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1:1~27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부활절을 의미하는 ‘easter’는 유럽의 튜튼족이 숭배한 봄과 새벽의 여신을 뜻하는 말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새벽은 어두움을 물리치고, 봄은 새 생명이 혹독한 겨울을 이기고 나온다는 뜻에서 부활절을 가리키는 명칭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부활절 음식이 달걀입니다. 달걀은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 새로운 생명이 있고, 껍질은 돌로 막은 예수님의 무덤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이 돌로 막은 무덤을 깨고 부활하셨다는 의미에서 달걀이 부활절의 대표적인 음식이 되었습니다.
세상의 어떤 종교에도 부활이 없습니다. 석가도 죽고, 공자도 죽었습니다. 모두가 무덤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성지라고 일컫는 예루살렘에는 예수님의 무덤이 없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여서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기독교의 클라이맥스(climax)라면 예수님의 부활 승천은 대단원의 막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길게 부활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소식은 우리의 최대 원수인 죽음을 이긴 승리의 소식이요, 희망의 소식입니다. 우리 중에 슬픔과 절망과 두려움으로 고생하시는 분이 있습니까? 죽음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희망의 노래를 부르며 살기를 기도합니다.
1.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다(요 11:1~4).
베다니 촌에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일찍 부모를 여읜 결손 가정이었습니다. 그런 중에도 그들은 오빠 나사로를 중심으로 외롭지 않게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마리아는 향유 한 옥합을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털로 씻기까지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예수님 또한 이 가정을 사랑하셨습니다.
행복했던 가정에 예기치 않은 문제가 생겼습니다. 가장인 나사로가 중병에 걸려 눕게 되었습니다. 두 자매는 급히 사람을 예수님께 보내어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다고 알렸습니다. 자매들은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다고 간단하게 전하기만 해도 예수님이 만사를 제쳐놓고 달려오실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어떠했습니까?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요 11:4)
나사로는 분명 죽을 병이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오빠의 죽을 병을 절망적인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 아들로서의 영광’을 나타낼 희망적인 사건으로 보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란 죽음 앞에 두려워하는 제자들과 절망하고 있는 두 자매에게 부활의 믿음을 심고자 하심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들로서의 영광’이란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드러내는 것을 말합니다.
이처럼 한 사건을 놓고 두 가지 측면에서 볼 수 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와 같이 인간적인 눈으로 보느냐, 예수님의 눈으로 보느냐입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부정적이고 절망스럽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적인 눈으로 생각하면 입구는 있으나 출구가 보이지 않는 동굴과 같이 앞이 캄캄합니다.
반면에 예수님의 시각, 성경의 관점에서 보면 출구가 보이는 터널과 같습니다. 동굴은 갈수록 어둡고 절망스럽지만, 터널은 가면 갈수록 희망의 빛이 가까워집니다. 예수님의 시각으로 보면 긍정적이고 희망적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안경을 쓰고 자신과 한국의 현실을 보면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특히 청년 세대는 천정부지로 오르는 집값 앞에 숨이 막힙니다. 젊은이들은 취업이 잘되지 않아 배달의 기수로 내몰립니다. 삶을 비관하여 자살하는 사람들이 점점 증가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자살률은 OECD 평균 11.3명에 비해 24.6명으로 15년째 1위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우리의 앞이 캄캄할지라도 예수님의 시각, 성경의 시각으로 보면 거기에 희망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유명한 ‘안네의 일기’를 알 것입니다. 안네는 1929년에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아버지가 은행업에 종사하는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난 유대인이었습니다. 안네가 5살 되던 1933년에 나치당의 히틀러가 정권을 잡으면서 유대인 학살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녀의 가족은 히틀러의 핍박을 피해 네덜란드로 망명하여 암스테르담의 좁은 은신처인 창고에서 안네 가족을 비롯해 3가족 8명이 몇 년간 살아야 했습니다. 그들은 사냥개 같은 독일 비밀경찰로 기침 소리조차 낼 수 없었습니다. 3가족 8명은 오랜 도피 생활로 스트레스와 우울증에 시달렸습니다.
