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3:1~3
거듭남과 하나님 나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예수님의 메시지를 크게 둘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다른 하나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하나님 나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세상 나라와 달리 영적인 나라이므로 영적으로 자격이 갖추어져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죄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함량이 미달하여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죄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인간들을 구원하여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본문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보고 경험할 수 있는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보고 경험할 수 있습니까? 어떤 여 목사가 ‘내가 본 천국’이라는 책을 내서 많은 사람이 성경 말씀보다 그녀의 글에 현혹됩니다. 하나님 나라는 누구든지 거듭나면 하나님 나라를 보고 경험할 수 있습니다. 거듭나서 하나님 나라를 보고 경험하기를 기도합니다.
1.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요 3:1~2)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가 있었습니다. 공관복음에는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등장하지 않지만, 요한복음에는 세 번 나옵니다(요 7:50, 19:39). 그는 엄격한 유대교를 신봉하는 바리새파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보통 바리새인 하면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본래 바리새파는 그렇지 않습니다. 바리새파는 이스라엘이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후, 에스라를 중심으로 뜻 있는 몇 사람이 모여 율법을 연구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출발했습니다. 그들은 바빌론의 세속 문화 속에 살면서 하나님의 법을 지켜 그 시대와 그 사회에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반면에 세속을 떠나 사는 부류가 엣세니파이고, 이방 문화에 젖어 세속적인 삶을 산 부류는 사두개파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파는 약 6,000명 정도였습니다. 그들은 서기관들이 해석한 율법을 정확하게 지켰습니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으로 율법과 각종 규례와 모든 절기를 지켰습니다. 그는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고,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 기도하며 육신의 탐욕을 절제하며 거룩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니고데모는 바리새파였고 또한 유대인의 지도자였습니다. 유대인의 지도자란 당시 산헤드린의 구성원 중 한 명이란 뜻입니다. 산헤드린은 71인으로 구성되었고, 입법, 행정, 사법기관의 모든 권력을 장악하였습니다. 형사 소송 때에는 재판관으로서 참여할 수 있었고, 민사 소송 때는 여러 재판관과 함께 판결을 내리거나 단독 재판으로 판결을 내렸습니다.
거기다가 그는 예수님의 시체에 바르도록 ‘몰약과 침향을 섞은 100리트라-33㎏’(요 19:39)를 내놓을 만큼 부유했습니다. 몰약은 방부제 역할을 하고 침향은 비싼 향료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학문적으로 이스라엘의 선생이었습니다(요 3:10). 이런 랍비, 선생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선망 대상이었습니다.
‘니고데모’란 뜻은 백성의 정복자란 헬라식 이름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히브리어 이름을 갖고 있었지만, 헬라문화를 접촉했던 상류층은 히브리어 이름뿐만 아니라 헬라 이름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니고데모가 헬라어 이름을 가지고 있던 것을 보면 헬라 교육을 받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히브리 사람으로 구약과 율법을 지킨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소크라테스와 탈레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헬라철학을 섭렵했던 학자였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당시 양대 산맥이었던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에 능통했던 이스라엘의 학자였습니다.
사람이 한 가지 분야에서 최고가 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름대로 모든 분야에서 정복한 탁월한 위치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정상에 오르지만 각종 비리로 권좌에서 물러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그는 정상에 오르고도 그 자리를 지켜나갈 만큼 자기 관리에 철저했습니다.
그는 외적으로 볼 때 세상의 모든 것을 소유했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는 모든 이스라엘의 부러움의 대상이었습니다. 우리 또한 이런 니고데모를 흠모하고, 이런 니고데모가 되고 싶습니다. 이런 사람은 아무 고민이 없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는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가 낮이 아니라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낮에는 산헤드린 업무를 봐야 하기에 밤에 찾아왔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 밤은 악과 거짓과 무지와 어둠을 상징합니다(요 11:10).
