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제 9강 요한복음 3:16~36

이처럼 사랑하사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3:16)

 

여러분은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형용 못하네(새찬송가 304)의 작시 작곡의 유래를 아십니까? 이 찬송가는 1917년에 레만(Frederick Martin Lehman) 목사님이 작시 작곡한 찬송가입니다. 프레드릭 레만 목사님은 독일에서 4살 때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했습니다. 그는 11살에 예수님을 믿고, 일리노이주 내퍼빌의 노스웨스턴 칼리지를 졸업한 후에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시골에서 목회하면서 생활비를 벌기 위해 치즈 공장에서 일했습니다. 그의 부인은 목사님의 점심 도시락을 늘 챙겨주었습니다. 레만 목사 부부는 평소에 은혜로운 말씀이나 좋은 글을 읽으면 메모해 두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하다무트(서곡)’의 시를 읽고 감동하여 메모하여 남편의 도시락에 넣었습니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세상 모든 갈대, 나뭇가지, 모든 초목을 펜으로 삼고, 온 세상의 바닷물을 잉크로 채우고, 온 인류가 능숙한 서기관이라고 해도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 그리고 놀라우신 이야기를 다 적을 수 없다.”

레마 목사님은 도시락 속에 들어있는 이 시를 읽고 그 또한 감동하여 찬송가 304장을 작시 작곡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를 내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의 손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습니다. 그 망치 소리가 온 천지를 진동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3:16)

이 말씀은 복음의 핵심이 다 담겨 있기에 복음서 속에 있는 복음(the Gospel within the Gospels)’, ‘작은 복음서(little Gospel)’라고 불립니다. 그리고 이 성경 구절을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전체를 대표하는 말씀으로 복음의 진수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도록 함입니다. 독생자를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새롭게 다가오기를 기도합니다.

1.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3:16~21)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세상(world, κόσμος)’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함한 온 인류를 가리킵니다. 유대인은 하나님 사랑의 대상을 이스라엘에만 제한시켰습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이 민족과 계급을 초월한 모든 인류를 사랑하신다고 했습니다. 이는 복음의 보편성을 뜻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열려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보내신 동기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사랑(ἀγαπάω)’은 요한복음에서 중요한 단어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연약함과 죄성을 끝없이 감싸 안으시는 뜻을 포함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입니다(요일 4:8).

하나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타율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막연한 이론이나 언어가 아니라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아낌없이 희생한 사랑입니다.

사람들은 사랑할 가치가 있고 또 마음에 들어야 사랑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사랑하신 세상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만한 자격이 있습니까? 인간은 아담의 범죄 이후,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았고,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늘 대적하고 불순종했습니다.

이사야는 이런 인간을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1:4)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에베소서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다고 말씀하고(2:1,3), 로마서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고 말씀했습니다(3:23).

인간은 하나님의 뜻과 목적과 요구하심에서 멀리 빗나갔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인간은 죄로 하나님의 고귀한 형상을 상실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잃은 인간은 죽음과 질병으로 끊임없는 고통을 겪으며 살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6:23). 사망 이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9:27). 그 심판은 둘째 사망으로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는 영원한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죄인에게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독생자(only begotten, μονογενς)’는 외아들이란 뜻 외에 속성과 성품에서 유일무이하신 분이란 뜻이 있습니다. 반면에 요한복음에서 아들(son, υίός)’은 그리스도를 지칭합니다(3:16,36, 5:20,23, 8:36).

주셨다(gave, διδωωμι)’는 뜻은 보내다(send), 넘겨주다(hand over), 값을 지불하다(pay)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성육신(Incarnation)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심(crucifixion)까지도 포함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9~10)

하나님은 사랑을 받을 가치가 전혀 없는 죄인들을 위해 독생자를 화목제물로 보내셨습니다.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면 속죄 제물이 필요합니다. 피 흘림이 없은즉 죄를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9:22). 그래서 대제사장은 1년에 한 번씩 속죄일에 짐승을 잡아 지성소의 속죄소에 피를 뿌렸습니다. 속죄소는 지성소에 있는 언약궤의 금 뚜껑을 뜻합니다.