그런 중에도 안네는 자신의 일기장을 인격화시켜 ‘키티’라고 부르면서 마치 사람에게 편지를 쓰듯 매일 일기를 썼습니다. 그녀의 일기 중에 집단 수용소에 끌려간 유대인들과 자신을 비유하면서 “자신은 천국과 같은 생활을 하고 있다.”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안네는 일기장에 “햇빛과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있는 한, 내가 그 햇빛과 하늘을 볼 수 있는 한, 나는 결코 슬퍼질 수가 없다.”라고 적었습니다. 그녀는 극한 시련 앞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절망의 동굴이 아니라 희망의 터널”이라는 것을 잊지 맙시다. 예수님 안에서 희망을 노래합시다. 먹구름이 끼인 날에도 구름 위에는 찬란한 태양이 비친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먹구름이 찬란한 태양을 이길 수 없고, 절망이 예수님 안에서 소망을 이길 수 없고, 코로나19가 예수 생명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2. 나사로가 잠들었도다(요 11:5~16)
예수님은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나사로를 친구라고 부를 정도로 그 가정을 사랑(아가페)하셨습니다. 그런 나사로가 죽을 병이 들었다면 빨리 가서 문병하고 고쳐주셔야 옳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듣고도 계시던 곳에서 이틀을 더 머무셨습니다(요 11:16).
예수님께서 이틀을 머무셨다는 것은 나사로가 병들어 죽기만을 기다리셨다는 뜻이 됩니다. 겉으로 보면 예수님은 그를 사랑하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하셨으므로 그들의 근본 문제를 돕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곧 달려가서 병을 고쳐주시면 그들은 병이 날 때 다시 예수님을 찾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계실 때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예수님이 계시지 않을 때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이 ‘아가페’ 사랑이 아니라 필로우(우정) 사랑을 한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예수 오빠, 예수 형님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번 기회에 아가페, 곧 하나님의 사랑으로 끌어올리고자 하셨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예수님은 그들로부터 섭섭하다는 오해를 받아야 했습니다. 하물며 그들이 예수님께서 일부러 이틀을 더 유하셨다는 것을 알았을 때 얼마나 섭섭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일시적인 오해가 있을지라도 근본 문제를 돕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달콤한 사랑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아픔도 있습니다. 아픔은 또 다른 생명을 잉태하는 아픔과 같이 성숙한 믿음을 갖기 위한 거룩한 아픔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이 기도를 즉각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섭섭할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모두가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틀을 유하신 후, 제자들에게 유대로 가자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을 돌로 치려 했던 것을 기억하고(요 10:31), 유대로 가기를 꺼렸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고로 실족하느니라.”(요 11:9~10)
낮에는 빛이 있으므로 실족하지 않으나, 밤에는 빛이 없어 실족합니다. ‘빛’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요 8:12). 빛되신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않으면 어두워서 실족합니다. 어두움은 실체는 없으나 세력이 있습니다. 어둠은 우리를 두려움과 불신에 빠뜨립니다. 그러나 빛이신 예수님과 함께하면 실족하지 않습니다. 빛 되신 예수님과 함께하면 방황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면 인생의 의미와 목적과 방향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면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 앞에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나사로가 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잠으로 보셨습니다. 잠에는 반드시 깨어남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잠으로 비유하심으로 죽음이 끝이 아니라 부활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부활은 죽음을 전제로 합니다. 그런데 믿는 사람도 죽음 앞에 설 때 슬퍼집니다. 이는 잠시 이별에서 오는 슬픔입니다.