그가 예수님을 찾아왔다는 것은 유대 종교와 지성의 한계를 드러낸 사건이요, 복음과 유대교의 만남이었습니다. 그는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소유했지만 내면은 어두웠습니다. 유대주의, 다시 말하여 유대 종교 생활과 지성과 철학으로 내면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해결할 수 없는 내면의 문제를 놓고 고민했지만, 고민하면 고민할수록 해결의 실마리가 풀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로마 식민지 하에 있는 이스라엘의 처한 모습으로 고민해야 했습니다. 성경에는 분명히 다윗의 왕국, 하나님 나라가 온다고 약속되어 있는데, 로마의 지배를 받는 현실을 볼 때 고민이 깊어갔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적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는 그동안 고민했던 문제들을 예수님을 통해 해결하고 싶어서 밤에 조용히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그는 마음에 있는 깊이 고민하던 문제를 드러냈습니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습니다.’ 이 말을 들은 예수님께서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2. 거듭남과 하나님 나라(요 3:3)
첫째, 하나님 나라
“진실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예수님이 보실 때, 그가 세상에서 모든 것을 다 소유했지만 거듭나지 않아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하나님 나라(the Kingdom of God)’는 하나님의 왕국, 다시 말해 왕이 다스리는 지역이나 활동, 영역보다 통치를 뜻합니다. ‘본다’란 경험한다(experience), 체험한다는 뜻입니다.
그는 거듭나지 않아 하나님께서 통치하는 하나님 나라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못해 그의 내면은 칠흑처럼 어두웠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높은 지위와 영광과 권세를 소유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않으면 지위여하를 막론하고 본질상 진노의 자녀(엡 2:1~3)로 사탄의 지배를 받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냐, 사탄의 통치냐, 둘 중의 하나로 중도는 없습니다.
그는 바리새인이므로 율법과 장로들의 유전이 그를 통치했습니다. 율법은 본래 선합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고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길잡이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율법을 알고 있어도 다 지킬 수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율법은 완전을 요구하므로 누구도 율법을 온전히 다 지킬 수 없습니다. 그는 선한 사람이므로 율법을 다 지키지 못함에서 오는 죄의식에 시달렸을 것입니다. 그는 죄의식으로 밤에 단잠을 자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그의 내면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자유와 기쁨과 평안함이 없었습니다.
장로들의 유전이나 율법은 본질보다 형식을 중요시합니다. 그러다 보니 그의 신앙생활은 형식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상 나라는 약육강식이 지배합니다. 그의 내면은 세상 나라가 지배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쌓은 사회적인 지위와 학문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 마음이 편하지 않고 늘 불안했습니다.
사람이 불안하면 밥맛이 없고, 동공이 커지고 식은땀이 납니다. 소변이 자주 마렵고 안절부절못하고 경직됩니다. 이처럼 세상 나라의 특징은 불안입니다. 니고데모의 내면에 의와 평안과 기쁨이 없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 나라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싶은 대로 먹고, 마시고 싶은 대로 마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성령 안’이란 ‘그리스도 안’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을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한 몸이 될 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의’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움입니다. ‘평강’은 인간 서로간의 화해를 뜻합니다. 희락은 마음의 기쁨입니다. ‘의’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 ‘화평’은 서로와의 바른 관계, ‘희락’은 나 자신과의 관계입니다. 세 가지 중에 어느 하나라도 빠져서는 안 되고 다 온전히 성취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이므로 더는 죄의식에 시달릴 필요가 없습니다. 로마서 5장 1절을 보면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은 자,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때 가장 먼저 나타나는 현상은 화평(평안)입니다. 사람들이 가장 원하는 것은 마음의 평화입니다. 마음에 평안이 있으니 나 자신이 기쁩니다. 그러니 밤에 단잠을 자게 됩니다. 기쁘니 안 먹어도 배가 부릅니다.
사람이 기쁘면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호수처럼 잔잔해지며 입에서 찬양이 흘러나옵니다. 사람이 기쁘면 여유가 있고, 얼굴에 미소가 있고 마음이 풍요롭습니다. 은혜와 사랑과 용서, 인내와, 충성, 기쁨, 비전이 있게 되고,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게 됩니다(벧후 1:4).
