이 남북으로 갈라져 있습니다. 그리고 지역과 지역이 갈라져 있습니다. 수도권과 지방이 갈라져 있습니다. 세대 간, 계층 간 갈라져 있습니다. 이념의 간극이 너무나 벌어져 있습니다. 화합하고자 여러 안을 제시해 보지만 갈등이 오히려 더 심화되고 있습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가 갈등에서 하나 됨의 아름다운 사회와 가정으로 변화되기를 기도합니다.
편협한 마음을 버리라
요한은 자기들을 따르지 않는 이들을 보며 분개해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막 9:38).
요한은 귀신이 나가는 것을 보며 기뻐해야 했지만 왠지 기분이 안 좋았습니다. 그는 즉시 그 활동을 하지 못하도록 중지시켰습니다. 이는 그 사람이 예수님과 제자들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변화 산에 올라갔을 때 밑에 있는 아홉 명의 제자들은 귀신 들린 아이를 고치지 못했습니다(막 9:14-29). 요한은 제자들이 귀신을 내쫓지 못하는 그 자리에 있지 않았지만 제자들 모두가 전체적으로 귀신을 내쫓지 못했다는 깊은 상실감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무리들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보니 화가 났습니다. 그는 자기 그룹에 속하지 않은 이들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보고 견딜 수 없었습니다. 이는 귀신 내쫓는 것을 자신들의 전유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그는 다른 사람들의 사역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요한은 마음이 편협하고 배타적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는 다른 사람들과 동역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배타주의, 나 이외, 우리 그룹 이외를 인정하지 않는 요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막 9:39-41).
예수님은 요한에게 다른 사람이나 다른 단체를 정죄하는 독선을 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반대하지만 않으면 다 자신의 편으로 생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 안에서의 다양한 생각, 다양한 사역을 인정하셨습니다.
좁은 마음, 편협한 마음은 사람을 원수로 만들고 동역을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편협한 우월주의나 배타주의는 금물입니다. 히틀러가 세계대전을 일으킨 것도 배타주의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문제는 우리 속에도 이런 배타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선교단체나 타 교단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배타성이 강한 저의는 문화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백의민족, 단일민족이라는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타 민족에 대해 강한 배타성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 속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교회 외에는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편협한 생각을 버리고 이단이 아닌 이상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은 모두 동역자라는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빌립보교회에는 바울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감옥에 갇혔다고 하니 그들은 아주 좋아했습니다. 그때 바울이 그들을 대하는 태도가 어떠했습니까?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빌 1:18).
바울은 그리스도가 전파된다면 자신을 인정하고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무 문제가 안 된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만 전파되면 기뻐하고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요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막 9:41).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이란 포용성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일이라도 그것이 주님을 위한 것이라면 기뻐 받으시고 반드시 상을 주십니다.
그러면 요한의 배타성은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이는 다른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에 대해 견딜 수 없어하는 시기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시기심은 인간관계를 분열시키는 원흉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도 시기심 때문이었습니다. 시기심은 남을 인정하지 않도록 하고, 미움과 질투, 더 나아가 살인까지 불러옵니다. 시기심은 무서운 마음의 질병으로, 나를 죽이고 다른 사람을 죽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타인을 인정하고 포용하는 넓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라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막 9:42).
‘작은 자들’이란 믿음이 있지만 아직 어린 사람을 말합니다. 믿음이 어린 신자들은 쉽게 상처받고 작은 유혹에도 쉽게 넘어집니다. 또 목자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쉽게 영향을 받습니다. ‘실족하게 한다’란 ‘걸려 넘어지게 한다’, ‘죄를 짓게 한다’는 뜻입니다. 목자는 어린 신자의 입장에서 섬세히 돕지 않으면 조그마한 이유로 실족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린 신자를 실족하게 하는 목자는 연자 맷돌을 목에 매고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강한 자에게는 대수롭지 않을지라도 초신자에게는 치명적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연못에서 돌로 개구리 맞히기 놀이를 하는 것이 재미있을지 모르지만 개구리는 생명에 치명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린 신자들에게 말 한마디, 행동 하나를 매우 조심해서 해야 합니다.
배려는 강자가 약자에 대한 태도입니다. 나는 나대로 살아갈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생각해 나의 권리를 제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타인에 대한 배려입니다. 다시 말해 나로서는 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을 위해 하지 않는 것이 배려입니다. 예를 들어, 돈이 많은 사람은 자기 돈을 가지고 자기 마음대로 쓸 수 있습니다. 자기 돈을 가지고 자기가 쓰는 것은 자유입니다. 그렇다고 부자가 “내 돈 갖고 내가 쓰는데 누가 뭐라고 해!” 하면서 흥청망청 쓴다면 이것은 타인에 대한 배려가 아닙니다. 이것은 약자를 실족하게 하고 낙심하게 하는 행동입니다.