사람이 죽었을 때 예수님이 없는 곳과 예수님이 계신 곳은 완전히 다릅니다. 예수님이 없는 곳은 절망과 허무와 슬픔과 체념이 지배하지만, 예수님이 계신 곳은 잠시 이별하는 슬픔은 있지만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과 더 좋은 곳으로 가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기 때문에 감사와 찬송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믿음이 좋으신 4자녀의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임종을 앞두고 네자녀 앞에서 인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세자녀에게는 ‘good-night’하고 인사했는데, 한 자녀에게만 ‘good-bye’하고 인사했습니다. 그래서 그 자녀는 물었습니다. ‘어머니 왜 저에게만 good-bye하고 인사하십니까?’ 그 때 어머니는 대답했습니다. ‘네 형과 동생들은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다시 하나님 나라에서 만날 수 있지만 너는 예수님을 안 믿으니 이것이 영원한 이별이어서 good-bye라고 인사해야 되겠구나!’ 이 때 그 자녀는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예수님 안에서의 죽음은 다시 만난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에 슬프지 않습니다. 깨어 보니 하나님 나라에서 다시 만나게 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해 ‘잠들었으면 깨어날 텐데 왜 가시느냐’고 반문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나사로가 죽었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내가 거기 있지 않은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함이라고 하시며 그에게로 가자’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도마가 비장하게 예수님과 함께 죽으러 가자고 했습니다. 도마는 영웅적인 것 같지만 내면은 두려웠습니다.
3.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입니다(요 11:17~27)
예수님이 베다니에 도착하셨을 때 이미 나사로는 죽어 무덤에 묻혀 있었습니다(요 11:17,39). 사람들은 나사로의 죽음을 슬퍼하고 두 자매를 위로하기 위해 함께 울어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위로는 가장을 잃은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위로가 되지 못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베다니 촌에 오셨다는 말을 듣고 곧장 달려와 예수님을 맞이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만나자 곧 울면서 원망했습니다. 마리아도 마찬가지였습니다(요 11:21, 32).
그들은 예수님이 늦게 오신 것이 섭섭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이 사람의 병은 고칠 수 있지만 죽은 자는 살릴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사랑했지만, 예수님께 대해 무지했습니다. 마르다는 이제라도 예수님이 하나님께 구하시면 하나님이 들어주실 것을 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요 11:22)
헬라어에 ‘구한다’는 말이 둘이 있습니다. 하나는 피조물이 창조주 하나님께 구하는 ‘아이티오(αἰτέω)’, 그리고 일반적으로 구하는 ‘에로타오(ἐρωτάω)’가 있습니다. 마르다는 피조물이 하나님께 구하는 ‘아이티오’라고 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심을 알지 못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 안에 하나님의 모든 능력과 신성이 충만해 있음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단지 선지자 정도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르다는 예수님의 능력을 아는 데 그쳤습니다. 아는 것은 결코 힘이 되지 못합니다. 힘은 아는 데 있지 않고 믿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지식으로 역사하지 않고 믿음으로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은 지식의 통로로 역사하지 않고 믿음의 통로로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스펄젼은 “하나님 나라에는 많은 보화가 있다. 그러나 이 보화를 이 세상에서 현금화하려면 믿음이 있어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공수표에 불과하나, 믿음만 있으면 현금이 됩니다.
예수님은 이런 마르다에게 단호하게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요 11:23)고 말씀하셨습니다. 마르다는 “주님, 내가 믿음이 없습니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해야 옳습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또 “마지막 날 부활 때에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요 11:24)라고 했습니다. 마지막 날에 부활한다는 것은 유대인이면 누구나 아는 상식이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믿지만, 유대교의 종교 생활과 상식 그 이상을 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마르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첫째, 예수님은 현재 부활이요, 생명이다.
죽음은 실체가 없지만, 내일이 아닌 현재 우리를 두렵게 합니다. 죽음은 보이지 않지만, 현재, 지금 (now and here) 내 생각과 삶을 지배합니다. 죽음에는 독소가 있어 우리를 두렵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현재(am) 부활이요, 생명입니다. 예수님은 현재, 지금 내게 부활의 소망과 생명을 줍니다. 이 생명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사람들이 봄이 와서 온 누리에 생명이 충만하지만 죽음이 주는 두려움으로 공허와 허무에 시달리고, 무기력하고 어둡고 원망과 한탄으로 살아갑니다. 사람이 죽음의 세력에 사로잡혀 캄캄한 껍질 속에 갇혀 어둡게 살아갑니다.