하나님 나라는 미래에 임할 나라까지 포함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는 현세적이며 미래적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한 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지만 죽은 다음에는 심판이 있다고 선언합니다(히 9:27). 그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영원히 던져집니다(계 21:8). 선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타납니다(요 5:29).
우리의 현실은 길어야 80~90년입니다. 그러나 내세는 영원합니다. 어떤 학자는 내세의 기한을 새 한 마리가 부리로 태평양의 물을 다 옮겨도 옮길 수 없는 기간으로 봅니다. 이런 영원한 세계에서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또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심판의 부활로 부활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떤 길을 가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어야 합니다.
장차 나타날 하나님 나라는 성삼위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시기 때문에 악의 세력이 전혀 없습니다. 도덕과 영과 영광스러운 면에서 새롭습니다.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하셔서 모든 눈물을 눈에서 씻기시므로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과 곡하는 것과 아픈 것이 없습니다(계 21:1~8).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런저런 일로 눈물을 흘립니다. 특히 한국 사람은 어느 나라 사람보다 눈물이 많습니다. 남북 분단의 슬픔, 강대국의 횡포에서 오는 슬픔, 배신당하는 데서 오는 슬픔,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함에서 오는 슬픔이 있습니다. 요즘 젊은 세대는 집을 살 수 없는 슬픔이 있습니다. 자녀를 키우는 데서 오는 남모르는 아픔이 있습니다. 양들로 눈물을 흘립니다. 예수님은 눈물을 닦아주시며 “수고 많이 했다!”며 위로해 주십니다. 그러고 보니 눈물을 흘리는 것은 좋은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강퍅한 마음을 회개하고 눈물을 많이 흘렸으면 합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 나라의 모습에서도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눈을 뜰 수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더라.”(계 21:11)라고 했습니다. 그곳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있었습니다. 그 성의 빛은 지극히 귀한 보석과 같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온 누리에 가득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를 사모해야 합니다.
둘째, 거듭남
우리가 어떻게 이런 나라를 소유할 수 있습니까?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를 소유할 수 있습니다. ‘거듭나다’는 ‘거듭’이란 부사와 ‘나다’의 동사가 합쳐진 단어입니다. ‘거듭(again, ἀνωθεν)’은 위로부터, 새로, 다시, 처음부터, 꼭대기, 높은 곳에서부터란 뜻입니다. ‘나다(born, γενναω)’는 태어난다는 뜻입니다. 이를 종합해 보면 ‘거듭나다’는 ‘위로부터 난다(born from above)’, ‘다시 태어나다(born again)’, 중생, 영적인 탄생, 존재의 변화, 새로운 세계로의 변화, regeneration를 의미합니다.
중생이란 단어는 요한복음에만 나오고 공관복음에는 없습니다. 바울은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이라고 했습니다(딛 3:5).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란 뜻입니다. ‘거듭나다’를 공관복음과 서신에서는 구원, salvation, 죄가 없다, justification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이 세례를 받고 유대교에 개종하면 그를 중생한 자라고 했습니다. 한편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혈통으로 태어났으므로 중생이 필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태어나면서 아브라함의 자손이므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을 기정사실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선택받은 유대인들조차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중생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니고데모가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는 말씀을 들었을 때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 자신을 중생이 필요가 없는 사람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중생은 나의 노력과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영역으로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중생은 단 한번, 단회적이고 절대적인 회심, 삶이 180도 회심을 뜻합니다. 따라서 중생은 육에 속한 자연인의 지,정,의가 서서히 발달하고 변하는 점진적인 변화가 아니라 즉시 근본적이고 전인적인 변화를 뜻합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영적 생명이 성령, 말씀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는 것이 중생입니다(엡 2:5; 고후 5:17).