요즘 빈부의 격차가 점점 심화되고, 이로 인해 계층 간의 갈등이 심각합니다. 몇 년 전에 ‘20대 80’이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1대 99’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돈 많은 사람들이 돈 없는 사람에 대한 배려가 없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우리는 모든 삶에 있어서 남을 배려하는 섬세함을 가져야 합니다.
만일 범죄하게 하거든
예수님은 계속해서 죄의 심각성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만일 우리의 손이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고, 발이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고, 눈이 범죄하게 하면 빼어버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과 두 눈으로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 낫기 때문입니다. 지옥은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 무서운 곳입니다. 지옥에 들어간 사람들은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게 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들을 때 신앙생활을 하다가 손발 다 잘리고, 두 눈도 뽑히고, 완전히 장애인이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생깁니다. 어떤 분은 눈이 50개라도 하루에 다 뽑힐 지경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요점은 죄의 심각성을 알리는 데 있습니다. 요즘은 죄를 죄로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죄를 즐깁니다. 한 예로 요즘에는 이혼을 죄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쉽게 이혼합니다. 이혼은 죄입니다. 이혼은 주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죄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막 10:8-9).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주님의 명령을 어기는 것이 죄입니다. 우리는 죄를 죄로 알고 죄의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죄의 삯은 사망이요, 사망 이후에는 심판과 둘째 사망이 기다리고 있다고 말합니다(롬 6:23상, 히 9:27). 또한 둘째 사망은 영원히 타는 유황불 못에 던져진다고 말합니다(계 21:8).
우리는 작은 죄라도 지을 가능성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그 뿌리를 뽑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환경에서 적극적으로 벗어나야 합니다. 그 자리가 신자로서 앉지 말아야 할 자리라면 일시적으로 욕을 들을지라도 과감하게 일어서야 합니다. 죄는 타협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죄는 피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할 대상입니다. 그리고 죄는 전염성이 강합니다. 예수님은 죄를 누룩으로 비유하셨습니다. 누룩은 비록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마치 지독한 암 세포와 같이 몸 전체로 무섭게 퍼져나갑니다. 그리고 구석구석 그 악영향을 끼칩니다. 따라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죄를 오염시키지 않도록 하나님 앞에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자기를 죽이라
70년대에 인기 절정이었던 <대부>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마피아들의 생태를 보여줍니다. 내용은 마피아 두목 일곱 명이 부하들을 다 거느린 앞에서 더 이상 싸우지 말자며 화합하는 의식입니다. 우리끼리 싸우고 보니 이긴 자나 진 자나 너무 손해가 많으니 다시는 싸우지 말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주 거창하고 장엄한 예식과 함께 “이제는 절대 싸우지 말자” 하고 서약했습니다. 그런데 결국 그들은 하찮은 일로 인해 틈이 벌어져 서로 싸우다가 오직 두 사람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거창한 의식을 행한 후 왜 하나가 되지 못했을까요? 그들은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 되기로 합의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 되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불의와 거짓, 그리고 죄악을 중심으로 하나 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 됨을 외칩니다. 화합하고 화목하자고 외칩니다. 그러나 하나 됨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를 포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죽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항상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화합하고 하나 되기 위해서는 내 이익을 포기하고, 자신을 희생해야 합니다. 자기를 포기하지 않은 채 나를 중심으로 모이라고 아무리 외쳐도 소용이 없습니다. 고 노무현 대통령이 그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바보가 되었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를 포기하지 않으면서 하나 됨을 강조하는 공동체는 절대로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막 9:49-50).
소금에는 3대 기능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우리가 아는 대로 맛을 낸다는 것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짜게 먹으면 건강에 좋지 않다며 소금을 먹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설렁탕을 먹을 때 소금을 안 치고 먹을 수는 없습니다. 소금은 모든 음식의 맛을 냅니다. 다른 하나는 방부제 역할입니다. 지금은 냉동으로 보관하지만 예전에는 냉장고가 없었기 때문에 방부제란 오로지 소금뿐이었습니다. 소금에 절여서 보관했습니다. 그중 하나가 소금에 절인 ‘안동 간고등어’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고르게 하는 것입니다. 소금을 넣으면 다 고르게 됩니다. 뻣뻣한 배추에 소금을 뿌리면 잎이 부드러워집니다. 이를 숨이 죽었다고 표현합니다. 뻣뻣함은 목숨이 살았다는 뜻입니다. 목숨이 산 뻣뻣함에 소금을 치면 뻣뻣한 숨이 죽어서 하나로 모입니다. 이와 같이 소금은 고르게 하고 모으는 역할을 합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제사에 소금이 쓰였습니다.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레 2:13).
