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4:15~26
참된 예배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4)
사마리아 여자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록 만나기까지 여러 장벽이 있었습니다. 민족의 장벽과 문화라는 장벽이 있었습니다. 특히 남자와 여자라는 장벽이 있었습니다. 당시에 여자들은 낯선 남자와 대화할 수 없었고, 차도르와 부르카로 얼굴과 몸을 가리고 눈만 드러내야 했습니다. 만일 얼굴 전체를 드러내면 간음죄로 여겼습니다. 이런 관습에서 남자와 대화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 시대에 예수님은 먼저 장벽을 깨고 사마리아 한 여자를 구원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배의 장소와 예배 대상과 그리고 예배의 성격과 자세에 관한 말씀입니다. 사전적 의미로, 예배(worship)란 ‘가치(worth)’와 ‘신분(ship)’의 합성어로, 존경과 존귀를 받을 가치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어로 예배란 ‘아바드(דבע)’와 ‘솨하(שָׁחָה)’가 있는데, ‘아바드(דבע)’는 섬긴다는 service와 유사한 개념이고, ‘솨하(שָׁחָה)’는 엎드리다, 굴복한다는 뜻으로 경배와 순종과 섬김이란 뜻입니다. 또 헬라어로 예배란 프로스퀴네오(προσκυνέω)로, 종이 주인에게 문안할 때 존경의 표시로 머리를 숙여 발에 입을 맞추는 것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독일 신학자 칼 바르트는 “예배를 가장 중요하고, 가장 긴급하며, 가장 영광스러운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예배는 거룩하시고 영존하시며 오직 한 분이시고 인격적이시며 영이신 하나님께 최상의 가치를 두고, 하나님께 합당한 존경과 영광을 돌리는 것으로(출 20:3; 신 4:35, 39; 사 44:6~23; 고전 8:4), 우리를 구원해 주신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에 감사하여 영광과 헌신과 찬송을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늘나라에 갈 때까지 바르게 예배를 드려 신령한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삶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1. 네 남편을 불러 오라(요 4:16~19)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자에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이 마르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이 여자는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어 더는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로 물을 길으러 오지 않게 하소서’라고 요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처음에는 아쉬운 마음으로 이 여자에게 ‘물을 좀 달라’고 요청했으나, 이제는 사마리아 여자가 예수님께 물을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예수님은 물을 달라는 사마리아 여자에게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요 4:16)
예수님께서 물을 달라는 사마리아 여자에게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는 말씀은 전후 문맥상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물이 남편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사마리아 여자는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아니 물을 달라고 했는데, 왜 갑자기 남편 이야기를 끄집어냅니까? 남편과 물이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하며 이의를 제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여자는 ‘남편이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물을 달라는 사마리아 여자에게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고 하신 것이 무슨 뜻이 있습니까? 먼저 여자들에게 남편은 어떤 존재입니까? 요즘 아내들은 남편을 어떤 존재로 여깁니까? 남편들에 대한 풍자로, ‘3번아 잘 있어라. 5번은 간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1번은 자녀, 2번은 강아지, 3번은 남편, 4번은 파출부, 5번은 홀시아버지를 지칭합니다. 요즘 남편의 순위가 강아지보다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래 남편은 지아비(夫)로서 하늘보다 높은 존재로, 사랑과 존경과 의지와 순종의 대상입니다. 그러므로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는 것은 네가 의지하고 사랑하고 순종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드러내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고 싶지 않습니다. 이 여자의 치부는 남편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남편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사랑하고 섬기고 의지하는 것이 곧 남편입니다. 만일 내가 돈을 사랑하고 의지하고 귀히 여긴다면 돈이 남편이 됩니다. 어떤 사람은 쾌락이 남편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지식, 예술, 학문, 명예가 남편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남편이 될 수 있고, 아내가 남편이 될 수 있고 자녀가 남편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영생하는 샘물을 마시려면 나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남편을 드러내야 합니다. 드러낸다는 것은 진솔한 회개를 뜻합니다. 진솔하게 회개할 때 하나님 나라의 축복과 사죄의 은총을 받게 됩니다(요일 1:8~9).