그런데 짐승의 피는 일시적이고 효력도 제한적이어서 근본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7:27~28). 그래서 매년 속죄제를 드리고 죄를 지을 때마다 동물을 잡아 피를 뿌렸습니다. 여기에서 짐승을 잡아 피를 뿌리는 제사는 장차 올 온전한 제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그림자입니다(8:5).

마침내 하나님은 죄인들과 화목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어린양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셨습니다(요한 1:29).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린 피는 단번에 온전한 영원한 제사입니다(9:12). 이제 더는 번거롭게 제사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지 예수님의 피의 은혜로 담대히 하나님의 은혜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10:19).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요, 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입니까?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우리에게는 5명의 아버지가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Heavenly Father)와 나를 낳고 키워주신 아버지(biological father), 나를 예수님께로 인도한 영적인 아버지(spiritual father)가 있습니다. 천주교에서는 대부(godfather)라고 합니다. 학문의 아버지(academical father)와 사회적인 아버지(social father)가 있습니다. 이런 분들의 사랑을 알고 감사하는 사람은 심리적으로 정서적으로 사회적으로 안정감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행복은 감사와 비례합니다.

특히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이에 감사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사람이 부모의 사랑을 깨달아야 철이 나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감사하는 만큼 성숙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감사하는 만큼 자기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도 사랑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고맙게 여기니 감사와 기쁨이 생기게 됩니다.

한 소녀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홀어머니와 함께 살았습니다. 그녀는 빵을 먹어본 경험보다 물로 허기를 채운 적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그녀가 굶어 죽기 일보 직전에 이웃에게 발견되어 겨우 목숨을 건졌습니다. 그녀는 설상가상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이라는 극한 상황으로 아사 직전에 이르렀습니다.

그때 한 구호단체가 모녀에게 구호품을 전달해 주었습니다. 모녀는 그들에게 받은 식량으로 굶주림을 해결했습니다. 그 단체는 국제연합아동구호기금(UNICEF)이었습니다. 이 단체는 지구촌의 굶주린 어린이들에게 빵을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녀는 이 구호단체를 잊을 수 없었습니다. 이 구호 빵으로 생명을 부지한 소녀가 장성하여 세계적인 영화배우가 되었습니다. 그녀가 바로 로마의 휴일에서 주역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은 오드리 햅번(Audrey Kathleen Hepburn)입니다.

그녀는 생전에 절망의 늪에서 나를 구해준 분들을 위해 이제 내가 그들을 사랑하고 섬기고 봉사할 차례다.”라며 헐벗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데 열정을 쏟아 그들을 섬겼습니다. 그녀는 죽은 후에도 이 단체의 홍보대사로 전 세계의 구호를 돕고 있습니다. 성경은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 4:11)라고 했습니다.

자기 자신이 받은 사랑을 감사할 줄 알고, 받은 사랑을 갚는 가족들로 모인 가정은 행복합니다. 그런 사회 또한 행복한 사회이고, 그런 교회는 작은 천국입니다. 그런 세상은 평화와 안녕으로 가득합니다.

둘째,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주는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받는 사람입니다. 어느 사회든 베풀고 섬기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늘 거지 깡통을 들고 누가 채워주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열중에 아홉을 주고도 나머지 하나를 더 주지 못해 미안해하는 게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모든 것인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성경에서 내어주었다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8:32)

자기 아들을 아낌없이 내주신 하나님께서 무엇이 아깝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많은 선물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름다운 가정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햇빛을 주시고, 때에 따라 비를 주시고, 아름다운 산야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우리가 가지고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우리가 갖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선물이 너무 많습니다.