‘언약의 소금’에는 중요하고도 신비로운 의미와 상징이 들어 있습니다. 모든 제물은 아무리 귀한 것이라도 산 채로 드릴 수 없습니다. 살아 있는 양을 죽이고, 살아 있는 소를 죽이고, 살아 있는 비둘기를 제단 앞에서 죽여서 드려야 합니다. 동물뿐만 아니라 채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채소를 드리는 제사가 소제입니다. 소제를 드릴 때는 뻣뻣한 것을 그대로 드릴 수 없습니다. 뻣뻣한 채소에 소금을 쳐 부드럽게 해서 드려야 했습니다. 따라서 소금을 치라는 것은 양을 죽이는 것과 똑같이 뻣뻣한 것에 소금을 쳐서 숨을 죽여 드리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뻣뻣한 것을 죽여야 됩니다. 목이 곧은 사람은 목을 굽혀야 합니다. 어깨에 힘주는 사람은 힘을 빼야 합니다. 눈높이가 높은 사람은 낮춰야 합니다. 결혼을 앞둔 사람들은 눈높이를 낮춰야 합니다. 잘났다는 사람은 자기가 가장 못난 사람이라고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겸손해져야 합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타인 중심으로 바꿔야 합니다. 나 중심인 사람은 하나님 중심으로 돌려야 합니다.
내가 하지 못하면 하나님이 친히 개입해서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합당한 자로 만드시기 위해 여러 시련과 환난을 주십니다. 교만한 사람이라면 여러 훈련을 통해 낮추십니다. 잘났다는 사람이라면 잘났다는 생각을 깨끗이 포기할 때까지 진노의 고삐를 늦추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복을 자기 노력과 열심으로 얻은 양 착각하는 배은망덕한 사람이라면 독수리 훈련을 시키셔서 두 손 들도록 겸손하게 하십니다. 물질에 눈이 어두운 사람,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것을 드리지 않는 사람은 여러 시련을 통해 모은 물질을 흩으십니다. 우리는 이를 항상 잊지 말고 주님 앞에 나올 때 푹 절인 배추처럼 아주 부드러운 모습으로 나와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 앞에 산 제물이 됩니다. 그래야 하나님 앞에 바른 예배가 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은혜가 없는 사람은 덜 죽은 사람입니다. 은혜가 없는 사람은 아직 숨이 살아 있는 사람입니다. 푹 절인 배추가 되지 않은 것입니다. 자기가 살았기 때문에 은혜가 없습니다. 푹 절인 배추가 되지 않아 얼굴이 굳어 있고 팽팽하고 일그러져 있습니다. 그들의 입에서는 원망, 불평, 정죄가 튀어나옵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는 공동체는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유대 격언에 “소금이 없으면 세상은 살아갈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들은 소금을 소중히 여깁니다. 양에게도 소금을 먹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양이 기운을 차리지 못합니다. 소금은 꼭 필요합니다. 로마 사람들의 격언에도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될 것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태양이고, 다른 하나는 소금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소금이 소금으로서의 기능을 다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로 작용해야 합니다. 먼저, 소금은 녹아야 합니다. 녹지 않는 소금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녹아서 형체가 없어져야 합니다. 녹지 않은 소금은 소금이 아닙니다. 형체가 없어지지 않으면 소금 구실을 못합니다.
다음으로, 소금은 다 녹아 없어지면서도 제 맛을 항상 지켜야 합니다. 본질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형체는 없어졌으나 본질이 살아 있는 것이 소금입니다. 다시 말해 소금은 다른 물체에 영향을 주지만 자기는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소금은 썩는 물체를 썩지 않게 할 수는 있어도 썩는 물체 때문에 자기가 썩는 일이 결코 없습니다. 소금은 어느 경우에도 제 맛이 변하지 않습니다. 소금이 제 맛을 잃어버리면 거름으로도 쓸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 5:13).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막 9:50하).
예수님은 친히 소금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시키시기 위해 친히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롬 3:25).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의 형체와 거룩함이 다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눅 23:34).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셔서 형체가 없어지셨지만 예수님의 화목의 본질을 그대로 지키셨습니다. 이로 인해 인간과 하나님, 인간과 인간 간의 화목의 길을 여셨습니다.
이기심과 자기중심, 그리고 나만 옳다는 편견과 교만을 가지고는 하나 될 수 없습니다. 타인에 대한 배려, 약자에 대한 배려가 있어야 하나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로 나를 죽여야 하나 될 수 있습니다. 그때 맛을 내는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인의 본분인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지켜나가기를 기도합니다.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고후 5:18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