사마리아 여자는 남편이 있는데도 남편이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남편이 없다고 하는 그녀의 심정을 이해하시며 ‘그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다. 네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함께 사는 남편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옳다.’(요 4:17하~18)고 받아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자의 과거와 현재를 다 아셨습니다. 이 여자는 이혼과 결혼을 반복했지만 사실 지금 함께 사는 남편도 남편이 아니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당시 이혼의 절차는 간단했습니다. 남편이 휴서(休書) 한 장 써주면 되었습니다. 여자는 이 휴서 한 장만 있으면 자유로이 다른 남자와 결혼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외국에서는 부부가 결혼반지를 빼서 서로 주면 끝입니다. 보통 여자들은 이혼하면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 여자는 이혼을 당하면 또 다른 남자와 결혼했습니다. 이 여자는 사람들의 이목을 의식하지 않고 소신 있게 행동하는 여자였습니다. 그리고 이 여자는 자신의 행복은 자신이 찾아야 한다는 나름의 철학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끈질기게 사랑과 의지와 순종과 경배의 대상인 남편을 찾아다녔습니다. 그러나 이 여자는 아직도 찾지 못해 남편이 없는 독신녀가 되었습니다. 이로써 사마리아 여자에게 남은 것은 아픈 상처와 텅 빈 마음뿐이었습니다.
칼뱅의 기독교 강요의 첫머리에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 없이는 자기에 대한 지식도 없고, 자기에 대한 지식 없이는 하나님께 대한 지식도 없다.” 하나님을 만날 때 자기의 존재를 알게 되고, 내가 누구인가를 알 때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앎과 자기 자신의 앎이 동시에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부모님과 자녀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님의 사랑을 알면 자녀로서의 자신을 알게 됩니다. 인간 상호 간도 똑같습니다. 나 자신의 소중함을 알 때 다른 사람도 소중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마리아 여자는 예수님을 만남으로 자신의 존재를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진정한 남편이 없는 진솔한 자신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자가 자기 자신의 존재를 알게 되니 영의 눈이 틔어 예수님이 선지자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I have found a prophet in you-(요 4:19).
우리가 영원히 목이 마르지 않는 영생하는 샘물을 마시려면 고통스럽지만, 자신의 진솔한 내면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또 이를 진솔하게 예수님께 드러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자기의 진솔한 모습을 내놓을 때 예수님을 만날 수 있고, 예수님을 만나면 영원히 목이 마르지 않는 영생하는 샘물을 마실 수 있습니다.
2. 내가 그라(요 4:20~26)
사마리아 여자는 예수님을 선지자로 아는 순간에 대화의 주제가 달라졌습니다. 사마리아 여자는 예수님께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하는데, 당신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이므로 아느 곳(장소)이 예배의 정통성이 있는지 잘 알 것이 아닌가 물었습니다. 이 질문 속에 사마리아 여자의 문제가 예배의 대상을 찾지 못한 데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람의 예배 장소에 대한 갈등은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B.C. 921년에 남북이 분단될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은 남쪽인 예루살렘으로 예배를 드리러 가는 것을 막기 위해 그리심 산에다 성전을 지었습니다. 그들이 그리심 산에 예배 장소를 만든 것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리심 산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 앞에 번제를 드린 장소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소돔 사람들에게 포로로 잡혀간 롯을 구하고 돌아오는 길에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리며 제사 드린 곳입니다. 또 모세가 광야를 지나 돌아왔을 때 제일 먼저 예배를 드린 곳이고도 합니다.
이런 점을 내세워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예루살렘으로 가던 발걸음을 멈추도록 하고 그리심 산에서 예배를 드리도록 했습니다. 반면에 유대인들은 예루살렘만이 유일한 성전이라 생각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유대교의 예배에 대한 것을 재해석하여 새롭게 정립해 주셨습니다.
첫째, 예배 장소(요 4:20~21)
사마리아 여자가 예배 장소의 정통성을 물었을 때 이에 말씀하시지 않고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요 4:21)
이 말씀에 대한 의미가 무엇입니까? 더는 지상의 어느 특정한 장소가 중요하지 않다는 혁명적인 말씀입니다. 그들은 예배의 장소를 가지고 서로 싸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의 손으로 지상에 세워진 특정한 장소와 건물이 더는 중요하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역사적인 가치가 있고 아름다운 건축물, 그리고 아무리 화려하고 장엄한 의식으로 치장되었다 할지라도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광야 시절에 성막을 지었습니다. 하나님은 그곳에서 만나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명대로 아름다운 예루살렘 성전을 세웠습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를 드릴 때 영광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나 성막과 예루살렘 성전은 성육신하신 하나님 아들을 기다리는 상징과 그림자였습니다(출 40:34; 왕상 8:10~11; 히 9:22-28).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의 몸을 입고 우리 가운데 거하심으로 장막의 상징적 의미가 성취되었습니다(요 1:14).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심으로 성전의 상징적 의미 또한 성취되었습니다. 성전에 성소와 지성소를 휘장으로 나누었습니다. 지성소에는 대제사장만이 일 년에 한 번 휘장을 열고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성전 휘장을 위로부터 아래로 찢으셨습니다(마 27:51; 막 15:38; 눅 23:45). 이제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지하여 하나님께 언제든지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어느 특정한 예배 장소나 특정한 교파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배를 드리는 영적인 상태가 중요합니다.