그 많은 선물 중에 가장 큰 선물은 독생자를 내어주신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금이나 다이아몬드 같은 보석을 주신 정도가 아닙니다. 아파트나 좋은 자동차를 주신 정도가 아닙니다. 주식이나 증권, 달라, 명예, 권세 정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주셨습니다. 내어주시되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도 요한은 세상의 모든 사전을 다 펼쳐놓고 찾아봐도 어떤 단어로도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할 수가 없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For God so loved the world.”라고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어디 있습니까? 이보다 더 큰 선물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선물’(4:10)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최고의 선물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어떤 선물보다 큰 선물, 독생자 예수님을 영접하여 복 받은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믿으면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하나님의 사랑은 누구에게나 열려있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이 조건은 믿음입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믿는다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불신자들은 무엇을 믿든지 믿는 것은 좋은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셔서 보내주신 독생자를 믿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내 신념이나 의지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내 욕망과 내 소원만을 이루어지기 위해 믿는 것은 기복신앙으로 질 낮은 신앙입니다. 독일 신학자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는 이런 신앙을 싸구려 신앙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내 소원만을 바라고 믿는 유치한 신자’, ‘싸구려 신자는 아닌가요? 우리는 이런 수준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복을 받고 담는 그릇이요 도구입니다. 믿음의 그릇이 없고 믿음의 도구가 없으면 하나님의 복을 담고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믿어지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이 믿어지지 않고, 부모님의 사랑이 믿어지지 않고, 아내나 남편의 사랑이 믿어지지 않고, 형제들의 사랑이 믿어지지 않고, 목사의 사랑이 믿어지지 않고, 성도의 사랑이 믿어지지 않고 의심한다면 이런 사람은 비참한 사람입니다. 이런 불행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보다 더 큰 저주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는 세상에서 저주 중의 저주는 하나님의 사랑이 믿어지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이 믿어지고, 하나님의 사랑이 믿어지고, 부모님의 사랑이 믿어지고, 아내나 남편의 사랑이 믿어지고, 형제들의 사랑이 믿어지고, 목사의 사랑이 믿어지고, 성도들의 사랑이 믿어지는 가정과 사회와 교회는 천국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가장 복된 것은 믿음입니다.

모슬렘은 다섯 가지 까다로운 규칙을 지켜야 구원을 얻습니다. 새벽 4시부터 일어나서 하루에 다섯 번 기도하고, 일 년에 라마단 기간에 한 달간 금식해야 합니다. 또 금지된 음식을 먹지 말아야 하고, 구제와 선행에 힘써야 합니다. 죽기 전에 이슬람의 창시자인 무함마드의 출생지인 메카를 순례해야 합니다. 그들은 이 다섯 가지를 절대적으로 지켜야 구원을 얻는 것으로 여깁니다.

불교에서도 세상의 모든 욕망을 버리고 마음으로부터 진리를 깨닫고 해탈해야 합니다. 모든 종교는 구원을 얻는데 까다로운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우리에게 행위와 업적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깨달음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단지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합니다. 그 믿음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최대의 선물인 예수님을 믿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넷째,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독생자 예수님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따라 멸망과 영생이 달라집니다(3:16,18). 여기에는 빈부귀천, 국적, 신분, 인종 차별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선물인 독생자 예수님을 믿으면 영생이고 믿지 않으면 멸망입니다. 멸망영생에는 중간 지대가 없습니다. 이는 절대 양자택일의 문제입니다.

멸망하다(perish, ἀπλλυμι)’는 요한복음에 10번 나오는데 요한복음의 핵심 단어입니다. 멸망하다는 잃다, 상실하다(to be lost)는 없어지다, 파괴되다(to perish, be destroyed)는 뜻입니다. 이 동사는 구원, 생명과 반대되는 죽음(3:6), 멸망(고전 1:19)과 상실을 뜻합니다(요이 8). 하나님의 품을 떠나 살아가는 사람의 모든 수고와 노력은 죽음과 멸망으로 끝을 맺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독생자 예수님을 믿지 않아 멸망의 길을 걷습니다. 그 이유는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3:19). 어두움의 길은 우리를 죽음으로 인도합니다. 반면에 빛의 길은 구원과 영생으로 인도합니다.