우리가 얼마나 죽음의 세력에 시달리느냐 하면 죽겠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추워서 죽겠다! 더워서 죽겠다! 신경질나 죽겠다! 심지어 좋아서 죽겠다!”라고 합니다. 우리의 겉은 멀쩡하지만, 우리의 의식, 무의식 세계에는 사망 권세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죽음의 세력에 사로잡히면 머리로는 무엇을 해야 하고, 문제가 무엇인가도 알고 처방도 알지만, 염려와 불안에서 벗어나지 못해 불면증과 우울증을 앓게 됩니다.
그러면 죽음은 어디에서 왔습니까? 죽음은 죄의 삯입니다(롬 6:23상).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히 9:27). 심판 후에는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영원히 참여하게 됩니다(계 21:8). 악한 일을 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타납니다(요 5:29하). 그러나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입니다(요 5:29상).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나타납니다(요 5:29상). 예수님을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습니다(요 3:16). 그리고 산 소망을 줍니다(벧전 1:3~4).
죽음이 현재 나를 두렵게 하지만, 예수님은 현재 부활이요, 생명입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으면 현재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과 죽어도 사는 부활의 산 소망을 갖고 살게 됩니다.
둘째,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이다.
예수님은 생명을 주시는 Life giver, Life-giving Spirit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의 부활이요, 산 자의 생명입니다. 예수님으로 생명을 공급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생명입니다. 예수님으로 생수를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생수입니다. 예수님으로 능력을 공급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능력입니다.
예수님께서 내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심을 믿는 순간에 죄에 대해 죽은 자요, 의에 대해 산 자가 됩니다. 예수님과 나는 한 몸이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나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나의 부활입니다(골 3:3~4). 예수님의 영광은 나의 영광입니다.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재림의 날, 부활의 영광에 참예하고, 산 자는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 나라로 들림을 받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는 결코 죽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밝은 삶을 살게 됩니다.
부활의 산 소망을 두고 살았던 로마의 카타콤의 성도들은 비록 캄캄한 동굴에 살았지만, 그들의 그림을 보면 색채가 밝습니다. 그리고 피닉스(불사조)를 그렸습니다. 반면에 매일 태양을 보면서 동굴 밖에 살았던 ‘고흐’의 그림은 색채가 어둡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생명과 부활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어두운 색채의 그림처럼 자살로 마감했습니다.
어떤 신용협동조합 이사장은 대출해줄 때, 부동산 유무로 대출하지 않고 안색을 보고 결정했다고 합니다. 안색이 창백하고 어두운 사람은 담보물이 많아도 대출해 주지 않고 밝고 힘이 있어 보이는 사람에게만 주었다고 합니다. 그 결과 30년간 한 번도 떼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안색은 어둡고 칙칙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순간 안색이 생기가 돕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집니다. 연약한 자가 강해지며 어둡던 자가 밝아집니다. 절망이 희망으로, 슬픔이 기쁨으로, 불행이 행복으로, 속박이 자유로, 무기력이 능력으로, 두려움이 용기로, 불신에서 믿음의 사람이 됩니다.
셋째, 예수님은 그(the) 부활이요, 생명이다.
예수님은 살아 있으나 죽은 자와 같은 마르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 그러자 마르다는 외쳤습니다.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요 11:27)
‘내가 믿나이다!’ 마르다는 예수님만이 부활이요 생명임을 믿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나의 죄를 용서하시는 그리스도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고백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이심을 믿었습니다. 마르다의 신앙은 아는 지식에서 믿는 신앙으로 바뀌었습니다.
우리 주위에 죽음이 주는 한계 상황 앞에 절망하며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혹시 우리는 그런 삶을 살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입니다. 부활과 생명이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한계를 극복하고 승리를 주십니다. 이제 우리는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머리로 아는 데서 가슴으로 믿는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의 십자가, 예수님의 부활이 나의 부활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부활 신앙으로 봄날의 새싹처럼 푸르른 삶,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기를 기도합니다.