중생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예수 생명의 씨가 내 마음에 떨어진 것입니다. 이제 예수 생명이 내 마음에 떨어졌으니 발아하여 자라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화(sanctification)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중생, 거듭났다면 이제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이제 우리는 예수님을 날마다 닮아 예수님의 형상에 이르기까지 성장하여 작은 예수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거듭나면 하나님 나라를 소유할 수 있습니다. 어둡고 캄캄한 한계적인 세계를 벗어나 기쁨과 생명과 자유가 충만한 세계에서 살게 됩니다. 세상에 보이는 것에 연연하던 육의 사람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으로, 땅에 속한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으로, 흑암의 세계에서 빛의 세계로(골 1:13), 어두움의 자녀에서 빛의 자녀로 변화합니다. 땅의 소망을 바라던 사람이 하늘나라의 소망을 바라며 살아가는 새로운 피조물,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고후 5:17).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북아프리카에서 A.D. 354년에 태어났습니다. 그의 어머니 모니카는 신실한 믿음의 여인이었지만 그의 생활은 방탕했습니다. 그는 16살 때부터 동거생활을 했고, 술 취함과 음란과 호색을 일삼았으며, 20대에 10년 동안 이교도인 마니교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어머니 모니카는 그를 위해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그는 어머니의 기도로 성 암브로스(St. Ambrose)의 설교를 듣고 돌아와 교회도 다니고, 성경도 읽으며 바르게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과거 죄의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는 속으로 “지금 당장 죄의 줄을 끊어버려야지. 지금이 이를 벗어버릴 때다!”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여러 번 결심을 해봤지만 실패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무도 없는 조용한 공원의 무화과나무 아래 엎드려 통곡하며 기도했습니다. “주님, 언제까지 제가 내일, 내일 할 것입니까? 왜 저의 더러운 생활을 이 순간에 깨끗이 끝내지 못합니까?” 이때 갑자기 이웃집에서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의 가사가 들려왔습니다. “집어 들고 읽어라! 집어 들고 읽어라!” 그는 급히 집으로 돌아가 성경을 펴들고 가장 먼저 눈이 닿는 부분을 읽었습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1~14).
그는 더는 읽지 않았고 더는 읽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그는 옛 생활에서 깨끗이 벗어났습니다. 그는 빛의 갑옷을 입고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덧입었습니다. 탕자 아우구스티누스가 성 아우구스티누스로 변했습니다.
그는 그 길로 어머니에게 찾아갔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을 모두 이야기했습니다. 어머니는 너무 기뻐서 우리 가운데서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는 모든 것을 넘치도록 능히 행하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어머니는 나를 위하여 슬픔과 눈물로 간구하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은총을 하나님께서 나에게 허락해 주신 것을 분명히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은 어머니의 슬픔을 즐거움으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어머니가 바라던 것보다 더욱 풍족하게 해주셨고 나의 육체가 바라던 것보다 더욱 순결한 기쁨을 주셨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가 회심 후, 성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한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탕자 시절에 만났던 한 여인이 그를 유혹했습니다. 그때 그는 앞만 보고 걸으며 이렇게 중얼거렸다고 합니다. “나는 이전의 내가 아니야. 내가 아니야.”
그는 회심을 체험 후에 A.D.387년, 33세에 부활절에 세례를 받고, 389년에 감독이 된 후에 430년까지 그가 남긴 족적은 경이적입니다. 그가 400년경에 쓴 《고백록》, 413~426년에 걸쳐 쓴 《신의 도성》과 《삼위일체론》은 불멸의 명작입니다. 후에 기독교 사상은 그의 사상에 주석에 불과하다고 할 정도로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의 회심은 그를 위대한 인물로 만들었습니다.
사람이 거듭나면 세계가 달라집니다. 내가 달라지니까 세계가 달리 보이고, 모든 것이 달리 보입니다. 가치관과 인생관이 달라지고, 세계관과 소망이 달라지니 모든 것이 다르게 보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죄 씻음을 받고 중생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을 소유하고 경험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