둘째, 예배의 대상(요 4:23상)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요 4:22~23상)
사마리아 사람들은 모세 오경만을 정경으로 인정하고 자기 나름대로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유대인을 통해 구속 역사를 이루어 오셨고, 마침내 메시아를 허락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다 지파에서 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감히 부를 수 없어 아도나이(Adonai, Lord)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버지라는 단어를 세 번 언급하며 예배의 대상인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했습니다(요 4:21~22). 예수님은 주기도문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Hevenly Father)라고 부르도록 하셨습니다. 이 또한 혁명적인 말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거룩과 위엄과 영광과 권능과 공의로 나타나셨습니다. 이 광경을 멀찍이 떨어져 본 백성은 여호와 하나님의 엄위(awesome)에 떨며 모세에게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 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출 20:19)라고 청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시내 산에 나타나셨던 엄위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요 20:17)라고 하셨습니다. 엄위하신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로 죄인들을 향하신 무한한 아버지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 아버지가 집 나간 탕자를 영접하시는 데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경배의 대상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다정함과 친근함, 섬세한 친밀함, 편안한 정감, 따뜻한 마음, 부드러운 돌봄, 지속적인 사랑, 깊은 동정, 무한한 용서, 그리고 다함 없는 은혜로우신 아버지이십니다.
셋째, 예배의 성격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요 4:23상)
예배의 때는 예수님이 오신 바로 그때를 의미합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한다고 하였는데,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예수님은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이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예배는 가시적이고 물질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제단에 양과 암송아지 및 황소의 피를 흘렸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예배의 근본을 바꾸셨습니다. 예배는 눈에 보이는 가시적이고 물질의 차원이 아닙니다.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영과 진리로 하나님을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벧전 2:5).
넷째, 예배자를 찾으시는 하나님(요 4:23하)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 4:23하)
구약성경에서는 예배하는 자가 여호와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지금은 반대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배자를 찾으십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영원 속에 거하시는 높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구원의 은혜를 베푸실 뿐만 아니라, 진실하게 예배드리는 것을 소망하시고 예배자를 찾고 계시니 말입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사람들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토록 소망하시는 예배를 드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임재와 사랑과 능력을 체험하지 못합니다.
다섯째, 예배의 자세(요 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는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4)
“하나님은 영이시니”에서 ‘영(a Spirit, KJV)’은 ‘빛’(요일 1:5), ‘사랑(요일 4:8, 16)과 마찬가지로 사도 요한이 하나님을 설명하는 중요한 단어 중의 하나로, 인간과 대비되며(요 3:6), 생명을 주는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스스로 계시하시는 분이란 뜻입니다(요 1:18). ‘영’은 바람처럼 보이지 않으나 소리는 들리며 결과가 확실하게 나타납니다(요 3:8). 그리고 ‘영’의 중요한 사역은 사람을 거듭나게 하며, 새 생명의 원리, 성경의 원리에 따라 살도록 합니다(요 3:5, 7:38~39). 영이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하시고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며 보이지 않으나 분명히 우리 중에 함께하십니다.
참된 예배는 영이신 하나님께 ‘영과 진리’로 드려야 합니다. ‘영과 진리’란 ‘영과 진리 안(in spirit and in truth)’란 뜻입니다. ‘진리’는 거짓의 반대로 말씀에 기초하여 바르게 마음과 성품과 온몸을 다하여 예배를 드리는 것을 말하고(신 6:5), ‘영’이란 가장 높고 가장 귀하게 드리는 예배를 말합니다.
진리와 영으로 드리는 예배는 애통하는 마음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시 51:17)고 했습니다. 상한 심령(broken spirit)은 ‘산산 조각난 영혼’, ‘찢기고 꺾인 마음’이란 뜻으로, 죄를 뼈저리게 아파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사람보다 통회하는 겸손한 자의 예배를 받으십니다.
그리고 진리와 영으로 드리는 예배는 지성소까지 들어가서 드리는 예배입니다. 성전을 보면 성전 뜰과 성소와 지성소가 있습니다. 성전 뜰에는 번제 단이 있고 물두멍이 있습니다. 번제 단은 양을 잡고 소를 잡는 등 좀 시끄러운 곳입니다. 성소에는 등대와 진설병과 금향 단이 있습니다. 이곳은 제사장들이 봉사하는 곳입니다. 지성소는 속죄소가 있는 곳입니다.