우리는 영생과 멸망의 길 중에 어느 한 길을 택해야 합니다. 어둠과 빛의 길 중에 어느 한 길을 택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행위가 악하기 때문에 빛 가운데로 나오기를 꺼립니다(3:20~21). 그러나 빛 가운데 사는 사람은 생명과 자유와 기쁨이 넘칩니다. 진리를 좇는 이들은 빛으로 나옵니다. 진리를 따르는 이들은 진리를 사랑합니다.

사랑에는 구체적인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말로 하는 사랑은 진실한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구체적인 사랑의 증거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 죄를 위해 가장 사랑하는 독생자를 아끼지 않고 내어주신 것입니다.

에스키모족은 남을 위해 살신성인하는 의로운 사람을 남자일 경우에는 펭귄 아버지라고 부르고, 어머니일 경우 연어 어머니로 부른다고 합니다. 5월의 남극은 해가 뜨지 않는 암흑의 대 빙원입니다. 펭귄의 암컷이 5월을 기다렸다가 내륙 깊숙이 들어와 알을 낳는데 하나만 낳습니다. 온 대지가 얼음 바닥이 아닌 곳이 없으므로 그대로 두면 알이 금새 얼게 됩니다. 그 알을 지키고 품는 것은 수컷이 담당합니다. 수컷은 알이 깨기까지 먹지도 못한 채 계속 알을 품고 있어야 합니다.

그동안 암컷은 먹이를 구하기 위한 기나긴 장정을 떠납니다. 바다에 이르러 새우 종류의 먹이를 잔뜩 뱃속에 저장시킨 다음 알을 낳은 곳을 향하여 되돌아옵니다. 돌아오면 새끼가 이미 부화되어 있습니다. 수컷과 교대해서 뱃속에 저장해 온 양식을 소처럼 되새김질로 잘 반죽하여 새끼에게 먹입니다.

달포 남짓 꼬박 굶은 상태에서 눈보라와 폭풍 속에 시달려 체력 소모에 영양실조까지 겹친 펭귄 아버지는 암컷이 마련해온 먹이를 먹고 싶지만 애써 외면한 채 굶주림에 비틀대며 바다를 향합니다. 바다로 향하는 펭귄의 아버지 모습은 처절하기까지 합니다. 필사적으로 걷지만 다리에 힘이 없어 미끄러지고 나뒹굴다가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죽습니다. 아버지 펭귄은 새로운 생명을 위해 눈을 감습니다. 이는 마치 가시고기와 같은 모습입니다. 새끼에 대한 애정은 이처럼 아름다우면서 처절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은 이와 비교할 바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고,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게 되었습니다(5:6~11).

2. 세례 요한의 증언(3:22~36)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유하시며 세례를 주셨습니다. 세례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주었습니다. 때는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않은 때여서 구속 역사가 세례 요한에게서 예수님께로 넘어가는 역사적 전환기였습니다. 세례 요한의 인기는 대단했습니다. 예수님이 나타나시자 그의 존재는 점점 희미해져 갔습니다.

이때 요한의 제자 중 하나가 한 유대인으로 더불어 결례에 대해 변론하였습니다. 결례는 세례와 동의어로서 죄나 더러움을 씻어 정결케 하는 의식입니다. 유대인이 요한의 세례가 예수님의 세례보다 못하다고 비판한 것 같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스승의 역사가 점점 줄어들고 예수님의 역사는 점점 흥하자 마음에 시기심과 경쟁심이 생겼습니다. 시기심은 관계를 무너뜨립니다. 이를 극복하지 못하면 믿음이 자라지 않고 마음고생을 하다가 인생을 마감합니다. 세례 요한은 이 문제를 어떻게 극복했습니까?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3:27)

세례 요한은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온다는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권위도 하나님께로 왔습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흥왕한 것도 하나님께서 역사하여 일어나는 것이므로 시기할 일이 아니라 오히려 기뻐해야 합니다. 우리가 시기심을 극복하는 비결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믿고 모든 것을 하나님 편에서 보는 것입니다.

요한은 더 나아가 신랑의 친구로서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신랑은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신부는 신자들을 가리킵니다. 신랑이 신부를 취할 때 신랑의 친구는 이를 크게 기뻐합니다. 이처럼 백성이 그리스도께로 갈 때 그의 기쁨은 충만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3:30)라고 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높이기 위해 자기를 부인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존재가 어떻게 되든 상관 없이 그리스도께서 높임 받을 때 기뻐하고 즐거워했습니다. 그리스도는 그의 소망이요 기쁨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도 흥하고 나도 흥하여야 하리라.”고 합니다. 자기가 죽고 자기의 존재가 희미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죽고 내가 쇠할 때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높임을 받게 됩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그의 기쁨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에 요한은 그들에게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분명하게 설명했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위로부터 오셨다(3:31~32)

예수님은 위로부터 오신 분이요 만물 위에 계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요한은 땅에 속한 자로서 땅에 속한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오셨으므로 보고 위에서 들은 것을 증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백성은 그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성령으로 말씀하신다(3:33~34)

우리가 예수님의 증언을 겸손하게 받으면 영의 눈이 떠져서 하나님이 참되시고 예수님의 말씀도 참되심을 알게 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성령을 주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예수님은 만물을 손에 쥐고 계신다(3:35~36)

하나님은 예수님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의 손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심판과 구원의 권세를 위임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순종하는 자는 영생이 있지만, 예수님을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지 않고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으면 영생을 얻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끝없는 사랑(endless love)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없는 사랑(unchangeable love)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unconditional love)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거룩한 사랑(holy love)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희생적인 사랑(sacrificial love)입니다. 하나님은 독생자를 희생제물로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의 최고 선물인 독생자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믿고 기억하고 감사하고 이 사랑을 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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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3 2021년 신년 말씀 한 알의 밀알되신 예수님-예수 생명의 흔적을 남기자 운영자 2020-12-28 294
422 2020년 성탄 말씀 큰 기쁨의 좋은 소식 운영자 2020-12-22 295
421 2020년 성탄 제 3강 돋는 해 예수님, 희망의 예수님 운영자 2020-12-17 231
420 2020년 성탄 제 2강 축복의 통로로 쓰임 받은 마리아 운영자 2020-12-17 153
419 주일메시지 2020 성탄 제 1강 축복의 통로로 쓰임 받은 사가랴와 엘리사벳-니콜라이 집사이야기 운영자 2020-12-17 332
418 요한계시록 제1강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운영자 2020-12-14 213
417 요한계시록 서론 운영자 2020-12-14 136
416 요한계시록 머릿말 운영자 2020-12-14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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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일 오전 예배 - 오전 11:00
  • 주일 오후 예배 - 오후 3:30
  • 어린이 예배 - 오전 11:00

대학마을교회 개척교회

우남식 목사님의 저서


    전도서에서 만난 복음
    (퍼플,2023)

      요한복음에서 만난 예수님
      (퍼플,2022)

        요한계시록에서 만난 복음
        (지식과 감성,2021)

          예레미야에서 만난 복음
          (지식과감성,2021)

            데살로니가전·후서에서 만난 복음
            (지식과감성,2020)

              이사야에서 만난 복음
              (지식과감성,2019)

                대학선교와 세계선교를 향한 권서행전
                (지식과감성,2019)

                  야고보서에서 만난 복음
                  (지식과감성,2017)

                    옥중서신에서 만난 복음
                    (지식과감성,2016)

                      행복과 긍정심리
                      (시그마 프레스,2015)

                        성심리
                        (시그마 프레스,2015)

                          마가복음에서 만난 예수님
                          (킹덤북스,2014)

                            사도행전에서 만난 복음
                            (생명의말씀사,2013)

                              로마서에서 만난 복음
                              (생명의말씀사,2012)

                                창세기에서 만난 복음
                                (생명의말씀사,2011)

                                    저서 구입연락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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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ananmen Square protests, China Democracy, 天安門 天安门 法輪功 李洪志 Free Tibet 劉曉波, 热比娅·卡德尔, 熱比婭·卡德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