많은 사람이 예배당에 오지만 성전 뜰에서 어슬렁거리다가 갑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에게 마당만 밟는 백성을 책망하셨습니다. 마당을 밟는 사람은 사교적으로 자기 유익을 좇아 교회에 오는 사람입니다.
성소에까지 들어가는 사람은 그래도 뜰에서 어슬렁거리는 사람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열심히 봉사합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에 기쁨이 없고 늘 피곤합니다. 이런 사람은 매너리즘(mannerism)에 빠져 형식적으로 신앙생활 합니다. 이런 사람을 일컬어 구신자라고 합니다.
참된 예배는 지성소까지 들어가야 합니다. 지성소는 속죄소로 하나님의 보좌입니다. 진정으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보좌에까지 나아가 하나님께 자기 죄를 고백하고 죄 사함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지성소에 들어갈 때는 다른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뜻을 찾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자 하는 자세로 나가야 합니다.
지성소까지 들어가는 예배는 기도하더라도 낙타 무릎이 되기까지 기도하고, 주님과 교회를 위해 헌신하되 온몸으로 헌신하고, 찬송하더라도 뜨거운 가슴으로 부르고, 한 영혼을 살리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전도하고, 주님께서 주시는 십자가를 즐거움으로 지고, 자기를 부인하고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합니다. 섬김과 나눔과 사랑과 헌신이 몸이 배어 있습니다.
아프리카 선교사 리빙스턴의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가 어렸을 때 자기가 다니던 교회에서 선교집회가 있어서 선교헌금시간이 있었는데 주머니를 뒤지다가 바칠 헌금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헌금 연보에 앉아 “저는 아프리카를 위해 저 자신을 바치고자 합니다.”라고 소리쳤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은 돈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 마음의 문제, 진실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마음과 진심을 원하십니다. 그래서 헌금을 드리는 것은 생명을 바꾸는(exchanging life) 것이라고 말합니다.
반면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미국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목사님이 설교하시며 “여러분 오늘의 교회는 주저앉아 있습니다. 이제 교회는 일어나 걸어야 합니다” 했더니, 회중들이 화답합니다. “맞습니다. 일어나 걸어야 합니다.” 이어서 설교자는 “걷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너무나 긴급합니다. 교회는 달려가야 합니다” 했더니, 또한 회중들이 화답합니다. “맞습니다. 달려가야 합니다. 달려갑시다.” 이어서 설교자는 또한 “세상은 너무나 넓습니다, 열방 중에 복음을 선교하기 위해서 교회는 날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했더니, 또다시 회중들이 화답합니다. “예, 맞습니다. 교회는 날아가야 합니다. 날아갑시다.”
다시 설교자는 “여러분, 이런 선교의 과제를 위해서는 돈이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 구체적으로 지갑을 열어 돈으로 헌신합시다” 했더니 조용하더랍니다. 그러더니 어떤 성도가 이렇게 화답하더랍니다. “우리 교회 그냥 주저앉읍시다.” 여러분과 저는 혹시 이런 성도와 같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신앙고백이 헌신과 일치하십니까? Studd 선교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주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주신 것이 참으로 사실이라면 우리의 어떤 희생도 결코 지나친 것일 수는 없다.”
우리가 하나님께 목숨을 바친다고 고백하기는 쉬우나 구체적으로 헌신한다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지금 여러분은 어떤 자세로 예배를 드립니까? 성전에 와서 마당 뜰만 밟다가 가지는 않는지? 봉사만 하다가 가지는 않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한 말씀을 듣고 영접하고 순종하고자 하는 자세로 예배를 드리는지 스스로 자문자답해야 합니다.
이 여자는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의 모든 상처와 아픔을 어루만져 주시고 이해와 사랑으로 도우실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요 4:26)
사마리아 여자는 예수님을 만나 대화로 마음의 문을 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자에게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고 하셨습니다. 여자는 자신의 진심을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그리고 예배할 곳을 찾았습니다. 예배는 속죄제로 어떻게 죄를 사함을 받을 수 있는가입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자에게 내가 바로 그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자의 죄를 지고 가신 하나님의 어린 양이십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자의 영혼에 생수가 흘러넘치도록 채워 주시는 영원한 샘물이십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자가 찾고 찾던 참 남편이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떤 분입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정열과 물질과 시간과 청춘과 생명을 드려서 섬겨도 조금도 아깝지 않은 나의 그리스도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토록 찾고 찾던 나의 메시아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